본문: 시편 42편 1–11절
[서론] 감옥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소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인생의 거친 풍랑과 영적 어두운 밤을 통과했던 한 인물의 고백으로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1944년 차디찬 나치의 테겔 감옥, 사형 집행을 앞둔 30대의 젊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사랑하는 가족과 성도들, 그리고 예배의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대적들의 폭정과 하나님의 침묵처럼 보이는 그 어두운 변방에서, 그는 사랑하는 약혼자와 가족들에게 마지막 시를 남겼습니다. "선한 능력들에 신실하고 고요하게 둘러싸여, 놀라운 평화와 위로를 받으며, 내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오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네."
이 유명한 찬송 고백은 3천 년 전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최북단 외딴 변방 헤르몬 산(6절)으로 쫓겨나, 원수들의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3절)라는 뼈를 찌르는 조롱 속에서 탄식했던 시편 42편 시인의 고백과 정확히 평행을 이룹니다.
오늘 본문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교훈시)로, 인생의 한계상황 속에서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 영혼에게 소망을 선포하는 거룩한 신앙적 투쟁을 보여줍니다. 본문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신약적 은혜와 실존적 통찰을 살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목마름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채우라
본문 1절과 2절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아라그) 내 영혼(네페쉬)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엘 하이)을 갈망하나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갈급함 같이(아라그, אָרַג)'는 단순한 소원이 아니라 광야에서 목이 타들어 가는 사슴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소리를 내며 헐떡이는 절박한 동작을 뜻합니다. 또한 '영혼(네페쉬,נֶפֶשׁ)'은 헬라적 이분법의 영혼이 아니라 '목구멍', '호흡', '전 인격과 생명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문 2절의 '살아 계시는 하나님(엘 하이, אֵל חָי)'은 죽은 우상이나 관념적 신이 아닌, 지금도 역사하시며 생명을 공급하시는 실재(Reality)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될 때 깊은 실존적 절망을 겪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4장과 7장에서 자신이 바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이자 생수의 강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외치신 주님의 목마름은, 우리의 '네페쉬'가 겪어야 할 영적 갈증을 대속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물질과 명예로는 결코 우리의 '네페쉬(목구멍/전 인격)'를 채울 수 없습니다. 본회퍼가 감옥이라는 한계상황 속에서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했듯이, 오늘 우리의 모든 목마름을 참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가지고 나아가 삶의 근원을 오직 주님으로 채우시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고난의 파도 속에서도 인자하심을 바라보라
본문 7절과 8절은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친보르)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헤세드)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라고 합니다. 7절의 '주의 폭포 소리'와 '파도(친보르, צִנּוֹר)'는 헤르몬 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거친 물결처럼 나를 삼킬 듯한 고난을 의미합니다. 주목할 점은 시인이 이를 '대적의 파도'가 아닌 '주의 파도'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8절의 '인자하심(헤세드, חֶסֶד)'은 조건 없는 '언약적 사랑과 변함없는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마틴 부버의 '나와 너(I-Thou)' 철학처럼, 시인은 자신을 삼키는 고난의 파도마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음을 인지하고, 하나님을 관념('그것')이 아닌 인격적 '너'로 부르며 다가갑니다.
신약의 시각에서 이 '헤세드'는 로마서 8장 26절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는 은혜이며, 어떠한 고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언약의 완성입니다.
낮에는 주님이 인자하심(헤세드)을 우리에게 베푸시고, 밤에는 주님의 찬송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를 덮치는 고난의 거친 파도가 아무리 거세다 할지라도, 그 파도보다 크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헤세드)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지키고 계심을 신뢰하십시오.
셋째, 낙심하는 자아를 향해 하나님의 얼굴을 선포하라
본문 5절과 11절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파님) 도우심으로"를 반복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5절, 11절 모두 '그가 나타나'로 번역 했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5절은 '그의 얼굴로(파나브, פָּנָיו)' 도우심"과 11절은 '내 얼굴(파나이, פָּנַי)'을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했으며 어근인 '얼굴(파님, פָּנִים )'은 하나님의 '얼굴'이자 '인격적 임재'를 뜻합니다.
5절과 11절의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선포는 고도의 내면적 대화(Self-soliloquy)입니다.
빅토르 프랭클의 로고테라피가 강조하듯, 인간은 환경을 바꿀 수 없을 때조차 그 환경에 반응하는 태도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막 14:34, LXX 시편 42:6 인용)라며 영혼의 중압감을 겪으셨으나 마침내 아버지의 뜻에 소망을 두셨듯, 신약의 성도는 부활하신 주님의 '파님(얼굴/빛)'을 바라보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믿음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심과 불안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침몰시키지 마십시오. 시인처럼, 그리고 본회퍼 목사처럼 자기 영혼의 객관적 주체가 되어 명령하십시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얼굴(파님)을 우리에게 돌리사 반드시 신실하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결론] 소망의 선포자로 일어서는 교회와 성도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차디찬 감옥 벽 안에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가 선포한 소망의 노래는 오늘날까지 전 세계 교회를 일으키는 영적 대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망은 땅의 환경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엘 하이)'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가, 그리고 성도 여러분 각자가 삶의 외딴 변방에 서 있습니까? 원수들의 조롱과 삶의 무게 앞에 영혼이 낙심하고 있습니까?
ㆍ우리 네페쉬(נֶפֶשׁ, 전 인격적 존재)의 갈급함(아라그, אָרַג)은 살아 계신 하나님(엘 하이, אֵל חָי)의 생수로 비로소 충만해집니다. 우리의 생수이자,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목마른 갈증을 해소 하십시오. 세상이 주는 물질이나 명예로는 결코 존재 근원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ㆍ인생을 덮치는 거친 풍랑(친보르, צִנּוֹר)속에서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헤세드(חֶסֶד, 언약적 사랑)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ㆍ낙심하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스스로를 향해 하나님의 파님(פָּנִים, 구원의 얼굴과 임재)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
이 거룩한 소망의 선포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 그리고 우리 교회 가운데 충만히 선포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