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후의 삶
육군사관학교 동기생 330명 가운데 우리 둘은 '알파요 오메가'로 알려져
있다.왼쪽 정우봉 장군은 동기생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고 나 박경석은 가장 연하자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다섯살 위의 정 장군은 동기생이지만 나로부터 형 대접을 받았다. 이사진은
안산 상록수 우성아파트 시절 내 아파트 거실에서 촬영한 것이다. 정 장군은 2015년 세상을 떠났다. 뒤의 족자는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친필 '大道無門' 휘호이다.나는 그로부터
정계 입문을 권유 받았지만 나는 작가의 길을 고수하기 위해 사양했다.우리 가문은 '정치 불개입'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나는 오랜 세월 독신생활을 해왔다, 이 아파트에서 살면서
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현재도 변함이 없지만 이때도 나의 창작활동의 전성기였다. 특히 1959년 육군소령 시절 필명 韓史郞으로 정식 등단한바 있었으므로 모든 장르의 문단에서 환영해주었다.
나는 독신으로 살면서 새 아파트로만 다섯번을 옮겨 살았다.창작 환경의 변화가
내 창작 의욕을 복돋았음은 말할 나위 없다. 2009년 현재의 내 집필실은 서울 사대문 안 복판이다. 사직단, 경희궁, 경복궁, 광화문과 함께
호흡하면서 이어온 겨레의 얼과 조국의 빛나는 발전상을 문학으로 남기고 싶었다. 아마 내 마지막 집필실은 내 고향 세종시 또는 대전광역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부 록: 대전광역시로 귀향, 새 시대를 열다. 2012년 6월 1일. 이후 대전에서 출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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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2년 6월 1일, 마침내 대전광역시 유성온천으로 귀향했다.
나는 조치원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을 비롯해 조상의 터전이 대전 대덕구이다. 선산도 회덕에 있다.
유성자이아파트에서 10분 거리에 국립공원 계룡산 수통골이 있어 자주 건강관리를 위해 그곳을 찾는다.
귀향 후 4년이 흐른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서 귀향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결론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