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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른 새 벽
종지스님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린다. 아침공양을 마치고 곱게 손질해 두었던 풀옷으로 갈아입었다.
비오는 날 무슨 풀옷으로 갈아 입는냐며 도반스님들이 모두들 한마디씩 한다. 왜냐구요, 오늘이 내가 출가한 날입니다.
나의 상노스님이신 효봉큰스님께서도 출가하신 날은 새 옷으로 갈아 입으셨다고 하셨다. 열흘 후면 벌써 출가후 네번째 맞이하는 하안거 해제다.
오랜 시간을 출가에 대하여 고민한 나로서는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진학의 좌절 그리고 다시 일년정도의 직장생활 그리고 방위근무후 출가에대한 결심을 하게되었다.
불교학생회 시절의 지도선생님의 도움으로 보름간의 발원기도를 모셨다. 기도 중 꿈가운데 위엄있으면서도 자비하신 스님의 손을 잡고 사천왕문을 들어서는 꿈을 꾸기도했다.
평소 학생회 활동을 했던 관음사 주지스님을 뵙고 출가결심에 대하여 말씀드렸더니 하고 싶어서 하는 출가 누가 말려라고 하시며 출가 하라고 하셨다. 주지스님께서는 처음에 해인사, 통도사에 출가 하라고 하셨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않았고 송광사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렸더니 처음에 반대하셨다가 결국 허락하셨고 당시 송광사 재무소임을 보시던 영진스님을 찾아가라고하셨다.
그날 저녁 부모님께 말씀드리려고 몇번을 노력했지만 그만 자신이 없었다.
벌써 삼년째 병석에 누워계시는 어머님, 많은 연세에도 노동일을 하시는 아버님 두분께서는 평생을 힘들고 어렵게 살아 오신 분. 차마 자식의 자리를 버린다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나는 밤새워 부모님을 생각하며 울었고 초행길인 송광사를 생각하며 웃기를 번갈아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일 나가시는 아버님 아침을 차려드리고 집을 나가시는 뒷모습을 보고 얼른 설거지한 후 어머님께 볼일 보러 나간다고만 말씀드리고 편지 한장으로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들의 먼여행을 예견이라도 한 듯 아픈 몸을 이끌고 마루까지 나와서는 잘 다녀오라고하시며 손짓해 주셨다.
나는 눈물이 핑돌아서 그만 대문을 열고 버스정류장으로 달렸다.
고속버스정류장에 가는 버스를 탔다.그러데 먼저 나가신 아버님이 다음 정류장에서 이 버스를 타시는 것이다. 나는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숨다시피해서 고속버스정류장에 내렸다. 보슬비가 내린다. 그리고 순천행첫차를 타고 버스가 창녕을 지나는데 장대비로 변한 빗물이 창밖을 적시고 있다.
점심 먹는 것도 잊고 다시 송광사행 버스로 절에 도착하니 흐린 날씨는 계속되었다.
낯설지 않은 도량을 참배하고 관음사 주지스님께서 일러주신대로 재무스님을 찿아 뵈었다.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어제 관음사 주지스님께서 전화왔었다고 하시며 원주시자실로 안내해주셨다.
낯설지않은 도량에서의 행자생활 일주일 정도의 대기와 삼천배 그리고 율원에서 삭발 오후엔 지금의 사집반 지대방으로 사용하는 행자실에 입방했다.
규율이 엄한 송광사 행자생활, 그런 가운데 늘 가슴속에 관음사 주지스님께서 자리잡고 있었고 시간이 가고 중노릇하는 습을 배우면서 더욱 관음사 주지스님 생각이 났으며 절집안의 전통인 스승, 상좌의 인연에 대하여 알면서는 더욱 간절히 관음사 주지스님을 생각했다.
어느듯 그해 가을 효봉큰스님 추모재에 관음사 주지스님께서 오셨다.
먼발치에서 스님을 뵈오니 설래이는 마음에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추모재가 끝나고 고양후에 스님의 맡시봉인 통영 미래사 주지스님의 주선으로 시봉으로 받아주시기를 청했으나 송광사에 휼륭하신 스님들이 많이 계시니 여기에서 정하라고 몇번 말하시며 그냥 돌아가셨다. 통영미래사 주지스님께서는 아무 걱정말고 행자생활하고 있으라고 하시며 가셨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도량 이곳저곳을 굴러다닌다.
종무소에서는 위탁한다는 말이 없으면 말사로 가지 못한다고 한다.
밤새부는 바람소리에 종무소에서 한 이야기를 생각하니 대구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다음날 새벽예불을 마치고 첫차로 대구에 갔다.
관음사에 도착하니 점심공양을 훨신 넘은 시간 따뜻하게 맞아주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너무도 호된 꾸지람에 오후내 마당에 선 채로 꾸지람을 들었다.
왜 왔느냐 그곳에 있지 누가 오라고 했냐 너 있을 방 없으니 당장 가거라 계속되는 꾸지람 왠지 싫지 않았다. 저녁예불을 마친후 스님께서는 공양하시러 가셨고 나는 법당 구석에 앉아서 부처님께 엎드렸다. 부처님 저 여기서 살수있도록 해주세요. 이러고 있는데 저에게 공양주 보살님께서 작은 목소리로 행자님 하며 부른다.
보살님의 손짓을따라 후원에 가니 공양상이 차려져 있었다.
아침, 점심을 못먹었던 차에 맛있게 공양을 하는데 보살님께서 왜 왔는냐고 물어서 말씀드렸더니 주지스님께서 절대 방에서 잠재우지 말라고 하셨다며 오늘밤은 법당에서 지내라고 하셨다. 공양을 마치고 따뜻한보리차 한잔을 마시고 나는 법당으로 갔다. 추우면 일어나 절하고 땀나면 앉아서 좌선하고 다시 땀이 식으면 일어나 절하고 좌복으로 무릎을 덮고 하면서 밤을 새웠고 새벽예불을 보았다. 햇살이 창문을 비출 때 공양주 보살님께서 또 부르셨고 아침공양을 주지스님 몰래 먹었다. 어제 호통 치신 후 한말씀도 안하시는 주지스님.
무료함을 달래기위해 나는 마당의 풀을 뽑고 낙엽을 쓸고 책 읽는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저녁공양도 역시 주지스님 몰래 먹고 피곤한 몸이지만 추워 잠 잘 수도 없어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공양도 역시 공양주 보살님께서 주셨다. 공양을 먹고나니까 보살님께서 오늘49재가 있다고 하신다. 그래서 공양후 마당을 쓸고 있으니까 주지스님께서 걸레를 하나 들고 오시며 너 나 몰래 밥먹었지 공밥먹으면 복감한다고 하시며 거래로 법당 문 창틀을 닦으라고 하셨다.
이틀만에 듣는 스님의 목소리에 나는 기뻐서 열심히 창틀을 닦았고 화단손질까지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보살님들과 스님들께서 오셔서 49재는 시작했고 오후1시가 넘어 끝났다. 나는 법당 앞 마당 한쪽에 있다가 비빕밥을 먹고나니까 송광사에서 만났던 대원각 노보살님을 만났다.
내손을 잡으며 왔어요 잘왔어요 하시며 공양주 보살님께 대충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시며 걱정말고 있어요 내가 주지스님께 말씀드려 볼께요하셨다.
노보살님께서는 주지스님방에 들어가셨다가 한참후에 나오시며 걱정말고 꼭 있으라고 하시며 가셨다.
그날 저녁예불을 주지스님의 집전에 맞추어 모신 후에 법당구석에 앉아있으니 주지스님께서 법당문을 열고 너 밥안먹어 이리와 하셨다.
놀란 결에 따라서 후원식당방에서 따뜻한 공양을 먹었다.
그리고 공양주 보살님을 밖으로 부르시더니 무슨 말씀을 하시고서는 당신방으로 가셨고 보살님께서는 신발을 미쳐 못벗고 방으로 들어와서 내손을 잡으며 행자님 이제 됐어요, 됐어요 하셨다 저는 뭐가 됐는데요 하니 오늘부터 행자님을 당신 시봉스님들이 오시면 쉬어가시는 방을 오늘부터 행자님을 있게해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뜻은 행자님을 시봉으로 받아주겠다는 뜻이라며 몇번을 됐다고 하며 상을 물리시는 것이다 나도 순간 이제 됐구나 두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겨울은 관음사에서 행자생활을 마쳤고 이듬해 봄에 종지(宗旨)라는 법명을 지어주시며 행자교육원에 보내주셨다.
그리고 행자교육원을 수료하고 다음날 아침에 송광사 설법전에서 보성(菩城)큰스님을 전계화상으로 모시고 사미계를 받고 사중 어른스님들께 인사를 드리는데 탑전스님께서 너 어떻게 관음사스님 시봉됐어 그스님 시봉 잘안받는데 법명이 종지, 간장종지냐 된장종지냐 아니 조계종지 도종지가 되어야해 하시며 격려해주셨다.
점심을 먹고 다른 도반스님들은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나는 은사스님 시봉하고 가원에 다시 오기로 결심하고 다시 대구로 왔다.
관음사에 도착해서 은사스님께 인사드렸더니 수고했다 앞으로 중노릇 잘해라고 하셧다. 그날밤 나는 가사, 장삼을 열번도 더입어 보았다. 늘 효봉 큰스님의 교훈으로 평생을 중노릇 잘해오신 은사스님을 일년정도 시봉하고 이듬해 봄에 강원에 입방했다.
그리고 지금은 사집반, 그리고 몇일 있으면 하안거 해제다.
밖에는 지금 보슬비가 장대비로 변해서 처마밑 땅을 뚫으며 내린다.
해제하면 은사스님께 가서 못했던 시봉해야겠다. 옛 어른스님들의 중노릇하신 이야기도 듣고, 나는 행복한 사미다.
<출처-송광사>
첫댓글 지심귀명례 불. 법.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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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출가기를 읽고 볼을 간지럽히는 미소와 한참 머물다 갑니다. 어른스님들처럼 이 한국불교에 큰 종지를 이루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