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절집에서는 중요한 날이었다. 백중... 이날은 모든 영가가 다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하늘 문이 열린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신자라면 조상님 제사를 백중날 다 지내곤 하는데 올해 민들레는 영 성적이 좋지 않다. 작년까지만 해도 꽤나 열성적이 부처님마니아였는데.
중요한 날을 못 챙긴 채 보내고 나니 오늘 아침 문득, 갓바위에나 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의 업을 오늘 보상 받기라도 할 양으로. 늘 하던 짓을 안하면 왠지 찜찜한 법이다.
그 생각도 잠시(사실 더워서 엄두가 안 났다), 미뤄 두었던 친구와의 약속이나 지키자 싶어 전활 했더니 좋아라 한다. 둘이서 제일 가까운 바다나 갔다오자고 의기투합, 아침부터 부산하게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의 운명은 바다가 아니고 산이었나 보다.
나갈 준비가 거의 끝났을 때, 오래 알고 지낸 선방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내 멋대로 해인사로 행선지를 바꾸어 버렸다.
스님은 바다로 가고 싶으면 가고, 산으로 오고 싶으면 오고... 하시며 늘 그러하듯 고요한 물결같이 나를 편하게 대해 주신다. 아니예요 당장 해인사로 출발합니다~.
내 마음대로 해석하건데, 오늘 아침 갓바위가 생각났던 것은 역시나 스님을 찾아뵈러 절에 가야하는 팔자에 의한 것이리니.
아파트 앞에서 만난 친구도 나의 일방적인 결정에 흔쾌이 동의했다. 이 친구는 어느 대학교내에서 복사실을 남편과 같이 운영한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출근을 해야 되는지라 우리는 여름방학, 겨울방학 한 차례씩 꼭 가까운 여행을 하곤 한다. 대화가 잘 통화고 다방면으로 지식이 많은 친구라 함께 있는 동안은 한층 업그레이드 되는 내 정신을 맛 볼 수가 있어서 이 친구와 동행하길 좋아한다.
그녀와 내가 잠시 쉬지도 않고 밀린 얘기를 하는 동안 차는 어느새 가야산 깊은 산속 원당암에 떡하니 도착해 주었다.
법당에 들러 잠시 기도를 올린 후 스님 방 앞에서 인기척을 내니 도반스님과 담소 중이셨는지 한 스님이 자리를 피해 주셨다. 일 배의 예를 올리고 자리에 앉자 스님은 곧바로 찻물을 끓이신다. 이 익숙한 방에서 오래 전 인연인 스님과 여러차례 차를 마셨으나 늘 대화는 검소하다. 할 말이 많지도 않다. 아예 말을 않고 차만 몇 십분씩 마실 때도 있었다. 첨엔 그 자리가 그렇게 좌불안석이더니 그것도 길들여지니 이제 그러려니 한다. 억지로 대화거리를 만들어 내지 않아도 이젠 제법 편하다.
때마침, 구름이 산중에 몰려들더니 한차례 억수같은 비를 퍼부었다. 우리 셋은 문밖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소리없이 차만 마셔댔다. 늘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계시는 분이니 특별히 궁금한 것도 없으려니와 스님 역시 속세의 삶에 그다지 관심도 없어보여 차 동무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하안거 생활에 살이 너무 빠지신 거 같아서 속으로 안타까웠지만 그것도 내가 애를 태울 일은 아니다. 자신의 괸리는 자신만이 할 수 있을 뿐이며 그분만의 어떤 철학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다.
찻물 끓는 소리가 나즈막히 들리고, 우리들의 차 마시는 반복된 행위가 이어지고, 창호지문 밖으로는 비가 내리다가 회색구름이 지나가다가... 그렇게 산중에서의 적요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너무 오래 스님 시간을 뺏는 것도 실례라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우리는 일어났다. 스님은 절대 또 붙잡는 일도 없다. 오면 오는갑다, 가면 가는구나...
반배로 스님과 작별한 후 보슬비를 맞으며 스님처소를 나왔다. 한무리의 외국인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마루에 서 계신 스님을 향해 반배를 올리며 지나갔다.
마당 끝에서 한번 뒤돌아보니 스님은 아직도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마루에 그대로 서 계셨다.
예전에 처음 스님을 알게 되었을 무렵, 내 안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날이면 꼭 그 스님으로부터 안부전화가 왔다. 때로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스님께 하소연이라도 할까 싶은 고민에 망설이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스님이 먼저 전화를 걸어오곤 하셨다. 너무 놀라고 무섭고 한편 고맙고... 내 마음 상태를 고스란이 꿰뚫고 계시는 것 같아 불편해서 한동안 내 쪽에서 연락을 않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중에는 오히려 더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무때나, 혹은 아주 오랫만에 연락이 닿아도 스님은 늘 한결같은 모습이시다. 말수도 적고 목소리도 나직하니 천상 수행자다. 속세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래도록 참선공부를 하면 그 얼굴이, 그 눈빛이, 그 목소리가 그토록 맑아지고 평온해지는 것일까?
인연 지은 세월이 축적되고 나니 이젠 가족같은 친근감이 드는 스님이다. 내 모습이 아무래도 괜찮아지는 대상도 스님이다. 내 속의 모든 걸 다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있어 든든한 맘을 감출 수 없다.
친구는, 첨 뵙는 분인데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이 없어서 더 좋았다 한다. 할 말도 없는데 억지로 할 말을 생각해내야 하는 괴로움이 없어서 좋단다. 그 친구도 별종은 별종이다.
내가 등단하기를 가장 바라는 분이 스님이신가 보다. 만날 때마다 삼킨 거 뱉을 때가 되지 않았냐고 물으신다. 내참 부끄럽구로... 삼킨 것이 많지 않아서 뱉을 것도 없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수필공부 한다고 떠든지가 언젠데 여태 그러고 있냐는 눈치신데 아이구, 분발해야지 안 되겠다.
오래된 고목들로 가득한 산길을 굽이 굽이 내려오면서, 또 혼자서 적막을 즐기실 스님의 투명하리만치 하얀 얼굴을 떠올리니 내 마음에도 맑은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첫댓글 이건 수필로 쓰려고 쓴건가요? 시나브로님 책 읽고 굉장히 감동 했는데...민들레님 역시 글이 유연하고 감정을 살짝 건드리는 흐름이 있어요. 제 좁은 소견으로 (이건 순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찌끌이는 제 느낌입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처음에 잡고 무엇에 포인트를 줄지 정해서 쓰시면 더 좋겠다.. 그런 혼자만의 생각을 했어요. 시나브로님 수필에서 느낀점이 바로 마지막에 때리는 감성의 강한 흔들림이었거든요. 수필에는 그런 핵심을 미리 정해야 하는 건가보다... 그런 생각을 시나브로님 수필 읽으면서 살짝 했어요. 저는 주로 인문서적을 읽는 편이라 소설이나 수필.. 시...이런 걸 잘 몰라요. 이제 좀 자주 그 쪽을 읽어보려 해요.
나중에 다듬으면 수필이 되겠지요. 그냥 해인사 다녀 온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수필 비슷하게 되어 버렸네요.^^
항상 글에 관심을 갖고 읽어주시는 일상님, 감사합니데이~~~^^
등단이라는 형식이 과연 나와 연결되는 것은 어떤 점일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거두절미하고, 원하시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괜히 갈등은 하지 마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주변엔 제가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길 바라는 분들이 많은데 솔직히 아직 그만한 주제가 못 되어서 큰 욕심을 내지 못합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제가 쓰는 글에 자부심이 아주 조금이라도 생기면 그때 방법을 모색하려구요.
한줄기님, 고맙습니다~~^^
마음이 평온해지네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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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님에 대해 예전에 써 놓은 게 있는데 이번 해인사행과 합쳐서 수필로 완성해야겠어요. 3목에서 열심히 해서 등단의 길이 보였음 좋겠어요.
그림이랑 비슷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만의 프로필은 필요악이라 생각 해요.등단을 하고 글을 쓰는 거랑 그렇지 않고 쓰는거랑 마음 가짐이 다를꺼라 생각합니다.언니도 좋은글 써서 꼭 등단하길 바래요~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한데, 아직 작품성이 없는데 등단 먼저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암튼 충고 고마워 은경~~^^ 열심히 해야지!
이렇게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요즘 점점 글과 더 멀어지는 나를 돌이켜 봅니다. 정말 가슴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꿈으로만 간직해야 할런지...많은 것을 다 껴안고 살아야 하는 일상이 힘이드는 요즘입니다. 민들레님의 글 속에서 봄날 햇살같은 밝음이 보입니다....평화랄까?...행복이랄까?.....^^
그러게요 언니. 고요한 마음으로 글만 쓸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인생이라는 놈은 우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질 않으니... 언니 힘내세요, 화이팅!!
백중이 사찰의식중에서는 최고의 명절이란 걸 들어 보았습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을 담아 의식을 치른다는걸,,,, 하안거를 마치고 솔숲을 내려오는 스님 몇분을 사진에 담은 신문을 며칠전 읽은 기억이 님의 글을 보니 생각납니다.
마음으로 전하는 것들을 언어로 옮겨 좋은 글로 완성하셔서 하안거에 대한 수필로 선보이시길,... 열심히 노력하는 민들레님 ,,,머지않아 님의 날이 분명 올겁니다. 님의 열정이 저에게도 전해지길,,,ㅎㅎ
나는 하안거, 동안거 들어가시는 스님들 뵈면 괜시리 마음이 착 내려앉습니다. 낮아져야지...
종교적으로 심취하여 열심인 사람들을 마음 한켠으론 동경하면서도 마흔 중반이 되도록 열정적인 신앙생활 한번 해보지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때론 정신적 장애인이 아닐까 싶어 조바심이 날때도 있습니다. 평소 불교는 종교라기 보단 철학이라 생각하며 체계적인 공부를 해보고 싶다 생각한지도 여러해 지났건만 게으름으로 인해 늘 미뤄두고 있슴다. 민들레님의 단아한 글을 보니 묻어두었던 불씨가 살살 일어나는 것이 마음이 청아해 오네요
스님들 말씀이 불교경전에 한번 맛들이면 세상 그 어떤 공부보다도 매력있다고 하시더이다. 저도 한창 빠졌을때가 참 행복했는데 요즘은 너무 게을리해서 사실 스님 앞에선 부끄럽답니다. 지나치게 중생다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