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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왕 |
이방인 자격으로 유대의 왕이 되었다. 로마가 유대 간접통치를 위해 임명하였다.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의 장자 아켈라우스가 다음 왕위에 올랐으나 학정으로인해 추방당했다. |
갈릴리 유다 |
‘근본주의’를 내세워 급진적 운동으로 로마에 대항한 열심당을 조직했다. 로마에서 요구한 황제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였고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림으로써 많은 급진/저항적 유대인들이 출현하는 시초가 되었다. 급진파는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단합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친로마적인 온건파들을 재판에 회부시켜 처형했다(급진파에는 John of Gishcala가 대표적 인물). |
유대 엘리트(사두개파) |
친로마적 성향을 띈 제사장들과 온건파들로 구성되었다. 현실문제(status quo)에 주목하였고, 신학적으로 내세와 천사의 불멸, 부활 등을 부정하였다. 현실문제인 성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후원에 의존적이었다(Simon Bar Giora가 대표적 인물). ⇔바리새파1) |
플로루스 |
로마가 임명한 유대장관(총독)이다. 가이사랴의 유대회당에서 시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갈등이 있었고, 이를 중재해준다는 약속은 했지만 방관하였다. 게다가 성전의 기금 17달란트를 약탈하였고, 로마군과 함께 이유 없이 유대인 공동체를 침략하여 유대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낳았다.≒ 총독 빌라도, 쿠마누스, 알비누스 |
칼리굴라 |
자신의 신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건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대인들은 주저 없이 무기를 들었다. |
베스파시안 |
그의 아들 티투스와 함께 유대전쟁을 진압한 로마의 장군이었다. 갈릴리 지역의 유타파타를 함락시켰고 이때 요세푸스를 로마로 체포하였다. 아들 티투스가 유대에 남아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
요세푸스 |
갈릴리에서 항전하나 체포당했다. |
2-2)『유대 전쟁사』의 줄거리
제 1권에서는 독립국이었던 유대가 로마에 의해 강제로 점거되는 과정에 대해 다뤘다. 로마의 알렉산드라와 히르카누스, 폼페이우스가 유대를 정복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였고, 유대가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는 모습이 나타난다(~BC63).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가 로마의 속주가 되며 이두메인 헤롯4)이 로마에 의해 유대의 왕위에 올랐다. 그은 이방 출신으로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는 정책을 하였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대제사장직을 겸할 수 없게 되자 그 자신이 직책을 임명하였고, 제사장직의 세습제 철폐와 권력 약화를 주도했다. 사실상 1권에서는 유대 전쟁의 발발과는 관련성이 적고 로마의 속주가 된 유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제 2권에서는 헤롯 사후 헤롯의 장자 아켈라우스(아르켈라우스)와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1세의 정치와 쿠마누스, 펠릭스, 플로루스 등의 총독들의 학정에 대해 서술하였다.5) 이에 따른 유대 전쟁의 발발 과정이 나타나있다.
제 3권~6권 에서는 갈릴리에서 유대군을 지휘했던 자신의 역할과 로마의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의 진격에 따른 갈릴리 요타파타의 함락에 대해 서술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갈릴리의 함락이후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는 곧장 예루살렘으로 진격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갔다.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유월절행사를 위해 모여든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아사했고, 중도파인 유대 엘리트들과 급진파의 갈등으로 인해 사상자가 더욱 늘었다. 그리고 마침내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2-3)『유대 전쟁사』의 특징
26-36 |
*빌라도(Pontius Pilate) |
44-46 |
파두스(Cuspius Fadus) |
46-48 |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 |
48-52 |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 |
52-59 |
벨릭스(Felix) |
59/60-62 |
베스도(Festus) |
62-64 |
*알비누스(Lucceius Albinus) |
64-67 |
*플로루스(Gessius Florus) |
『유대 전쟁사』의 첫 번째 특징은 전쟁의 외부적 원인을 단지 종교적 압제로 보았다는 것이다. 위의 표에서, 이름 옆에 별표가 있는 장관들은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쓰여졌다.그리고 나머지는 전쟁에 큰 책임이 없다고 쓰였다. 이런 요세푸스의 견해는 타키투스와 현대의 사가들과는 다소 상이하다.6) 동시대 역사가인 파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와 필로(Philo Judaeus)에 따르면, 벨릭스와 베스도, 파두스 등의 장관은 유대사회의 반감을 증폭시킨 공동의 주범이다. 파두스는 당대 거짓선지자와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들을 모조리 살해했고, 알렉산더는 갈릴리 유다의 두 아들을 처형했다. 벨릭스는 유대 지역 전역의 급진주의 운동을 모조리 진압했고, 이 운동에 가담한 마을들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가 살해한 유대인은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실정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는 파두스, 벨릭스, 베스도 등의 유대장관들이 요구한 무거운 세금과 정치적 박해는 유대전쟁의 발생 원인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유대에 일어난 기근과 궁핍함 역시 유대전쟁의 원인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오히려 이들이 파견되었을 때에 유대사회는 평온한듯 묘사했다. 반면에, 그는 쿠마누스, 알비누스, 플로루스 등의 유대장관들이 유대인에게 종교적인 압제를 가했을 때7)에만 목숨을 걸고 봉기한다고 보았다. 즉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인을 분노시키는 원인은 폭정이 아닌 율법을 어기는 범죄이며, 유대 종교에 대한 모욕 혹은 모욕에 대한 방관이다. 전쟁 발발 원인에 정치적 박해나 경제적 궁핍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요세푸스가『유대 전쟁사』의 저술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사실 베스타시아누스가문의 보호 아래에서 로마의 강건함과 베스타시아누스가문을 선전하기 위하여 『유대 전쟁사』를 저술하였지만, 이면에 유대인들의 고귀함과 유대교의 숭고성을 지켜낸 유대 전쟁의 의미성을 담아내려고 하였다.8) 고대 사학자 테사 레자크(Tessa Rajak)에 따르면, 당시『유대 전쟁사』는 요세푸스가 주로 사용했던 알람어로 쓰여 졌고, 로마인인 조수들과 함께 헬라어로 번역했다. 요세푸스는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람어로써 『유대 전쟁사』를 작성하였고, 로마의 강건함과 베스타시아누스 황제의 업적을 예찬해야하는 캠페인 작품의 성격을 가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유대 전쟁 발발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런점을 미루어 보아, 유대교와 유대인의 고귀함을 이면적으로 내비치기 위하여 요세푸스가 종교적 압제만을 전쟁의 원인으로 상정했을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유대전쟁의 내부적 원인을 급진주의자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유대 전쟁사』전반에서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을 일으킨 급진주의자들을 ‘강도’라고 칭한다. 또한 이들이 마치 사회의 하류집단에서 출현하여 민중과 상류층을 선동하고, 멸망시킨 화신처럼 묘사했다. 바리새인의 신분으로 갈릴리의 지휘관으로 활약한 자신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급진파를 비난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그 중 Martin Hengel과 현대 주류 사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요세푸스에게 유대전쟁 자체는 유대종교의 고귀함을 알리는 의도가 있었기에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요세푸스에게는 로마에 무장으로 투쟁하고 독립을 쟁취할 계획은 없었기에 유대전쟁의 전반적 성격을 격하시켰고, 민중의 목숨을 잃게하였다. 또한 요세푸스는『생애』에 회고하길 자신은 로마와 유대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평화를 도모하려고 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은 친로마 엘리트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처형했고,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에도 내부갈등을 조장하였다.
세 번째 특징은『유대 전쟁사』의 작품적 특징이다. 『유대 전쟁사』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아람어판과 헬라어판 두 종류가 있다. 헬라어판이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이는 요세푸스가 로마에서 기거할 때, 로마인 조수들이 도와 아람어판인『유대 전쟁사』를 헬라어판으로 번역한 것이다. 헬라어판의 『유대 전쟁사』에는 셈족어형(아람어적 표현)이 있지 않고, 어려운 어휘적 선택이 쓰여졌으며, 다른 요세푸스의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는 요세푸스의 높은 헬라어 구사력의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앞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했듯-로마인 지식인까지 동원된 국가적 캠페인의 일환이었음을 의미한다.9) 또한 『유대 전쟁사』가 쓰여진 25년 후『아피온 반박문』에서 요세푸스는 초기 작품을 쓸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또『아피온 반박문』과『생애』에서 그는 『유대 전쟁사』의 저술당시 자신의 개인적 역량에 대해서 강조했다. 『유대 전쟁사』는 사실 다른 사료들과는 다르게 객관성이 크게 확보되지 못했다. 몇몇 사료-유대 헤롯왕의 저서와 그의 우손인 아그립바1세, 2세의 저서- 들을 참고했다는 사실 외에는 대부분이 요세푸스의 직접적인 목격에 의존했고, 그의 목격 범주의 외에 있던 내용은 다른 사료를 참고하였다고 말한다.
네 번째 특징은 유대 전쟁사의 저술 목적이다. 유대 전쟁사』는 우리에게는 대식국으로 알려진 파르티아의 발흥과, 전후 유대인들의 열망을 달래기 위해 쓰여졌다.10) 이는 헬라어판의 서문에 나타난다. “그 지경안에 있는 야만인들”에게 보냈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야만인은 파르티아인, 아라비아인, 바벨론인, 메소포타미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등을 경계하며 낮추어 부른 말이다.
에티오피아의 유대인. 생물적 인종과 관계없이 그들의 관습을 지키고 있다.
3.선정이유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흑인과 백인, 심지어 동양인까지 많은 인종들이 상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로마에 의한 강제추방 후 수 천년동안 어디에서 디아스포라를 지키며 살아왔느냐에 따라 외형이 바뀐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선 인종을 막론하고 이들은 똑같이 통곡의 벽에서 울며, 성경구절을 왼다. 이른바 ‘다인종 단일민족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 전쟁사』에서 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부지하는 연대의식을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였다. (특히 로마에 의해 유대의 생활과 단체와 정부가 와해되기 전의 그것을 말이다)
또한 로마의 식민지 지배체제의 문제점을 엿보려 하였다. 어떤 정책적 문제점이 유대의 반발을 샀을까? 그것을『유대 전쟁사』가 잘 시사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유대인인 요세푸스의 시각으로 미시적 차원인 민중들의 불만이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속주의 일원으로서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발 했을지, 아니면 부분적으로나마 로마에 문화적으로 동화되었을지, 타협적인 친로마파와 유대인들의 관계는 어땠을지 알아보려고 하였다.
4.독후감
사실 책을 읽은 후 들었던 생각들은 예상했던 그것과(선정이유)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고찰은 물론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아보였던 부차적인 요소로부터 형식상이나 내용상의 한 차례 더 도약한(?) 생각들이 들었다. 의식의 흐름 속에서 필자가 느꼈던 생각들을 정리 해보려고 한다.
4-1)내가 본 『유대 전쟁사』의 이례적 특징
『유대 전쟁사』를 읽으며, 다소 이례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개괄적인 역사서(전쟁사)이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봐왔던 서양의 여러 역사서들과는 달리 몇 명의 영웅을 상정하지도 않았고, 특정 사람이나 특정 집단의 시각을 중심으로 서술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필자가 아직 역사고전을 읽은 경험이 적어서 만들어진 편견일 수도 있다)김시열 교수의 「제 1차 유대 전쟁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그가 동지에게는 예찬을, 정적에게는 비난을 하는 그리스의 수사법을 따랐을 것이라고 하는데,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왜냐하면 첫 째, 요세푸스는 전쟁에 다소 관련이 없는 사실들도 가능한 많이 서술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대인의 분파와 그들의 생활, 장군의 아내, 헤롯의 장례식 등 아주 많은 사건 사고들을 적었다. 이는 특정 영웅의 시각으로 편향될 가능성을 배제하는데 일조하였다고 생각한다. 둘 째, 전쟁에 대해 로마, 유대 그 아무도 예찬하거나 영웅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랑케류의 객관성으로 연상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그가 객관성을 지켰다기 보다는, 단지 누군가를 영웅으로 삼거나 예찬적, 당위적인 의제를 주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전술했듯, 유대전쟁의 고귀함을 간접적으로 내포하긴 하였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요세푸스는 이분법적으로 옳은자(동지, 로마 혹은 유대인)와 그른자(정적, 로마)를 구분하여 영웅적 주관성을 개입하지는 않았고, 다만 사건의 원인에 대한 본인의 분석, 특정 인물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통해 자신의 시각과 관점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는 베스타시아누스황제가 요구했던 저술목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베스타시아누스나 로마의 권위를 예찬하거나 영웅적으로 그리지 않았고, 단지 베스파시아누스의 객관적 역량을 통해, 유대 전쟁의 전후 참혹한 참상을 통해 저술의도에 충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 이례적인 특징은 미시적인 사건들과 민중의 시각에서 서술된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어쩌면 필자가 아직 역사고전을 읽은 경험이 적어서 만들어진 편견일 수도 있겠으나, 필자는 역사서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개괄적이고 거시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이라고 생각해왔다. 즉 역사서들은 사건과 관련된 특정 인물(왕 혹은 성인, 장군 등)과 정책적, 사회적 의제 등을 제시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유대 전쟁사』는 그렇지 않았다. 예컨대 유대의 특정 분파들과 그 분파들의 전통과 사상까지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 총독의 아내 글라피라의 생애를 서술하는 등 전쟁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미시적 사건까지 모두 서술했다. 또한 전쟁의 과정에 대해 읽었을 때에도, 『유대 전쟁사』는 애초에 전쟁에 관련된 집단의 이해와 성격을 모두 서술했다. 또한 민중들의 생활, 주된 거주지, 갈등 등을 서술하였다. 따라서 책을 읽을 때 한층 더 이해와 몰입이 쉬웠다.
4-2)바리새파와 열심당, 극단으로의 몰락
호메이니의 가르침에 따라 이슬람으로의 회귀를 강조한 이란혁명
앞에선 책의 형식적인 특징에 대해 느낀점을 이야기 했다면 이제는 내용상의 느낀점과 나의 의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바리새파에 대한 견해가 첫 번째이다. 내용상 이해를 돕기 위해 말하자면, 그 당시 유대사회는 크게 바리세파와 사두개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바리세파는 내세를 믿었으며 반로마적 성향을 갖고 있었고 사두개파는 현상문제에 집중한 친로마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사두개파는 성전위주의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시에도 사두개파는 로마와 유대의 중재를 주장했고, 바리새파의 일부는 열심당을 조직하여 로마에 항전하였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열심당은 재판을 열어 친로마적 성향을 가진 유대인들 모두 처형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유대 공동체는 바리새파적인 성향을 가진 유대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유대 전쟁사』를 읽으며 내세위주의 바리새파 독존의 시대가 유대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념은 대중의 추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절충하며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사두개파가 공존하여 서로의 교리와 시좌를 공유하고 절충했다면 이산의 시대인 디아스포라의 시대도 빨리 끝나지 않았을까? 디아스포라가 여호와의 뜻이니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유대 공동체를 위한 현실적 방안을 낼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말이다. 내가 느낀 바리새파의 독존과 예루살렘의 포위사태에서도 같은 유대인들을 처형한 상황은 세계 곳곳에 중도 없이 극에 치우친 사건들과 중첩되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그 중 하나다. 호메이니가 대중을 선동하여 근대화의 바람으로 입헌제의 온건한 이슬람 국가였던 팔레비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을 전례없는 강력한 정교일치 국가로 만들어 미니스커트를 입던 이란 여성들에게 니깝을 입혔고, 비밀경찰 사바크가 국민들을 종교적 기준에 따라 감시하게끔 하였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스탈린의 민족주의, 나찌즘 또한 마찬가지다. 다시 돌아와서, 현재의 이스라엘을 보면 과거 바리새파의 이상적 공리공담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종교나 이념, 사상과 학문은 모두 시대에 따라 융통성을 갖추고 변형되며 퇴보와 진보를 겪는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할라카, 탈무드 율법, 랍비 율법, 민하김, 미쯔바 등 수 많은 율법에 얽메여 생활 영위에 지장이 있는 점을 보면 그들의 경직성에 안타깝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방법이며, 이러한 사유가 문화적 상대성을 무시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4-3) 그 다음은 ‘친일파’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유추의 관련성에 대하여 지적 받을 수도 있으나,『유대 전쟁사』에서 나타난 로마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통해 일본과 조선의 관계, 그리고 역사적으로 모든 식민지의 국민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견해에 대해 말하기 전에, 필자는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분노하며, 국치에 일조한 친일파들과 징병, 징용 참여를 권장한 친일파들을 증오한다는 것을 사전에 밝히고 싶다. 『유대 전쟁사』에는 크게 세 가지 집단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첫 번째로는 로마의 지배층이다(로마에서 임명한 대제사장들과 장관들도 포함한다). 이들은 로마에서 지명한 ‘로마의 앞잡이’ 이며, 로마의 시민이나 유대의 장관, 특정 대제사장들이 이에 해당 되었다. 두 번째는 온건한 유대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유대의 급진파와 로마 사이에서 중재적인 역할을 했다. 세 번째는 급진파이다. 이들은 열심당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압제에 대항하여 로마와 싸웠다. 또한 변절자라고 판단되는 유대 엘리트들을 처형시켰다. 요세푸스는 혈통은 급진적인 바리새파이지만, 행적을 미루어 판단해 보았을 때 온건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는 갈릴리 전투에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항복하였고, 훗날 예루살렘에서 로마와 유대의 중재를 도모하였다. 또한 『생애』에 따르면 그는 베스파시안의 가문에 대한 선전과 로마의 강건함을 알리는 캠페인에 공헌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유대 전쟁사』에서 유대교의 고귀함과 숭고함을 이면에 제시하였고, 만년에는 『아피온에 대한 반박』, 『유대인의 고전성』을 저술하여 유대인의 우월함을 동시에 나타내었다. 갈릴리 유타파타에서 자결하였던 급진파들의 입장에서 요세푸스는 변절자이며, 민족 대반역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를 중심으로 유대 엘리트 집단들은 제정 로마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전쟁 시에도 로마와 유대의 중재를 도모했고, 융통성을 갖추려 했다. 로마가 초기 속주를 통치할 때에 유대교를 인정하였고, 유대인들의 행사에 단지 로마 황제에 대한 제의만 추가하길 요청했음을 미루어 보면 유대 엘리트의 역할에 대해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요세푸스를 비롯한 온건파들은 최선과 차선, 최악과 차악을 선별하여 현실문제에 치중하였던 반면, 갈릴리 유다의 열심당은 그 마저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여 대항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의 경우를 유추해 보았다. 박영효와 김홍집, 박정양, 홍영식 등은 조선을 모화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융통성을 갖추고 근대적 문물을 도입하기를 원했다고 판단된다. (이는 유대 엘리트와 다소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이들 뿐 아니라 일제치하에서 살길을 나름 도모하고 식민사회에 수동적인 태도를 갖춘 사람들은 민족적 변절자로 간주해야할까, 아니면 조금 더 너그럽게 봐도 될까? 물론 유대에서 조선의 모습을 찾는다는 게 ‘잘못된 은유’가 될 수 있다. 또한 관용적인 초기의 제정 로마와 일본을 동일선상에서 봐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강점기에 대항보다 평화(?)를 추구하며 이른바 ‘살
길’을 찾아 생활했던 구성원들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필자는 아직 국사 지식이 얕아 일본 침탈에 대해 다 알지 못하고, 당시 살아보지 않았기에 다소 무례할 수 있다는 점에 양해를 구한다). 또 물론 자신의 사리사욕에 급급하여 국민들을 수탈한 부농들과 징병 참여를 촉구한 민족적 반역자(이들은 로마의 앞잡이에 해당되기에 말할 여지도 없다고 생각한다)들은 여전히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두 가지 고민’이라고 말했듯 이런 관점과 반대되는 견해도 갖고 있다. 만약 강제점거의 상태에서 평화를 희구하고, 살길만을 도모한다면, 점차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잃어갈 것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유대 전쟁의 전에 유대 엘리트들이 우세하였다면 일단 유대전쟁을 아예 일어나지 않거나 간단하게 종결했을 것이고, 유대에는 친로마파가 득세하였을 것이다. 또 처음엔 로마황제의 제의에 관용을 갖추고, 나중엔 점차적으로 로마황제 우상화(Idolization)에도 너그러워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대의 교리체계와 사회관습은 붕괴되고 유대는 지중해 남쪽의 또다른 로마가 되지 않았을까? 이는 아일랜드와 일본에서도 관찰 할 수 있다. 아일랜드는 게일어(Irish Gaelic)를 사용하던 켈트의 영토였지만, 영국과 합병되어 영어를 쓴다. 또한 지금의 오키나와인 류쿠왕국 역시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잃고 일본어를 쓴다. 만약 조선에 항일단체들은 전무하고 유대 엘리트와 같은 중재적 집단들만 있었다면 이 보고서가 히라가나로 쓰였을 수도 있다.
물론 요세푸스 자신도 ‘변절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집단에 너그러웠을 것이고, 나 역시 그런 관점을 수용한 것이기에 아직 위의 두 가지 견해를 좁히지 못한 상태에서 방치하고 있다. 국사에 대한 지식이 다소 얕기 때문에 더 많은 공부와 생각을 통해서 결론을 내리려 한다. 어쨌든 단언할 수 있는 것은『유대 전쟁사』가 우리와 세계의 역사적 사실들을 좀 더 이색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시초를 제공 하였다는 것이다.
5.참고 문헌
영상
Jewish Rebellion, Critical moment 3/6 Ancient Rome The Rise and Fall of an Empire
도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저, 서영철 외 7명, Thackeray, H. St. J. 역,『유대 전쟁사』, 도서출판 달산, 1991
강영수, 『유태인의 오천년사 : 발로 쓴 최초의 유태인 역사서』, 청년정신, 2003
논문
이대섭, 「유대戰爭(AD66-70)과 初期基督敎에 關한 硏究」, 『神學과宣敎』, 제 11호, 서울신학대학, pp.79-101
김시열, 「제 1차 유대 전쟁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2002
박양규, 「제 1차 유대전쟁(A.D. 66-70)의 원인 연구」, 고려대 대학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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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수, 「로마제국의 팔레스타인 지배과정과 헤롯 왕조」,『神學과 世界』,監理敎神學大學校, 제74호, 2012, pp.61-93
장양미, 「1세기 로마제국 치하 갈릴리의 현실에 비추어 본 21세기 대한민국의 초상」,『기독교사상』, 제 637호, 대한기독교서회, 2012, pp.16-26
김무순,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와 신학 연구」, 한남대학교 학제신학대학원, 2012
첫댓글 등장인물 정리가 굉장히 인상깊네요. 책의 특징들도 잘 정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진이 하나도 안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