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24 08:00 by 김삼웅
김대중은 목포에서 별로 지지 기반이 없는 민국당에 들어가는 것보다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는 쪽이 당선에 훨씬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복병’이 나타났다. 이승만 정부가 노동조합 간부들을 모조리 체포한 것이다. 당시 노동조합은 자유당의 기간단체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이승만 정권의 어용단체였다.
이런 노동조합이 자유당 공천후보를 두고 무소속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다고 하여 간부들을 체포한 것이다. 경찰은 간부들 모두에게서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받고서야 풀어주었고, 노동조합은 김대중 지지를 철회하였다.
당시는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통하던 시대였다. 경찰은 자유당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한지 오래이고, 경찰이 간섭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른바 ‘경찰국가’체제였다. 김대중은 정계입문의 초입에서부터 이승만 정권의 폭압으로 패배의 쓴 잔을 들게 되었다. 김대중의 파란곡절의 정치인 생애는 이렇게 패배와 좌절로부터 시작되었다.
목포의 민의원 선거에는 9명이 입후보하여 전남대 상대학장을 지내고 민국당의 공천을 받은 정중섭이 8,71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김대중은 3,392표를 얻어 5위에 머물렀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3선 연임을 가능하도록 헌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3분의 2 의석이 필요했다. 그래서 5ㆍ20 민의원 선거에 관권을 동원하고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부정ㆍ타락 선거의 결과 자유당은 114석을 얻어 민국당 15석, 대한국민당 3석, 국민회 3석, 제헌동지회 1석, 무소속 67석에 비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으나 당초 목표인 개헌정족수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처음으로 총선에 나섰다가 패배한 김대중의 회고를 들어보자.
자유당 정권이 경찰에 압력을 가해 노조간부들을 전원 체포해버린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면 국가 기간단체인데 여당이 아닌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는게 그 죄목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노조 간부들로서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내 지지를 철회하는 대신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쓴 다음에야 풀려나왔다. 그리고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조합원들을 모아 집회를 열고 다니면서 조합의 방침이 바뀌어 자유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마소가 자다 깨어나 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런 식의 얼토당토 않는 부정선거는 그 뒤로도 오래오래 끈질기게 계속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최대의 피해자가 바로 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내 자신의 기록은 한국 부정선거 약사(略史)나 부정선거 피해자 기록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나는 최초의 선거에서 졌다. 8명의 입후보자 중에서 4위였는지 5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참담한 패배였다. (주석 1)
1970년 40대기수론의 김영삼씨와 함께
김대중과 평생 ‘동지와 라이벌’ 관계가 된 김영삼은 이때 고향인 거제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아 26세의 최연소자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 만약 김대중이 국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면 그의 야당에서의 명성은 훨씬 일찍 부각되었을 것이고, 4ㆍ19와 5ㆍ16의 격동기에 있어서 한국 정치판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주석 2)
총선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중심지인 서울에 자리잡는 것이 관건이라 생각하고 1955년 8월경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해운회사와 신문사를 정리한 자금이 선거를 치르고도 약간 남아있어서 서울에 허름한 집 한 채를 구할 수 있었다.
서울에 자리잡은 김대중은 목포출신 소설가 박화성의 소개로 여성 국회의원 박순천을 만나, 그를 돕는 한편 한국노동문제연구소 주간으로 취임하고 노동문제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목포에서 노동조합과의 연고도 작용하였지만, 앞으로 우리나라가 산업화가 진척되면 노동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것으로 보았다. 또 자신이 목포의 선거과정에서 직접 당한 것처럼 이승만 정권에서 노동계가 어용화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현실도 노동문제에 집착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김대중은 <동아일보> 1955년 9월 14~15일자에 '노총분규와 우리의 관심'이란 시론을 두 차례 기고하였다. 내용은 관료자본주의의 폐단을 비판하고 경제 각 주체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민주적 자본주의론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김대중은 이보다 앞선 1954년 4월호 <신천지>에 '공정선거에의 희원(希願)'이란 시론을 기고하였다. 아마 중앙의 언론매체에 자신의 이름으로 쓴 최초의 글이 아닌가 싶다. 이 잡지는 <서울신문> 출판국에서 발행하는 종합지였다. 관권이 작용한 부정선거로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느끼게 된 공정선거의 희원을 담은 글이다. 몇 대목을 발췌한다.
누구나 주지하는 바 민주정치는 대의정치다. 따라서 국민을 대표하여 국정을 담당할 의원 선거의 적부 여하는 실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성패와 국민의 행복을 좌우할 중대사로서 우리는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공정하고 명랑한 가운데서 우리의 주권을 행사하여 명일의 안녕과 행복을 선출된 대의원을 통하여서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공산당을 배격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공산세계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공산당이 내세운 입후보자에게만 투표를 강요당하고 국민 스스로가 자기들의 권리를 위해서 진실한 봉사를 할 수 있는 대표를 선출하는 자유가 박탈되기 때문에 공산정치를 배격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거가 자유로운 분위기 하에 매수나 사사로운 정실을 떠나 입후보자의 정견과 인물을 본위로 하는 공정하고 명랑한 선거가 되어야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보다 승할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선거를 통해서 성립되는 국회라야 공산당의 악독하고 집요한 침략을 완전히 물리치고 통일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현하 우리의 초미의 긴급지사가 되어 있는 것이며, 또는 모든 민생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전국민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에 대한 현실적인 감사념과 한없는 애착심을 갖게 된 것이니 그러한 민정에는 어떠한 공산분자의 침투도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주석 3)
그토록 권력의 탄압이 두렵거든 차라리 입후보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같은 대한민국의 안에 있는 여당의 압력을 두려워하는 류의 기백으로서 어떻게 국사의 최전선에 서서 적색침략 분자와 생ㆍ사의 대결을 하여야 할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있겠는가?
국회의원은 결코 감투나 무슨 특권자가 아니다.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복리를 위해서는 감히 생명조차 아끼지 않을 수 있는 정도의 성실과 용기를 간직함으로서만 능히 그 임무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비굴은 잔인에 통하는 것이다. (주석 4)
김대중은 정신적으로 대단히 조숙한 편에 속한다. 순전히 자력으로 사업을 일구고, 30세에 국회의원에 입후보하고,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위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에 올라오고, 노동문제연구소를 차리고, 언론에 기고활동을 벌이는 등 조숙한 청년으로서 사회활동을 시작하였다.
주석 1) 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80쪽. 2) 김진배, <김대중수난사 인동초의 새벽>, 58쪽, 동아, 1987. (이후 <인동초의 새벽> 으로 표기). 3) 김대중, '공정선거에의 희원' <신천지>, 1954년 4월호, 32~33쪽. 4) 앞의 책,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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