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형님 집에서 자고 아침 6시 40분.
큰형님이 500원 큰누나가 1.000원을 주어 받아서 출발했다.
부천에 도착했는데 어디인지
찾지를 못해 한참을 헤매 찾았다.
오후에 일 끝나고 기숙사 들어가서
1.000원을 가지고 비누 치약 사고 보니 150원 남았다.
그러고 보니 일요일 노량진 갈 차비가 없다.
제발 100원이라도 있으라고 가방을 뒤져보니 150원이 있다.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다음날 노량진까지는 갔는데 천호동 집에 갈 차비가 없다.
큰 형네 조카가 태어났다.(치훈)
노량진 누나 집엘 가서 조카 애들과 놀았다.
난 조카 애들이 참 예뻤다.
지금은 조카들도 다 커서 애들 낳고 오손도손 살고 있지만
그때는 내가 조카들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었다.
돈이 없으면 조그만 과자라도 사주고
못 나가면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돈이 좀 있으면 여의도 고수부지며 남산이며 데리고 다녔다.
** 1983년
봉급이 나왔다.
봉급이 600원 올랐단다.
봉급 48.000원에 식대12.000원
가계 외상값7.000원 연탄값 5.000원...
하루 13시간..
야근은 밥 먹듯이 하고 좀 더 나온다 하면 130.000원이다.
이러니 돈이 모이겠느냐고.
젠장 환장하겠다.
일하고 심심해서 차도 타고 싶고 해서 길을 거니는데
전봇대에 붙은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 일요학교 '라는 곳에서 공부하고 싶은 분들
입학하라는 광고다.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지고 마음 한구석에서
배우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린다.
나오며 책방에서 " 열관리 " 책을 사서 공부를 해 본다.
요즘 열관리가 자격증만 있으면 먹고살기 좋다고 하는데
책을 봐도 도무지 모르겠다.
모두 수학 공식이라 배우지 못한 난 학원
안 다니면 딸 수가 없을 거 같다.
그래도 열심히 보면서 일하면서...
작은 누나께 전화했다.
공부하려는데 돈이 없다고 하려다가 무슨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전화받은 누나가 말도 없고 조용하다.
반기는 기색도 없이.
하나님이 좋다고 교회에서 봉사하며 사신다.
고숙이 돌아가셨다고 이야기만 하고
전화 수화기를 놓았다.
4월이다.
온 천지가 꽃 잔치를 한다.
빨간 장미꽃 노란 개나리꽃 순백색 하얀 목련까지.
봄이 되면 사람들의 옷차림부터 달라진다.
고향 친구들이 부천까지 왔다.
정말 오랜만이다.
기숙사 생활은 못하고 방 얻었다고 했다.
25.000원에.
놀러 오라고.
자주 가는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옛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오후 일 끝나면 다방 와서 차 한잔 마시고
12시가 넘도록 텔레비전 영화보고 집에 간다.
그때는 심심하면 다방 와서 영화를 틀어주면 보고 가곤 했다.
집에 오니까 연탄 냄새가 진동한다.
** 1984넌
집에 와서 조카를 불러 함께 놀았다.
그리고 공부 좀 해야겠기에 새벽에 학원 다니고
좀 늦겠다고 하니 간판 사장님 사모 벌레 씹은 인상이다.
그리고 1984년 2월 4일 신설동 수도학원에 입학했다.
정말 꿈만 같다.
5일17일.
막내 누나는 아파서 누워 있다는데
가 보지도 못했다.
한 번 시간을 내어 가 봤더니 아파서 2주째 누워 있었단다.
오 하나님~~~
시골에서 오신 어머님과 함께 누나네서 하루 잤다.
( 간판 공장 )
내가 이제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니.
새벽에 일찍 일어나 공부하고 일하고 할 수 있을까?
새벽 4시에 일어나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버스를 타고 전철를 타고 학원으로 출발했다.
노량진에서 신설동까지 약 40여 분.
늦게 들어온 관계로 교과서 진도가
나가서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영어와 수학이 기초가 없으니 너무 어려웠고.
한 달 만에 첫 시험을 보았는데 영어 60점 나왔다.
** 1985년
새로운 작업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워보고 싶었다.
청량리 쪽에 누가 얘기를 해서 나가게 되었다.
첫 봉급을 150.000원 주었다.
따뜻한 4월의 봄이 오고 밖에 만물은 나를 설레게 한다.
작은누나가 오랜만에 여행을 가자고 한다.
엄마와 누나와 함께 춘천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춘천 막국수를 먹고 여행도 하고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부터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귀에 아무 소리가 안 들렸다.
옆에서 사장님이 무어라 하는데 하나도 안 들린다.
입만 쳐다보고 눈치로 일을 하고 퇴근했다.
몇 시간을 그랬다.
며칠 동안 한 번씩 그러다 괜찮아졌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12월이 다 되어간다.
방을 얻어 엄마랑 나가서 살겠노라고 방을 알아보았다.
돈도 없고 너무 비싸고 해서 부천 쪽으로 나가보았다.
백운역에서 내려 전철역 근처 부동산에 들러 2층릉 얻었다.
방 하나 보증금 60만 원에 월 3만 원.
일 끝나면 맥주 한잔하고 전철 타고 퇴근한다.
집에 가면 엄마 혼자 밥해놓으시고 기다리신다.
그렇게 다시 셋방살이가 시작되었다.
집에 오면 심심하고 해서 무슨 취미를 하나 만들까 고민하다가
어항을 하나 사다가 물고기를 길러보기로 했다.
앙증맞은 붕어가 예뻤다.
엄마도 내가 없으면 붕어에게 밥도 주고 함께 커 가는 걸 즐겼었다.
병이 나면 어항 집 가서 약도 사다가 넣어주고
실증 나면 토종 민물고기도 잡아다가 길러보고 헸다.
옆 맥줏집 사장님이 항상 나를 참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어항 이야기가 나와서 크게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아시는 분이 유리 가계를 크게 하신다고 소개를 해주었다.
거기서 유리를 가로65 세로 40으로 가공을 해 주셨다.
집에 가져와 직접 조립식 앵글로 틀을 만들어 실리콘을 발라 어항이 완성되었다.
위에는 형광등을 달아 밤에는 불을 켜고.
며칠 동안 말려서 방 한쪽에 놓아 보았더니 그럴싸하게 어울렸다.
모래를 사다가 깔고 예쁜 붕어들을 넣어서 길렀다.
한 달에 한 번씩 일요일에는 교회 갔다 와서 모래를 꺼내어 씻고 청소를 하면 엄마는
일하고 일요일이라도 쉬지 이런다고 야단이셨다.
하긴 어항 모래를 꺼내어 씻고 청소하기 시작하면 두어 시간씩 걸리니깐.
** 1986년
( 간판 가게 개업 )
> face="굴림">6월 11일. 대방동 가게를 보러 갔다.
길동 4차선 도로 삼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데
보기에는 썩 좋은 자리는 아니다.
동네가 너무 썰렁하고 가게도 폭1.9m에 가로 약 5m 정도였다.
>간판집 하기엔 좀 어려운 구조다.
>고물상에서 벽돌로 쌓고 지붕은 합판으로 덮고 지어
손을 올리면 내 키에도 천장이 닿았다.
오래되어서 곧 주저앉을 거 같다.
(그때는 무허가 건물들이 많았다.)
할아버지가 혼자 텐트 가게를 하시는데 연세가 높으셔서
가게를 그만둔다고 하신다.
보증금도 없이 월세만 내면 된다고 한다.
한두 달만 할아버지가 텐트를 할 거니까
나보고 일당 다니느니 한번 해보라고 해서 알았다고 했다.
여기저기 일 있으면 일당 다니면서
시간이 나면 가서 작업 다이도 짜고 천장도 고치고
간판도 예쁘게 만들어 달았다.
그리고 6월 21일날 작은 형님이랑 작은 누나랑 가게에 오셔서
예배를 보았다.
이제 내가 처음으로 운영하는 가게를 얻었다.
신길동 가게 개업한 지가 벌써 7개월이 되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이 시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겠지.
선배랑 커피 한 잔.
조카 미숙, 정환이랑 사육신묘 데리고 나가서
한강 바람도 쐬어 주고 왔다.
열 살이 다 되어가는 미숙 이도 많이 컸다.
천호동 옥탑방에서 태어나 우는 아가가 시끄럽다고
집주인에게 쫓겨났던 때가 엌그제 같은데.
1월 25일 미숙이 조카를 데리고 신풍시장 가서
이만 원짜리 잠바를 한 벌 사 입혔다.
그리고 다음날 작은 형님과 미숙이랑 관악산 약수터 갔다.
하얀 눈이 온 산을 덮었다.
이렇게 겨울 산에도 올라가 보면 또 다른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
그 눈 덮인 산을 못 잊어 동생보고 가게 보라고 하고
미숙이 데리고 또 산에 왔다.
** 1991년
새해 졸업시즌이다.
조카 혜경이 졸업이라고 명동 데리고 나가
예쁜 백 하나 27.000원짜리 사 주었다.
어릴 때 삼촌 하며 따라다니더니 벌써
사회 첫발을 디딜 때가 되었다.
좋은 직장에 다니기를 빌어본다.
** 1993년
조카 미숙이가 많이 컸다.
천호동 옥탑방에서 태어나 여기저기 이사 다니며
나와 함께 놀러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중학교 1학년.
그런데 시골로 이사한다.
큰형님네 동네로 이사한다.
집은 마을 옆 조그만 산 뒤에 조립식 주택을 지었다.
많지 않은 돈으로 보조금을 보태어 가셨다.
나도 이런 산골에서 넓은 마당이 있는 이런 집에 살고 싶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예쁜 꽃이며 개와 토끼가 뛰어노는 그런 집.
언젠가 돈이 모이면 내려오리라 꿈을 꾸어보며.
큰 형님 내려가실 때 마음 아팠던 그런 기분이 오늘도 재연되었다.
형님, 형수, 미숙아 잘 가 !!!
시간이 나면 놀러 갈게 ㅠㅠ.
** 1995년
사람은 이 시간에도 태어나고 죽고 다치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같은 서울에서 살면서 막내 누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보여주기 싫은 것인지 집으로 초대는 안 하고 만나면
밖에서 차 한잔 하고 오기만 한다.
어떨 땐 감기가 들어 혼자 끙끙 앓고 일어나기도 하고
어떨 땐 연락이 한 달 정도 안 돼 너무 궁금하기도 했다.
이제는 자주 만나질 수 있겠다.
5월에 막내 누나가 수색역 근처에다 아가 놀이방을 한단다.
나 어릴 때 책도 사서 보내 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셨던 막내 누나가
이제는 조그만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 하나님 도와주세요.
항상 울면서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신 우리 작은 막내 누나를 도와주세요.
작은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 많은 관심을 하나님이 보여주세요..."
놀이방 상호를 " 앙떼떼 놀이방 " 으로 지었다.
앙떼떼란 프랑스어로는 " 앙떼떼ent t : 완고한, 고집센 " 란 뜻이란다.
도배하신 작은 형님과 도배를 해 드리고
앙증맞게 간판을 만들어 달아 드렸다.
이제 번창하고 잘되었으면 좋겠다.
** 1997년
어느 날 보험 아줌마가 오시더니 가족사항을 물어보신다.
아시면서도 확인차 물어보신다고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 누나 중매 한번 할까 해서..."
" 우리 누나 중매를요?..."
" 그래 사장님 보아하니 누나도 좋으실 것 같아서..."
" 하하하~~그래요 내가 좋아요?..."
" 그럼 사장님 성격 좋잖아.
원래 가족들도 성격이 따라가거든요..."
" 고맙습니다. 좋은 사람 소개해주세요 ㅎㅎㅎ"
" 좋은 사람이 있으니까 이야기를 하지요..."
혼자서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며 고생한
우리 누나 부탁한다고 했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중매가 성사되어 만나고 있다.
그리고 동아 생명이 통합되고 아주머니는 갈빗집을 하셨다.
나중에 우리 아들 재민이 백일에 아시는 분들과
그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잊었는데 선을 본다고 누나가 연락이 왔다.
그동안 가정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희생한 우리 막내 누나.
나에게도 어릴 적부터 보이지 않게
많은 힘을 주셨던 막내 누나.
내가 초등학교 때 "어깨동무" 란 책을 달달 마다
시골로 보내주셨던 누나.
하나님밖에 모르고 한 달에 한 번씩
우리 집에 오셔서 가족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보며 울면서 기도하던 작은 누나.
이제 모든 짐 내려놓고 좋은 신랑 만나
시집가서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