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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나서 집사람에게 처음 들은 충고가 ‘밥을 좀 천천히 잡수시라’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밥상을 차리고 돌아서 보니 벌써 내 밥그릇은 비어 있다’고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이런 내 식사 버릇인데, 2시간 반 걸리는데 주빈(主賓)으로 초대를 받았으니 욕이 저절로 나온 것도 자연스런 일이 아닌가 싶다.
CMB(벨기에의 국영 해운사)는 하나의 왕국이었다. 과거 한국의 KSC(해운공사)나 일본의 NYK[日本郵船]와 같은 것. 지금은 어느 나라 없이 국영기업는 거의 없어져 민간으로 되었다.
지금까지 같은 선주인 홍콩의 포츄나(Fortuna)사(社)의 ‘Eastern Unicorn'호가 용선되어 왔는데, 용량이 작다는 이유로 내가 승선하고 있던 ‘Eastern Summit’호가 교체 배정되어 아프리카 항로를 정기선(定期船)으로 뛰게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체제와 System이 적용된 셈이었다.
처음으로 CMB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기에 그곳 담당 육상직원들과 한끼 오찬(午餐)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소속 선박들의 선장 · 기관장들은 육상직원들의 부장(部長) 클래스의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거대한 빌딩 내에 마련된 여러 개의 구내 식당(Restaurant)은 직급별로 급수가 매겨져 있었다. 물론 이들 식당은 아무나 수시로 드나드는 곳도, 돈을 주고 사 먹는 곳도 아니다. 대외 고객들을 접대할 때만 이용하게 되어 있는 곳이다. 최고 경영자급, 이사(理事) 클래스, 부장급 등등이 별도로 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내부 장식도, 나오는 식사 종류도, 시중드는 서비스맨들의 유니폼도 달랐고 그들의 어께에 얹힌 금색 줄의 색깔도 달랐다. 부장급에는 파란색으로 꼬인 줄무늬로 되어 있다.
이들 각 급수별 식당 입구에는 미리 장소, 참석자, 시간, 메뉴 등등이 게시되어 있다. 일반 육상이나 해상직원들 가운데서도 이 식당에서 한 끼 오찬(午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공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서비스가 좋았다는 소리였다.
나와 같이 동승하기로 되어 있는 Supercargo(화물관리인) Mr. L. Husson은 이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 서른 전의 젊은 친구다. 미리 Capt. Cabin(선장실)을 찾아와 오래전부터 꼭 참석하고 싶었는데, ‘선장이 허락하면 참석이 가능하니 부탁합니다.’고 간청했다. ‘그래?’ 하고 부서장에게 앞으로 같이 일하자면 필요할 것 같으니 합석시키자고 했더니 선뜻 그러라고 있다. 이 녀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각 식당에는 따로 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시작 시간이 될 때까지 도착하는 대로 설치된 간의 Bar 같은 것으로 맥주 간단한 음료수 등을 마시며 아는 사람끼리 인사도 나누고 대화를 한다. 진토닉(Gin Tonic Cocktail)로 분위기를 잡아보았다. 이 시간은 마시는 것이 주가 아니고 아는 사람끼리의 대화가 주 내용이다. 나는 같이 간 기관장과 Mr. L. Husson 이외는 별로 아는 이가 없으니 좀 어색하기는 했다. 약간 안면이 있는 사람은 여기서 정식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주고 받기도 했다.
안내인의 지시에 따라 들어가 각자의 명패가 놓여 있어 찾아 앉으면 되는가 했더니 그것도 마음대로가 아니다. 가슴에 단 명찰을 보고 안내자가 일일이 안내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또 덥썩 앉으면 실례다. 의자 앞에 서면 의자를 밀어 넣어 줄 때 앉아야 한다. 우리네 식으로 하자면 진짜 제기랄이다. 어색하고 번거롭기 짝이 없다. 하기야 내 자신이 서양 예절을 모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으리라.
포도주부터 시작한다. 마치 군의장대(軍儀仗隊) 복장 차림을 한 서비스맨이 포도주병을 깨끗하고 하얀 보자기에 사서 주빈(主賓)인 내가 아닌 옆의 주재자(主宰者)인 운항부서장에게 가져가서 포도주병의 상표부터 보인다. 그가 고갤 끄덕이면 그의 잔에 포도주를 조금 따른다. 주재자가 한 모금 맛보고 다시 고갤 끄덕하면 그 다음은 주빈(主賓)부터 차례로 잔을 채워 나간다. 축배(toast) 하고 나서야 시작한다. 말은 전혀 없다. 그냥 제스처뿐이다.
한마디로 지겹고 감질나기 그지없다. 생선 한토막, 그저 둘둘 말아 젓가락으로 집으면 한 입도 돼지 않을 것을 몇 차례의 포크질로 생선 갈비살까지 발가 먹으면 다음 또 하나가…. 좌우지간 한 젓가락 한 숟갈이며 될 만큼의 양으로, 그것도 한참씩 뜸을 드린 다음에 가져 오니 감질나지 않을 수 없다.
요런거 하나씩을 각각 2-30분 동안 먹으라니! (빌려온 사진)
식사가 끝나고 마지막 코스에는 cigar(엽연초) 상자를 들고 와서는 집어란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을 아는 Mr. L. Husson이 내 옆구리를 집적하더니 한 개 집어 두었다 자기를 달라고 한다. 엉큼한 넘 같으니라구…. 얼른 눈치를 긁고 ‘2개 가져도 돼요?’ 했더니 ‘No problem’이란다.
미리 짜여진 각본인 듯 내 옆에 초로의 여성이 앉았다. 어찌보면 내 큰 누나, 혹은 막내 숙모 뻘 같은 또래인데 풍기는 얄싹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시작으로 저 아래쪽까지 뻗어간다.
국영(國營) 선박회사에서 연료유(燃料油)만 30년간 취급했다는 아짐씨의 능수능란한 제스처가 일품이었다. 선박 연료유에 대해선 도사(道士)였다. 처음부터 연료유 가지고는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가 강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많이들 그랬듯이 아마도 자국(自國)에서도 선박연료류 유출이 많다는 뜻이리라. 특히 이곳과 먼 아프리카의 항구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일이기도 한 일이다.
마칠 때까지 3시간 남짓한 식사시간은 우리에겐 쌍말로 지랄 같이 긴 시간이었다. 분명히 가짓수로는 열 가지는 더 나온 걸로 기억되는데 뭘 먹은 것 같지도 않고 배는 하나도 부르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오찬 이전에 분위기, 어울린 사람들 등등 복합적인 사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우리의 ‘빨리빨리’ 심성이 작동한 탓도 있었다.
“잘 먹었소?”. “묵을 게 뭐 있던교? 지어버 죽을 뻔 했오.” 마치고 나오면서 기관장과 나눈 얘기였다.
우리네 만찬은 모두 벌려놓고 각자 갖다 먹으라는데~~(빌려온 사진)
해외여행의 자유화 이후 홍콩의 쩐바오촨팅(珍寶餐廳 : 점보식당이라고 했음). 이곳은 선박을 고급 식당으로 개조하여 바다 위에 띄워 두고 거룻배로 왕래했는데 홍콩에서 관광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지금은 중국홍콩특별행정구이지만 이전에 영국의 식민지 시절이다. 동남아 여행코스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낮에 보면 마치 빈민가처럼 너덜너덜해 보이지만 밤이 되면 휘황찬란한 조명과 네온사인으로 별천지였다. 별 볼 일 없어 감추었으면 하는 지저분한 것들을 용케 알고, 어둠이 감싸고 덮어주는 역할이 크게 한몫하는 것이다. 6~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둥근 테이블 가운데는 샤브샤브 장치가 잘 되어 있었다. 특히 한국 여행객의 인기를 끈 것은 왕새우 샤브샤브 요리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먹기가 어려웠던 왕새우가 인근 동남아시아 얕은 수심의 바다에서 많이 잡혔던 것이었다. 얼음을 섞어 수북이 쌓아두고 요즘말로 ‘무한리필’이었다. 그곳 지배인의 말에 의하면 한국의 체육대학생들이 단체여행을 왔다가 한 사람이 최고 87마리까지 먹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24마리 먹고 나니 더 이상 넘어가질 않았었는데~~.
또 하나는 철판요리였다. 재료는 두루두루 잘 갖춰져 있다. 육류, 생선, 어패류부터 별별 야채, 양념에 이르기까지, 어느 아줌마는 ‘만고강산’이라 했었다. 자신이 골라 담아 가져가면 쉐이프들은 넓직한 철판 위에다 붓고는 마치 예술 같이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볶아만 준다.
함께 간 아줌마끼리 ‘니꺼는 맛이 있는데 나는 와 이러노?’ 했다. 원인은 재료 선택이었다. 간장이나 조미료나 하나 넣고 안 넣고가 결정적일 수도 있었다. 그 보다도 큰 문제는 천천히 맛을 보지도 않고 ‘간장’이란 표식만 보고 그냥 넣은 탓, 소위 한국인의 ‘빨리빨리’ 성격탓에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아예 손도 안 대며, 아는 음식은 맛도 보지 않고 퍼담는 성격 탓이었다. 같은 간장도 지역에 따라 맛의 차이가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음대로 실컷 먹도록 해도 그게 말이 그렇지 쉽지 않다. 양(量)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나가지 말래도 배부르면 저절로 밖으로 나온다. 그 시간이 길어도 30분이면 철철했다. 이때 ‘갑시다’ 하고 호르라기를 불면 뒤처지는 사람 없이 싹 따라 나선다.
다른 쪽 중국 사람들 테이블을 보면 식탁 한쪽에 마작(麻雀)판을 펴 놓고 한 짱 하고는 먹고 마시고 얘기하면서 앉았다 하면 그날 저녁 마칠 때까지랬다. 그러니 한국 고객이라면 쌍수(雙手)로 ‘화안닝 화안닝[欢迎 欢迎]’ 이었다. 한국인이 일어서기만 하면 이내 테이블 보만 둘둘말아 걷어내고는 새것으로 펴는 순식간에 새로운 팀의 고객을 맞이할 수 있어 이용률이 엄청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 ‘빨리빨리’ 심성이 여기에서는 쌍수로 환영받는 곳이다.
제법 오래전의 일이지만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란 문화인류학자가 구미인(歐美人)들의 평균 저녁식사 시간을 비교해 놓은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미국인들이 2시간, 프랑스 사람들은 3시간,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3시간 반 안팎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한국사람들은 개강 15~20분 정도가 보통이라 본다면 10~20배를 빨리 먹는 셈이다.
언젠가 우리나라 교통안전진흥공단이 자동차 사고를 발표했을 때 자동차 1만대 당 교통사고 건수를 1천4백17건으로 세계 제일이란 걸 보고 서구(西歐) 여러 나라들과 비교해보니 식사 시간과 얼추 비슷한 걸 보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구 소련여행이 자유로워 졌을 때 ‘미스터 빨리빨리’가 그곳에서 한국 사람을 통칭하는 별명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의 이 ‘빨리빨리병(病)’이 형성된 복합적 이유에는 옛날부터 우리의 기후, 풍토 등 자연환경 탓도 있다. 유럽의 경우와 달라 우리 한국의 벼농사는 수확의 적기를 조금만 놓쳐도 찬 이슬이나 서리 때문에 냉해를 입는다. 연중 변하는 기후에 쫓겨 열흘 안팎의 시한 동안에 뭔가를 하지 않으면 감수(減收)나 한해의 농사가 실농(失農)을 하는 시한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매사에 있어 서양사람들처럼 느긋하거나 기다리지 못하고 빨리빨리 서둘러 하는 심성이 체질화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예부터 이에 대한 우스개 일화도 많다. ‘장가간 날 첫날밤을 지나고 나더니, 아이 안 낳는다고 신부를 개 패듯 후려 팼다’는 것도 얘기도 그 중의 하나다.
내 자신부터 그랬다. 어렸을 때 식구 수는 많고 먹을 것은 늘 부족했으니 좀 꾸물럭 데다간 김치 한 토막도 얻어 먹기도 힘든 시기였다. 아침 밥상에 둘러앉으면 전쟁이었다. 아우 중 한 녀석은 양손을 쓸 수 있어 한 손에 숟가락, 다른 손에 젓가락을 들고 미리 김치 토막을 집어 들고 있어 항상 아랫 녀석들의 불만을 만들어 냈다.
한창 시절인 중고등학교 때는 기차통학 열차시간 때문에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퍼넣지 않으면 기차를 탈 수 없었다. 이런 습성이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몸에 베인 일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먹는 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다는 생각이다. 먹는 것은 빈부의 차이를 떠나서 우리에게는 생존의 중요하고 절박한 수단으로써 인식되는 데 비해, 서구에서는 가족은 물론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담소를 섞어가며 우의와 친선으로 인간관계를, 먹는 것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빨리빨리병’을 고쳐야겠다고 작심한지는 오래됐고 숱하게 애도 섰지만 여의치 못했는데, 나이들어 보니 자연히 입맛도 밥맛도 떨어지고 치근(齒根)에 힘이 줄어드니 빨리 먹으려 해도 안 된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그게 맞다는 생각이다. 저절로 고쳐진다. 고얀지고~~, 헐헐이다.
첫댓글 <빨리 빨리 습성>을 유형별로 엮어 주어서 고개 끄덕이게 합니다.
마무리 역시 썩 맘에 듭니다요.ㅎ
맛깔스런 글 솜씨에 늘 놀라고 있습니다.
바람새는 행동은 빠르지만 식탁에서는 느림보.^^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빨리빨리 중 식사를 빨리빨리 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실천이 잘 됩니다.
특히 통학이라는 것을 하면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퍼 넣는다는 느낌으로 채워야 다음 행동이 전개되어 습관이
되어 고치기 힘듭니다. 입대를 진해 병영에서 했는데 입대 후 몇 주 째부터 '식사 시작' 구령이 떨어지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라는 복창과 함께 정신없이 먹다가 절반도 먹지 않았는데 구대장이 '식사 끝' , '단독무장으로 연병장에 선착순 집합' 구령이 떨어지면
먹던 밥을 치우고 내무실로 뛰어 나가서 M1소총을 들고 연병장으로.. 어정거리다 선착순 줄에서 끝번에 가까우면
야구 방망이로 얻어 맞고.. 이런 훈련이 계속되니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퍼 넣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때는 젊었으니
적응이 되었지만 .. 나이가 들고 보니 만성 식도염과 위궤양 증세가 도져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들, 특히 서구인들과 식사를 하다 보면 그들은 식사를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좀 바뀌어야 하고.. 빨리 먹는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놈의 '빨리빨리' 병을 국가에서 가르친 셈이되네요. 우리도 그랬으니까요.
쪼께 더 있으면 자절로 나이가 고쳐줍니다. ㅎㅎㅎ 건강하세요.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