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가진 것은, 평균고도 4백 미터쯤의 전북 동북부산악지대 진안에서 살다가, 불과 20킬로미터만 서쪽으로 이동하면 완주군 고산면 만경평야가 시작되는 저지대를 만나는 것으로 쉽게 확인된다.
1. 굽은 강 바로 펴기, 기타.
만경강은 곡류(曲流)가 심했고 주변 땅은 고도가 5미터에 불과한 낮은 지역으로 농사가 어려운 곳이었단다. 원래 강물이 적고 바다와 높낮이 차이가 거의 없는 만경강이니 하구를 통해 올라오는 서해의 밀물에 막혀 심할 때는 삼례 앞까지도 주변 땅이 물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낙동강 하구의 김해평야를 연상하면 되겠다.
그렇게 넓기만 하고 농사짓기는 힘들었던 징게맹갱뜰을 오늘의 곡창지대로 만든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조선총독부였다. 구불거리는 강을 직류하천으로 만들고 둑을 높이 쌓아 강물(바닷물?)이 논밭으로 넘치지 않게 하며, 넓은 들은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리했다. 또 역류를 막는 수문(水門)과 관개수로를 수없이 만들어 이른바 수리안전답으로 변모시킨 것.
그 당시에 건설되었던 수문들은 지금도 여전히 현역으로 가동 중이다.
또, 적은 강물을 보충하려고 상류에 대아저수지를 지었고, 그걸로도 모자라 경천면에 경천저수지를 또 만들어 농사철에 집중적으로 흘려보냈다.
만경강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남쪽 동진강에도, 섬진강댐(옥정호 또는 운암호)을 쌓아 남쪽으로 흘러가는 섬진강물을 정읍 칠보면으로 유로를 바꾸어 서쪽으로 흘려 모자라는 유량을 벌충했다.
2. 곡류하천 흔적 찾기.
만경강이 구불거리며 흘렀던 흔적은 도처에 남아있다. 눈에 띄는 곳 몇 군데만 찾아보자면…
익산 춘포(春浦)면, 옛 이름은 봄개. 그래서 춘포면 소재지 동북쪽에 있는 산이 봉개산. ‘봉개’는 ‘봄개’의 와음(訛音)일 것이다. 만경강 하구를 통해 여기까지 배가 올라왔다는 것. 이곳도 곡류의 흔적이 남아 춘포초등학교 뒤쪽에 옛 강의 줄기가 보인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넓은 터, 큰 바닥’이라는 뜻으로 ‘오오바손[大場村]’이라 부른 것이 아직도 그 지명을 딴 상호가 많이 남아있는 유래가 되었다. ‘대장미용실, 대장교회’ 등.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던 왜인 호소카와, 그의 집도 아직 있다. 우리가 걸을 강둑길에서 보인다.
춘포역은 폐역이다. 최근에 이곳을 역사문화박물관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작업이 있었으나 역전 도로를 깔끔하게 포장한 것 정도 말고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 듯. 폐쇄된 춘포역사 뒤로는 높은 고가철도가 지어져 개통을 기다리고 있다.
곡류의 흔적은 또 있다.
춘포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3킬로미터, 비교적 넓은 소하천을 사이에 두고 신복·용강마을(석탄동)이 마주 보고 선 곳이 나타난다. 아래위가 막힌 반달 모양의 소하천이 원래의 만경강 유로였다.
신복·용강마을을 만나기 전에 있는 간리(間里)마을은 ‘사잇뜸, 샛뜸’이 아니었을까.
석탄동을 지나 1.5킬로미터 하류로 내려가면 유천마을인데 이곳은 속칭지명이 아예 ‘옛뚝’이다. 원래의 만경강 둑이 있던 곳이라는 뜻이겠다. 크게 휘돌아 흘렀던 강줄기가 지금도 마을 앞에 있다.
도로명 ‘유천고제(古堤)길’도 옛 뚝길을 일컫는 말이다.
목천포천이 합수하는 곳이어서 강물의 역류를 막으려는 수문이 집중적으로 서너 군데나 있다.
동네이름 ‘석탄(石灘)동’으로부터는 어떤 상태를 유추할 수 있을까.
'강바닥에 암반이 많이 드러나 있어 물이 얕은' 구역?
3. 강물 흐름 바꾸기, 천하의 대역사.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 다른 강으로 보내는 일은 참으로 대단한 역사(役事)라 할밖에 없다. 운암호로 섬진강 물을 막아 서쪽 동진강으로 흘려보낸 것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금강의 물을 막아 용담호를 만들고 그 물을 역시 서쪽 만경강으로 흘려보낸 것은 1996년이다.
그런데 이 두 강의 유로를 바꾸어 서쪽 평야지대를 곡창으로 만드는 일은 생전의 강증산(증산교 창시자)이 1900년대 초에 이미 예언했었다 한다.
“이쪽(진안고원 동쪽)의 강물(금강과 섬진강)은 흔하니 저쪽(서쪽)으로 조금 나누어 준다 하여 농사에 큰 지장은 없겠고, 서쪽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할테니…”라 말했다는 것이다.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은 증산 사후의 일이지만 증산을 상제(上帝)로 숭앙하는 사람들은 “상제님이 사후에도 그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여 오늘의 결과가 이루어진 것”이라 믿는다. “그것도 왜인들의 손으로 실천하게 만든 것이 무엇보다 기막힌 일이 아니겠느냐”고 감탄한다.
용담호를 완성한 것은 2000년대의 일이지만, 사실은 이 역시 일제강점기에 이미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발전소 설치를 주목적으로 했는지 「조선전력주식회사」가 사업주체였단다. 용담군 농민들과의 협의가 여러 차례 결렬되는 시행착오와 해방·전쟁 등으로 이 계획은 계속 연기되었었다.
이 모든 역사(役事)가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의 결과라… ‘믿거나 말거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참고로, 증산 강일순은 정읍 고부에서 태어났고 모악산을 근거지로 포교활동을 펼쳤다. 그의 주활동지가 모악산 아래 김제 금산면 금평저수지 옆에 있는 동곡약방(銅谷藥房)이었다.
4. 다시 만경강으로 돌아오자.
이야기가 상류↔하류로 왔다 갔다 해서 송구스럽지만(^^),
상류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5. 곡선의 미학.
대아저수지는 1920년대에 조성했다. 1980년대에 와서 저수량을 늘리기 위해 최초 댐 위치에서 400미터 쯤 아래에 더 높은 둑을 새로이 쌓았는데, 원래의 둑을 그냥 두고 담수했다. 일본강점기에 쌓은 원래의 둑은 곡선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물이 좀 빠지면 그 모습을 볼 수 있을텐데…
위성(衛星)에서 곧바로 아래를 향해 사진을 찍는다면 그 곡선의 형태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지상에서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번 주(4월 13일)에 우리 일행이 바로 대아댐을 탐방하게 될텐데, 며칠 사이에 물이 좀 많이 빠져서 곡선 댐을 볼 수 있을지?
‘곡선 댐’ 이야기로 또 가지를 치게 된다.
저 위에서 말한 운암호 얘기다. ‘옥정호’로 이름이 바뀌었고 댐 이름은 섬진강댐인 바로 그 운암호.
일제 때 처음 이 댐이 건설될 때에는 곡선이었다. 작년 겨울 「대장금 마실길」을 촬영할 때 현지(황토마을) 주민들에게서 그 사실을 확인했고, 옛 모습을 찍은 사진을 얻어오기도 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댐의 곡선은, 솔직히, 아름다웠다.
토목공학적으로 곡선이 직선보다 더 튼튼하거나 안전한 것인지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알 수 없지만, 시각적으로는 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아니면…
미국 테네시강에 지은 몇 개의 댐 중 하나가 곡선이었으며 1935년에 완공된 라스베이거스의 후버(Hoover)댐도 곡선이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댐을 곡선으로 짓는 것이 세계적인 유행이었을까?
세계열강과 나란히 토건 수준을 자랑하고 싶었을 일본정부가 ‘식민지 조선 땅’에 온갖 실험을 다 하면서 기술을 연마하고 축적하는 기회로 삼았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 후에 우리 정부가 건설한 댐들은 웬일인지 모두 직선으로만 되어 있고 과거의 아름다운 곡선을 보기는 힘들어졌다.
자칫 “그때가 좋았다”로 흐를까봐 위험 수위를 넘지 않기 위하여 오늘은 이쯤에서 스톱해야겠다.
(이번에도 사진을 올리지 않는 것은 현장에서 직접 보는 즐거움을 미리 빼앗지 않기 위함이오니 양해 바랍니다. 많이 참석하시면 이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각자 확인하실 수 있사오니 그리 아십시오.)
첫댓글 꽤 오래살았던 익산인데도 활동반경에 없어 잘 몰랐던 춘포...
map과 로드뷰 열어놓고 감사님의 글을 읽으니 미리보기의 재미가 시간가는줄 모르게 합니다
이번주 토욜 확인 들어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겁납니다... 살살 해주세용 ~
고맙습니다~^^*
요즘 통 못보겠네요?
@최태영 네.. 농사 시작이라 정신없이 바쁜척 합니다..ㅋ
마무리 되면 즉시 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