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군 영해면 괴시마을 & 목은 이색
동해한 바닷가에 고이 간직된 전통마을!
전통한옥의 지붕선만 봐도 다가가고 싶은 곳 괴시마을!
그곳에서 태어난 목은
이색!
이번에 소개할 곳은 영덕의 전통문화의 향기가 그윽한 괴시마을과 목은 이색이다.
지난번 호 「영덕 블루로드 C코스 목은(牧隱) 사색의 길」에서 간략하게 소개되었으나
조금 더해서 괴시마을이 위치한 영해면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목은 이색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호에는 전통한옥이 즐비한 괴시마을을 단순 문화재 답사하기, 공부하기가
아닌 전통 문화에 대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석구석 살펴보고자 하오니 기대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영해 전경>
괴시마을이 자리잡은 곳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寧海)면이다. 영덕군 하면 “영덕대게의 고장”으로 전국에 잘 알려졌지만
“영해” 하면 6~70세 이상의 어르신들은 아직까지 알고계시지만 현재 영덕군을 찾아오시는 많은 관광객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지역의 젊은 세대들도 잘 몰라 이번 기회에 영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영해면은 북쪽으로는 울진의 평해, 남쪽으로는 포항의 흥해를 합쳐 경북 동해안의 삼해(海)라 불리우는 지역으로 모두
드넓고 비옥한 들이 있는데, 이러한 경제적 넉넉함을 밑바탕으로 괴시마을에 전통 한옥들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는 괴시마을 처럼 집단적으로 한옥이 남아있는 마을, 나라골 보리말로 알려진 「인량마을」과 세 성씨가 하나의
마을을 이룬 「원구마을」이 각각의 고유의 특색을 지니고 있어 괴시마을을 답사한 후 함께 둘러봐도 좋을 듯하다.
경북 동해안에 이처럼 반촌이 형성된 것은 지리적으로 동해바다와 영해평야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물산과 퇴계학통
계승하신 갈암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한 문화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일찍이 영해는
안동의 유교문화를 쉽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소안동”이라 자처할 만큼 역사적으로 자부심이 대단한 지역이다.
또한 영해면은 경북 동해안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영해부(寧海府)로 빈번하게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주위의 여러 군현을 거느렸는데 영덕군을 포함하여 울진 평해, 청송, 영양,
포항 청하까지 아우르는 지역을 관장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영해는 항일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한 곳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강제로 영덕군 행정구역
내 영해면으로 통폐합시켜 우리지역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단절되는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 당시 대표적인 평민의병장 신돌석장군, 1919년 3・18 독립 만세운동을 비롯하여 수많은 항일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이 이백여명이 넘어 전국 군 단위에서 가장 많은 유공자를 배출한 지역으로 지금까지도 주민들의 자긍심이
매우 높은 고장이다.
이제야 영해의 진면목을 좀 이해하시겠죠?
과거의 찬란한 “영해”의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영덕군을 영해군으로?
그러면
영덕대게 브랜드는?
너무 늦은 감이 있어 이것저것 아쉽네요!
<괴시마을 전경>
괴시마을은 남북방향의 산세가 동해를 가로막고 있으며, 남동쪽의 망일봉(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자연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 가옥들이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기본 배치로 하여
한옥을 지었기 때문에 오래된 한옥의 경우 대부분 서남향(西南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마을 내력은 고려말에 함창 김씨(咸昌 金氏)가 마을에 처음 정착하였고, 그 후 조선 명종( 1545~1567) 년간에는
수안 김씨(遂安 金氏)와 영해 신씨(寧海 申氏), 신안 주씨(新安 朱氏) 등이 거주하다가, 1630년(인조 8)에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가 처음 거주하였으며, 그 후 다른 성씨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영양 남씨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영양남씨 괴시파종택>
마을에는 영양남씨 괴시파종택(경북 민속자료 제75호)을 중심으로 30여채의 한옥들이 밀집하고 있으며,
중에 口자형 가옥의 분포 수가 많은데, 경북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이 15개소나 산재하고 있다.
“괴시(槐市)”라는 마을 명칭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濠池村)이라 부르다가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년)이 문장으로써 원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구양현(歐陽玄)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라 고쳐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목은 이색 상>
이색 선생은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의 절조를 지켜 삼은(三隱) 중 한분이고,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문장으로는 이제현과 쌍벽을 이루었을 정도로 이름을 떨친 대학자
이자 문장가로 조선 성리학의 주류인 권근, 길재, 이숭인, 정도전, 김종직, 변계량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목은과 괴시마을의 인연은 그의 부친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 선생이 시작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곳에 오셨는
지는 당시 고려말 영해가 3대에 걸쳐 문하시중을 배출한 영해 박씨의 박세통, 박홍무, 박감을 비롯하여 영해부사로 온
윤신걸, 사록으로 온 역동 우탁, 백문보 등 많은 유학자들이 활동하던 지역임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다.
국문학사에 나오는 가전체 소설 「죽부인전」의 저자로 알려진 이곡이 한산에서 학문 교류를 위하여 이곳 영해에 이르러
머무를 때 당시 영해향교의 대현 김택의 사위가 되어 이색을 1328년(고려 충숙왕 15)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호지마을
무가정(無價亭)에서 낳았다. 현재의 이 터에는 목은이색 기념관이 세워져 있어 목은 선생의 생애과 업적, 관련 유물
그리고 관어대소부 등 선생이 지은 시가 전시되어 있다.
<목은 이색 기념관> <기념관 내부 1> <기념관 내부 2>
그리고 괴시마을 이름에 관한 구양현과 목은과의 재미난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선생이 21세 때 중국의 학사
구양현(歐陽玄)이 그를 변방 사람이라 하여 조롱했는데 이에 대한 목은이 화답을 한 것이다.
獸蹄鳥迹之道 交於中國 / 犬吠鷄鳴之聲 達于四境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왕래하는냐?” 하자 목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개 짓고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오고 있다.” 고하였다. 이는 목은을 짐승과 새로 비유하였으나 중국 또한 개나 닭으로 비유한
기막힌 대답이였다.
持盃入海 知多海 / 坐井觀天
日小天
구양현은 이어서 “잔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니, 바다가 큰 줄 알겠더라.” 하자 목은은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늘을 작다고 하는구나.” 하고 화답하니 구양현은 크게 감탄하여 그날 이후 목은과 학문을 논하는 벗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영덕 영해의 지역 역사를 읽으셨다면, 이제부터는 이곳 영해에 한발 다가오셔서 동해의 청정하고 시원한
기분을 느끼고, 넓은 들과 온난한 기후가 만들어주는 온갖 산해진미의 맛을 보시려 꼭! 한번 영해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