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1)
번역 김재성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과 조교수)
인간의 가장 깊은 부분은 표현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돌아볼 때 내 외적 경험과 내적 경험의 몇 가지 개요만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1장 : 소년기
나는 1878년 2월 19일, 독일 중심부에 있는 유명하고 아름다운 휴양지인 비스바덴에서 태어났습니다.
내 본명은 안톤 발테르 플로루스 괴트 Anton Walther Florus Gueth이고, 내 수호 성인은 은둔자 안토니우스Antonius였습니다. 우리 아버지 안톤 괴트 Anton Gueth는 교사였으며 나중에는 비스바덴 시립 김나지움Gymnasium의 교장이자 추밀원 의원이었습
니다. 그는 항겐메일리겐에서 태어났으며 지주이자 시장 안톤 괴트Anton Gueth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파울라Paula였습니다. 그녀는 쿠르헤센 Kurhessen 지방의 헤르스펠트Hersfeld 마을에서 온 지방 행정관 아우팔트Auffahrt의 딸이었습니다.
나는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가족 중 넷째이자 막내였습니다. 변호사인 큰형 아르민 Armin은 1938년에 사망했습니다. 나보다 4살 많은 다른 형 오스왈트Oswald는 공학자였으며 한동안 워싱턴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
했지만 대학에서 교수직을 사임한 후 독일에 장기 또는 단기로 자주 왔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가 살았던 비스바덴에 집이 있었습니다. 내 누나 리아Ria도 비스바덴에 살았고 지역 김나지움 교장인 시만스키Symanski 박사와 결혼했습니다.
우리가 다소 두려워했던 아버지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공정했습니다. 가끔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그는 매우 공감적이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졌습니다. 가족의 자녀들 중에서 그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나였던 것같습니다. 매일 저녁, 그는 숲으로 산책을 갔습니다. 때로는 고도로 학식 있는 수학 및 물리학 교사나 의사와 함께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혼자 가곤 했습니다.
만약 그가 산책을 할 때 동료가 있었다면,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산책이 동료를 가짐으로써 내적 자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잃을 것이라고 말할 것 입니다. 나는 고독을 사랑하는 특성을 아버지와 공유했습니다. 송아지들의 눈들이 아름답다고는 그의 말에서도 그의 감성은 드러납니다. 그는 분명히 이 동물들의 눈에서 한없이 온화하고 어린애 같은 표정을 언
급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후기 저술에서 나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던 짧은 에피소드 하나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 학교에서 수학 수업에서 내가 무엇을배웠는지 물으셨고, 나는 우리가 배우고 있는 특정 공식에 대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공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에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 자신의 명료한 상상력과 이해력을 발전시키려는 이 호소는 내 성격에 매우 강한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모든 고정관념을 포기하고 공식, 슬로건, 공허한 개념에 대한 모든 집착을 없애고 생생한 그림과 모든 것에 대한 명확한 개요를 얻도록합니다. 내 번역과 다른 작업에서 내가 이것을 얼마나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독자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스위스 로잔에서, 한 번은 기독교 잡지의 기자로부터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간결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먼저 ‘신’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주세요.” 훨씬 후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인도에서 인턴 생활을할 때, 한 독일인은 내가 ‘영혼’을 믿느냐는 또 다른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습니다. 확실히 나는 인간 안에서 작용하는 선의 법칙으로 이해된다면 신을 믿었고, 그것이 무의식적인 삶의 과정을 의미한다면 ‘영혼’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러한 용어의 명료화를 주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토론에서 서로를 오해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자체가 아니라 의미와 내용입니다.
단어를 명료하지 않게 사용하면, 두 사람이 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단어를 사용하거나 같은 단어를사용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명확히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 채 대화가 끝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우리 어머니는 온화하고 이해심이 많았습니다. 때때로 그녀는 우리 아버지의 성미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했습니다. 그녀는 젊었을 때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고, 나이들어서도 당당한 인물이었습니다.
카셀Kassel에서 기숙 학교를 다니는 동안 어머니는왕립 궁정 극장Royal Court Theatre의 오케스트라 감독인 라이스Reiss 아래에서 피아노와 노래를 공부했습니다. 그녀는 리차드 바그너의 절친한 친구인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왕이 바트 키싱엔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그녀를 무도회에 초대했다고 우리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우리 아버지와 결혼한 이유를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엄격하고, 그때도 꽤 질투심이 많은 성격이었고, 그래서 그녀가 다른 남자들 앞에서 더 이상 노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구애하는 다소 엉뚱한 사촌을 외면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탈리아의 공주와 결혼하여 슈타이어마르크의 포니클 성에 정착했습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지방 행정관인 그녀의 아버지는 음식을 요구하기 위해 그의 집 앞에 모인 군중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마을은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헤센의 황태자가 프로이센과의 전쟁 중 카셀에서 포로 생활을 했을 때 할아버지가 그를 풀어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암 수술 이틀 후인 1913년에 정말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나의 누나와 함께 스위스 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4년 후인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인 1918년에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녀는 의사의 과실로 사망했습니다.
유럽에서 나의 교육은 이랬습니다. 나는 1884년부터 1888년까지 중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 다음 1888년부터 1896년까지 코니글리히Konigliche 왕립 김나지움을 다녔습니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나는 음악 이론과 작곡, 바이올린, 피아노, 비올라, 클라리넷에 대한 개인 교습을 받았습니다. 1889년부터 1900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의 호흐세Hoch'sches 고급 음악 아카데미에서 음악 이론과 작곡을 공부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작곡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의 음악원에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은 행복했고 아무 병도 없었습니다. 이미 10살이 되기 전에 영적인 삶에 완전히 헌신하려는 열망이 내 안에 일어났습니다. 나는 심지어 “원주민”을 개종시키기 위해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고 그곳에서 순교자의 죽음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로 자랐기 때문에 사제에게서 받은 가톨릭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 “가까운 친척의 죽음, 특히 천국에 확실하게 갈 어린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참된 믿음이 없다.”말하곤
했습니다. 내 조숙한 시절의 발언이 논리적으로 상당히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론상으로만 가톨릭 신자였지 실제로는 그렇지않았습니다. 그의 일상은 1년에 단 한 번, 보통 밤 11시 30분에 소위 “게으름뱅이의 미사”라고 불리는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자연, 숲 속의 고독, 종교적 철학적 사고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나는 특히 신의 본성, 별이 총총한 밤하늘의 광활함, 모든 생명체의 형제애,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나의 큰 소망은 은둔자나 수도사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수도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때 교회에 서서 세상의 무상함과 허영심에 대해 설교하고,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확신하는 내 말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때 보석과 다른 장신구를 벗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나는 당시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형 아르민이 수도사가 되기를 남몰래 바랐고, 실제로 법학을 마치기 얼마 전에 그는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소 성급한 계획을 포기했습니다. 나 자신은 점점 더 종교적으로 되었지만 동시에 모든 외적인 의식주의를 점점 더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교회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고, 성수를 받지도 않았으며, 공공장소에서 성호를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또한 “내 탓이오(mea culpa)”라고 말하면서 내 가슴을 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한편 한동안 나는 아무도 없을 때 저녁마다 교회에 가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라>는 책에 몰두했습니다. 내가 12세인가 13세 때 첫 영성체 때 나의 종교 교사였던 베데베르Wedewer로부터 받은 그 책은 항상 내 코트 주머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숲의 고독에 대한 매력은 내 평생 동안 실처럼 꿰뚫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내 섬의 숲 속에 홀로 살고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