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종 격투기가 인기가 있던데 1970년대에 이종격투기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안토니오 이노키죠. 이 양반 국회의원까지 하고 북한에 프로 레슬링 시합을 하는 등 바쁩니다. 요즘 프라이드 F/C로 한창 잘 나가고 있던데 선수들 귀싸대기 때리는 걸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노키한테 맞고 시합하면 이긴다는 미신이 있어서 자청해서 때려 달란다는군요.
원래 브라질 태생으로 일본으로 역 이민을 온 케이스인데 안토니오라는 이름도 브라질에서 지어진 거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리키도잔(力道山) 문하의 동문이자 라이벌인 자이언트 바바, 오오키 긴따로(김일, 金一) 등을 제치고 일본 레슬링계를 평정하고 심심해지자 뭐 돈 되는 게 없을까 궁리를 합니다. 원래 사업가 기질이 있는 양반이니까요.
그래서 생각해 낸 회심의 카드가 무하마드 알리였습니다. 복싱과 레슬링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누구나 한 번은 가졌을 궁금증을 흥행과 연결한 것이지요. 1976년 여름,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600만 불을 주고 알리를 동경으로 모셔와 15라운드 경기를 가집니다.
여기서 유명한 알리-이노키 자세란 게 나오죠. 이노키는 누워있고 알리는 아프리카 출신답게 주위를 간들간들 돌고... 로프터치에 의한 이스케이프를 인정해 알리는 이노키키가 잡기만 하면 로프를 붙잡고 버텨 이노키는 불리한 시합을 했습니다.
시합 결과는 다 아시는 대로이고 이 경기에서 알리는 펀치 여섯 개를 날리고 600만 불을 쓸어 담았죠. 멍청한 일본 놈들... 이 시합을 추진한 이노키는 막대한 부채를 지게 되었는데 빚을 갚기 위해 계속 이종시합을 하게 되지만 알리와 싸웠다는 사실자체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니 본전은 건진 셈입니다.
경기를 마친 알리는 그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던 이준구 사범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합니다. 일개 복서에게 카 퍼레이드를 하는 등 거의 국빈급 예우를 해서 말이 많았고 TV에 나왔을 때 그의 품에 안긴 여자 연예인이 징계를 받는 등 시끄러웠습니다.
말도 잘 하더군요. 박 대통령은 great, great ,great...하다고 치켜 세우고 박수를 받고 "이노키는 매춘부다. 누워서 돈을 버니까... 지금까지 권투해서 5천만 불을 벌었는데 4천만 불을 미국정부가 세금으로 강탈해 갔다" 등등.
이노키의 다음 상대는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월렘 루스카였습니다. 루스카는 도복 입고 이노키는 홀랑 벗고 하는데도 잡히기만 하면 이노키가 링 바닥에 패대기 쳐지고 결국 꺽기로 이노키가 이겼지만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반면 일본의 유도가들은 "거 봐.."하며 유도의 강함을 은근히 자랑했지요.
그 다음엔 세계 프로 가라데 챔피언인 몬스터 맨이라는 사람과 싸웁니다. 프로 가라데란 게 있나 했는데 권투 장갑을 끼고 발에도 발등을 스폰지 같은 걸로 감싼 신발을 신고 하더군요. 이노키가 역시 꺽기로 승. 그 후 몬스터 맨은 사카구치를 KO시키고 이노키에 재 도전하지만 역시 KO 패합니다.
가장 재미있었던 경기는 얼간이 복서 처크 웨프너와의 시합이었습니다. 알리한테 도전했다가 KO패 한 적도 있는 대머리에 배불뚝이 복서지요. 실베스터 스탤론이 웨프너를 모델로 영화 록키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 시합은 역할이 뒤바뀐 시합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게... 떨어져 타격전으로 가면 이노키가 두들겨 패고, 넘어져 엉기면 이노키가 밑에 깔려 고전하고... 웨프너란 놈, 어찌나 뚝심이 센지 나중에는 누가 복서이고 누가 레슬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습니다. 이노키가 허리꺽기로 승. 웨프너는 시합 때 코피 흘리는 걸로 유명한데 이 시합에서는 용케 코피는 안 터졌습니다.
이렇게 시합을 계속하는데 드디어 최배달의 극진 가라데가 거론됩니다. 극진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지요. “이노키는 지금까지 보통 사람들의 눈은 속여 왔지만 싸움 전문가인 우리가 보기엔 애들 장난 같은 쇼를 해 왔다…”
당시 일부 극진 수련생들의 호전성은 유명해서 어디 좀 쎈 놈이 있다 싶으면 안 싸우고는 몸이 쑤시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술집에서 야쿠자 간부들을 개 패듯이 패기도 하고…. 최배달 총재도 두들겨 패고 오는 제자들을 별로 나무라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사실 이종격투기를 시작하고 계속 이겼으니 극진과의 시합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당시 극진은 명실공히 최고의 전성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극진 세계 16강쯤 되는 윌리 윌리엄스와의 시합이 주선됩니다.
윌리엄스의 생애 최고 성적은 79년 세계 극진가라데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한 것이니 상당한 실력자지요. 지금은 월드 오야마 가라데로 분파했지만 극진 미국지부의 개척자인 오야마 시게루(한국명 조일삼)의 제자로 당시 유치원의 스쿨버스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최배달 흉내를 낸답시고 목욕탕 샤워기 앞에 가부좌 꼬고 앉아 폭포수 수련을 하고 캐나다에서 곰과 싸우기도 한 괴짜 청년이죠. 195센티의 장신에 광대뼈가 튀어 나온 비쩍 마른 괴물 – 곰을 죽인 사나이(Bear Killer)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시합이 거의 성사가 되나 했는데 최배달 총재가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시합을 강행하면 윌리엄스는 파문이고 그 스승인 조일삼에게는 금족령을 내릴 거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하지만 총재 자신이 수많은 이종격투를 한 사람인데 유독 그 시합을 금하는 게 석연치 않았고 아마 이노키와의 관계 때문일 거라고 모두들 수군거렸습니다.
이노키의 스승인 역도산은 최배달의 친구였고 그에게서 가라데 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알리와의 시합을 앞두고 이노키는 최배달에게 극진공수를 배우고, 알리는 이준구에게 태권도를 배운다는 것이 알려져 세기의 대결 뒤에는 한국계 두 무술인이 있다고 언론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최배달로서는 누가 이겨도 한 쪽이 상처 받는 게 마뜩찮았을 겁니다.
우여 곡절 끝에 시합은 성사되었습니다. 이 시합은 이노키의 이종 격투 시합 중 가장 격렬한 시합이었습니다. 시합이 성사되어 가는 과정에서부터 서로 언론에 대고 상대를 우습게 보는 발언을 하는 등 아주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시합 당일에는 서로 으르릉 거리는 분위기가 피크로 달아 올라 거의 일촉즉발이었다고 합니다. 시작하자 마자 때리고 엉기고 다시 때리고 하다가, 4 라운드에 이노키가 팔 가위꺾기를 시도하자 엉겨붙은 두 사람이 링 아래로 떨어져 링 아래서 난투극이 벌어지고 양측 세컨드들이 우르르 합세하고….
링 아래서 막싸움을 하는 두 놈을 뜯어 말리고 보니 윌리엄스는 팔이 부러지고 이노키는 갈비뼈가 부러져 있었습니다. 결국 심판이 중지 선언을 하고 무승부가 선포되었습니다. 이노키의 홈페이지 기록에도 무승부로 나와 있었습니다.
알리와의 대전에서 로프터치를 인정해 주는 등 불리한 시합을 했다고 판단한 이노키는 시합 룰을 자기한테 유리하도록 바꿔, 윌리엄스는 난생 처음 두꺼운 글러브를 끼고 하는 시합을 해야 했습니다.
이노키 시합의 백미는 우간다 대통령 이디 아민과의 것입니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발상이 끝내주지 않습니까? 아민 대통령은 우간다 육군 헤비급 복싱 챔프였고, 쿠데타로 정권 잡은 후에는 각료들이 말 안 들으면 링에 불려 올려, 자기랑 3분 3라운드 스파링을 시킬 정도로 또라이였지만 그게 또 흥행 요소가 되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짝사랑하는 순정파에다 자기가 겸임하는 우간다 국립대 총장 자격으로 자기한테 박사학위를 수여한 학구파에다가... 이 시합에서 알리가 레프리를 보게 한다는 것도 천재적인 아이디어였지요. 아뭏든 이노키, 실력도 있지만 천부적인 엔터테이너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 무렵 아민 대통령은 권좌에서 축출되었습니다. 그때 우간다 중앙은행의 달러를 몽땅 갖고 튀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중해 연안에 별장을 짓고 테라스에서 그림을 그리는, 아주 향기롭고 우아한 생활을 한다는 소식이…. 사교계 출입도 그리 옹졸하지 않아서 명함에는 자기가 자기한테 수여한 박사학위로 닥터 아민이라고 새기고. 아직 살아 있다는군요.
저희 사부님이 한국사람이라는것을 시합때보셔서 아시고 다음에 일본에 올기회있음 극진에 꼭 찾아오시라했답니다 그래서 몇달후 일본에 가신김에 극진에 가셨답니다 대련을 하기위해 가셨는데 저희 사부님께서 그때당시 쿵후7단 이셨다고하더군요 참고로 비종권 한국인 최초 장문인이셨습니다
저는 사실 극진등 가라데에 대해서 여기 카패서 많은걸 보고읽고하며 배웠습니다 그전까지는 가라데를 잘~몰랏고 일본무술이라 별로 알고싶지도안았거든요 ㅎ 하지만 알아갈수록 놀랍고 엄청난이야기가 만이있내요 그 무술의역사를만든 분들과 제자분들 이야기가 단순 흥미가아닌 지금 무술을 하는젊은이로써
이노끼에게 불리한 룰이라는건 이노끼의생각이고..시청자의 생각들은 다릅니다.알리는 권투 글러브를끼고 이노끼는 글러브 안끼고..그러니 누위있는 이노끼를 알리는 어찌 할수가 없습니다..만약 잘모해서 엉켜누워버렸다면 두꺼운 글러브를 낀 알리는 영락없이 당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경기를 보시면 느끼실겁니다..
애초에 알리는 그래플러인 이노끼에게 여러가지 불리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예를들어 관절기 사용이라던지.. 이노끼와 엉키지 않기 위해 몇가지 조항을 달았죠. 어차피 이노끼 입장에선 복서인 알리에게 스탠딩으로 정면대결하는것은 자살행위이기에 그러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노끼가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조금 다르죠.. 그것보다 일본의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리키도산(역도산)만 보더라도 뒷 공작이나 각본에 움직이는 경우는 많았지만 실제 진검 대결도 제법 있었지요.. 역도산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경우도 그런 부분도 상당히 작용합니다.. 프로 레슬링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레슬러라고 평가받는
물론 알리와 꼴사나운 경기도 했지만 그건 알리 측에서 그래플러인 이노끼에게 상당히 불리한 룰을 제시했기에 경기 결과가 그렇게 된거구요. 극진의 강자 윌리 윌리엄스와의 대결도 진검 대결이었죠. 오죽했으면 극진의 핵심인물인 조일삼(오야마 시게루)씨가 "지면 할복" 선언까지 했을 정도이니 뒷 공작은 있을수가 없죠
호, 해박한 글. 척 웨프너는 이노끼와의 시합을 위해 억지로 랭킹10위로 만들었는데. 복서치고 그렇게 뚱뚱하고 뱃살이 늘어진 선수도 없을 것. 그런데 경기 후반에 태클 자세로 있는 이노끼를 같이 허리를 숙여 쪼그린 자세의 웨프너가 왼손 잽을 툭 던져 이노끼를 맞췄는데, 이노끼의 눈이 핑 돌아가고 무릎이 휘청~ 하고 꺾이는 걸 보았지요. 진짜 헤비급 정타를 맞으면 그냥 끝. 당시 한궁의 티브이에서도 복서와 레슬러들이 나와서 서로 이긴다고 며칠씩 설전을 하기도. 결국 이 시합은 이노끼의 코브라 트위스터로 끝나지만. 우리 어릴 땐 하나가 나는 김기수다!하면 다른 애들이 나는 역도산이다! 나는 자이언트 바바다!하고 놀았죠.
저의 사부님께서도 70년대 홍콩서있었던 세계무술대회 (영화 투혼같은경기라보심됩니다)나가서 3연패하신분입니다만 잘알려지시진 안았습니다 언제가 사부님께서 경기후 그때 심사위원으로 최배달선생님이계셨다는군요 가라오케 같은술집에서 작은 실수로 극진분들과 싸움이 날뻔했답니다 그때 최배달 선생님께서
이햐..본문과 리플 정말 잘읽었습니다...이런 비화가 있는줄은 정말 몰랐군요...^^;
저희 사부님이 한국사람이라는것을 시합때보셔서 아시고 다음에 일본에 올기회있음 극진에 꼭 찾아오시라했답니다 그래서 몇달후 일본에 가신김에 극진에 가셨답니다 대련을 하기위해 가셨는데 저희 사부님께서 그때당시 쿵후7단 이셨다고하더군요 참고로 비종권 한국인 최초 장문인이셨습니다
대만서 여러 장문후계자들과 시합하여 장문직을 받아오셨다고.... 하여튼 그때당시 최배달 선생님께서 극진 7단이신분들과 대련시킬뻔했다는데 결과는 못했다고 하내요 ㅎㅎ 참~척노리스가 한국서 군복무할때 저희 사부님께 한수배웠답니다^^ 사진보니 아주 열심히 하더군요^^ 척노리스 아주 젊더군요^^
그때당시 미군부대서 가라데 태권도등 여러사범들이 척노리스한테 못이겨다고하내요 영화 맹룡과광때의 척노리스가 아니었나봅니다^^ 헛~~말이 이상한데로 빠졌내요^^
저는 사실 극진등 가라데에 대해서 여기 카패서 많은걸 보고읽고하며 배웠습니다 그전까지는 가라데를 잘~몰랏고 일본무술이라 별로 알고싶지도안았거든요 ㅎ 하지만 알아갈수록 놀랍고 엄청난이야기가 만이있내요 그 무술의역사를만든 분들과 제자분들 이야기가 단순 흥미가아닌 지금 무술을 하는젊은이로써
많은걸 느끼고 알려줍니다.... 어떤 무술이던 궁극적 목적에는 모두 강함이라는것이있지만... 그 강함을 실천하는자는 극소수이지요.... 무술이 강한것이아니라 시현하는 시현가의 자질과노력이 강해지는것을 가끔 오늘같은 글을 만나면 새삼느낍니다...
오호..그럼 아랑전같은 만화는 사실이 바탕이군요..음//브라질 태생인것도 그렇고..음.....
이노끼에게 불리한 룰이라는건 이노끼의생각이고..시청자의 생각들은 다릅니다.알리는 권투 글러브를끼고 이노끼는 글러브 안끼고..그러니 누위있는 이노끼를 알리는 어찌 할수가 없습니다..만약 잘모해서 엉켜누워버렸다면 두꺼운 글러브를 낀 알리는 영락없이 당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경기를 보시면 느끼실겁니다..
물론 이것도 쇼일수있겠지만(장담은 하지않습니다.워낙 무작정 태클들이 많아서)
애초에 알리는 그래플러인 이노끼에게 여러가지 불리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예를들어 관절기 사용이라던지.. 이노끼와 엉키지 않기 위해 몇가지 조항을 달았죠. 어차피 이노끼 입장에선 복서인 알리에게 스탠딩으로 정면대결하는것은 자살행위이기에 그러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노끼가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알리 역시 큰 소리 칠 입장은 절대 못됩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이노끼가 진짜로 강한 선수였군요..
근데 좀 궁금한것이 있는데, 헐크 호간 대 이노키의 경기만을 봤는데 것도 그렇고 어쨌든 프로레슬링은 엔터테인먼트 적 요소가 강한 스포츠이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이노키는 프로레슬러이고 대부분 자기 경기를 자기가 주최한 모양인데
이노키 대 몬스터 맨이라든가 윌리의 경기는 정말 프로레슬링 적 요소가 없는 격투 대회였나요
이제서야 보게되는군요^^ 분명 프로 레슬링은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매우 강한 스포츠지요.. WWE만 하더라도 완벽한 각본체제로써 그들은 파이터라기 보다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엔터테이너입니다.. ^^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조금 다르죠.. 그것보다 일본의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리키도산(역도산)만 보더라도 뒷 공작이나 각본에 움직이는 경우는 많았지만 실제 진검 대결도 제법 있었지요.. 역도산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경우도 그런 부분도 상당히 작용합니다.. 프로 레슬링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레슬러라고 평가받는
루테즈 역시 10번중의 1~2번은 실제 진검대결이었으니깐요.. (더군다나 마에다 미츠요 시절에 존재했던 프랭크 고츠라는 레슬러는 실전에서도 엄청난 실력자였죠.) 아무리 프로레슬링이라도 어느정도 실력이 있어야지 상대가 납득하고 각본대로 움직여주지요..
안토니오 이노끼의 경우는 엔터테이너적인 요소와 여러가지 권모술수에도 능한 사람이었지만 실력 자체로 본다면 무척이나 강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현역 레슬러들이 노장인 이노끼를 당해내지 못할 정도면 어느정도인지 알수 있겠죠..
물론 알리와 꼴사나운 경기도 했지만 그건 알리 측에서 그래플러인 이노끼에게 상당히 불리한 룰을 제시했기에 경기 결과가 그렇게 된거구요. 극진의 강자 윌리 윌리엄스와의 대결도 진검 대결이었죠. 오죽했으면 극진의 핵심인물인 조일삼(오야마 시게루)씨가 "지면 할복" 선언까지 했을 정도이니 뒷 공작은 있을수가 없죠
호, 해박한 글. 척 웨프너는 이노끼와의 시합을 위해 억지로 랭킹10위로 만들었는데. 복서치고 그렇게 뚱뚱하고 뱃살이 늘어진 선수도 없을 것. 그런데 경기 후반에 태클 자세로 있는 이노끼를 같이 허리를 숙여 쪼그린 자세의 웨프너가 왼손 잽을 툭 던져 이노끼를 맞췄는데, 이노끼의 눈이 핑 돌아가고 무릎이 휘청~ 하고 꺾이는 걸 보았지요. 진짜 헤비급 정타를 맞으면 그냥 끝. 당시 한궁의 티브이에서도 복서와 레슬러들이 나와서 서로 이긴다고 며칠씩 설전을 하기도. 결국 이 시합은 이노끼의 코브라 트위스터로 끝나지만. 우리 어릴 땐 하나가 나는 김기수다!하면 다른 애들이 나는 역도산이다! 나는 자이언트 바바다!하고 놀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