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실성왕 (實聖王)의 투신자살과노무현의 투신자살
- 낭산 성루에서 투신자살한 삼국시대 실성왕 (實聖王)의 '친고구려 행위'와 봉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자살한 노무현 전 대통령 -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는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No one steps into the same river twice)"라고 말했다. 역사는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비교되고 유사한 전철을 밟을 수는 있다는 면에서 역사적 교훈은 성립한다.
역사적 교훈의 유사성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의 구조적 상황과 그 배경의 여러가지 유사성을 과거 우리나라 역사에서 필자는 찾아내 비교하고자 한다.
삼국시대 때도 왕이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필자가 찾아냈다. 그 사건은 '투신자살' 말고도 노무현 전 대통령 투신자살 사건의 그 구조적 배경과도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오랫동안 필자가 연구해 온 노무현 전대통령의 '투신자살'에 대한 역사적 전례를 추적하던 중에 찾아낸 삼국시대 신라의 실성왕의 '투신자살'과 그 '친고구려- 친북활동'에 대한 자료 조사를 마친 뒤에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 글은 어떠한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엉이바위 투신자살 사건의 충격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며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바탕한 역사적 고찰이다.
역사적인 해석을 통하여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그 '투신자살' 충격을 완화시켜보고자 이 글은 1천 6백년 전에 벌어진 신라의 '실성왕(實聖王)의 투신자살 사건'을 분석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과 그 정치적 배경을 비교 분석한 글이 될 것이다.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투신자살하는 사건은 죽은 자보다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현상인 것은 틀림없다. 어느 시대에도 놀라운 일일 따름이다. 아마도 건국이래 가장 괴기스럽고도 놀라운 사건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 사건일 것이다.
1. 투신자살한 실성왕은 누구인가
실성왕은(實聖王) 신라 제18대 왕(재위 402-417)으로 친고구려 정책으로 토박이 신라 왕실파들을 제거하고 나라를 고구려에 바치려던 왕이었다. 그의 전임자 내물왕의 태자였던 눌지(訥祗, 장차 눌지왕이 됨)의 덕망을 시기하여 그가 가까이하던 고구려계 부하를 시켜 죽이려 했다.
그러나 고구려계 병사들은 실성왕보다 눌지가 더욱 어질다고 보아서 보반태후에게 그 음모를 보고하게 되고 보반태후(내물왕 왕후이며 눌지왕 어머니)와 눌지태자는 신라 왕성에서 실성왕 세력을 밀어내고 장악한다. 그 결과 실성왕은 궁성을 버리고 그가 만들어두었던 낭산의 '작은 성'으로 피신했다가 포위망이 좁혀지자 그 고뇌를 참지 못하여 성루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투신자살했다(尼師今乃墮樓下而崩). 다음은 그 사실을 기록한 <화랑세기>의 필사자 박창화의 유작 가운데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의 내용이다.
五月海干河期等開城門而納王尼師今走入狼山仙臺王命垢音好原等進圍狼山尼師今出城上願見大王和解王不許尼師今乃墮樓下而崩卽重五日也 - 박창화,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 1> -
왕이 구음(垢音) 호원(好原)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낭산(狼山)을 포위하게 하자 니사금(尼師今)은 성(城) 위로 나와 대왕(눌지태자)을 보기를 원하며 화해를 청했다. 왕이 허락하지 않자 니사금(尼師今)이 마침내 성루(樓) 아래로 떨어져서 붕(崩)하니, 곧 중오일(重五日:5월5일)이었다.
실성왕의 투신자살은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성왕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실성기(實聖期)>의 기록에도 같은 사실이 남아 있다. 그 내용은 "마침내 문루에 올라가 아래로 떨어지니 좌우가 목놓아 호곡하였다(乃登門樓墮之左右號哭)"라고 기록하고 있다.
帝乃脫圍欲逃而左右無可爲者侍妾多越城而走至重五日糧盡帝謂沙沙等曰汝等年少可事新主朕當自處以贖之乃登門樓墮之左右號哭. - 박창화, <실성기(實聖期)> -
제(帝,실성왕)는 이에 포위를 벗어나 달아나고자 했으나 좌우에 할 수 있는 자가 없고 시첩들은 허다히 성을 넘어서 달아났다. 5월 5일(重五日)에 이르러 양식이 다하자 제(帝,실성왕)는 사사(沙沙)등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이가 젊으니 가히 신주(神主)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짐은 마땅히 자처(自處)함으로써 그를 속죄하리라.” 마침내 문루에 올라가서 아래로 떨어지니 좌우가 목놓아 호곡(號哭)하였다.
실성왕 당대의 사실에 대한 기록과 실성왕의 투신자살 후에 즉위한 눌지왕 재위기간의 기록에서도 실성왕의 투신자살은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 뛰어 내린 지점을 각각 '성루'와 '문루'의 차이로 표현했을 뿐이다.
박창화의 유작들이 <화랑세기>와 함께 사료로서 그 진위 여부는 논쟁 중이다. 그러나 다른 사료들과 비교하여 판단해 보면 독자들은 그 진위 여부의 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직 실성왕의 '투신자살'에 대한 그 역사적 문헌자료는 <화랑세기>의 필사자 남당 박창화의 유작들에 남아 있는 사료들에서 필자가 찾아낸 것이다.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와 그의 유작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필자의 앞선 글들에서 이미 소견을 밝혔기에 그 역사적 사실 여부의 진위 여부는 이 글을 보는 독자들 개인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 사건이 우리의 역사에서 과거에 왕으로서 투신자살한 유일한 케이스이다. 따라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과 연상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과연 실성왕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가 비밀히에 눌지를 죽이려 한 배경은 무엇이며, 그가 동원한 고구려계 병권은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실성왕(實聖王)은 실금왕(實金王)이라고도 표현되었다. 고구려에서는 그를 보금왕(寶金王)이라고도 했다. 옛날엔 컴퓨터 활자가 아니라 필사된 글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실(實)'이 '보(寶)'로 혼동하여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실성왕이 왜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죽이려 했는지 그 역사 기록을 살펴보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간단한 기록과는 달리 <화랑세기>의 필사자 박창화의 유작에는 아주 많은 양의 스토리 배경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실성왕에 대하여 먼저 <삼국유사>의 기록 전문을 보겠다.
先是, 實聖王元年壬寅, 與倭國講和, 倭王請以奈勿王之子未斯欣爲質. 王嘗恨奈勿王使己質於高句麗, 思有以釋憾於其子, 故不拒而遣之. - <삼국유사> -
이 보다 앞서 실성왕(實聖王) 원년 임인(壬寅)년에 왜국과 화친을 맺을 때, 왜왕이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요구하였다. 실성왕(實聖王)은 일찌기 내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스럽게 생각하여 그 아들에게 분풀이를 하고자 했기 때문에, 왜왕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내물왕의 아들인 마사흔(斯欣)을 인질로 보냈다. 화친을 계기로 왜국의 인질로 보낼 때에 실성왕은 내물왕의 아들 마사흔을 왜국으로 보내놓고도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시 또 내물왕의 아들 눌지를 살해하려 고구려사람까지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음모가 눌지와 보반태후(내물왕의 황후)에게 발각되어 실성왕은 그의 생을 마감하는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이에 대하여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奈勿王三十七年, 以實聖質於高句麗, 及實聖還爲王, 怨奈勿質己於外國, 欲害其子以報怨. 遣人招在高句麗時相知人, 因密告: 見訥祗則殺之. 遂令訥祗往, 逆於中路. 麗人見訥祗, 形神爽雅, 有君子之風, 遂告曰: "爾國王使我害君, 今見君, 不忍賊害." 乃歸. <訥祗>怨之, 反弑王自立. - <삼국사기> -
내물왕 37년에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실성實聖)이 돌아와 왕이 되고나서 전임 내물왕이 자기를 외국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였다. 그는 내물의 아들(눌지)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원한을 갚고자 하였다. 그는 비밀히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서로 알던 사람에게 은밀히 그에게 "눌지를 보거든 죽이라"고 사주했다. 마침내 눌지에게 명하여 다른 이유를 핑게로 고구려로 보냈다. 그 가던 길에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보니 그 자태가 고상하여 군자의 기풍(君子之風)을 갖추고 있음을 보았다. 그 구려인은 눌지에게 "그대의 국왕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죽이도록 하였으나 이제 그대를 보니 차마 죽일 수 없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눌지가 그것에 한을 품고 실성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실성왕이 자신을 죽이려던 것을 알고는 눌지가 "도리어 왕을 죽이고 자신이 섰다(反弑王自立)'고 하여 눌지가 실성왕을 '죽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反弑王'의 진상은 '도리어 죽게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액면 그대로 '죽였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편에 서서 쓴 <삼국사기>의 표현이 그렇게 결국 투신자살하게 한 결과가 눌지왕의 압박에 의하여 '죽였다'고 보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기록에서는 실성왕이 스스로 '투신자살'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대로 실금왕(實金王)이라고도 불렸던 실성왕(實聖王)은 박창화의 <실성기(實聖期)>와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 >에서 그의 죽음을 '스스로 투신자살했다'고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왕이었던 실성왕의 투신자살에 대하여 고구려 기록에서는 '독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박창화의 유작 가운데 고구려 조정에서 본 시각에서 실성왕의 죽음 즉 보금(寶金)의 죽음에 대해서는 '독살(?)'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고구려 19대 영락왕에 대한 기록인 <永?大帝紀>에서 보인다.
四年丁巳, 五月, 訥祇殺?金而自立. 正月, ?金, 使訥祇?曉辰入朝, 賂于邊?而害之. 邊?, 恐朝廷, 而不敢害之. 事遂發. 上, 命評部?賓部, 治其罪. 訥祇, 含而?之, 與天星共謀而?金. - 박창화, <長壽大帝紀> -
4년(AD. 417) 정사년, 5월, 눌지(訥祇=訥祗)가 보금(?金王, 또는 實聖王이라고도 한다)을 죽이고 자신이 보위에 섰다. 정월에, 보금(?金)이 눌지(訥祇)와 효진(曉辰)을 입조하라 해 놓고 변방 장수를 시켜서 이들을 해치우라고 시켰는데, 그 변방 장수가 조정(조정의 반고구려 민심)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들을 해치지 못하였더니, 그 일이 드러나게 되었다. 상(보금왕)은 평부와 빈부에 명하여 그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다. 눌지는 입 다물고 돌아가서 천성과 공모하여 보금을 짐독(?)으로 죽였다.
위에서 보는대로 <長壽大帝紀>의 '독살설' 주장은 그 정황상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독살이 이루어지려면 전시상황이나 위기 상황이 아닌 평상시에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의 기록에서는 보금이 나라의 신기(神器)를 가지고 낭산의 작은 성으로 도망쳐서 항거하는 상황이 상세하게 나오기도 하고, 포위망이 좁혀질수록 눌지 세력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내용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독살설이 아니라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성루에서 투신자살했다는 신라의 기록이 더욱 정황에 맞는 내용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일어난 일은 신라의 기록이 더 정확할 것은 물론이다. 고구려측 기록을 중심으로 보더라도 이미 보금은 그의 눌지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독살설'이 들어설 공간은 적어진다. '독살'이라고 쓴 고구려측 기록인 <長壽大帝紀>에서는 보금이 눌지를 입조하라고 해놓고 조정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변방의 고구려 장수를 시켜서 암살하려 했다라는 내용까지 들어 있다.
고구려 공주와 결혼한 친고구려 왕으로 세워졌던 실성왕(보금)이 정통 신라 왕통과 그 태자를 끊어버리고 고구려의 피로 이어지는 신라 왕통을 삼으려는 음모가 발각 된 뒤에 '독살'이란 비논리적인 것이다. 신라의 조정에 '입조하는 눌지를 암살하려 한' 위의 <長壽大帝紀>에 남아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에 보낸 눌지를 고구려인이 암살하도록 했다'는 내용과도 대치된다.
눌지측이 실성왕을 생포하였다 해도 독살보다는 효수를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낭산으로 도망쳐 작은 성(小城)에 포위된 채, 막판의 타협안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성왕은 스스로 성루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로 마감했다는 신라 조정의 기록인 <눌지천왕기>의 기록이 가장 타당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아마도 후세 왕조들이 이러한 <실성기(實聖期)>와 <눌지천왕기>의 내용을 보면서 '왕의 투신자살'이 믿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뒤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에 대한 역사적 사실도 그의 퇴임 직후 그의 고향 뒷동산 바위 위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기록은 지금도 극히 일부에서 '음모론'을 제기하듯 사실 그대로 '투신자살'이 된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가지 '투신자살'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후세인들의 판단에 맡겨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두 가지 역사적인 '나라의 최고 통치자의 투신자살' 사건은 노무현 전대통령에게 일어났듯이 신라의 왕인 실성왕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신라 왕에 대한 신라측의 기록인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의 남겨져 있는 기록에 비하여 이름도 다른 '보금'으로 표현된 실성왕에 대하여 고구려가 쓴 기록은 이미 현장을 관할한 현지 조정의 기록이 아닌 것이다.
실성왕의 투신자살에 대한 현장 상황을 담은 <실성기(實聖期)> 및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의 그 경과 내용을 상세히 보게 되면 고구려에서는 실성왕((寶金)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고구려에서는 실성왕을 죽게한 신라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정황을 보여주는 동시에 실성왕이 고구려 조정과 깊은 연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추측케 한다.
신라측의 기록들인 <실성기(實聖期)>와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처럼 고구려측의 기록인 박창화의 '고구려사략'의 기록도 그러한 백그라운드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보금(寶金)은 내물왕(내밀왕으로도 표현되었다)의 조카로 태어나, 처음에 서라벌 궁전 지위에 등장하는 것은 왕비들이 머무는 궁전의 대부로 등장한다. 그러나 내물왕이 조카인 보금((寶金, 실금, 실성왕)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거기에서 보금은 고구려의 영락왕의 공주로서 과부가 된 천성(天星)공주와 혼인을 한다.
보금(寶金)은 고구려 인질로 거기에서 자식을 셋 낳을 때까지 살다가 고국에 돌아온 뒤에 고구려 조정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백그라운드로 신라의 왕위에 오른다. 그의 이러한 왕위 즉위는 그의 치세 내도록 반신라적인 행태를 보였다. 그러한 행태는 보금((寶金) 즉 실성왕이 눌지에 대한 암살 기도에서 그 극에 달한다.
그리하여 고구려 공주의 피로 신라 왕계를 이어보려는 그의 음모는 오히려 그 음모에 가담한 고구려계 신라 변방장수에게 배신당하여 보금(실성왕)은 자신 스스로 투신자살의 결말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실성왕이 투신자살하고 내물왕의 아들 눌지왕이 즉위하여 내물왕의 황후였던 보반황후는 눌지왕의 모후로서 보반태후에 봉해졌다. 실성왕이 신라 왕실의 혈통을 끊으려 했던 그 음모를 앞장 서서 막았던 인물이 보반태후였다.
표주박을 닮은 쌍능으로 유명한 경주의 황남대총은 내물왕의 황후의 무덤이라는 학설이 있다. 눌지왕의 어머니인 보반태후와 눌지왕의 아버지인 내물왕이 그곳에 묻혀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직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발굴 당시 황남대총 쌍능의 북쪽 능인 황후의 모습에서 드러난 여왕관이 남쪽 능에서 발굴된 그의 남편인 내물왕의 왕관보다 더 크고 화려하다.
가슴 부분에 반월같은 큰 곡옥이 있다. 신라 17대 내물 니사금(奈勿 尼師今) 부부가 묻힌 것으로 보기도 한다.
3. 실성왕의 눌지 암살시도의 숨은 배경
고구려 19대 영락왕(永?王) 때에 고구려 인질로 가 있다가 내물왕 12년(AD. 402년) 에 신라로 돌아온 보금(寶金)이 왕위에 오르고 그의 정궁 왕비로 고구려의 과부공주였던 천성(天星)공주가 들어선 것은 신라가 친고구려 왕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한 친고구려 왕권이 아니라 신라 왕손들을 제거하고 고구려 혈통인 실성왕의 자식들을 신라의 후계왕으로 세우고자 한 것이다.
실성왕은 고구려의 사주를 받아 내물왕의 자식들을 제거하려 했다. 자신의 고구려 인질 앙갚음이라는 것은 핑게에 불과했다. 그 이유를 보금(실성)을 신라로 귀환시켜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도 내물왕이었기 때문이다. 인질로 보낸 내물왕이 자신을 다시 돌아오게도 하고 신라의 왕위에 세우는 역할을 했는데도 앙갚음이란 어불성설이 되는 것이다.
내물왕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서 자신의 조카인 보금과 그의 부인인 천성공주 내외를 신라로 돌려받아 자신의 후계왕으로 세우기를 원한다고 고구려 조정에 요청했으며, 보금과 그 부인 천성공주가 함께 신라로 오도록 했다.
그렇게 내물왕에 의하여 왕위에 오른 실성왕은 내물왕의 아들 마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내고 내물왕의 또 다른 아들인 눌지를 암살하려 한 것은 실성이 '친고구려 왕'으로서 고구려의 '지령'을 받고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부인이 된 고구려 공주인 천성공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셋 중에 하나를 후계 왕으로 세우고싶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신라를 위하여 고구려에 인질로 갔으면서도 고구려에 10년 인질 기간 동안 세뇌되고 혼인까지 하여 고구려 '왕자'가 되어 신라의 왕권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서 실성왕의 눌지 암살의 음모는 겉으로는 '내물왕의 인질 보낸 앙갚음'으로 위장하여 동정적인 울타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는 내물왕의 아들 눌지 태자를 암살하려 한 그 실상은 고구려 조정이 개입하여 고구려 왕실의 사위인 실성왕과 그의 고구려 아내인 천성공주의 자식을 신라의 차기 왕으로 세우려는 '친고구려 후계왕 옹립'의 일환으로 꾸며진 것으로 필자는 추단한다.
그러한 증거는 실성왕 재위 기간 여러 다른 정황에서도 나타난다.
내물왕 뒤에 왕좌에 오른 보금(實聖王)과 천성은 신라에서 고구려 시조 동명의 단상(東明檀像)을 만들고 중천제(中川帝)와 옥모(玉帽) 황후의 상도 신라의 궁중에 만들어 두고 보금(實聖王과 함께 조석으로 성상을 참배하여 기원을 했다.
天星遣使?言, 是年二月謁其祖?而創東明檀像及中川·玉帽像于宮中, 與?金, 朝夕拜之禱聖躬, 云. - 박창화, <영락대제기(永?大帝紀)> -
반면에 위에서 보는대로 고구려 왕실의 '사위'가 된 실성왕은 신라 서라벌에서 고구려 공주 천성왕비와 함께 신라 김씨 왕조의 조상묘를 참배하고 또 거기에 고구려의 동명단상(東明檀像)을 만들어 함께 참배했다는 것이다. 북한 고위 관리가 서울의 동작동 국립묘지에 참배하던 것과 같은 양상이라 할만하다.
신라에서 이와같은 고구려 동명단상을 차려 참배했던 것만큼 물론 고구려에서도 평양에 신라의 '계림성모사(鷄林聖母祠)'를 세워 고구려 왕실에서 참배한 내용은 필자의 앞선 글에서 다룬대로 그 시대의 신라와 고구려의 긴장과 우호가 교차하던 때의 '호혜적 외교'의 양상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성왕(보금)이 서라벌에 동명단상(東明檀像)을 만든 것과 그 추가적인 '친고구려행위'는 눌지 암살로 치닫고 있었다는데서 극한적 반신라 행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성왕은 고구려의 선도(仙道) 도장을 만들기 위하여 고구려 선사(仙師)를 보내달라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 댓가로 고구려에 신라가 '평양대교'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지난 10년 정권 기간 '선도(仙道)'와 상징적으로 관련이 있는 금강산(金剛山) 관광을 댓가로 '백두산 비행장'을 만들어주는 것과 같은 모양이라 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때에 나타났던 채운(彩雲)의 전통적 의미는 신라의 화랑도에서 꽃이 피었던 선도(仙道)의 전통에서 그 뜻이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노제 때에 나타났던 그 채운은 '고구려 선도(仙道)'였을까? 서울 광장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때에 채운(彩雲) 현상처럼 고구려 선사(仙師)를 받아들이기도 했던 친고구려왕이었던 실성왕이 낭산에서 천성왕비와 함께 본 채운(彩雲)을 보았기 때문이다.
二十三年癸丑, 八月, ?金, 與天星, 謁東明神像于狼山, 彩雲回繞自成樓閣, 香氣郁郁不滅. 乃求仙師而欲置道場. 上, 命鯨太子?之. ?金, 作平壤大橋, 而答皇恩 - 박창화, <영락대제기(永?大帝紀)> -
채운(彩雲) 현상에 대한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의 기록인 '고구려사략' <영락대제기(永?大帝紀)>에서 나온 것이다. 이 내용은 신라사략인 <실성기(實聖紀)>에도 나타나는데 같은 기사에 채운(彩雲)이 서운(瑞雲)으로 표현되어 있다.
八月瑞雲起狼山上望之如樓閣香風郁然久而不歇神士二同等奏曰天仙降遊也抑帝德之致?帝以爲然禁伐狼山林曰福地可以幽遠神邃也 - 박창화, <실성기(實聖紀)> -
8월에 낭산(狼山) 꼭대기에 상서로운 구름(瑞雲)이 일어났는데 그를 바라보면 마치 누각과 같았고 향기로운 바람(香風)이 자욱이 퍼져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실성왕이 왕이 되기 전 고구려에 인질로 10년을 채류한 것은 지난 김대중 - 노무현 정권 10년의 기간이 핵무기 제조로 엄포를 놓던 북한의 '10년 인질' 상황이었을까?
10년 동안 인질이 아닌 고구려에 '세뇌되고 혼인되어' 돌아온 '친북왕'이었던 실성왕(보금)이 낭산에서 고구려 시조신인 동명신상에 배알하자 채운(彩雲)이 생겼다. 어쩌면 이렇게 '좌파 10년 정권'과 더불어 권양숙 여사와 혼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끝내 '투신자살' 했던 역사와 이렇게도 유사할까?
그래서 필자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때에 서울광장에서 서북쪽 하늘에 보였던 '채운(彩雲)'은 별나게 남아 있는 이미지이다.
그 노제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실성기(實聖紀)>에서 표현하는 '서운(瑞雲)'이라고 하지 않고 <영락대제기(永?大帝紀)>에서 표현한 '채운(彩雲)'이라고 말한 것은 투신자살한 실성왕과 그 왕비였던 고구려 공주 천성이 함께 보았던 '고구려 채운'의 그림자라도 되었던 것일까 운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도다.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때 권양숙 여사도 본 서울광장의 서북쪽의 '채운(彩雲)' 1천 6백년전 친고구려왕 실성왕과 고구려 출신 천성왕후도 '채운(彩雲)'을 보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대통령과 관련하여서 채운(彩雲)이 화제가 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때였다. 이제 필자의 이 글을 통하여 사람들은 '채운(彩雲)'의 의미와 그 역사적 비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실성왕이 고구려 왕실의 공주를 왕비로 한 것은 혈통적으로 그 자신이 '고구려 사위'의 입장에 있었다. 그와 같은 패턴에서 사상적으로 보면 빨치산의 딸이었던 권양숙 여사의 남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한의 사위'와 같은 양상이 된다. 보금(실성왕)의 '고구려 인질 10년'이란 현대 한국사에서 지난 '친북한 정권 10년 인질 기간'이다. 더불어 6.25때에 양민학살로 지목된 권양숙 여사 부친의 친북활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결혼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구려 공주와 결혼한 보금(실성왕)을 닮아 있지 않는가? 똑같이 투신자살한 우리나라 역사의 두 통치자였다.
서울 시청앞에서 한창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벌어지던 날 채운(彩雲)이 서쪽 하늘에 일어나 뉴스가 되었던 바로 그 같은 채운( 彩雲)이 '친고구려 왕' 실성왕과 '고구려 공주 천성'이 고구려 시조를 배알한 뒤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라기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의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의 임기 말에 휴전선을 걸어서 넘어 김정일을 '배알'하고 돌아왔었다.
실성왕과 노무현은 그 부인과의 결혼은 물론 그 '친북적' 정치색까지도 그렇게 서로 유사한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유사성의 극치는 그 말로에서도 둘 다 '투신자살했다'는 것에서 필자가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필자는 지난 좌파 정권 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당한 실질적인 인물의 한 사람이다. 이미 그에 대하여서는 필자는 노무현 정권 때에 평통강연 연사로 나가 노무현 정권의 편식적 '갱우(坑友)' 획책에 대하여 규탄한 바 있다.
필자가 온갖 정열과 재산을 바쳐 벌여온 1893 한국전시관복원기념사업회의 복원사업에 대하여 정부가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말도 안되는 '정경원 일기문 표절' 운운하던 자의 편에 서고 도리어 그 같은 자가 필자의 자료를 사람을 시켜 훔쳐가려했던 사건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정권의 말로는 투신자살이었다. 필자의 피맺힌 절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4. 보금(실성왕)의 투신자살과 노무현의 투신자살
고구려 제 20대 왕인 장수왕때의 기록인 박창화의 '신라사략'인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 에 따르면 신라의 실성왕(보금)이 친고구려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을 때 신라의 보반황후(내물왕 왕후)와 눌지가 일으킨 쿠데타로 신라의 신기(神器)를 가지고 낭산으로 달아나 그 신기(神器)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다. '국가기록 컴퓨터'를 가지고 봉하 마을로 내려가 논란이 되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상황과 같은 논란이라 할만하지 않는가?
눌지 측의 포위와 압박으로 실성왕이 스스로 성루에 올라가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뇌물죄 수사가 옥죄어 오자 스스로 부엉이바위에 올라가 뛰어내리는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이 어찌 역사의 '반복'이라 할만한 사건이 아닌가. 두 사건 모두 5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인간은 흐르는 물에 발을 두번 담글 수 없다'고 말한 헤라이클레이토스가 입을 벌리고 다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박세리가 US 오픈에서 다시 한번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 우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치된 사건이 반복되어 일어났지 않는가!
보다 정확히 하기 위하여 실성왕의 투신자살 전후에 대한 <실성기(實聖紀)>의 기록과 <눌지천왕대제기>의 기록 두 가지 모두를 보면 그 내용은 거의 일치하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실성기(實聖紀)>의 내용을 보고 그 다음으로 이어서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의 기록을 보도록 하겠다.
五月伊?奈己奉保反后密詔與河期進思等開門納太子于城中帝知天命已去與沙沙寵花等出奔狼山太子入御大宮出榜安民曰殺伐非吾祖宗遺法也今帝背恩先德不遵聖母黜我質弟爲天所厭乃復其初凡我臣民勿驚勿駭各安其業
帝使享叔請和曰可得南路以終天年太子曰神器不可私議有天命者守之而已帝乃脫圍欲逃而左右無可爲者侍妾多越城而走至重五日糧盡帝謂沙沙等曰汝等年少可事新主朕當自處以贖之乃登門樓墮之左右號哭好原等乃入城中盡搜帝寶及沙沙等獻于太子保反后乃命太子卽祚大宮天大雨暴風群臣以爲先帝之崇乃使阿老聖命祭先帝于豆乙宮命好原收帝魄于狼山七日流久味等十五人于阿瑟羅神山以河期爲摠行?判大赦國中. - 박창화, <실성기(實聖紀)> -
5월에 이찬(伊?) 나기(奈己)가 보반후(保反后)의 밀조(密詔)를 받들어 하기(河期) 진사(進思) 등과 더불어 성문을 열고 태자를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제(帝, 실성왕)는 천명(天命)이 이미 떠났음을 알고 사사(沙沙) 총화(寵花)등과 함께 낭산(狼山)으로 달아났다.
태자(눌지를 말함)가 대궁(大宮)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방(榜)을 내걸어 백성을 안심시켜 말했다.“살벌(殺伐)은 우리 조종(祖宗)의 유법이 아니다. 금제(今帝, 실성왕)가 선제(내물왕을 말함)의 은덕을 배반하고 성모(聖母)에게 준명치 않으며, 나를 쫓아내고 아우를 인질로 하여 하늘이 싫어한 바이니, 곧 그 처음대로 복귀하리라. 무릇 우리 신민(臣民)들은 놀라지 말고 동요하지 말며, 각자 그 생업(生業)에 편안히 종사하라.”
제(帝)가 향숙(享叔)을 사신으로 보내 화해를 청하며 말했다. “남로(南路)를 얻을 수 있다면 가히 천수(天年)를 마치리라.” 태자가 말했다. “신기(神器)는 사사로이 논의할 수 없으니 천명(天命)을 가진 자가 그것을 지킬 따름이다.”
제(帝)는 이에 포위를 벗어나 달아나고자 했으나 좌우에 할 수 있는 자가 없고 시첩들은 허다히 성을 넘어서 달아났다.
5월 5일(重五日)에 이르러 양식이 다하자 제(帝)는 사사(沙沙)등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이가 젊으니 가히 신주(神主)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짐은 마땅히 자처(自處)함으로써 그를 속죄하리라.” 마침내 문루에 올라가서 아래로 떨어지니 좌우가 목놓아 호곡(號哭)하였다.
호원(好原)등이 이에 성안으로 들어가서 제(帝)의 보물및 사사(沙沙)등을 남김없이 찾아내어 태자에게 바쳤다. 보반후(保反后)가 이에 태자(太子)에게 명하여 대궁(大宮)에서 즉위하도록 했다.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지고 폭풍이 불자 군신들은 선제(先帝, 실성왕)의 빌미(?)라고 했다. 이에 아로(阿老)와 성명(聖明)으로 하여금 두을궁(豆乙宮)에서 선제(先帝)를 제사하게 했다.
호원(好原)에게 명하여 낭산(狼山)에서 제(帝)의 시신(魄)을 수습하게 했다.
위의 번역문에서 그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필자가 패러그래프를 나누어 놓았다. 아래는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의 내용이다. 전대의 왕에 대한 기록은 '王'자도 빼버린 '實聖紀'라고만 표현한데 비하여 실성왕을 몰아낸 뒤에 즉위한 눌지왕에 대하여서는 '눌지천왕'이라는 표현과 함께 '訥祇天王紀'라는 명칭이 붙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 실성왕은 그의 투신자살 만큼이나 신라 역사에서 '친고구려 행위'와 함께 비판되고 있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위의 <실성기(實聖紀)>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사실을 기록한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에 남아 잇는 실성왕의 투신자살 전후의 급박했던 상황을 묘사한 부분이다.
五月伊?奈己奉保反后密詔與河期進思等開門納太子于城中帝知天命已去與沙沙寵花等出奔狼山太子入御大宮出榜安民曰殺伐非吾祖宗遺法也今帝背恩先德不遵聖母黜我質弟爲天所厭乃復其初凡我臣民勿驚勿駭各安其業帝使享叔請和曰可得南路以終天年太子曰神器不可私議有天命者守之而已帝乃脫圍欲逃而左右無可爲者侍妾多越城而走至重五日糧盡帝謂沙沙等曰汝等年少可事新主朕當自處以贖之乃登門樓墮之左右號哭好原等乃入城中盡搜帝寶及沙沙等獻于太子保反后乃命太子卽祚大宮天 - 박창화,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 -
5월에 왕궁에서 낭산(狼山, 토함산 기슭에 있다)으로 달아났던 실성왕(보금)이 그의 신하 향숙(享叔)을 사신으로 보내 화해를 요청하며 “남로(南路)를 얻을 수 있다면 가히 천수(天年)를 마치리라”고 말했다.
태자가 말했다. "신기(神器)는 사사로이 논의할 수 없으니 천명(天命)을 가진 자가 그것을 지킬 따름이다(神器不可私議有天命者守之)"는 눌지의 대답이 돌아왔다.
주위에서 실성왕에게 포위를 벗어나 탈출을 권하기는 했으나 그를 보필할 마땅한 장수가 없었다. 시첩들은 이미 성을 넘어 달아났다.
5월 5일(重五日)에 이르러 성안(자신이 낭산에 만들었던 작은 小城)에 양식이 다하자 실성왕은 그의 수하 사사(沙沙)등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이가 젊으니 가히 신주(神主=눌지)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짐은 마땅히 자처(自處)함으로써 그를 속죄하리라(汝等年少可事新主朕當自處以贖之)"고 하며 마침내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아래로 떨어지니 좌우가 목놓아 호곡(號哭)하였다.
호원(好原)등이 이에 성안으로 들어가서 실성왕의 보물및 사사(沙沙)등을 남김없이 수색하여 잡아내 태자 앞으로 붙들어 왔다. 보반후(保反后)가 이에 태자(太子)에게 명하여 대궁(大宮)에서 즉위하도록 했다
낭산 작은 성으로 도망갔다가 포위된 실성왕이 화해를 요청해도 태자 눌지와 보반태후(保反太后)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동시에 "신기(神器)는 사사로이 논의할 수 없으니 천명(天命)을 가진 자가 그것을 지킬 따름이다(神器不可私議有天命者守之)"라고 했다. 부하들은 향후 살아남기를 바라면서 투신자살한 실성왕은 '부하들은 살리고 투신자살한' 현대판 이야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축약하여 실성왕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 배경을 도표로 비교해 보겠다.
<실성왕과 노무현 전 대통령 투신자살의 비교 대조표 >
(* 이 글 전체를 스크랩하는 것 외에 비교 도표만을 옮겨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음)
이 비교표를 더욱 축약하여 몇몇 어휘들만으로도 '유사성 사전'이 만들어지는 신기한 대조를 볼 수 있다. 고구려 인질 10년 = 핵무기 '인질' 10년, 고구려피와 결혼 = 빨치산 피와 결혼, 자신이 만든 소성(小城) = 자신이 만든 사저(私邸), 신기(神器) 논란 = 국기기록 논란, 채운(彩雲) = 채운(彩雲), 성루 투신자살 = 부엉이바위 투신자살.
가장 흥미로운 유사성은 '신기(神器) 논란'과 '국가기록 논란'이다. 그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자.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문제가 제기된 첫 부분이 '국가기밀 개인 유출 열람 컴퓨터'를 봉하마을로 가져간 문제였다. 그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의 시발점이었다. 실성왕 또한 그가 지은 소성(小城)으로 신라의 국가 신물인 '신기(神器)'를 가져간 것이 먼저 문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청와대의 국가기밀이 담긴 컴퓨터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의 사저인 봉하마을로 가져간 것처럼 실성왕이 월성에서 그가 지은 낭산의 소성(小城) 으로 옮겨간 '신기(神器)'는 신라의 '국가기밀'과도 같은 신성한 것이었다. 희한한 일치이지 않을 수 없다. 신라의 '신기(神器)'는 위의 기록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나중에 불교로 강화된 신라의 '신기(神器)'는 '삼보(三寶)'로 바뀌어 표현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추정이다. 즉 신라삼보(新羅三寶)는 '황룡사의 장륙 존상(丈六尊像), 황룡사 구층탑(九層塔), 진평왕의 옥대(玉帶)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진평왕의 옥대(玉帶)만이 불교 이전의 유물이다.
그렇다면 실성왕이 가져간 그 당시의 신라의 '신기(神器)'는 신선풍류의 신국(神國)의 도(道)에 맞추어진 '신기(神器)'였을 것이며 그 갯수는 세 가지였을 것으로 필자는 추측한다. 그것을 신라의 '神國의 道'가 왜국으로 건너가 일본 천황가에 남아져 온 '신기(神器)'를 일본에서는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라고 부른다. 그것은 대대로 천황이 물려받는 3가지 나라 보물을 의미한다. 단순한 옥새가 아니라 이러한 '신기(神器)'를 전대 왕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것이 신라의 왕통 계승의 상징이며 위엄이었을 것이다.
일본 천황가의 계승되는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는 거울(鏡), 구옥(勾玉. 곡옥과 유사), 검(?)이다. 현재 거울과 구옥은 미에현(三重?) 소재의 이세 신궁(伊勢神)에 검은 아이치현(愛知?)의 아츠타 신궁(熱田神宮)에 보존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가장 앞서 언급되는 거울이다.
실성왕이 이렇게 중요했을 신라의 '신기(神器)'를 가지고 낭산의 그의 '사저'로 도망쳤을 때 그 '신기(神器)'에는 거울 즉 '다뉴세문경(多?細紋鏡)'과 같은 동경이 가장 중요한 상징적 인 물건이었을 것이다. 실성왕이 가지고 낭산으로 도망갔던 '다뉴세문경(多?細紋鏡)'이란 손잡이가 여러개 달린 동경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여러 윈도우 프로그램을 갖춘 '국가기밀이 담긴 컴퓨터'가 아니고 그 무엇인가! 지금 무서운 일치성을 독자들은 보고 있다.
내물왕의 아들 눌지를 암살하려다 발각된 실성왕은 자신이 좋아하던 낭산(狼山)에 만들어 두었던 작은 성(小城)으로 도피했다. 탄핵에 긴 시간의 레임덕으로 막판에 정권을 빼앗기고 도망치듯 봉하마을에 스스로 '사저'를 지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에 그대로 일치한다.
실성왕은 포위망이 좁혀져 오니까 당황해 한다. 포위 병력이 증가되어 갈수록 자신을 따르던 신하들마저 점차 돌아서자 그는 화해의 제스쳐마저 써보면서 '남로(南路)' 지방이라도 자신이 관할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신라 고유의 왕권을 유지하려는 신정권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신기(神器)는 사사로이 논의할 수 없으니 천명(天命)을 가진 자가 그것을 지킬 따름이다(不可私議有天命者守之而已)"
임기중에 국회에서 탄핵을 받아 헌법재판소가 판결이 날 때까지 직무정지까지 당했던 노무현 전대통령은 선출된 대통령 자격을 상실하고 헌법재판소에서 '법적으로 재신임된 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의 나머지 기간을 이행했다.
퇴임한 대통령이 추격당하는 사람처럼 국가기밀이 담긴 청와대 컴퓨터를 봉하마을로 가져갔다. 그것은 신라로 말하자면 신정권에 추격당하여 도망치면서 나라의 '신기(神器)'를 실성왕 자신이 낭산에 지어놓은 '작은 성(小城)'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신라의 고유 왕성이 낭산에다 개인적인 실성의 '작은 성'으로 옮겨간다는 의미가 된다. '국가기밀'이 한동안 있었던 봉하마을 '사저'는 실성왕의 '소성'이나 같았다.
그러한 신라의 '신기(神器)'와도 같은 '국가기밀'을 한동안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열람할 권한을 가지겠다고 우기다가 결국 청와대로 돌려주어야 했던 것이 노무현의 봉하마을 '사저'에서 벌어진 '국가적인 사건'이었다.
실성왕이 낭산의 '작은 성'에 포위당하고도 남로(南路) 지배권을 달라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하고나서도 이상하게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듯 인터넷 정치를 확대하고 있었다. 특히 뇌물 수사가 시작되었을 때도 큰 소리로 비웃으며 인터넷에 여러번 자신의 정치발언을 했다. 그 내용은 '수사방향 암시'라거나 '타협안 제시' 등으로 해석되어 뉴스 기사가 되기도 했다. 실성왕이 타협안을 내서 '남로 관할권 제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실성왕을 따르던 사람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궁녀들도 담넘어 도망을 쳤다. 640만달러 뇌물 수수혐의로 신정권의 수사 압축에 서울법정을 오간 뒤에 그의 참모들은 하나둘씩 사건의 배후에 대하여 자백하고 그를 떠나는 현상이 벌어지자 노무현은 그때부터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노무현 정권 당시 총리까지 했던 모 인사는 스스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로 불려다닐 때 침묵했던 부끄러움이 제 가슴에 남아 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상황이 모두 패주의 길로 치닫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가 뇌물 문제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한스러워 하다가 더 이상 외부 발언을 자제하고 고민의 나날을 보냈다. 더 이상의 '타협'이나 '인터넷 공개 발언'은 중지되고 '두문불출'의 상황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는 유서를 썼다.
위에서 인용한대로 실성왕은 자신의 신하들이 눌지 편으로 넘어가는 일이 계속되자 자신의 책임을 속죄로서 자살하는 것을 암시하는 마지막 말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너희들은 나이가 젊으니 가히 신주(神主=눌지)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짐은 마땅히 자처(自處)함으로써 그를 속죄하리라(汝等年少可事新主朕當自處以贖之)"
그리고 그는 투신자살했다. 실성왕의 마지막 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부분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너희들'이란 실성왕을 떠나 神主=눌지에 붙은 사람들을 원망하는 뜻이 들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뇌물 수사과정에서 하나 둘씩 자백을 하는 그의 참모들을 향하여 '신세를 졌다'고 표현하면서 은근히 그것을 원망하는 표현을 쓰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의 그 시작 부분에 '남은 여생의 짐을 죽어서 풀겠다'는 의미를 풍기고 있다. <실성왕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언 비교>
결국 일국의 대통령을 지냈던 노무현은 자신이 애써 만들었던 사저의 뒷산 그가 평소 신성시하여 자랑하기도 했던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역사에서 '최고 통치자'가 스스로 만든 이 희대의 사건은 1천 6백년 전 서라벌에서도 그대로 벌어졌다. 실성왕은 낭산의 문루에 올라가서 스스로 몸을 던져 투신자살했다. 부엉이 바위는 거대한 성문 처럼 양쪽으로 벌어져 있다.
5. 낭산(狼山)의 선대(仙臺)는 어떤 곳이었나
실성왕이 투신자살한 낭산(狼山)의 '작은 성(小城)'은 어떤 곳인가? 그 낭산에 실성왕이 쌓았다는 선대(仙臺)와 그 바깥쪽에 쌓았다는 '작은 성(小城)'은 어떤 곳이었을까?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선대(仙臺)가 나온다. 신라의 대등들이 화백회의를 하는 곳이다. 드라마상 그 장면은 문노와 함께 절벽 아래 물 속으로 떨어졌던 천명공주가 다시 살아돌아와 그곳 대등회의를 하는 선대(仙臺)에 나타나는 장면을 연출했던 곳이다.
신라와 같은 시기의 당나라의 선도(仙道)에서 선대(仙臺)는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찾아보니 당나라 무종(武宗, 841-846)이 세운 선대(仙臺)의 개념은 "선대(仙臺)를 쌓아 수련하면 안개가 되어 올라가 구천에 노닐면서 강복과 성수를 누리며 장생의 낙을 영원히 보전한다"는 것에서 파악할 수 있다.
당나라의 선대(仙臺)는 대궐 안에 쌓았는데 그 높이가 '150자'였다고 했다. 그 선대(仙臺)를 쌓기 위하여 3천명이 동원되어 흙을 옮기기도 한 것을 보면 토대는 흙으로 쌓은 50미터 정도의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개가 서리면 높은 산은 안개가 산을 따라 올라간다. 그래서 천상인 아홉하늘인 구천을 올라 복과 장수를 한다는 도가적인 장생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선대(仙臺)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올라가면 산 아래로 운해(雲海)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은 신선이 노니는 곳으로 신라에서는 그러한 신선을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여 <화랑세기>의 7세 설원랑 조에서 오는 화랑도의 한 파로 등장하는데 문노의 호국선과는 달리 향가를 잘하고 청유를 좋아하며 골품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따랐던 선도(仙徒)들의 그룹으로 나와 있다. 선대(仙臺)가 있던 낭산(狼山)은 신라의 '해돋는 동산'으로 신라의 왕기가 서린 곳이다. 신라 신화에서 기본적으로 낭산(狼山)은 그 어떤 외적의 기상이 살아남을 수가 없는 신성한 곳이었다. 친고구려파 실성왕의 신라종실 멸살음모가 발각되면서 그는 낭산(狼山)으로 도망쳤고 그가 세워놓았던 그 낭산의 작은성(小城)의 성루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투신자살하여 죽었다.
아마도 실성왕은 고구려 선도(仙道)에 빠져 스스로 만든 낭산(狼山)의 선대(仙臺)의 소성(小城)에 올라가면 죽지 않고 장생할 것으로 믿었는지도 모른다.
고구려에서 10년간 인질로 있으면서 고구려 공주와 혼인하고 고구려의 선도에 심취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인질에서 신라로 돌아와 왕이 된 뒤에 서라벌 동쪽 낭산(狼山)에 세운 선대(仙臺)는 아마도 당나라 무종(武宗)이 불교를 배척하고 선도(仙道)를 강화시키던 때에 궁궐 안에 만든 선대(仙臺)와 같은 스타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당나라 무종(武宗) 5년(AD. 845년)에 만들었던 선대(仙臺)는 어떤 모양이었는지 다음 글에서 따로 다루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그 선대를 세웠던 낭산에 대하여 좀더 천착해보기로 하겠다.
서라벌에는 신비로운 산들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낭산이다. 토함산과 남산 그리고 선도산은 어느정도 알려져 있다. 낭산은 토함산 남쪽 자락 서라벌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으며 반월성 - 첨성대를 잇는 동쪽으로 해중능을 바라보는 방향에 낭산(狼山)이 있다.
선도산(仙桃山 = 西述山)이 신라의 조상과 지신을 모신 서산이라면 낭산(狼山)은 서라벌의 해가 돋는 곳으로 새로운 왕이 태어나는 상징적인 '해돋는 동산'이었다.
실성제가 자살하기 전 평소에 낭산의 기운에 대하여 스스로 감탄하고 상서로와 했다. 그것은 마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소에 봉하마을의 산세와 더불어 부엉이바위를 상서로운 바위로 치켜올리던 것과도 너무나 유사하다.
'누각구름'이나 '향풍((香風)'이 인다고 실성왕이 감탄해 했던 그 낭산은 신라의 신선풍류도에서 신화적인 신라의 미래를 가진 산임에 틀림없다. 신라의 상서로운 기운에 고구려의 기운이 스러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할만한 산이 낭산(狼山)이다.
보금(실성왕)은 자신이 장차 투신자살할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신라 종실의 내물왕의 아들 둘을 인질로 보내고도 또 암살하려 했다가 그 자신 스스로 낭산(狼山)에 작은 성(小城)으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투신자살해야 했다. 실성왕 13년 (AD. 415년)의 기사를 보자.
五月 狼山仙臺成命築小城于其外 - 박창화, <실성기(實聖紀)> -
5월, 낭산(狼山)에 선대(仙臺)가 낙성되었다. 그 바깥쪽에 작은 성(小城)을 쌓았다.
누가 알았으랴. 그렇게 신성하다고 생각하여 그곳 낭산에 스스로 만들었던 '작은 성'의 성루에서 그 자신이 투신자살할 줄이야!
실성왕에 의하여 선대(仙臺)가 만들어진 뒤에 선대는 신라 멸망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천6백년 후 텔리비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재현된 선대(仙臺)의 그 바깥 쪽에 세웠다는 실성왕이 세운 작은 성(小城)은 친고구려파 보금(실성왕) 자신이 투신자살한 곳이다.
*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선대(仙臺)의 촬영지인 담양의 금성산성 선대(仙臺) '바깥 쪽 작은 성(小城) 성루에서 신라 18대 실성왕實聖王, 재위 402-417)이 스스로 몸을 던져 투신자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이 쌓은 사저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자살한 때로부터 1592년 전의 일이었다.
그토록 아끼고 신성시하던 낭산과 그 선대(仙臺) 자체의 성루에서 떨어져 스스로 투신자살한 실성왕을 보면서 21세기 노무현 전대통령의 봉하마을 애향심과 그토록 그 자신이 어린 시절 '영감을 받은 바위'로 신성시하고 자랑하던 그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투신자살한 것도 거울 속에 비치기라도 하듯이 한 쌍의 닮은 그림자이다.
영남출신으로서 노무현 전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친호남 대권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좌파인물로 영남토박이 사람들을 배제하고 인터넷에서도 박해를 했던 대통령이었다. 필자가 지난 10년 기간 국민고충처리위원회라는 기관에서 당한 고충은 잊을 수가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책임을 질만한 관리가 있다면 그 사정의 전후 내막의 모든 진상을 파악해 보라. 필자에게 상을 내리고 필자의 문화사업을 지원해도 못마땅할 정부가 한 일이 어떠한 일이었는지를!
노무현 전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만났다. 김정일은 마치 '사위'나 되는듯이 환대했다. 그러나 임기중 국회에서 탄핵되어 직무정지까지 되기도 하여 끝내 '선출된 대통령'은 아니었으며, 법적으로 재신임된 대통령으로서 임기말년에는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리다 후계를 자신의 정당 후보로 세우지 못하여 정권을 빼앗기도 도망치듯 그가 만들어 놓았던 고향 사저로 내려갔다.
그곳으로 가져가버린 국가기밀이 담긴 청와대 컴퓨터를 놓고 청와대와 '사저'는 눌지왕과 실성왕이 대치한 소성(小城)과 같은 곳이다. 이명박정권의 등장과 함께 노무현은 퇴임하자마자 그가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는 달리 그토록 그가 자랑하던 그의 고향으로 '쫓겨가듯' 낙향을 서둘렀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지지세력의 중심이었던 호남이 아닌 그의 고향 봉하마을에 '작은 성'과 같은 저택을 만들었다. 그 뒷산에 있는 '문루'와도 같은 부엉이바위를 상서로운 바위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눌지왕과도 같은 새로 등극한 반대편 정당의 이명박정권으로부터 640만달러의 뇌물 수수혐의로 사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거의 '자택금고상태'에 빠진 모습은 실성왕이 갇혀 있던 소성(小城)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
수사과정에서 서울로 버스로 불려다니던 노무현의 처지는 1천6백년 전의 친고구려파 실성왕 보금이 낭산에 스스로 만든 '작은 성'에 포위되어 그의 '사신(使臣)'을 신정권 세력에 파견하던 것과 같은 형국을 맞이했다.
우리 민족 역사에서 전무후무했던 성루에서 실성왕이 투신자살하듯 노무현 전대통령은 봉하마을 그의 '작은 성' 뒷 '문루' 부엉이 바위에서 스스로 뛰어 내려 투신자살했다.
부엉이와 늑대(狼)는 다같이 밤에 운다.
6. 실성왕의 시신수습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 수습
노무현 전 대통령은 투신자살하고도 그 시신 수습에 많은 소문이 따라 다녔다. 결국 국가적인 예우를 받아 그가 투신자살한 그 지역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그대로 1천 6백년 전 신라 18대왕 (實聖王, 재위 402-417)의 투신자살 직후의 상황과도 너무나 유사하다.
촛불이 재현되듯 전국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추모' 열기에 빠져 여당의 어떤 대표는 '폭동이 일어날까 걱정된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박창화의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의 내용은 어땠는지 그대로 옮겨본다.
大雨暴風群臣以爲先帝之崇乃使阿老聖命祭先帝于豆乙宮命好原收帝魄于狼山七日流久味等十五人于阿瑟羅神山以河期爲摠行?判大赦國中. - 박창화,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 -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지고 폭풍이 불자 군신들은 선제(先帝: 실성왕을 말함)의 빌미(?)라고 했다. 이에 아로(阿老, 실성왕의 차녀)와 성명(聖明, 실성왕의 후궁)으로 하여금 두을궁(豆乙宮)에서 선제(先帝)를 제사하게 했다. 호원(好原, 눌지를 보필하는 兵官)에게 명하여 낭산(狼山)에서 제(실성왕)의 시신(魄)을 수습하게 했다.
노무현 장례식을 몽땅 추모파 주동자들이 바라던대로 해주었다. 실성왕의 장례식도 그의 신하였던 (阿老)와 성명(聖明: 실성왕의 후궁)에게 맡겼다. 그 시신 수습 또한 장지 또한 모든 것을 노무헌 전 대통령 측근들이 원하는대로 해주었다. 전직 여총리는 장례 조사에서 "다음 세상에서는 정치하지 마십시오"라고 읊었다.
부엉이 바위 아래에 투신하여 떨어진 노무현 전 대통령 시신을 청와대 직할로 되어 있던 봉하마을 경호원들이 옮겨가는 과정에 대하여 많은 소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실성왕의 시신에 대하여서도 "난군(亂軍)들이 훔쳐갔다고 했다"라고 '...했다'라고 인용식으로 쓰고 있다. 사실이라기보다 그렇게 들었다는 것이다.
九月葬帝于狼山先是河期怨帝曝帝魄于仙臺之庭以爲亂軍偸去時聖明得寵有娠夢見帝在仙臺木奴花下而泣聖明乃泣訴于王曰吾母亦以實聖之妃受幸于聖父而生我兄何怨?而不葬叔乎恐有不祥于吾腹兒盖阿老不能自訴故使之言也王乃搜木奴花下得帝魄玉體不變如初乃具棺槨備禮而葬之賞收魄老?母子以布穀帝身長七尺五寸腰圍甚大一夜能御五宮少時明達有遠識能攬衆心及爲尼昑好色多寵猜忌近臣王子背恩聖母以至不能令終惜哉. - 박창화, <實聖紀> -
9월(AD. 417년)에 제(帝, 실성왕)를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이에 앞서 하기(河期)는 제(帝, 실성왕)를 원망하여 제(帝)의 시신(魄)을 선대(仙臺)의 뜰에 내버려두었는데 난군(亂軍)들이 훔쳐갔다고 했다. 당시에 후궁 성명(聖明)이 총애를 얻어 임신하고 있었는데 꿈에 제(帝, 실성왕)가 선대(仙臺)의 목노화(木奴花) 아래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대개 아로(阿老)가 스스로 호소할 수 없는 까닭에 그를 시켜 한 말이었다. 눌지대제가 이에 목노화(木奴花) 아래를 찾게 하여 제(帝)의 시신(魄)을 찾을 수 있었는데 옥체(玉體)는 처음과 똑같이 변함이 없었다.
이에 관곽을 갖추고 예(禮)를 차려서 그를 장사지내고 백체(시신)를 거둔 노파 모자(母子)에게 포곡(布穀)으로 상을 내렸다. 제(帝, 실성왕)는 신장(身長)이 7척 5촌이고 허리 둘레가 심히 커서 하루 밤에 능히 5궁(五宮)을 거느릴 수 있었다. 어려서는 사리명철(明達)하고 멀리 내다보는 식견(遠識)이 있어서 능히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었으나, 닛금(尼昑)이 되기에 이르자 호색다총(好色多寵)하며 근신(近臣)과 왕자(王子, 내물왕의 왕자)들을 시기하고 성모(聖母)에게 배은망덕(背恩)함으로써 명대로 살다가 마칠(令終)수 없기에 이르렀다. 애석하도다.
제 명대로 살 수 없었다고 한 이유가 어렸을 때는 사리에 명달했으나 왕이 되고 나서 근신과 내물왕의 왕자들을 시기하고 배은망덕했다는 것이다.
실성왕(보금)이 내몰린 죄명 중에는 태후에게 불복종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반태후는 <삼국유사>에서 '내례길포(內禮吉怖)'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필자의 앞선 글에서 다루었지만, 신라의 옥모태후와 고구려의 중천왕과의 '연애사건'은 이렇게 신라왕조에서는 친고구려파들을 청소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엉이 바위 투신자살에 대한 국민적 충격은 이제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직 대통령의 난데없는 투신자살에 대한 역사적 전거의 경우를 필자가 찾아내 비교하고 해석함으로 해서 우리의 역사 이해에 있어서도 그 인식의 당황함을 벗어나는 수단에만 머물지 않고 앞으로 우리의 분단 역사의 앞날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 될 것이다.
7. 실성왕 투신자살과 노무현 전 대통령 투신자살의 역사적 의미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전에 <경주의 신라 우물 인골은 누구였나?>에서 풍월주 용춘공 낭두였던 대남보의 딸이 그 신라 우물에 투신자살했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투신자살한 인골의 주인공을 찾아낸 글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의 전형을 필자는 이 글에서 1천 6백년 전의 신라의 실성왕에게서 찾아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 사건이 일어난 남북 분단시대는 1천6백년 전 신라와 고구려 세력간에서도 같은 패턴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이 글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투신자살'의 주인공이었던 신라의 왕은 '친고구려' 왕이었고 그의 부인은 고구려 공주였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이미 옥모태후와 고구려 중천왕 사이에 벌어졌던 '연애대전'과 그 '퍼주기' 사건에서 신라와 고구려의 '남북갈등'은 양 국가 내부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퍼주기'는 고구려가 신라에 적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로 끝이 났다. 이에 대하여 필자의 앞선 글 <역사산책> 신라의 옥모(玉帽) 황후와 고구려의 중천제의 '연애대전' 누가 이겼나 에서 이미 다루었다.
신라와 고구려의 대결은 옥모태후의 영향을 어떻게 정리했는가에 따라 그 내부 정치의 역사적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신라의 옥모성모를 모시면서 '계림성모사'까지 만들어 신라김씨 육조(六祖)를 모시기까지 하고, 옥모황후의 아들 '달가'에게 '안국군'의 자리와 함께 병권까지 주어 그 영향력을 나중까지 유지하게 했다. 그런 반면에 신라에서의 눌지가 친고구려세력인 실성왕을 완전히 제거한 것에서 차별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인질로 있던 중 고구려 공주를 왕비로 삼고 정치적으로도 친고구려왕이었던 보금(실성왕)이 신라 종실의 눌지태자를 제거하려 했다는 것은 결국 그의 투신자살의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그 사건은 신라 내부의 고구려파들의 '자멸'을 의미했다.
눌지태자를 옹위하여 친고구려계 보금을 몰아낸 보반황후의 활약은 일찍이 옥모황후가 중천왕과의 '연애대전'에서 승리한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고 하겠다.
멀리는 삼국간의 대치가 신라의 삼국통일로 귀결됨으로써 낭산으로 도망쳐 버티던 보금왕(실성왕)이 문루에서 투신자살한 것은 고구려가 결국 투신자결한 것과 같이 된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필자의 이러한 희한한 유사성 대비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이 들까? 이미 필자는 노무현씨가 대통령 선거 출마 때에 노무현과 광해군의 유사성에 대하여 비교하고 그 결말이 비극으로 끝날 것을 예측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동시에 그 글에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아브라함 링컨의 암살 사건을 비교 대조한 미국인들의 대조를 필자가 소개한 바 있다. 그에 대하여서는 <칼 럼>숙명의 '3월12일' 광해군말로와 노무현 탄핵 에서 볼 수 있다.
남아 있는 말
작년 2008년 설날 숭례문(남대문)이 불타기 시작한 2시간 내에 필자의 글 <남대문 화재와 봉황의 저주>가 인터넷에 올라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퍼갔으며 그 결과 중앙일보를 비롯하여 많은 인터넷 신문들이 기사화했다.
그 당시 한국의 Q채널 케이블 TV 방송(현,중앙방송)의 작가가 필자에게 국제전화로 인터뷰를 한 바 있다. 그 작가는, 역사를 전공하고 역사에 관한 글을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오랫동안 써온 필자에게 '무속적 예언가' 이미지가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2백회 이상 써온 필자의 <신화이야기>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많은 예지와 시사에 대한 즉흥적 본능으로 쓴 글들이다. <남대문 화재, 봉황의 저주>는 그렇게 하여 청와대 봉황 철폐를 취소시켰다.
숭례문 화재의 재난은 숭례문을 개방한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기 한달 전에 '청와대 봉황을 없애겠다'고 한 필자의 글의 예언성에 대하여 방송작가는 '무속적 예언가'로 필자를 평가한 것이다. 사실상 필자의 경고는 정부에서 받아들여졌을 때 새로운 국가적 변화가 왔다.
숭례문이 불탄 후 그 심각성을 알고 이명박정권이 들어선 뒤에 재난 안전실을 만들어 대비에 나섰다. 더불어 필자의 강력한 주장과 더불어 이명박 정권은 '청와대의 봉황 철폐 취소'를 선언함으로써 더 이상의 큰 재난이 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봉황제거 취소의 결과일까? 그 대답은 국민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정신을 차릴 때에 재난이 물러가는 것일 따름이다.
필자가 나중에 알았지만, 숭례문 화재 후 3월에 이명박 정권은 행자부에 재난 안전실을 새로 만들면서 그 칭호도 '행안부'로 고쳐 재난을 예방할 책임자를 군장성 가운데 전문가를 선발해 선임했다. 더 이상의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재난에 대한 '군전문가'를 불러 임명한 것은 그 시기의 이명박 정권의 '고소영 인사'에 대한 비난과는 달리 참신한 결정으로 받아들여진다.
더불어 사실상 봉황문양 철거 취소를 선언한 결과 다른 정치적인 부분과는 달리 더 이상 큰 재난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신기하게도 이명박 정권이 잘 해온 부분의 하나라는 점이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하여 많은 국민들이 반대한 대운하도 결국 취소를 결정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그 어떤 부정한 행위나 국민포용적이지 못한 정치에 대해서는 노무현 정권의 말로처럼 가차없는 국민적 비판을 직면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경선에 승복한 박근혜 전대표에 대한 예우는 언제나 요의 주시하는 국민들의 시선이 있다는 것은 이명박 정권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정치 잣대의 척도로 작용할 것이다.
친고구려파가 신라의 정통 왕실 인물인 눌지를 제거하려 할 때 일어난 일은 심상치 않은 일로 치달아갔다. 눌지왕은 태어나자 마자 '스스로 해가 뜨는 방향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신라의 태양사상을 타고 난 인물이었다.
是日奈勿果幸保反于眞經堂有娠而生神異自知日出之方人多奇之 - 박창화, <눌지천왕기(訥祇天王紀) 1>
이 날 내물(奈勿)이 진경당(眞經堂)에서 보반(保反)황후와 동침(幸)하였는데, 임신을 해서 (눌지왕을) 낳으니 신이(神異)하여 스스로 해가 뜨는 방향을 알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내물왕과 광명태후가 낳은 눌지왕이 "나면서 해 뜨는 방향을 스스로 알았다(有娠而生神異 自知日出之方)"고 한 표현은 친고구려파에게 화를 입을 뻔 했던 눌지왕의 신라 토박이 아이덴티티를 신라의 사관이 드러내고자 한 의미심장한 내용이라 하겠다.
낭산은 신라 중에서도 신라적인 곳이었다. 새해가 되는 동짓날 해중능 위로 뜬 새해가 뜨는 그런 신라의 '내일(來日)'이 뜨는 산이 낭산이다. 실성왕이 신라의 신기(神器)를 가지고 도망친 것은 자신이 신라 왕실의 대통을 끝까지 차지하고 싶어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낭산의 새로 솟아오르는 태양인 주인인 눌지태자를 암살하려 했던 것이다.
신라의 태양사상에서 선도산이 서라벌의 태양이 지는 서쪽의 서산이었다면 토함산은 해가 돋는 동산이었다. 선도산(仙桃山 또는 桃山)은 신라 왕실의 조상들과 신국(神國)의 제의적인 장소였기에 서라벌에서 서산으로 진 태양(역대 조상 왕들)을 모시는 서쪽 산의 묘당이 있어 서술산(西述山)이라고도 했다,
선도산仙桃山)과 대조적인 방향에 있는 토함산 자락의 낭산(狼山)은 동짓날마다 해중능 위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해가 낭산 봉우리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새로운 해(왕)가 태어나고 신라의 미래가 솟아오르는 해돋는 동산이다. 그래서 낭산은 해중능에서 떠오른 해를 잠시 품었다가 다시 서라벌로 토해 낸다고 하여 '吐含山(토함산)'이라 했다는 것이 필자의 토함산 풀이이다.
선도산과 낭산은 연중 일반적인 서산과 동산이라고 할 수 있다면, 동짓날 해돋는 방향으로는 옥녀봉을 중심으로 서라벌은 해중능을 향하여 태양을 맞이하는 태양의 길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서는 필자의 앞선 글 <문화비평> 문무왕보다 앞서 해중능으로 간 선덕여왕(善德女王)에서 이미 다루었다.
서라벌 서북서 방향의 옥녀봉을 기점으로 해중능으로 이어지는 길은 동짓날 새해의 첫 해돋는 '동남동'의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짓날 해중능에서 뜨는 해는 낭산 위로 떠서 반월성 위를 지나 첨성대를 넘어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의 향동지일출(向冬至日出) 라인이다. 선덕여왕이 묻혀 있는 낭산은 그래서 신라의 '내일(來日)의 왕들'이 오는 산이며 서라벌의 동산(東山)이며 그 자체가 해를 머금었다 토해내는 '吐含山'이다.
*서라벌 유적들과 동짓날 일출 방향 향동지일출(向冬至日出) 라인 옥녀봉 - 첨성대 - 반월성 - 선덕여왕릉 - 대왕암(해중능)
신라의 전통 태양숭배는 석굴암의 본존불의 방향이 해돋는 해중능의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낭산에서 실성왕이 스스로 만든 소성(小城) 성루에서 떨어져 투신자살하여 죽은 것은 실성왕의 태양은 반월성 넘어 선도산으로 가지 못하고 낭산의 자신이 파놓은 '우물'에 떨어져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선덕여왕이 반월성 서쪽에 만든 첨성대는 서라벌 전체의 상징적인 '하늘 우물'이며 신라의 태양들(왕들)이 다시 바다로 지는 우물이다. 그래서 다시 해중능 바다 위로 환생하여 뜬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반월성의 모든 왕들이 첨성대 우물을 통하여 '하늘 바다'로 간다고 여겨 선덕여왕은 첨성대 '하늘 우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실성왕은 그 첨성대로 지는 해가 아니었다. 스스로 키운 개에게 잡아먹힌 일식된 해가 되었다.
고구려 인질 10년에 고구려 공주와 결혼하여 신라 종실의 눌지태자를 암살하려 한 실성왕의 투신자살은 그래서 신라의 정통성을 말살하려다 스스로 맞이한 죽음이 되었다. 그 시작이 고구려 공주와의 결혼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부인 권양숙 여사와의 결혼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이해된다. 그러나 분단시대의 대통령으로서는 아무리 연좌제가 해제되고 또 문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롤 모델' 위치에 있어야 하는 남한의 대통령 자리에는 애초부터 격에 맞지 않은 형국이었다. 필자는 그것을 이미 그 당시의 글에서 광해군과 비교하여 경고를 했었다.
스스로 자격에 대한 컴플랙스로 고 노무현씨는 자주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하였고, 국회는 그를 다수결로 탄했했다. 그 결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은 역사적으로 흔치 않은 사건이 된 것은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이제 필자의 추적으로 찾아낸 삼국시대의 실성왕의 투신자살과 비교한 결과 실성왕의 투신자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의 역사적 교훈의 그림자의 하나로 비치고 있다.
두 통치권자 모두 당당하게 신 정권을 통하여 자신의 죄과를 백성과 국민앞에 비판받았더라면 그것은 국가적 역사 속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투신자살의 결과는 어리석은 개인적인 옹졸함과 소인배적인 이미지만 남기게 된 것이다.
필자의 이 글은 그 역사적 과거를 들추어 내어 나라의 앞을 내다보고 다시 반복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글이라는 것을 이 글을 심각하게 읽는 분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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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홍근 원문보기 글쓴이: 小岩
첫댓글 조홍근 선배님 이런 글은 언제 올려 놓으셨습니까? 낙담, 충격이며 실망스러움을 숨길 수 없습니다. 늘 균형감 있는 선배님으로 선생님으로 존경했습니다. 이제는 마음을 돌려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