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우도 코스 돌고나서 쏠레에서 짐을 찾아 바로 서귀포 숙소로 옮겼습니다.
1~3코스 외에 다른 코스를 돌기에는 성산보다 서귀포 교통편이 편리합니다.
서귀포 숙소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민중각을 미리 예약해놓았지요.
민중각은 옛 모텔 건물을 손 봐서 올레꾼 전용숙소로 내놓았는데,
부부 사장님이 올레꾼들과 워낙 잘 어울려서 사람냄새가 제대로 나는 곳입니다.
저녁이면 땡볕과 바람에 벌겋게 상기되고 종일 걸어서 절뚝거리며 돌아오는 올레꾼들을 위해
김치전 몇장 부쳐서 정겨운 막걸리 파티도 종종 열어줍니다.
이 모임에는 서귀포 출신으로 올레사랑이 각별한 이유순 시인께서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데,
막걸리 한잔 걸치면 감동 그득한 자작시를 낭송해서 흥을 돋우기도 합니다.
올레꾼들은 막걸리 한순배씩 돌려가며 자신이 걸었던 올레길에 대한 경험과 정보를 교환하며 새로운 인연을 맺어갑니다.
고적한 숙소에서 자아와의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나 홀로 여행도 의미 있지만,
여러 올레들꾼과 함께 어울리며 인연을 만들어가는 것도 올레여행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민중각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틀째 올레 걷기를 위해 나서는데, 민중각 사장님이 우의를 준비했냐고 묻습니다.
이번에는 따로 우의를 준비해오지 않았고, 날이 흐리기는 하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고 했더니,
오후에 비가 온다고 했다며, 잘 보관해놓은 1회용 우의 두벌을 내줍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낭에 넣고 나왔는데, 실제로 오후 들어 9코스를 돌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우의 덕을 톡톡히 봤지요.
이번 여행의 둘째 날은 지난 여행 마지막 날 절반만 걸은 7코스 나머지 절반과
제주올레 코스 중 제일 짧은 9코스를 돌기로 합니다.
오늘의 출발점 풍림리조트 산책로입니다.
제주에서 거의 유일하게 은어가 서식하는 강정천이 아이 뒤로 흐르고 있습니다.
강정천을 따라 잘 꾸며놓은 산책로를 잠깐 걷고나면 바로 강정포구로 향하는 신작로가 이어집니다.
강정포구 가는 길...날이 잔뜩 흐려 걷기는 좋습니다.
강정포구는 해군기지가 들어오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합니다.
아이와 함께 걷는 길가에도 ‘해군기지 결사반대’ 깃발이 펄럭이고 있습니다.
단기적 성과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됩니다.
강정포구에서 월평포구로 쭈욱 이어진 길.
시멘트로 포장돼 있어서 볼품없지만, 눈길만 조금 돌리면 시원한 바다와 마주할 수 있어서 조금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최근 제주 여행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포구.
바다를 막고 있는 바위가 작은 배 한척 드나들 정도의 너비로 절묘하게 트여 있어서 천연 제방의 역할을 합니다.
월평포구는 7코스 종착지이자 8코스 출발점입니다.
대략 8km 정도를 걸어 7코스 나머지 절반을 걸었으므로 다시 버스를 이용하여 9코스가 시작되는 대평포구로 이동합니다.
9코스가 시작되는 대평리 마을의 용왕난드르라는 식당입니다.
동사무소처럼 생긴 건물이지만, 올레꾼들에게 나름 유명 맛집입니다.
지난번 8코스 걸을 때 아들이 서귀포 관촌밀면을 고집해서 한참 아쉬워했던
보말 수제비와 강된장 비빔밥으로 좀 이른 점심을 때우려고 찾았습니다.
곁들이 반찬 항공촬영.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하나같이 정갈하고 맛납니다.
아들이 주문한 보말 수제비. 보말, 아시죠? 제주도 방언인데 다양한 바닷고동을 일컫습니다.
보말로 구수하게 국물을 내고, 생미역을 수제비와 함께 넣고 끓였습니다.
배릿하면서도 구수한 수제비에 아들도 대만족입니다.
제가 주문한 강된장. 여기도 보말이 적잖이 들어갔군요.
강된장 비빔밥을 시키면 요렇게 각종 나물을 가지런히 담은 비빔그릇이 함께 나옵니다.
든든히 점심을 먹었으니, 이제 9코스 걷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9코스는 이곳 대평포구에서 시작하여 대평리 한쪽을 막아선 저 아찔한 바위절벽, 박수기정과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꼽히는 안덕계곡을 거쳐 화순해수욕장에서 끝납니다.
사진으로 보이는 박수기정은 130m의 수직절벽으로 오른쪽 숲길을 통해 올라가는데,
맨 위에는 놀랍게도 드넓은 숲과 평원이 펼쳐집니다.
박수기정을 올라가는 길은 이렇게 호젓하고 다소 가파른 숲길입니다.
올라가는 길에 잠시 숨을 돌리다 보면, 이렇게 울창한 숲 사이로 대평리의 평화로운 전경을 내려다볼 수도 있습니다.
박수기정 올라가는 길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비치던데, 날이 흐리지 않았다면,
대평포구의 시원한 풍광을 선사해드릴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감자와 호박밭, 숲길로 이어지는 평원을 지나오면 기정길과 볼레낭(보리수) 길이 이어집니다.
130m의 수직벼랑 위를 걷는 길입니다. 이 길을 복원하면서 화순선주협회 분들이 벼랑 끝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튼튼한 밧줄로 펜스를 만들어놓았지만, 잠깐만 내려다봐도 현기증이 일 정도입니다.
9코스 종착지 화순선주협회 건물. 박수기정에서 내려오면 안덕계곡으로 이어지는 황계천이 나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다 아이마저 힘들어해서 제주의 비경 중 하나인 안덕계곡 트래킹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습니다.
황계천 다리에서 잠시 화순마을 길을 걸으니 종착지가 나오는군요.
에고, 허망해라. 비가 와서 조금 위험하기는 했겠지만, 안덕계곡을 빼고 나니 9코스가 이리 짧을 줄이야.
결국 안덕계곡은 포기하고 예쁘게 조성된 화순 마을 도로를 따라 다시 서귀포행 버스를 타러 갑니다.
시간이 너무 일러 비가 올 때도 안전한 서귀포 시가지 올레, 6코스 절반만 걷자고 아이와 타협을 합니다.
다시 외돌개 솔빛바다. 조그맣고 예쁜 찻집입니다.
이곳에 온 이유는 6코스 거꾸로 올레 걷기를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난번 소개드린 소깍이와 놀아주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소깍이는 비가 오는 관계로 난과 분재로 가득한 비닐하우스로 옮겨서 묶어놓았더군요.
사람의 손길이 그리운 외롬쟁이 소깍이와 한참을 놀아주고 외돌개 뒤쪽 오름인 삼매봉을 오릅니다.
삼매봉을 오르다 바라본 문섬. 촉촉이 비가 내리는데다 해무까지 잔뜩 끼어 전망 제로입니다.
맑은 날에는 외돌개 앞바다와 서귀포 시가지 조망명소라지만,
초여름 비오는 저녁에는 촉촉하게 젖어드는 숲길을 오롯이 걷는 즐거움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어둑할 무렵이어서 올레 표식을 못 찾고 길 따라 삼매봉을 내려오니 어디 내어놓아도 빠지지 않을 세계적인 미항,
서귀포항으로 이어지는군요. 몇해 전 가족여행을 와서 렌트카를 몰고 구불구불 삼매봉 길을 내려오다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마주친 서귀포항의 아름다움에 반해 헉,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제주의 바닷물색은 언제 보아도 사람의 넋을 빼앗아갑니다.
비를 피해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오래 전 유행했던 김장훈의 오페라를 읊조렸더니 아이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오페라, 오페라, 오페랄랄랄라~’ 하는 후렴구절이 귀에 익다며 장난스레 따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쳐 걸었던 탓에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아이와의 작은 교감에 감사하며 마지막 발길을 재촉합니다.
이날의 마지막 여정 천지연폭포 주차장에서 간식으로 먹은 감귤찐빵.
천지연 입구 상가에 감귤찐빵 집에서 먹은 것인데, 팥소와 외피에 감귤이 듬성듬성 들어있습니다.
감귤향이 은은한 게 맛 좋습니다. 입소문을 타고 감귤찐빵을 찾는 올레꾼들이 많아져서 요즘 장사하기 괜찮답니다.
이댁 사장님께서 아이가 대견하다며 감귤 비스킷도 하나 내어줍니다.
천지연폭포. 빗발이 제법 굵어진데다 날마저 어두워져 천연온대림 숲을 감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저 무념무상의 상태로 산책로를 걸어 천지연폭포에 도달했습니다. 신통하게도 아이는 아직 웃음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천지연폭포를 마지막으로 이날 여정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조금씩 세차게 뿌리는 빗방울이 부담스러웠지만, 따뜻한 짬뽕 생각에 서둘러 덕성원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