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출판사가 2007년에 발행한 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 중 제3편의 제1장에 허미수의 단군세기라는 서명이 나온다. 단군세기(檀君世紀)의 한자 표기가 환단고기 중 단군세기와 같다. 이 책이 다음을 증명한다. 단군세기는 단군 조선의 정사의 한역본이다.
단군세기가 1363년의 한역 후 우여곡절을 겪었다. 약술하면 이렇다. 단군 조선이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인 새끼줄 악서로 사서를 지었다. 그 새끼줄 사서가 3,696년 동안 123세대의 악사들에 의해 전승됐다. 고려 말에 이암이 그 새끼줄 사서를 한역했던 문서가 단군세기이다.
단군세기가 한역 후 널리 읽혔다. 당시 식자층이 거의 다 읽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 단군 열풍이 불었다. 그런데 단군세기의 기사 중 당시 명나라의 조정이 격분했을 만한 내용이 있다. 그 기사가 ① 부를 사태를 우려하여 우리 조정이 선제적--선수를 쳐서 상황을 호전시키는--조치를 취했거나 또는 ② 명나라의 추궁--잘못한 일에 대하여 끝까지 따짐--을 불렀다고 추측한다. 임금이 결국 민가가 보유한 단군세기의 사본들을 모두 수거하여 불태웠고, 단군세기는 금서가 됐다.
현대인이 그런 우여곡절의 사연을 모르고, 위서로 의심한다. 하지만 위서가 아니다. 580~620년 전 상황이 무척 심각해서, 그처럼 진행됐을 뿐이다.
단군세기가 단군 조선의 정사의 한역본이라는 증거 중 하나가 허미수의 단군세기이다. 근대 조선 초의 수서령에 응하지 않고, 단군세기를 간직했던 사람이 있었고, 허미수가 그 사본을 얻어 공개했으리라. 허미수가 조정의 간섭을 걱정했던 듯하다. 그래서 단군세기 앞의 이암의 서를 뺀 채 공개했다고 짐작한다. 그것이 신채호가 단군세기의 내력을 추측하지 못 했던 까닭이었으리라.
이처럼 한때 널리 유포됐던 문서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더구나 근대 조선 초에 단군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단군 조선의 정사가 이 조선 땅에서 사라질 리가 있겠는가? 그럴 리는 정말 없다. 조선 사람의 넋이 먼저 사라지지 않는 한, 단군세기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으리라.
단군세기의 수거에 응하지 않았던 집들이 더 있었다. 평안북도 태천에 사는 백관묵의 조상이 그랬다. 그 사본을 계연수가 얻어, 환단고기에 실었다. 이를 봐도 단군세기가 위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중 단군세기가 위서라면, 허미수의 단군세기는 뭔가? 두 위서의 지은이가 위서를 썼는데, 제목이 같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두 단군세기가, 내용 또한 같으리라고 본다. 위서라면,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두 단군세기가 15세기 초의 수거에 응하지 않았던 사본임을 알 수 있다. 단군세기는 근대 조선의 초기에 널리 유포됐던, 단군 조선의 정사이다.
위처럼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가 여럿이다. 환단고기는 조상들의 우리말 새끼줄 악서의 한역본들을 모은 책이다. 환단고기를 위서로 의심하는 자들은 바보들이다. 돌대가리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한다. 그런 말들은 돌대가리들의 개소리이다.
우리가 모든 왕조의 정사를 다 갖췄다. 다만, 공개되지 않았거나, 정체를 모르거나, 도난당했을 뿐이다. 우리 역사의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다. 배달유기를 공개하고, 단군세기의 정체를 바로 알고, 백제, 신라, 고구려의 정사를 돌려받으면 된다. 조상들이 불우했다. 현대 한국인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