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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8일-주일2부 (요한복음4:16-26 / 사마리아와 유대인의 해묵은 갈등을 해소시켜주실 메시아)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가 처음 펼쳤을 때 개인적으로 품행이 방정치 못한 여인, 그래서 다섯 명의 남편을 거칠 수밖에 없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본문을 자세히 따라 읽어보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은 단순히 품행이 방정치 못한 인물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의 집단적 상처를 대표하는 인물처럼 부각이 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의 대화가 결정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이 어떤 인물인가를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갈에 시달려서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에 눌러 앉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점점 말이 어려워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14절이 갑자기 어려워지는 본문입니다. 13절까진 괜찮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약간 어려워질 듯한 조짐은 10절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선물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오경이라는 성경만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오경이란 말은 모세오경의 사마리아버전인데 모세오경의 주요한 내용들을 전부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중심으로 본문을 약간씩 수정한 것을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말합니다. 사마리아 모세오경이라는 말이죠. 사마리아 모세오경에는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에 대한 말씀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은 예언서에 나옵니다. 예언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사마리아의 배교 때문에 사마리아가 먼저 망했고, 사마리아는 희망이 없는 일종의 배교자 집단인 것처럼 사마리아를 공격했기 때문에 예언서를 이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오경만 굳게 붙잡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 특별히 신명기 27장이 사마리아의 중심지인 세겜성에서 모든 언약식이 끝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중심도시였던 세겜에서 모든 언약이 끝나는 것,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언약의 체결식이 사마리아 중심지인 세겔에서 끝났기 때문에 모세오경보다 더 추가된 성경은 성경이 아니다 라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고쳤던 대표적인 성경이 이런 겁니다. 창세기 22장에 모리아산,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본문을 어떻게 고쳤느냐면 모래산으로 고쳤습니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습니다. 자음만 써놨습니다. 모래, 렘 레쉬 헤 라고 돼 있습니다. 그걸 약간만 고치면 모리아도 될 수 있고 모래도 될 수 있는데, 이 모리아를 모래라고 고친 것입니다. 이 말은 세겜 땅에서, 이런 뜻입니다. 세겜은 어디입니까? 북왕국의 중심도시, 사마리아의 중심도시입니다. 세겜 땅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쳤기 때문에 세겜 땅이 성스러운 땅이고, 그런데 모리아는 예루살렘을 가리키거든요. 철두철미하게 헤게모니 각축과 갈등을 의식하면서 성경을 약간씩 고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물은 모세오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선물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에스겔서, 예레미야서, 이사야서입니다. 그다음 요엘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한 마음, 집단적으로 강퍅해진 마음을 순식간에 사람의 육신처럼 부드럽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겠다, 이게 선물입니다. 선물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걸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선물, 성령을 주실 하나님으로 자기를 자임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선물을 주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목이 마릅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실 하나님의 아들이 네 앞에 와 있는 걸 알았더라면 네가 오히려 구했을 텐데, 사마리아 사람들 너희가 오히려 구했을 텐데, 이렇게 예수님이 말합니다. 그런데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11절에서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물은 저 깊은 우물 생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2절의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생수를 저 아래 깊은 물로 생각합니다.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기서부터 갑자기 말이 어려워집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종교적 분위기가 나면서 굉장히 난해해져버립니다. 이렇게 말하자마자 15절의 대답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일상생활을 포기하는 듯한 발언입니다. 일상생활의 수고로운 노동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생수입니다. 사실 이런 생수는 사약이죠. 죽어야만 물 길러 오지 않죠.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일이 고달프고, 식사하는 일이 고달프고, 가정을 꾸리는 다 고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고된 일이 하기 싫어서 이런 물을 마시자마자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는 말은 이 여인이 병적인 구원을 원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로부터 잠적하고 싶은 구원입니다. 물 길러 오는 수고는 가정생활이 불행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침에 침대에서 식탁 부엌으로 가는 길이 천리만리 먼 사람은 원수 같은 남편과 같이 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식사를 해주고 싶지 않은 인간과 같이 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금방 눈치를 챘습니다. 약간 도발적입니다. 예수님이 약간 이런 면이 있긴 있습니다. 16절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건 함부로 할 말은 아닙니다. 여자를 보고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예수님이 좀 심했습니다. 이걸 받고 여자가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이 말은 엄청난 어려움이(?) 필요한 말이 아닙니다. 물 길러 오는 수고가 힘든 여인에게는 정상적인 남편이 없는 겁니다.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여기서부터는 예수님은 여론조사를 했거나 뭔가 이 여인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는 지식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일상대화라고 보기엔 너무 기가 막히니까 모든 교부들은 이것을 allegorical 하게 해석을 했습니다. allegorical 한 대화는 이건 실제대화가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오경만 믿고 있기 때문에 모세오경만 믿고 있는 사람을 다섯 남편을 가진 과부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영적인 궁핍함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알렉산더 클레멘터 오리겐 같은 교부들의 해석입니다. 사실 그 해석이 오랫동안 교회사에서 유효한 해석입니다. 우리는 그 해석이 틀렸다고 단정하기 힘듭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 된 병자가 나오는데, 이 38년된 병자는 민수기 본문에 38년 동안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메타포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것도 allegorical하게 해석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allegorical 해석이 참 쉬운 본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해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그런 해석을 2차적으로 참조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일단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게 중요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을 때는 끝까지 해보는 겁니다. 저는 문자적 해석을 끝까지 해봅니다. 그런데 문자적 해석을 하면 좀 도발적이고 무례합니다. 왜냐하면 누가 보더라도 남편을 데려오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친절한 사람이 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슨 말이든 간에 거침이 없는 면이 있는데,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말은 15절에 이 여인이 노출한 정보 때문에 그러는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다시 말해서 정오에 물 길러 오는 여인, 물 길러 오고 싶은 수고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여인, 그 말은 부서진 가정생활의 주인공,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남자를 불러 오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하면 끝나야 합니다. 끝나고 다른 주제로 가야 하는데 예수님은 한 번 물고 늘어지면 끝가지 갑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이 본문을 정상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했을 때 매우 도발적이고 위태로운 지경까지 가는 대화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이 여인이 남편 다섯을 거친 품행 방정치 못한 여인처럼 보였는데 정확하게 20절부터 시작해서 이 여인이 사마리아의 상처를 집중적으로 대변하는 여인, 사마리아인의 슬픔을 대변하는 사마리아의 대표적인 대변인으로 느껴집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다섯 명의 남편을 거쳤고 지금은 기둥서방 같은 남편이 있다는 말입니다. ‘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사실 사마리아는 하나님이 없는, 남편이 없다는 말은 신앙의 중심이 없는, 과부라는 말은 고대 셈족의 어법에서 하나님이 없는, 이런 뜻입니다. 참된 예배가 없는 공동체를 남편 없는 과부라고 생각했는데, 남편 없는 이 여인이 개인적으로 불행할 뿐 아니라 사마리아사람 전체의 불행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실제로 남편이 없는 이혼녀 또는 이혼당한 여자입니다. 이혼당한 여자였던 이 여인이 함께 사는 자는 남편이 아닙니다.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전체가 신학적으로 볼 때 참된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서 이탈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선 예수님이 유대인과 똑같습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예수님께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편적인 하나님의 아들, 보편적인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지만 특수성을 완전히 배제하진 않았습니다. 두 군데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배타적 특수성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첫째 유대인에게서 구원이 난다는 말,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 말은 사마리아인의 예배를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의 예배가 불충분한 것, 과부상태에 있는 걸 알았지만 사마리아를 사랑했습니다. 중요합니다. 북한 동포들이 엉망진창 정치대륙에 속박돼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주체사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 동포들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북한 동포들이 우리에게 용납되고 우리와 화해해야 할 존재이지만 북한이 옳아서 그런 건 아니듯이 예수님은 사마리아가 분명히 잘못됐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BC 125년에 유대인으로부터 집중적인 군사 공격을 받아서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 지금 이 여인이 마주보고 있는 산이 그리심산입니다. 이산이라고 할 때 그리심산입니다. 그 그리심산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명기 27장에 보면 그리심산이 모세가 올라갔던 산입니다. 모세와 하나님 백성들이 올라갔던, 모세는 올라가진 않았지만 모세의 율법 안에 나온 그 산이 그리심산입니다. 여호수아와 하나님 백성들 열두지파가 올라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그 산이 그리심산인데, 이 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BC 125년에 거기에 성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을 그리심산에 지어놓고 여기가 바로 정통 모세 신학을 계승하는 산이다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막 비난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비난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사람들을 막으니까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이었던 요한 힐카누스가 군대를 동원해서 이산,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 상처를 지금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의 적개심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예수님이 하는 말입니다. 보편주의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그리심산에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배자가 중요하다, 장소의 신성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예배자 마음의 신성성, 영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의 예배가 참 예배다,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은 예배 받으신다, 이 산과 저 산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으며 진리를 향한 그 사람이 드리는 예배만이 아버지께 열납되는 예배다, 영과 진리로 감화감동 받는 예배, 그것이 아버지가 찾는 예배자다, 예루살렘과 그리심산 특정한 지역과 장소를 더 이상 신성화하면 안 됩니다. 극한까지 가는 보편주의가 나옵니다. CS 루이스가 이 점을 주목했습니다. CS루이스가 종교다원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일부 사람들한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복음주의자라 말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CS루이스를 다원주의자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나니아 연대기> 제6권에 보면, 이교도 신을 섬겼던 사람이 천국에 갔습니다. 아슬란이라는 사자왕에게 가서 나는 이교도입니다. 나는 당신 아슬란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슬란 당신을 예배하지 않고 내가 믿던 우리 민족의 종교 민족의 토착 신에게 절했습니다, 한번도 나는 당신을 찾지 않았습니다, 했을 때 아슬란이라고 하는 사자왕,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왕이 그렇게 말합니다. 네가 정직한 사람, 정직과 신용과 자비와 친절의 삼위에 터전을 두고 드렸던 모든 기도는 사실상 아슬란에게 드린 기도다, 지역 신에게 드린 기도가 아니다, 네가 아슬란에게 기도를 드렸다 하더라도 부정직과 폭력과 증오심과 거짓 위에서 드렸던 모든 기도는 내 이름으로 드려진 기도지만 사실은 이교도 신에게 드려진, 우상에게 드려진 기도와 같은 것이다, 이 본문이 나오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라는 논란이 나온 겁니다. 그러나 그건 종교다원주의가 아닙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 산을 숭배하는 원시적 종교입니다. 산을 숭배한다는 말은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던 그 기억을 절대화하여 특정인들, 칼빈 루터 웨슬러 찰스 피니 등, 산과 같은 우람한 영적 거인들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을 숭배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참 같잖은 것이죠. 심지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도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덜 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 우주적인 하나님, 저 초월적인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 땅의 모든 종교의 국지적 구별과 차이가 마치 이 산과 저 산의 구별정도밖에 안 될 수 있는 겁니다. 참 알 수 없는 겁니다. 핵심은 이 산과 예루살렘 산과의 갈등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와 육으로 거짓으로 예배드리는 자의 차이가 더 큰 것이라는 겁니다. 중요합니다. 기독교 내에서 기독교인A 라는 사람과 기독교인B라는 사람의 차이가 무한 광년, 600광년 차이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A와 불교도인A는 한 1광년 차이밖에 안 납니다. 그렇게 보일 수가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굳이 누구라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특정 M자가 들어가는 그 특정기독교는 전도의 문을 막아버린 기독교입니다. 특정 M자가 들어가는 그분이 다니는 교회는 너무 조롱과 야유를 받는 교회가 됐습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지금 세계인들에게 존경받고, 한국 사람한테 존경받는 무서운 대통령감으로 떠오른 사람은 불교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 주변에 전부 다 머리 많이 갂으신 분이 계신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분이 표방하신 가치관과 산성을 쌓으신 그분이 가진 가치관 사이에 누가 더 기독교 같느냐고 볼 때, 기독교라는 그 산 이름으로 모든 것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사마리아와 유대의 갈등, 예수님이 오시면, 메시아가 오시면 이런 지역적 갈등을 보편적을 해소시키는 완전한 통일자가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기독교를 믿지만 기독교를 믿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타 종교를 배타시하거나 적개심을 가지고 보거나 멸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 우리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실제로 천국에 이교도가 오거나 머리 깎은 분이 왔다갔다 하더라도 놀라면서, 왜 이 사람이 여기 와 있습니까? 이 사람은 법주사 출신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하나님께 혼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산과 저 산의 논쟁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범하는 모든 지역적 갈등, 보편적 진리를 몰랐을 때 오는 자기 중심적인 아집의 갈등입니다. 이 세상에는 보편적 진리에 속박되지 못하고 벌이는 많은 국지적 갈등이 이 세상을 다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부분적으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 비해서 인식론적 우위에 있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산과 저산의 논쟁에 대해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강조했지만, 그럼 예수님이 배타성과 특수성을 다 포기했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보편적 진리를 파수하는,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닌 그 모든 가르침을 유대인들이 가진 성경에서 말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가진 성경이 중요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편적 주장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배타적인 기분을 띌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겁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은 굉장히 배타적 주장입니다. 이 배타적 주장은 어떤 종교적 특권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 절대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무제한적 보편성, 무제한적 개방성, 무제한적 무차별성 그 진리를 위하여 그렇게 배타적 주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배타적 주장이 왜 필요하냐면 배타적 주장을 통해서만 참된 진리가 전파가 됩니다. 이것저것 다 된다는 것은 민주적이고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정부주의고 무질서를 표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편주의를 높이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배타성을 띄는 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는 배타적주장을 일삼았지만 그 예수님의 배타성은 세계 만민에게 모든 종교에게 어떤 것도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하나님 은총 안에서 모든 죄인들을 평균케 만드는, 모든 죄인들을 똑같은 조건으로 불러내시는 우리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을 강조하기 위하여 배타적 주장을 일삼았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이 말은 맞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의 성경, 기독교에서 난다, 이렇게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이 산과 저 산의 갈등을 재현시키는 주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주장을 하는 구원이 여기에서 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행동과 삶 전체가 보편적으로 타당할만큼 자기희생적이어야 하고 자기 특권을 포기해야 하고 자기 부인의 영성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그럴 때 배타적 주장은 힘을 얻습니다.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게 중요합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가 특수한 산과 장소를 신성화하는 예배보다 더 온전한 예배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 예배는 성령의 이끌림으로만 가능하나 진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만이 예배자가 될 수 있다, 예배자의 조건은 성령 주도적인 초청자입니다. 성령에 의하여 이끌림 받은 사람만이 예배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불신자들은 예배 드릴 수 없습니다. 불신자들을 예배당에 오게 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불신자들은 예배당에 출입을 못하게 했고, 가르침을 받게 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성경을 먼저 배웠습니다. 예배를 절대로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목실장이 되고, 교목실장실에서 불신자들을 강제로 예배드리는 것을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 숭실대에서는 예배 포맷이 아니라 강의 포맷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질에게 영광받으시지 않습니다. 포로로 묶어 놓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노예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 기분이 몹시 상하죠. 사슬에 묶인 노예들에게 할렐루야, 하나님은 자유자에게 자녀에게 영광 받으시길 원하지 인질과 노예에게 영광 받길 원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시끄러운 악기를 동원해서 엄청난 데시벨로 우리 고막에 폭력을 가하면서 예배드리면 안 됩니다. 실내에서 엄청 시끄럽게 예배드리면 그건 진짜 예배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실내가 시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청년 집회에 가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건 아예 음악도 아니고 예배도 아니고 폭력입니다. 소리학회에 가면 이렇게 엄청난 소음 데시벨에 우리 고막이 노출될 때는 로고스 기능이 정지된다고 돼 있습니다. 그렇게 시끄러운 음악을 들은 얘들이 설교하자마자 좁니다. 그 이유는 로고스가 엉망이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게 시끄러운 건 음악이 아닙니다. 음악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들의 특권입니다. 영은 뭡니까? 첫째 영은, 성령으로 부드러운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만큼 정돈이 온전한 상태입니다. 영이란 말은 자기부인의 은사가 충만한 것입니다. 영은 그야말로 영입니다. 영은 제로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자기 부인의 지향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잘 고쳐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욕망이 부인되고, 자기 고집이 부인되기 때문에 금방 잘 고쳐집니다. 영성이있다는 말은 성령의 감화감동을 잘 받음, 성령의 영향을 잘 받음, 성령의 지시에 순종을 잘 함, 이것이 영입니다. 빌립 집사님이 사마리아 광야를 가고 있었는데, 성령이 감화감동하여 가사 톨게이트로 달려가라, 거기에 네가 도와줄 사람이 있다, 할 때 즉시 가사로 달려가서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성경을 가르쳐준 것, 이게 바로 성령입니다. 이게 바로 영입니다. 영이란 말은 성령에 민감한 것이 영입니다. 성령에 민감하다는 말은 영적 지침, 세미한 음성으로 나에게 타진되는 하나님의 요청과 하나님의 권고사항을 즉시 받아들임, 이게 영인데요. 영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의사소통 상태로 조율되는 겁니다. 이게 영입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 하나님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예배드릴 때 자기 말씀이 전파됨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 진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적 지침과 명령과 권고사항을 삶 속에 실천하는 사람이 진리입니다. 알렉테이아, 진리라는 말은 영어로 말하면 신실성이라는 뜻입니다. 영과 진리할 때 진리는 명제적 진리를 가리키지 않고 인격적 견고성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어제 그 사람과 오늘 그 사람이 같은 겁니다. 일관성, 영과 일관성으로 라는 말은 조건과 상관없이 항상 옳은 말에 순종하는 사람, 인격적 통전성, 일관성 또는 견고성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진리, 명제적 진리가 아닙니다. 2+2=4 이런 게 아닙니다. 요약하면 , 영과 진리, 성령에 감동받기 잘하는 마음과 자기 부인 잘하는 감수성과 영의 지침에 따라 일상생활에 따라서 지적 인격적 견고성이 확보된 사람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 산 저 산이 중요하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 아버지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는다, 아버지는 강제로 인질로 끌려온 사람들,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 그렇게 어수선한 사람들의 예배를 받으시지 않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총체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영물들, 영적 존재들을 찾으신다, 그런데 이 영적존재는 바른 성경을 읽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그 말이 맞는 겁니다. 그래서 전 여기서 무얼 깨닫느냐면 아무리 우리 기독교가 보편성을 주장해야 하지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성경적 특수주의와 배타성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적 배타성과 특수주의를 포기하면 인류에게 기독교가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줄어들고 인류에게 줄 기독교의 선물은 없어지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23절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렇게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 영과 진리라는 말은 도구격입니다. in, 이걸 헬라어로 데이티벌, 여격, 도구격, 영과 진리 안에서, 또는 성령의 감화감동 안에서, 폭넓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진리 인격적 견고성과 항상성과 통전성 불변성, 자기 통일성을 가진 그 사람, 그 사람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CS 루이스의 작품 중에서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작품을 한 번 꼭 읽어보세요. 혹시 방학 때 시간나면 읽어보세요. 두껍지 않습니다. <Until we have faces> 이 작품은 CS 루이스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 굉장히 재미있고 너무 깊은 소설입니다. 제가 <목회와 신앙>인지 <빛과 소금>인지는 지금 기억이 안 납니다. 오래 전에 그 책에 긴 서평, 해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홍성사에서 나온 책입니다. 그 책의 핵심내용입니다. 우리가 우리 얼굴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인격적 통일성을 가지고 예배 드려야지, 거짓된 내 자아상을 가지고 예배하면 안 된다, 나는 내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예배해야 한다, 내 못난 모습, 내 지치고 상처 입은 그 모습을 가지고, 인격적 진실성과 순전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만 하나님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과 진리라고 할 때 좋은 것이란 뜻이 아닙니다. 진실된 내 모습으로, 이런 뜻입니다. 진실된 내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은 진실된 내 모습으로 나온 그 자를 찾아온다, 이런 뜻입니다. <Until we have faces>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 그 주제가 바로 참된 아이덴티티를 가진 사람, 일관된 견고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또 나오네요.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25절,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맞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국지적 분쟁의 해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미국에서 이라크 종전 기념식을 했는데, 930조의 돈이 들어갔습니다. 미군이 4437명 죽었습니다. 이라크 양민이 11만 명 죽었습니다. 4437명 미군 사망, 3만 명 정도의 사상자 발생, 930조원의 경비소요, 아무도 축하승리라고 말하지 않는 종전기념일입니다. 지금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민간 핵 테러위협이 전 세계 방송에 떴습니다. 이 말은 미국이 조만간에 이란을 공격할 것이다, 거의 세계 관점입니다. 왜? 이란이 가진 핵은 파키스탄이 가진 핵만큼 위험한데, 알카에다가 이 핵물질을 가져가서 민간인이 테러를 하면 전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이 온다고 믿는 겁니다. 이런 국지적, 미국이 설정하는 평화, 모든 힘 가진 자의 궤변과 중심논리, 이것이 전부 언제 해결됩니까? 메시아가 오면 해결됩니다. 약간 절망감이 듭니다. 그럼 메시아가 안 오면 우린 할 게 아무 것도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고, 우리가 그 오실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말은 무엇인가? 중요합니다. 그런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기다린다는 말은 그런 메시아적 행동을 미리 앞당겨 우리가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겁니다. 나에게 올 A 학점을 주실 2012년 1학기에는 오신다, 그런 계시를 받았습니다. 나에게 A+7개를 가지고 나를 방문하실 메시아 또는 산타클로스가 오신다, 그럼 그 산타클로스를 기다림은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기다림의 핵심이죠. 세계의 국지적 문제를 초월적이고 보편적 정의를 가지고서 해결하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말은 그런 메시아의 행동을 앞당겨 미리 실시하고 있는 것, 이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국제문제 전문가가 많이 나와야 해요. 여러분 이런 말을 들으면 내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런 문제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문제입니다. 이사야 23장 보세요. 이사야가 나일강에 나온 곡물시장의 가격폭등과 폭락 때문에 두로의 상인들이 엉망진창의 파탄을 맞이하는 장면이 소상하게 이사야 예언서에 나옵니다.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곡물시장의 폭등과 등락 상태를 정통으로 꿰뚫고 있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국지적인 분쟁해결에 종국적 궁극적 해결을 주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국지적 분쟁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해결자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가 이런 해결을 시도하는 것, 이것 자체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돼야 하겠죠? 여러분 성탄절에 국지적 분쟁, 해묵은 갈등, 이 산과 저 산의 헤게모니 갈등, 유대와 사마리아의 갈등, 남자와 여자의 갈등들, 이것이 메시아가 와서 해결되는 그 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앞당겨 이 갈등을 창조적으로 해소하려고 노력함, 이것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 대림절의 마음, 이것이 성탄절 직전의 마음이다 할 수 있겠죠? 여러분 주변에 없습니까? 항상 산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산이 아니고 이 평지와 저 평지는 갈등이 없습니다. 약간 돌출적으로 탁월한 사람들끼리 갈등이 일어나고, 이 평지와 저 평지는 전혀 신성성을 다투지 않습니다. 둘 다 신성하지 않기 때문에요. 그러나 약간의 신성성을 주장할만한 그런 인물, 그런 권위를 가진 인물들이 항상 갈등합니다. 잘난 사람의 갈등이죠. 이라크가 석유가 없었다면 이라크는 전쟁감도 안 됩니다. 이라크가 석유가 많기 때문에 전쟁대상이 됐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약간의 사마리아의 하나님과 예루살렘의 갈등만큼 또는 그리심산과 시온산의 갈등만큼 해묵은 갈등이 있다면 이 갈등을 오실 메시아에게 위탁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 분투하는 것, 이게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해결점이 보일 줄 믿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으로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창출하기 위하여 영과 진리란 더 보편적 원리로 화해를 이루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심산과 시온산의 갈등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자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성탄절 맞아서 이 벅찬 평화와 화해를 맛보아 메시아의 도래를 확실하게 기다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국지적 분쟁과 갈등에 몸서리를 앓고 있는 연약한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오늘 그리심산과 예루살렘 산의 갈등을 경험하고 있고 우리 주변 가까이에서 갈등을 경험하고 있고 분쟁을 경험하고 있고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특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영과 진리로 예배함으로 이 산과 저 산의 갈등을 뛰어 넘는 하나님과의 소통과 화해를 이 성탄절에 이루게 하여 주소서. 우리 가향 내의 갈등들, 우리 가향 안팎의 갈등들, 가향에 속한 가족 안에 있는 갈등들, 공동체 안의 갈등들, 해묵은 분쟁들, 다 이 성탄절에 풀어지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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