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전, 또 다른 도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3월이다. 메마른 가지에 새싹이 움트는 채찍질이 이틀째 이어진다. 봄비는 처진 나뭇가지를 비틀 듯 한다. 화려한 목련의 하얀 꽃망울이 고동색으로 바뀌어 여기저기 흩어진다.
퇴직 후 도서관과 공공 기관 프로그램 수강을 하면서 개인적인 생활로 시간을 보내다 지난해에 이어 3년째 학생들을 만난다. 도시에서 벗어난 지역이라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이들이 귀엽다. 간혹 수업이 힘들어 떼를 쓰는 아이들도 있어 웃음으로 대신한다. 시골집 가까이에서 텃밭 작물을 키우는 농사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지지대를 세우고 퇴비를 적당히 뿌린 농작물과 곁가지를 제거해 준 채소는 결실이 과정을 알려 주는듯하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관심 정도에 따라 성장 속도와 방향은 달라진다. 몇 년간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주일에 이틀은 소중한 경험이다. 세대를 몇 번 건너뛴 중학생과의 생각 차이를 줄이기 위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려 힘쓴다.
또 다른 계기가 되어 집에서 삼십여 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공항로를 끼고 도심을 벗어나 자동차 전용 도로를 달린다. 벚꽃은 나뭇가지를 아래로 쳐지게 할 만큼 하루가 다르게 꽃송이를 늘린다. 자동차 앞 유리에 내리는 빗물을 가장 빠른 속도로 걷어내며 내리는 비를 가르고 정문에 도착하여 차를 세우고 사무실로 들어선다. 주차할 곳이 마땅찮아 빈자리에 두고 간다. 출발 전 모바일로 현황과 대략적인 규모를 살펴보는데 요즈음 인구 감소에 따른 세태와 달리 한 학년에 열 개 반이 넘어 규모 비교가 된다. 사전 안내된 장소로 들어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차가 탁자에 올려져 한 모금 삼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자동차를 옮겨 달라고 한다. 우산을 사무실에 둔 채 차로 이동하고 돌아오는데 비가 세차게 내린다. 도리 없이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복도를 지나 자리로 왔는데 웃옷이며 안경에 물방울이 맺혔다. 직원의 세심한 배려에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고 관리자를 만나러 간다.
관리자실로 들어서는데 세 사람이 앉아 있다. 한 사람은 과목 담당 중간 관리자이고 나머지는 정, 부관리자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퇴직 후 일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최고 관리자가 내가 근무한 학교에 대해 먼저 운을 뗀다. 역사 전공한 선생을 알고 있단다. 누구일까? 잠시 머뭇거리는데 책상 위 명패와 가슴에 달고 있는 이름표의 성씨가 눈에 들어왔다. 삼십여 년간 한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다가 나보다 일 년 먼저 퇴직한 동료이자 친구인 그와 성이 일치한다. 일전에 인근 지역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 머리에 스친다. 그렇다. 바로 그 남동생이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는 학교다. 이런 인연이 있을까.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부담을 느낀다. 서로의 가정사를 나누고 학교 전반을 안내받았다. 이어서 한자 두 글자를 필순에 따라 써 보여 달라고 요청을 한다. 자신이 원칙을 우선하는 사람임을 이야기하면서 양해를 구한다. ‘이런 것이 필요한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을 가다듬고 긴 호흡 후 펜으로 한 획 한 획 글자를 쓴다. 수업 실연 대신 받는 통과 의례다.
삼십여 분 후 자리를 옮긴다. 2층 교무실에 들어서 원탁 테이블에 앉아 서류에 서명한다. 종류가 다섯 가지다. 교과 담당 선생님의 안내를 받는다. 학생과 부모님들의 관심이 많은 지역으로 앞으로 좋은 강의 부탁을 요청한다. 다음 주부터 학생들과 교실에서 만나는 기대를 한다. 현역 때 맡았던 시간 수 만큼 두 개 학교에 각각 이틀씩 나흘을 출강한다. 아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체는 지금까지 하던 것과는 달리 괜스레 부담을 느낀다. 정신적인 것 이상으로 체력이 뒷받침될까 걱정도 앞선다.
사람은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활력을 느낀다고 했던가. 전공이 아닌 과목에 감히 뛰어들었다. 훗날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일찍이 관련 자격증을 하나둘 취득한 것이 지금에 와서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자격증이 어떤 기관에서 주관한 것이었는지 확인을 받으면서 선택을 잘했다고 하는 자부심을 품는다. 역사와 전통이 있고 공신력을 갖춘 최초의 민간 자격증이라는 덤까지 듣는다.
현관을 나서는데 퇴근 시간과 맞물려 관리자의 배웅이 이어진다. 발걸음이 쉽게 옮겨지지 않는다. 내가 지닌 재능을 나누겠다는 애초의 마음과는 달리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준비가 있어야겠다. 새로운 도전을 하는 시점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세대들에게 꿈을 펼치고 미래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스럽다. 강사라는 제한된 신분이지만 개의치 않고 나에게 소임을 모자람 없이 펼칠 각오를 한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전통 중에서 가치를 알려주고 옛것을 친숙하게 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국의 한자 문화가 받아들여지고 우리말의 절반이 넘는 어휘가 한자어다. 신문이나 책에서조차 한자에서 멀어져 있는 현실이지만 외면할 수 없다. 뿌리가 없는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가까이는 부모가 있어 자식이 존재하듯이 민족의 정기와 역량이 숨어 있는 고전을 낯설지 않게 만드는 일이 작은 출발점으로 아이들에게 안내해 볼 요량이다. 원문을 보는 것과 해석본은 엄연히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전문가가 풀이한다고 할지라도 누가 주석을 붙였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고전의 맛은 직접 받아들이는 즐거움이 비교될 터이다.
사전 수업 준비를 한다. 학습지는 동료 선생님이 제작한 수업 자료를 받아 활용하기로 했다. 이 자료를 어떻게 자신의 능력에 맞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할 것인가 염려를 한다. 자신이 맞이한 경험은 중요한 결과를 판가름 나게 한다. 긍정적인 경험은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그렇지 못한 때는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이전에 가진 부정적인 것은 멀리하고 스펀지처럼 젖어 드는 상상을 하며 차근차근 자료를 모은다.
새로운 시작은 늘 긴장과 부담을 안긴다. 생소한 장소는 적응이 필요하다. 나만의 의지가 많은 이의 꿈을 만들어 가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도전은 계속된다. 봄꽃의 화사함 만큼이나 내일이 기대된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길에 꿈이 영글어 간다. 그 끝이 어디에 이르는지 모르지만, 이전과 달리 옆과 뒤를 돌아보는 여유와 함께 내면을 다지는 계기를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