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7일(토)
어제 너무 힘들게 버스를 타고 온 때문인지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꿈속을 해매고 있는데 언니는 벌써 나가서 호수주변을 한바퀴 돌고 왔다고 한다.
숙소 Peace Cottage가 주식이 포함되지 않은 곳이라 달걀과 감자를 사러 간 언니가 한참만에 돌아와서 웬일인가 했더니 로비에서 한국에서 3년 동안 공부하고 온 네팔인 써미르라는 남자를 만나 대화하고 오느라 늦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오늘 오후 4시에 일이 끝나고 돌아와 우리를 가이드 해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잘 됐다 싶어 그 시간을 기대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점심때가 다 돼서야 어슬렁거리며 포카라의 거리를 보기위해 숙소를 나섰다. 포카라는 카투만두에 비해 훨씬 차량의 행렬도 적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숨쉬기가 편했다. 카투만두의 타멜거리와는 전혀 다른 그냥 소도시의 편안함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언니, 저 집 피자 맛있겠다.”
우리는 얼마 걷지 못하고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오르는 갓스파더(Got's father)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이끌리듯이 들어갔다.
“덥다 더워. 이 집 왜 이렇게 덥지?”
“화덕 바로 앞에 앉으니까 덥죠. 자리 옮길까요?”
“아니, 그냥 여기 앉자. 안쪽은 너무 어둡고 답답할 것 같아. 지나다니는 사람도 좀 보고.”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덕 바로 앞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온갖 재료가 다 들어간다는 스페셜 피자를 시켜 먹었다. 적당한 두께의 도우에 시금치, 고기, 햄 등에 야크치즈를 듬뿍 끼얹은 대다 화덕의 고열로 단숨에 구워낸 때문인지 참 담백하면서도 맛이 너무 좋았다. ‘위장이 찟어져도 좋아.’ 하면서 한판을 둘이서 다 해치워버렸다. 가격도 우리돈 9천원 정도라 부담이 없어서 이곳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은 더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언니의 아들이 근무하는 병원에서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외과의사라 수술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한다. 한번은 응급환자가 와서 급하게 수술을 하였는데 환자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음식을 섭취하여 위장이 늘어져서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다 제거한 후 무게를 달아보니 무려 10Kg에 육박하였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더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름) 너무 가난하여 거의 굶다시피 하고 살다가 1년에 한 두 번 뷔페식당에 가서 그동안 못 먹은 것은 다 먹고 온다고 하니 이보다 더 슬픈이야기가 또 있겠는가?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 우리는 이 말을 가끔 인용할 때가 있다. 어쨌든 꼬리꼬리 하면서도 콧속에 계속 여운이 남는 야크치즈 맛은 두고두고 생각이 날 것이다.
다시 거리를 걷다 혼자 여행을 온 대구에서 왔다는 여대생 시은이를 만났다. 혼자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3개월 동안 여행하고 이곳 네팔에서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 갈 예정이라는 대찬 인생을 살고 있는 한국낭자였다.
같이 윈드폴이라는 한국인 숙소겸 여행사를 찾아가 포카라와 트레킹에 대한 정보를 얻기로 했다. 폐와 호수를 끼고 걸어가니 곧 윈드폴이 나왔다. 호수가 바라보이는 리셉션에는 이미 온 다섯명의 젊지만 결코 어리지 않은 남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물어보니 제각각 혼자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여행을 마쳤고 누군가는 이제 할 거라며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 장소라고나 할까?
그 중에는 실업수당을 받아 온 사람도 있고, 대기업을 사직하고 퇴직금과 예금한 돈을 찾아 세계일주에 나선 사람이 있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 분은 네팔 트레킹을 몇 군데 완주하고 내일이면 파리를 거쳐 생장으로 이동하여 6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를 할 것이라도 하여 우리를 더 놀라게 했다.
“부럽다. 우리 아들하고 마흔 둘, 동갑인데 우리 아들은 남들 수술하느라 제주도도 한번 못가고 살고 있는데.”
언니 얼굴에 부러움이 살짝 스쳤으나 은근히 아들을 자랑하는 모습이 더 컸다.
“그래도 아들이 의사면 우리처럼 잘릴 일은 없잖아요.”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반면에 실업수당 받는 자유인이 될 수도 없고 돈은 있으나 여행하며 쓸 시간이 없으니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의사는 본인보다는 본인의 가족들을 위한 직업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의사의 부인들은 대부분 마치 자신을 위하여 시부모가 아들을 의사로 만들어 준 것처럼 너무 당연하게 혜택을 누리며 살려고 한다. 자녀들을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외국어 학교에 보내며 고액의 과외금을 서슴없이 지불한다. 그러니 언제 직업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삶을 시작해 보겠는가?
“사람들이 어찌 알고 오는지 일년내내 빈방이 없을 정도다” 주인 아주머니는 오십대 중반으로 숙소를 운영한지 10년쯤 됐다는데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몇 가지 짤막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막 잘나가다가 코로나가 오면서 손님이 거짓말처럼 싹 끊겨버렸을 때 일이다. 코로나에 걸려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팽배해져 있을 때에도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버틴 몇 사람과 무스탕으로 트레킹을 떠났다고 한다. 이때 나이가 지긋하신 비구니가 있었는데 이 분이 산속에서 생활하는데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라 산속에서 식재료를 많이 채취해 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확신을 가지고 뜯어 온 풀 중에 독초가 있었나보다. 이것을 나물로 무쳐서 먹은 사람들이 모두 환각과 환청 상태에 빠져 난리가 났다. 어떻게 환각과 환청 상태에 빠졌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듣지 못하였지만 경찰들이 달려오고 구급차가 와서 모두 싣고 병원으로 이송돼서 해독주사를 맞고 나았다니 참 끔찍한 일이긴 했나보다.
그 이후 서서히 코로나가 풀리면서 현재는 빈방이 없고 몇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할 정도라니 참 다행한 일이다.
“푼힐 쪽으로 트레킹을 다녀오고 싶은데 스틱이나 필요한 장비를 대여 할 수 있나요?”
“숙소에 묵지 않은 사람도, 이곳을 스쳐만 간 사람도 다 빌려줍니다.”
쟁반 가득 담아온 청포도와 시원한 물을 나누어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다보니 포카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분만 있으면 이곳에서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든든한 지원군을 한 분 얻은 것 같아 뿌듯했다.
배낭 하나만을 달랑 맨 시은이는 사랑곳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타러 오른쪽으로 가고 우리는 왼쪽으로 돌아 폐와 호수 주변을 산책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호수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과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기도 하고 호수를 응시하며 앉아서 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낭만적인지 이곳에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곳에서라면 몇 날 며칠을 살아도 지겨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평화로운 곳을 두고 저 높은 절벽같은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찌보면 참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다.
4시가 조금 늦어 써미르는 정말로 나타났다. 솔직히 내가 직접 만나지 않은 사람이라 반신반의 했는데 깔끔한 옷차림에 비록 작지만 제대로 된 차를 몰고 온 그를 보자 대번에 믿음이 확 갔다.
“어디부터 가고 싶으세요?”
“일본인 사찰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가본 적 있으신가요?”
“가본 적은 없지만 문제 없어요.”
네비게이션의 위력은 이곳에서도 참 유용하다. 써미르는 처음 와봤다는 산자락의 일본인 파고다를 쉽게 찾아 올라간다. 말이 쉽지 가는 길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이어진 길을 곡예하듯이 올라가는데 놀랍게도 주변에는 민가들이 심심치않게 늘어서 있다. 또 산속에 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산중에 집들을 짓고 살았을까 싶다.
사찰에 오르니 한눈에 폐와호수가 내려다 보이고 앞에는 사랑곳이 바로 보인다. 스모그만 없으면 얼마나 더 근사할까? 스모그없던 시절이나 시기에 왔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저녁식사로 숙소 바로 앞에 있는 한국레스토랑에서 바비큐에 맥주를 마셨다.
혼자 온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다닌다는 아저씨와 합석. 먹은 것에 비해 많은 돈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