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삶은 계속된다(Zendegi Edame Darad 1992): 파격의 충격, 화면 가득한 인간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 감독
테헤란 시 외곽의 톨게이트. 라디오에선 끊임없이 지진의 비극이 흘러나오고 있다, 집과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구호물자를 기다리고 있으며. 부모를 잃은 수많은 아이들을 입양해줄 것을 호소한다. 1990년 이란을 할퀸 대지진 소식에, 황급히 돌아온 키아로스타미. 그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했던 소년들의 생사를 확인 못해 초조하다. 하지만 코케 마을로 가기 위한 도로는 자동차의 행렬로 꽉 막혀 있고 길은 어렵기만 하다.
샛길을 돌아 마주치는 사람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포스터를 보여주고 아이들이 살아있는지를 물어보지만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채 그날의 삶조차 힘겨운 사람들은 아무도 답변해주지 않는다. 감독의 뒷자석에 앉아 여정을 함께하던 어린 아들은 지친 나머지 잠이 들고…… 바위 더미에 묻힌 집들, 가족을 몽땅 잃고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들, 가족이 전부 죽었다고 말하면서 물지게를 지는 할아버지. 이들이 만난 생존자들은 그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은 이미 말랐고 그들은 또 다른 삶을 꾸려간다.
차는 점점 더 코케 마을에 가까워지고 그들은 우연히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할아버지 역으로 출연했던 루히 씨를 만난다. 그들을 반기며 자신의 집으로 이끄는 노인. 그 지진 속에 노인은 살아남았고 집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마드는? 네마자데는? 그 사랑스런 눈동자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987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잘못 가져온 친구의 숙제장을 돌려주기 위해 친구 집을 찾아 헤매다 하루해를 다 보내는 꼬마의 이야기를 다룬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발표해 세계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의 촬영지는 이란 북부의 가난한 마을이었고, 대부분의 출연자도 마을 주민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90년에 이란 북부지역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뮌헨을 방문 중이던 키아로스타미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했던 꼬마들의 생사가 염려돼 곧바로 귀국해서는 카메라를 들고 그 마을로 찾아간다. 그 과정을 다룬 작품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다.
이 작품은 분명 극영화다. 하지만 줄거리는 지진으로 폐허가 된 곳을 어렵게 헤쳐나가며 두 꼬마를 찾는 과정이 전부다. 여기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이는 고다르처럼 이데올로기적이지도 않으며, 요즘 범람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장르 해체라는 시대 조류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런 장르 해체보다 더 파격적인 것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극영화건 다큐멘터리건 그 속에 담기는 이야기는 대부분 굴곡이 있게 마련이고, 또 다층의 플롯을 지니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그런데 한 부자가 톨게이트를 지나는 장면에서 시작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누군가를 찾는 과정만은 91분 동안 담는다는 것이 어떻게 관객의 눈길을 꼭 붙잡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힘들다. 경이로운 것은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관이다. 그의 파격은 조용한 작품 성격에 반비례해 너무나 충격적이다. 영화사에서 파격에 관한 한 첫손 꼽히는 고다르의 경우는 영화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그 출현의 개연성이 수긍되는 반면, 키아로스타미의 출현은 돌연변이라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그의 영화는 어느 누구의 영화와도 닮지 않았으며, 영화사의 발전과정과도 무관하다. 단지, 이란 영화가 전통적으로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강세를 보여왔다는 점 정도를 그의 영화가 출연하게 되는 배경으로 언급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돌연변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은 세계 어디서나 공감할 만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어린이의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각과 인간의 삶에 대한 경이가 듬뿍 담겨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인간의 삶을 힘든 고갯길을 넘어서는 것에 비유한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마지막 장면을 보자. 주인공 부자가 탄 차가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다 힘에 부쳐 다시 내려온다. 이때 조금 전에 태워달라는 요청을 무시당했던, 짐을 진 청년이 차를 밀어 무사히 내려가게 도와준다. 청년은 다시 짐을 지고 고갯길을 올라가고, 내려갔던 차는 잠시 후 다시 올라와 마침내 고개를 넘어 그 청년을 태우고 떠난다. 비록 꼬마들을 찾지는 못했지만 삶에 대한 희망은 여전하다는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라는 제목에도 딱 맞아떨어지는 라스트 신이다.
영화의 장르 구분, 리얼리즘 개념, 내러티브의 개념, 시나리오론, 영화사…… 이제 이 모든 것을 다시 써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순전히 변방의 영화로만 인식돼 왔던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 중심의 이른바 ‘주류 영화’의 흐름을 통째로 뒤엎을 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키아로스타미로 인해 새로운 영화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ㅡ김지석
대지진이 발생한 이란 북부지역을 배경으로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꼬마들의 생사를 추적하는 감독 부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원어명 Zendegi Edame Darad
1992년 이란의 카눈(Kanun:청소년 지능개발센터)이 제작하였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가 각본과 감독을 겸하고 파하드 케라만드(Farhad Kheradmand)와 부바 바이요르(Buba Bayour)가 주연을 맡았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the friend's home?>(1987)에서 시작되어 <올리브 나무 사이로 Through the Olive Trees> (1994)까지 이어지는 ‘이란 북부 3부작’ 가운데 2부에 속한다. 1990년 이란 북부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영화에 출연했던 꼬마들의 생사가 염려된 감독 키아로스타미가 카메라를 들고 꼬마들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1990년 이란 북부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자신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던 두 소년이 걱정된 감독(파하드 케라만드)은 어린 아들 푸야(부바 바이요르)와 함께 아이들을 찾으러 길을 떠난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지진으로 65명의 친척을 잃은 상황에서도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 여동생과 조카 셋을 한꺼번에 잃고도 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난민촌에 안테나를 세우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여정의 종착지인 코케로 가는 가파른 언덕에서 감독은 짐을 진 청년의 승차요구를 거절한다. 그러나 차가 언덕에서 시동이 꺼져 뒤로 밀리자 청년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밀어주고 감독은 다시 짐을 지고 언덕을 올라가는 청년을 차에 태우고 길을 떠난다.
1992년 제45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선정되었고 특별상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상을 수상하였다. 영화제 이후 파리에서 50주간 장기 상영되었으며 그해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ema》가 선정한 베스트 영화 부문에서 평론가 선정 3위, 관객 선정 9위에 올랐다.
ㅡ『두산백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