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충무사 (忠武祠)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당으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1545∼1598), 정운(鄭運:1543∼1592), 송희립(宋希立)을 제향하고 있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100년 후 왜인의 악귀가 마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불안해진 주민들이 1697년경 사당을 짓고 충무공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오다가, 1944년 일본인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으면서 유적보존회가 설립되어 1947년 사당을 새로 건립하였다. 그 후 1987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1576년(선조 9)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뒤 의주판관, 정읍현감 등을 지내다가 1591년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부임하여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는 큰 공을 세웠다.
정운의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 시호는 충장(忠壯)으로, 지금의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1570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웅천현감, 제주판관 등을 지내다가 1591년 류성룡의 천거로 녹도만호(鹿島萬戶)에 임명되어 군기를 정비하였다. 임진왜란 때 옥포, 당포, 한산도대첩 등에 참여하였고 부산포해전에서 순절하였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송희립의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신중(信仲)으로 고흥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도만호(智島萬戶)로 형 대립(大立)과 함께 의병을 모아 참전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건물은 4동으로 신실은 정면 3칸, 측면에 전퇴를 둔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이다. 충무공 탄생일과 귀천일에 제향을 모신다.
■ 순천왜성 (順天倭城)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광양만을 따라 쌓은 조선시대의 성. 1999년 2월 26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가 전라남도 기념물로 격하된 것이다. 면적은 188,428㎡이고 이름이 왜교성, 왜성, 왜성대, 왜교, 예교(曳橋), 예교성, 망해대(望海臺), 신성리성, 순천성 등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순천 왜성은 정유재란(1597) 당시 육전에서 퇴진한 왜군 선봉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도다카도라[堂高虎]가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이다. 또한 침략 최정예 부대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 4000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 수륙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최후·최대의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중국 명의 육군 장군 유정(劉綎)과 조선 육군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육군 3만 6000여 명, 명의 해군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수군 1만 5000여 명의 병력이 순천 왜성을 비롯하여 장도(노루섬) 등을 오가며 왜군을 격퇴하였고, 이순신이 27일간 머물면서 고니시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바로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였다.
순천시가지에서 여수 쪽으로 6㎞ 정도 가다가 왼쪽으로 6㎞ 더 가면 신성리 마을과 이순신을 배향한 충무사가 나오고, 여기에서 남쪽 200m 지점의 광양만에 접한 나지막한 송림에 순천 왜성이 자리잡고 있다.
수륙요충지로, 성곽규모가 36,480평이고 외성 길이 2,502m, 내성 길이 1,342m로 외곽성(토·석성) 3개, 본성(석성) 3첩, 성문 12개로 축조되었다. 평면이 직사각형을 이루는데 지금도 끊긴 데가 한 곳도 없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성을 쌓은 돌의 크기는 1.5∼2m이고 내성높이 4m, 외성높이 5m, 둘레길이 약 3,000m이다.
왜교 또는 예교란 명칭은 축조 당시 왜군들이 피습이 두려워 조·명 연합군이 축조한 순천 검단산성(사적) 쪽의 육지부를 파내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마치 해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고 출입하기 편리하게 연결다리를 설치한 데서 유래하였다.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왜성이다.
♧남파랑길 51코스 트레킹중 순천시 해룡면에 있는 '충무사 & 순천왜성'를 경유하면서 담아본 풍경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