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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성모성지 - 초대교회 처형지이며 한국 최초의 성모성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리 1704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112
남양 성모성지의 의의
화성시 남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의 위치를 갖고 있고 포구가 발달하여 해상으로 서해안의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등은 물론이고 중국과의 연락과 이동이 용이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 많은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찾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천주교인들이 숨어 살면서 옹기를 구워 연명하였기에 일찍이 인근에 백학, 홀연, 활초리 등 여러 교우촌들이 형성되었다.
지금도 백학 교우촌에서는 가마터와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교우촌은 왕림과 큰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안양 수리산 · 양지 골배마실 · 안성 미리내 · 진천 배티 · 아산 걸매리 등과 걸어서 하루 거리에 위치해 박해 당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순교성지가 된 것은 이곳이 조선 시대에는 남양 도호부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인극 교우촌에서 교우들은 잡아다 문초하고 처벌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일반적으로 순교성지는 대체로 지난날 큰 관아나 진영이 있었던 곳이 많다. 대전 교구로 볼 때 해미와 홍주가 그렇고 공주와 청주가 또한 그렇다. 어제 다녀온 죽산 순교성지도 옛 관아터이다.
남양도호부의 상징적 공간이 관아인데, 지금의 남양초등학교와 보훈회관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다만, 현재 관아와 관련해 남아 있는 건물은 남양 풍화당(風化堂)이 유일하다. 이러한 남양도호부 관아와 남양 성모성지가 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순교했지만 현재 이름이 밝혀진 이는 극히 소수로 김 필립보, 박 마리아 부부와 정 필립보와 김홍서 토마 등 4명뿐이다.
남양 성지가 순교성지라는 점과 또 하나의 의의가 있다면 남양 성모 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모 성지이다. 원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무명의 신앙 선조들이 순교한 순교 성지인 남양 성지는 1991년 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며 수원교구 설정 기념일이기도 한 10월 7일 정식으로 성모님께 봉헌됨으로써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 성지로 선포되었다.
성모 성지란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 신심을 일깨우는 성지로 선포한 곳을 말한다. 흔히 성모 발현지를 두고 성모성지라고 알고 있지만, 현재 전 세계에 1천 8백 여 성모 성지 중 성모가 발현한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필리핀, 인도 등에 보통 한 곳에서 많으면 여섯 곳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곳 남양 성모성지도 성모님의 발현과는 관계없고 성모님께 기도하는 성지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성모 신심은 각별하다. 어려울 때마다 성모님을 찾고 마지막 선종을 할 때에도 다들 예수 마리아를 염했다고 한다. 힘든 일에 부닥치게 되면 엄한 아버지보다는 편한 엄마를 먼저 찾아가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모르겠다. 언제 찾아가더라도 지친 영혼을 포근히 감싸주는 성모 마리아를 모신, 성모 마리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성지가 바로 병인박해 순교 터 위에 세워진 남양 성모 성지이다.
한편, 남양 성모성지는 화성시에서 화성 8경 중의 하나로 지정되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3시 반이 가깝다. 입구에 들어서니 오른쪽으로는 화장실과 무인 성물방 같은 곳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잔디밭 가운데 마치 비닐 하우스 같은 시설이 있는데 이곳이 사무실과 식당이라고 안내되어 있다. 그리고 공사 중인 데가 많다.
그리고는 호젓한 숲길이 이어진다.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성모님 초봉헌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잔디밭이 끝나고 야외제대가 있다. 야외제대 뒤편으로는 지금 공사 중이라서 포장이 씌워지거나 새끼줄이 쳐져있고 인부들이랑 매우 혼란스럽다.
성모 초봉헌실 - 안쪽 벽이 뚫어져 맞은 편 멀리 서 계시는 남양 성모상을 액자처럼 볼 수 있다.
로타리 예수님상
야외 제대 뒤로는 팔을 벌리신 예수님상이 서 계시는데 주변에 성인 조각상 쉼터는 공사 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다. 조각상은 성녀 마더 데레사와 성 꼴베 신부, 그리고 성 비오 신부이다. 사진도 제대로 찍을 수 없어 이전 사진을 덧붙인다.
마더 테레사 성녀는 인도 캘커타 빈민가에 사랑의 선교회를 세우고 각종 구호단체를 설립하여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197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는데, 그 상금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는 말을 남겨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성 비오 신부는 이탈리아 카푸친 수도회의 사제로서 50년 동안이나 손과 발, 옆구리에 예수님의 오상(五傷)을 지니고 산 분으로 유명하다.
폴란드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족이 있는 동료 사
형수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았을 만큼 실천하는 사랑을 강조하셨던 분이다.
로사리오 광장 (남양의 성모상, 묵주기도 시작)
로사리오 광장은 묵주의 기도가 시작되고 남양 성지의 랜드마크라고 남양의 성모상이 있다. 3.5미터 높이의 이 성모상은 조각가 오상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작품으로 어린 예수가 엄마 마리아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친근한 모습이다.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성모님과 어머니의 치마폭을 잡고 있는 어린 예수를 바라보면 성모님의 강한 모성애에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느끼게 된다.
묵주의 기도가 시작되는 곳에는 대형 십자가가 눕혀져 있고 묵주 알이 5개가 있고 그 다음 남양의 성모님에서 둘로 갈라져 하나의 묵주 다발을 이룬다. 지름 70cm 크기의 대형 화강암 묵주알이 로사리오 광장 주변과 야산의 오솔길을 따라 4.5m 간격으로 놓여 있다.
오른쪽은 환희의 신비와 빛의 신비이고, 왼쪽은 고통의 신비와 영광의 신비로 이렇게 20단이 산기슭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성모님으로 돌아와 끝이 난다. 순례자들은 1㎞의 길을 걸으면서 그 묵주알들을 한 알 한 알 짚어가며 20단을 바친다. 따라서 성지 자체가 대형 묵주인 것이다.
여기서 오른편 환희의 신비 쪽으로 이동하면 박지한 요한신부 흉상과 성체조배실, 생명의 샘터, 그리고 바로 위의 경당으로 이어진다.
박지한 요한 신부는 1982년 잊혀져 있던 이곳 병인 순교박해지를 개발하다가 1985년 3월 29일 선종했다. 이 흉상은 1999년 10월7일, 남양성지 개발자 이상각 프란치스코 신부가 세웠다.
성체조배실
조배실 앞에는 입간판에 성체조배의 의미를 담았다. 성체조배란 길 잃은 양이 목자를 만나는 때이며, 장님이 빛을 만나는 순간이다. 또한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찾는 곳이며 고통을 받는 자가 위로자를 만나는 때라고 했다. 절망에 빠졌을 때 헤어날 유일한 방법은 감실을 찾는 것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런데 입구에는 성체조배실이 바로 위의 경당으로 옮겨 갔다고 안내되어 있다.
생명의 샘터
이곳은 영성의 샘터이자 순교터이다. 성모상 발밑에는 십자가 아래쪽에 샘물이 나오고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소서”라는 청원의 말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엽전 같기도 하고 형구 같기도 한 둥근 맷돌석에 병인 대박해 순교지 표시가 있고 또 하나의 맷돌석에는 순교자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그 이름은 순교자 김 필립보, 박 마리아 부부와 정 필립보와 김홍서 토마이다.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1812~1868년)
김 필립보는 충청도 면천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부친의 반대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훗날 그의 부친이 마음을 돌려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하게 되었다. 장성한 뒤 박 마리아와 혼인한 필립보는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분을 잘 지키게 하였으며, 다른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는 이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필립보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수원 걸매(현 충청남도 아산시 걸매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에 의해 다시 회장으로 임명된 필립보는 한결같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필립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충청도 신창 남방재로 피신하여 살았다. 1868년에 다시 박해가 성하게 되자, 필립보는 홍주 신리에 살던 사위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남양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남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아내 박 마리아는 필립보와 포졸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고 하면서 자원하여 따라나섰다. 이들 부부는 남양 옥에 한 달 정도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고 교회 일은 하나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68년 8월 3일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들 부부는 동갑으로 57세였다.
▲정 필립보 (? ~ 1867)
경기도 용인의 덧옥돌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김홍서 토마(1830 ~ 1868)
수원 걸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 토마의 나이는 38 세였다.
이곳 샘터 옆 언덕 아래 몇 개의 게시판이 나란히 서 있는데, 남양 성지의 묵주기도 길과 관련하여 매우 신비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곧 남양 성모성지의 묵주기도의 길을 하늘에서 보면 자비의 성모인 블라디미르의 성모님의 이콘을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다음 안내판 중 가운데가 블라디미르의 성모님, 그 오른쪽이 하늘에서 본 묵주기도길의 항공사진이다.
성모상의 아기에 해당하는 것이 항공사진의 무덤 부분인데 토지 소유주가 끝까지 팔지 않아서 무덤을 그대로 두고 가리기 위해 둘레에 소나무을 심었다고 한다. 마치 자비의 성모 이콘의 아기에 해당하는 부분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다. 비록 성모님께서 남양 성지에 발현하지는 않았더라도 여기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섭리가 아닐까? 하고 안내문은 설명한다. 여하튼 신비롭다.
남양 성지 경당
남양 성지 경당 제단에는 평화의 모후 왕관 열두 개의 별 성체 현시대가 안치되어 있다. 이 성체 현시대 제작은 2008년부터 세계 평화를 지향하며 각국에 기도처와 현시대를 제작, 안치하고 있는 평화의 모후 협회(폴란드)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로로, 국가 간 무력 충돌과 종교 분쟁 등을 겪는 열두 지역을 선정해 성체 현시대를 안치하고 있는데 남양 성모성지가 여섯 번째 장소로 선정됐다. 2017년 10월 14일이었다. 그동안 이스라엘 베들레헴, 카자흐스탄 오즈노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메주고리예 등 다섯 곳에 성체 현시대가 안치됐다.
남양성모성지 성체 현시대에 붙여진 이름은 ‘일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다. 폭7.5m, 높이 2.5m에 달한다. 현시대 가운데에는 성모 성광이 자리하고 있으며, 크리스털로 된 겉면에는 예수의 토리노 수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좌우 문을닫을 때 가운데 성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형태는 갈라진 남과 북이 기도와 통일로 일치하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현시대는 6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축복했다.
경당을 뒤로 묵주 기도의 길을 접어들어 조금 오르면 왼쪽에 과달루페 성모상과 자비의 예수님 동산이 나온다.
과달루페 성모상
‘돌뱀의 머리를 짓밟아 부수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과달루페 성모님은 1531년 12월 9일 멕시코 테페약(Tepeyac) 언덕에서 발현하셨다.당시 멕시코에서는 1년에 2만 여명의 사람 심장을 꺼내어 돌뱀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었는데, ‘돌뱀의 머리를 짓밟아 부수다.’라는 이름의 과달루페 성모님 발현 이후, 800만 명의 멕시코 인들은 ‘돌뱀’을 버리고 가톨릭 신자로 개종하였다.
후안 디에고의 틸마(망토)에 새겨진 성상을 보면 성모님은 멕시코 인디오 여인의 전통적인 복장을 입고 계시는데, 그 인디오 여인의 옷차림 속에서 성모님은 앞가슴에 까만 띠를 하고 계신다. 이 까만 띠가 상징하는 것은 ‘나는 아기를 잉태했습니다.’라는 뜻으로 멕시코 신학자들은 이 표시를 성모님께서 멕시코에 예수님을 낳아주시기 위해 발현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생명 수호자들은 낙태 반대 운동으로 과달루페 성모님을 받든다.
성모상 옆에는 낙태 아기들 묘가 있어 이를 말해준다.
낙태 아기들 무덤은 낙태에 대해 속죄하며 보속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한 곳이다. 이곳에는 생명수호를 위한 십자가의 길을 꾸몄으며, 생명의 어머니 과달루페 성모상을 모셨다. 낙태를 부추기는 사탄과 싸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묵주기도의 터전에서 생명수호를 위한 기도를 바치는 것처럼 의미 있는 일도 드물 것이다.
자비의 예수님 동산
묵주기도 방향과는 반대로 나 있는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언덕 정상, 그러니까 로사리오 광장 오른편에 있는 이 동산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기억하고 그분께 의탁하며 기도하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조성된 것이다. 동산 잔디밭에서는 자비로우신 예수님상과 피에타 성모상, 그리고 하느님 자비의 사도인 성녀 파우스티나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흉상이 순례객을 반긴다. 여기서도 묵주기도의 길 5단이 조성되어 있다.
본격적으로 묵주기도의 길 환희의 신비에 접어들면 바로 아래에 드넓은 잔디 광장이 있고 바로 밑에 대형 십자가가 서 있다.
남양 성모성지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남양 성당 주건물은 일명 '통일 기원 마리아 대성당'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 3년에 걸쳐 건축하여 2021년에 준공하였다. 마리오 보타는 붉은 벽돌을 소재로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의 구성과 조형을 추구하며,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로손 주택 등 유명 건축물을 설계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교보 타워, 삼성 리움미술관 등 건축물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성전에는 50만 장의 벽돌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남양성모성지 성당은 대성당과 소성당을 포함해 총 1750석을 갖춘 대규모 성당이다.이 성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41m 높이의 두 개의 탑이다. 마치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아쉬운 것은 대성당은 미사 때만 개방하고 다른 때는 열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은 미사 시간이 아니라서 성전 안에 들어 갈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인다면 이 성지 조성에 지난 20여년 간 자신의 모든 것을 남양 성지 개발에 다 바친 분이 있다. 바로 이상각 신부다. 이 신부는 “순교자들이 죽는 순간까지 매달린 이가 성모 마리아요, 그들이 바친 기도가 묵주기도”라며 “이곳은 바로 순교자들의 성모신심을 잇는 성모성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언제 가난하고 고통받아 (남양 성모동산에서)
꿈 지닌 것들 밤새껏 달려서
이곳 성스런 기슭에 닿아
밝은 미소 흐르는 대지에 닿아
분홍빛 아침을 엽니다
내가 사무치는 그리움이 되어
햇살처럼 동산에 스며들어
어느덧 작은 기도 한 줄로 낮아질 때
바위 깎아 만든 묵주알들에는
결 푸른 오색 하늘 출렁입니다
가난하통 받는 이의 어머니여
나는 언제 가난하고 고통 받아
미소 밝은 그 무릎에 머리를 뉘일까요
이별처럼 고운, 부활처럼 고운 햇살 아래
내가 온전히 죽어
참회의 그늘에서 피는 들꽃 하나 된다면
여기 깊은 동산 물가에 서서
떠나며 입어야 할 옷 곱게 개면서
눈물 밝은 촛불 하나 될 수 있다면(김영수)
오후 4시 반. 마지막 일정인 요당리 성지 행.
요당리 성지 - 성 장주기(요셉)를 비롯한 장씨 일가 순교 터 |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191-1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길 155
요당리 성지의 순교사적 의의
요당리(蓼塘里)란 지명은 ‘여뀌 풀(蓼)이 무성한 못가의 마을’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의 경우 서해 바닷물이 아산만 쪽에서 현재의 발안천을 따라 고잔 저수지를 거쳐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 일대까지 밀려 들어왔다. 현재는 남양 방조제로 가로막혀 바닷물의 유입은 중단된 상태다.
요당리 성지는 화성시 남쪽에 있다. 더 남쪽으로는 충남 내포지역인 아산, 당진과 경계를 이루는 평택이고 북쪽으로는 안산, 수원이 접해 있어 바로 서울로 통한다. 이처럼 요당리 성지는 서울과 내포지역을 잇는 교통의 길목이 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더욱이 서해 바다를 끼고 있어 바닷물이 유입돼 뱃길이 열렸던 박해 당시에는 서울과 충청도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오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서 깊은 교우촌(당시 양간 공소)이었다.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이곳 역시 박해의 여파가 미쳤고 기해년(1839년)과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두 번의 박해 때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 했던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의 요람이었다. 요당리는 이와 같이 유서 깊은 곳이기에 다음과 같은 순교성인들의 얼이 서려 있다.
첫째, 요당리 성지는 배론 신학교의 공로자이며 갈매못의 순교 오성(五聖) 중의 한 분이신 성 장주기 요셉이 태어나서 신앙 기반을 다지고 주위 친척과 교우들에게 신앙을 전파한 곳이다. 또한 성 장주기의 6촌인 복자 장 토마스(1815-1866)를 비롯해 친인척인 장경언, 장치선, 장한여 베드로, 장사진 요한, 방씨(장주기 요셉의 숙모) 등을 비롯하여 지 다대오(1819~1869) 임 베드로(1845~1871), 조명오(曺明五) 베드로, 흥원여 가롤로(1850~1872,) 등의 순교자도 있다.
▲복자 장 토마스 (1815∼1866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얼마 안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청주교구 서운동 성당 참조)
바로 그때 토마스는 대자 되는 사람이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성 정화경 안드레아(1807∼1840)
충청도 정산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은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이곳에서 회장을 맡아 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하며 힘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의 마음을 북돋아 주었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 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 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다. 9월에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이듬해 1월 23일 33세의 나이로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둘째, 요당리 성지는 한국 교회 최초로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서 그 책임을 맡았고, 끝내는 순교한 성 민극가(閔克可, 1787~1840) 스테파노와 이곳에서 공소 회장을 맡으며 신앙 전파에 힘쓰다 순교한 성 정화경 안드레아(1807~1840)가 활동하던 곳이다.
▲성 민극가 스테파노(1787∼1840)
민극가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뒤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이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7년 뒤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극가는 집을 나와 서울 경기 지역을 전전하며 교리 서적을 팔아 생활하였다. 또 어디서나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 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 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하였거나 마음이 약해진 교우들에게 신앙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천주가사 삼세대의(三世大義)을 짓기도 하였다.
셋째, 요당리 성지는 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 (Imbert, 范世亨, 1796~1839)라우렌시오 주교가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상게’로 피신하였다가 순교하였으며, 성인의 피신을 돕다가 순교한 손경서 안드레아(1799~1839)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주기 요셉은 누구인가?
1803년 요당리 느지지(현 요당3리) 마을에서 태어난 장주기 요셉 성인은 1826년경에 세례를 받았고 모방(Maubant 羅 베드로, 1803~1839) 신부에 의해 회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1843년부터 제천 배론에 정착하였다.
1855년 성 요셉 신학당이 설립되자 메스트르 신부에게 초가 3칸짜리 자기 집을 학교 건물로 내주었으며, 자신은 한문 교사와 공소 회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사형 선고를 받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 황석두(黃錫斗, 재건, 1813~1866, 루카)와 같이 충청도 갈매못으로 내려가 64세의 나이로 3월 30일에 참수 치명하였다. (갈매못 성지, 서짓골 성지 참조)
갈매못의 수영(水營)에서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와 장주기 요셉이 치명한 후 그 시신 중 황석두 루카만이 가족들에게 넘겨지고 나머지 시신은 형장 모래밭에 묻혀 있었다. 이때 순교지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이 내려와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다녔는데, 그 사람은 바로 장주기 요셉의 아들 장노첨이었다. 그는 장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여 뜻있는 신자들과 함께 이곳에 몰래 왔다. 그 중에는 장주기 요셉의 조카 장치선도 있었다. 그는 리델 신부를 조선 밖에서 탈출시켰던 사람으로 나중에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잡혀 교수 치명하였다.(강화도 진무영 순교성지 참조) 이때 장치선은 직접 장례에는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장례에 필요한 물품과 일꾼을 조달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아무튼 장주기 요셉의 아들과 용기 있는 신자들이 모여 목숨을 걸고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 나섰는데 시신을 묻은 곳에 잔돌로 봉분처럼 쌓아놓았기 때문에 장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근처에 주막이 있으므로 소리를 낼 수 없어 맨손으로 무덤을 헐어 시신을 찾았다. 이때 시신들은 몸과 목이 맞춰져 있었고 허리에 두른 칡 줄기에 나무패가 달려 있었는데 한글로 성(姓)을 써놓아 시신을 구별할 수 있었다.
장노첨 등은 네 구의 시신을 널빤지에 놓고 삼베로 감은 다음 지게에 얹고 거기서 10리 밖에 떨어진 곳에 이장할 수 있었다. 남의 눈을 피해 밤에 할 수 밖에 없었기에 멀리 가지 못하고 하나의 봉분에 구덩이를 네 개 파서 각각 모실 수밖에 없었다. 7월에 가서야 다시 신자들이 모여 시신을 남포 서짓골로 안전하게 이장할 수 있었다.(대전교구 서짓골 성지 참조) 그의 시신은 1882년 블랑 주교의 명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졌다가 1894년 용산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1900년 명동 성당에 옮겨졌다가 1967년 절두산 지하 성당에 모셔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지 조성의 과정
그동안 요당리 성지는 이러한 역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장주기(요셉) 성인의 출생지이고, 예전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다" 라는 정도로 치부되어 많은 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점을 안타깝게 여겼던 최덕기(바오로) 주교는 성지 부지 구입을 완료하고 2006년 9월 26일 성지 전담 사제를 파견함으로써 성지개발에 대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게 되었다.
요당리 성지 초대 전담 김대영 신부는 2006년 9월 26일 부임하여 성지 조성 계획을 수립에 들어가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성지 보성을 완료했다.
2006. 10. 04. - 컨테이너 1동을 세우고 첫 미사 봉헌
2006. 12. - 천막성당 및 사무실, 컨테이너 화장실 설치 공사, 관정 공사 실시
2007. 03. 30. - 제1회 장주기 요셉 성인 치명일 기념 미사 이용훈 주교님 집전으 로 봉헌
2007. 09. 18. - 제1회 요당리 성지 순교자 현양 대회 실시
2008. 3 - 2009. 5. - 대성전 및 기타 부속건물 공사를 완료
2010, 05. 11. - 수원 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님 집전으로 성전 봉헌식 거행
요당리 성지에 서둘러 도착하니 오후 5시가 약간 지났다. 지난해 7월 수원교구 양근 성지가 떠오른다. 5시가 조금 지나서 도착했는데 문이 잠겨 있어 전화를 했더니 사무원이 퇴근을 해버려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정문에 순례 확인 스탬프는 내놓았다. 멀리서 성당 외관이라도 보았으니 순례한 걸로 하라는 건지, 아니면 확인 스탬프라도 찍게 해달라는 순례자의 요청에 친절히 부응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부랴부랴 요당리 성지에 들어갔더니 이 성지도 5시에 문을 닫는단다. 단 양근 성지와 다른 점은 여기는 신부님이 문을 잠그고 퇴근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신부님을 만나 멀리서 왔으니 잠시나마 시간을 달라고 사정을 하여 겨우 성전과 순교자 묘지는 참배할 수가 있었다. 좀더 시간을 달라는 말은 미안해서 나오지 않아 서둘러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성당
2008년 3월에 착공해 1년 3개월여의 공사를 마치고 2009년 6월 4일 입당미사를 봉헌한 붉은 벽돌 건물이다. 정면에서 보면 한 송이 꽃처럼 소담하고 아름답다.
성전에 오르는 계단 앞에는 성전 봉헌 기념조형물이 있는데 두 손만 잘린 것이 섬뜩하다. 그리고 계단 오른쪽에는 촛불 봉헌대와 성 장주기 요셉의 흉상이 있다.
그리고 성전 바깥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간에 황금색 성모님 모자상이 맞이한다.
성당 내부는 목재 천장으로 은은한 향기를 발하고 있고, 제대 뒷벽은 전체가 수많은 소벽전 모자이크로 이루어 가운데 모셔진 고상도 이름 그대로 뼈만 남은 듯한 고행상이다.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느껴진다. 제대 뒤편 벽 아래에는 성 장주기 요셉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기도의 광장
성전을 나와 다시 성전 측면을 지나 기도의 광장 입구로 간다. 입구는 주차장에서 바로 계단을 올라오면 되는데 우리는 성전을 먼저 갔기에 다시 되돌아 온 격이 된다.
기도의 광장 정면 입구에서 왼쪽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오른쪽으로는 묵주기도의 길이 있다. 광장은 넓은 잔디밭이며 그 한가운데 성모상이 있다.
기도의 광장 중앙의 성모님은 어디서 본 듯도 한데, 알고 보니 남양 성가정 성지의 성모님이었다. 요당리 성지 개발 초기에 남양 성모성지 전담 이상각 신부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순교자 묘역
기도의 광장 뒤쪽에서 낮은 계단을 오르면 묘역이다. 묘역 앞쪽에 대형 제대가 있고 잔디 광장 멀리 앞쪽에 대형 십자가 아래 순교자묘가 있다. 제대를 보면 야외 성전을 장소로 이용되는 것 같다, 묘역은 물론 시신이 안장돼 있지 않은 의묘(擬墓)이다.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유해는 대성당에 모시고 있다.
7기의 묘는 왼쪽으로부터 하느님의 종 지 다대오, 성 앵베르(라우렌시오) 주교, 성 민극가(스테파노), 성 장주기(요셉), 성 정화경(안드레아), 복자 장 토마스, 그리고 마지막 맨 오른쪽은 합장묘로 장사진(요한), 장한여(베드로), 장경연, 장치선, 방씨, 손경서(안드레아), 임 베드로, 조명오(베드로), 홍원여(가롤로)이다.
묘역을 나오면 소성당, 사무실이 있는 관리동 건물이 나온다. 사무실 앞에 비치된 확인 스탬프를 서둘러 찍고 소성당은 들어가지 못한 채 나왔다.
이로써 요당리 성당을 끝으로 이번 25차 순례를 끝낸다. 하나 같이 순교자의 자취가 어린 곳이며, 이를 성역화한 분들의 노고 또한 찬양 받아야 마땅하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