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8. 대동 운강석굴 ②
불교 ‘르네상스’…북방민족의 신심에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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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석굴 전경> |
사진설명: 대동시 서쪽 16㎞ 지점에 있는, 무주산 남쪽 기슭에 개착된 운강석굴은 북위불교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산 위의 성벽은 명나라 때 쌓은 것이다. |
불교가 아닌 ‘도교적 풍모의 유교 체제’로 북위를 다스리고 싶었던 재상 최호(381~450)와 도사 구겸지(?~448)의 기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북위 태무제에 의한 ‘446년의 불교탄압’은 적어도 도사 구겸지가 관계됐기에 불교와 도교의 이념투쟁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446년 법난’의 진실은 아니다. 폐불(廢佛)의 주된 선동자가 양자강 이북에 이상적 유교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최호였다는 점에서, “446년의 법난은 비(非)한족계(선비족) 종족의 중국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케네쓰 첸)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하와이대 등에서 오랫동안 불교를 연구하고 가르치다 작고한 케네쓰 첸 또한 한족(漢族)이기에, 한족을 높이는 ‘한족화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로 법난을 이해하는지는 모르지만, ‘446년 법난’이 단순히 도교와 불교의 대립이 아님은 분명한 것 같다. 당시 팽창 일로에 있던 북위는 중국 대륙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내적으로 한화(漢化)정책을 펴고 있었다. 북위 조정의 이런 경향은 494년 낙양 천도 이후 구체화 되지만, ‘446년 법난’도 한화정책 과정에 일어난 사건의 하나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어찌됐던, 최호와 구겸지의 죽음과 태무제의 사망(451년)으로 그들이 기도했던 ‘원대한 계획’(?)도 무너지고 말았다. 태무제를 이어 황제가 된 문성제(재위 452~465)는 등극하던 그해(452) 12월 불교신앙을 허용하는 조칙을 내렸다. 조칙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 주의 군현에 명하노니 대중들이 많은 곳에는 각각 불탑 한 기씩 세울 것을 허락한다. 비용은 얼마가 들든 제한하지 않는다. 불교의 진리와 가르침을 좋아하여 사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만일 그가 양가 출신이고 성품과 품행이 평소 독실하며, 여러 혐오스러움과 더러움을 떠난 자라면 출가를 허용한다.”
사문통 담요스님이 운강석굴 개착 발원
불교가 재기(再起)한 그 해 문성제의 호의로 평성에 석불상이 조성됐다. 불상이 완성된 뒤 불상을 보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문성제의 얼굴과 불상의 상호가 비슷해, 북위 제1대 도인통(道人統) 법과스님이 내세웠던 “황제는 당금의 여래”(王卽佛)라는 언명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454년 문성제는 오대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다섯 구의 청동불상을 주조하도록 명했는데, 각각 1장6척이나 됐다. 불상들은 마치 황제인 것처럼 숭배됐다. 이처럼, 부흥된 불교는 황실의 확고한 지원을 받았고, 승단 자체가 국가정책과 긴밀히 연계돼 움직였다.
승단과 관료는 서로 서로를 지배했다. 법과스님을 이어 도인통에 오른 사현스님(師賢. ?~460)도, 뒤 이어 사문통에 출세한 담요스님(曇曜. ?~?)도 이런 정책을 계승해 나갔다. 계빈(간다라) 출신인 도인통 사현스님은 의원으로 가장해 법난 속에서 살아남았고, 불교가 부흥된 뒤에는 친히 황제의 삭발을 받았다. 황제는 도인통(사문통으로 개칭)이 승단을 지도할 수 있도록 했고, 사문통은 이를 역으로 활용했다. 황제와 사문통의 관계를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이 담요스님이었다.
담요스님의 생애에 대해선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생몰년도 모른다. 다만 양주(하서주랑에 있는 무위)에서 지내다 439년 북위가 하서주랑을 지배하던 북량 왕조를 흡수한 이후, 수도 평성으로 옮겨온 스님 가운데 한 명이었다. 사현스님의 입적과 더불어 담요스님은 사문통으로 명칭이 바뀐 승관(僧官)의 최고 위치에 오르게 됐다. 등극 이후 사문통으로 훌륭한 공적을 남기며 20년 동안 지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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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운강석굴에 있는 여러 표정의 불.보살상. |
사문통이 된 담요스님은 흥불(興佛)을 위한 여러 시책을 실시했다. 먼저 승지호(僧祇戶)와 불도호(佛圖戶) 제도를 확립했다. 승지호.불도호를 설명하기 위해선 당시 북위의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무제가 죽고 난 후 북위 정권은 황제권의 강화, 즉 ‘중앙집권화 정책’과 불교의 국교화(國敎化)에 의한 ‘사상통일’을 추진했다. 불교의 국교화는 담요스님의 주도 아래 승관제를 정비하고, 승지호.불도호를 이용해 교단의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형태로 진행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확립된, 효문제에게 주청해 결정된 승지호는 ‘매년 60석의 승지속(僧祗粟)을 승조(僧曹. 교단 관리하는 정부 기구)에 납부해야만 하는 특수 가구(家口)’를 말한다. 승조(僧曹)는 곡물들을 저장해 두었다 기아가 닥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승지호는 농업을 향상시켜, 흉년이 들었을 때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다만 승지속을 생산하는 토지는 승지호들이 소유하며, 세금이 면제된 재산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승지호는 신속하게 확산됐다. 승조는 필요에 따라 곡물들을 팔 수 있는 권리도 갖고 있었으며, 수익금은 불교적 목적에 사용됐다. 반면 불도호는 죄수들이나 노예들로 구성됐다. 그들은 사원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절 주변을 청소하고 장작을 패는 등 사원의 일상적인 일들을 했다. 죄수들의 노동력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의 경제적인 부담이 되지 않았다. 승지호.불도호는 국가에 도움 되고, 불교에도 유용한 제도였다. 승지호.불도호는 토지와 노동력을 교단에 귀속시키는 역할을 했고, 국가는 교단을 통제함으로써 결국 토지와 노동력을 관리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불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담요스님이 이룩한 두 번째 업적은 운강석굴의 개착이다. 북위 황실은 태무제가 저질렀던 법난을 보상하고, 교단은 교단대로 불교를 진흥시키는 방안의 하나로 석굴 개착을 진행시켰다. “바위로 조성된 불상들은 불법(佛法)의 영원성에 대한 구체적 상징으로, 후세의 지배자들에게 불교를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것이기에, 불교부흥의 기념비적인 사업”(케네쓰 첸)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운강석굴은 문성제 화평 원년(460)에 개착되기 시작, 효문제 재위기간(471~499)에 정력적으로 추진됐다. 비록 494년 낙양으로 천도하는 바람에 완성을 보지는 못했지만, 운강석굴은 그래도 오늘날 중국을 대표하는 3대 석굴에 포함된다.
웅장한 운강석굴 가운데 초기에 만들어진 석굴은 ‘16굴~20굴’(소위 담요 5굴)이다. 이 석굴 안에는 거대한 다섯 위의 불상들이 안치돼 있는데, 어떤 불상은 서있고, 어떤 불상은 앉아 있다. 큰 것은 70척이 넘는다. ‘담요 5굴’의 불상들은 “황제는 현세의 여래”라고 한 법과스님의 사상에 따라 조성된, 북위의 다섯 선조(도무제.명원제.태무제.경목제.문성제)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법과스님이 말한 “황제는 당금의 여래”라는 사상은 한계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성불하여 열반에 든 존재라는 점이 그 것. 그래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있던 미륵하생신앙이었다.
16~20굴 부처님은 북위 황제 닮아
미륵신앙을 활용, 북위의 과거 황제를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현 황제 문성제를 미륵으로 하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운강석굴, 특히 담요 5굴이 모두 미륵불과 석가모니불로 조성된 것은 이 때문. 따라서 교각미륵보살이 본존인 17굴은 바로 문성제 자신을 위해 만든 석굴이라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나머지 4굴의 본존은 대체로 볼 때 석가모니불인데, 이는 문성제 앞의 도무제.명원제.태무제.경목제를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 특히 석가불이라도 각기 형상이 다른 것은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교화 대상에 응해 나투신 응신불(應身佛)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담요 5굴’에 이어 5번에서 10번까지의 석굴들이 개착됐다. 특히 5번 굴과 6번 굴은 운강석굴 전체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게 조각됐으며, 부처님 일대기도 5.6번 석굴 안에 조상(彫像)돼 있다.
운강석굴엔 다른 석굴에 없는 특징이 또 있다.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함께 조각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 5.6굴에 보인다는 점이다. 다보여래가 보살도를 수행하고 있을 때 “내가 성불 멸도(滅度)한 이후 세상에는 〈법화경〉이 있을 것이며, 나의 탑묘는 지하로부터 용출해 그 경을 들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후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자, 눈앞에 높고 큰 보탑이 출현해 부처님을 찬미하는 소리를 냈다. 이 교리에 근거해,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같이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이 조성됐다. 이에 대해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 교수는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사계절출판사. 2003)에 수록한 ‘석굴 속에 새겨진 중생들의 끝없는 욕망’에서 “운강석굴이 정력적으로 개착되던 효문제 재위시절, 효문제와 그의 조모 문명태후라는 두 명의 권력자가 있는 현실정치를 반영해 이불병좌상이 조성됐다”고 주장한다.
북위불교에 관한 생각을 접고 20굴 앞에 섰다. 미소를 머금은 거대한 대불(大佛)이 앉아있다. 대불을 가로막았던 앞부분이 무너져 내리며, 부처님이 드러난 굴이 바로 20굴이다. 선 채로 삼배하고,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잘 생긴 상호(相好)였다. 정치적 동기로 조성됐던, 종교적 신심에 의해 만들어졌던, 이렇게 훌륭한 종교적 성물(聖物)을 남긴 선비족들의 신심(信心)에 새삼 고개가 숙여졌다. 운강석굴 전체를 보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문을 나서며 돌아보았다. 석굴과 부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무주산을 보며 다시 한번 선비족을 떠올렸다. “설사 당시 선비족이 끝없는 욕망을 갖고 석굴을 개착했다 해도, 그들의 신심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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