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개인적인 인사말.
롬16:1-16절, 350.372.513장.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오늘 읽은 로마서 16장 1-16절의 말씀을 자세히 실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본문은 15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안부와 성도들과의 교제를 그리워하면서 마지막 장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동안 사도 바울이 목회하는데 재정후원을 하며 기도 후원을 하며,
위로하며 격려했던 분들 그리고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해서 그 영혼이 새롭게 변화되어, 바울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주었던 성도들을 일일이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안부의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본문을 준비하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에 감격했습니다.
바울은 대 학자이면서 대 설교가였습니다. 그리고 명쾌한 법 이론과 성경지식을 가진 신학자이지만 성도 한분 한분에게 받은 바 은혜와 사랑과 교제를 잊지 않고 안부와 따뜻한 고마운 정을 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갈파한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는 모든 성경 중에서도 가장 귀한 진리를 썼습니다.
그는 대 학자다운 걸출한 인품이었으나, 그의 인간적인 따스함과 섬세함이 16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목회자로서의 바울도 위대하고 크신 분이지만 한 목회자의 대 사역을 위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눈물과 땀을 바쳐 헌신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며 물질을 바쳐서 선교하는 일을 도우며, 바울이 어려운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몸을 던져서 바울을 보호하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역시 깨닫는 것은 그 목회자에 그 성도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목회는 목사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의 사랑과 협력을 통해서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한 곳에서만 머물러서 목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개척해서 교회가 되면 또 다른 곳에 가서 개척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순회 전도자로서의 목회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몇차례나 옥고를 치루었고 결국은 옥사로서 순교하였습니다만, 그는 옥중에서도 많은 편지를 써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편지를 통해서 설교했습니다. 물론 사도가 옥중에 있고 소망이 없어 보이니 나중에는 하나 둘 배신하고 그의 곁을 떠나고,
결국 주치의인 누가만 남는, 참으로 고독하고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로마의 추운 겨울, 바울은 드로아의 가보집에 있는 겉옷 한벌이 생각났습니다. 그의 전재산은 겉옷 한벌과 성경 한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로마서를 쓸 당시만 해도 그를 돕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분 한분 이름을 거명하면서 안부를 묻고, 칭찬과 격려를 주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있습니다. 우선 1절에 보면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자매인 뵈뵈를 로마교회에 추천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전후 문맥을 보면 바울은 여성도들의 위치를 상당히 높이 올려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를 겐그리아교회 일꾼으로 말하면서 추천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는 목회자 바울을 향한 지극한 충성을 다한 듯 합니다. 그 이유가 2절에 잘 해설이 되어있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를 합당한 예를 갖추어서 영접할 뿐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 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뵈뵈는 남몰래 신실한 성도들과 특히 사도 바울을 도와주고 보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매가 바울을 보호했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 아마도 물질로 돕고, 어려울 때 그를 대변해 주고 바울의 안질의 병을 치료해 준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귀한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가 있었기에 사도 바울이 큰 일을 할 수 있었고,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골격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큰 인물의 배후에는 남몰래 눈물과 땀을 바친 평신도가 있었다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작은 기도와 작은 헌신이지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것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자로서는 수준 미달의 연약한 목사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부족한 종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한국교회에서 칼빈주의 사상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는 제 뒤에서 기도하고 위로하고 협력자가 되신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활기차게 일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과 관계도 서로 사랑하는 협력 관계입니다. 목회자가 혼자서 앞질러가는데 성도들은 저만치 쳐져서 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 그 반대로 성도들은 앞질러 가는데 교역자는 저만치 쳐져 있어도 안됩니다. 목회는 평신도들과 더불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 3, 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특별한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너희에게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맨 처음 문안 받은 가정교회는 브리스가와 그녀의 남편 아굴라였습니다. 그들과 바울과의 관계는 여러 해 전에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였습니다.
이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특별한 헌신과 열정은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동안이었습니다. 이 본문에 있는대로, "내 목숨을 위해서 자기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목숨의 위협을 당했던 폭동을 두고 한 말이겠습니다.(행 9:28-31, 고전 16:9, 고후 1:8-10).
이 사건은 사도 바울의 일생에 있어서 지워지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이 두 부부는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걸고 폭도들을 가로 막고 위기를 면하도록 했습니다. 정말로 이런 성도들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이 달려갈 길을 다 갔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큰 목회자이지만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쳐서 그를 보호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헌신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이처럼 눈물겨운 아름다운 용기와 헌신이 있었기에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사랑한 것도, 바울의 인격을 사랑했다기 보다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목회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교회와 그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실 때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각각 다른 은사와 소명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소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모양도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각 다른 달란트와 각각 다른 성품을 통해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어떤 이는 기도로, 어떤 이는 봉사로, 어떤 이는 증거하는 일로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라고 질문합니다.
사렙다 과부가 가진, 기름 조금과 밀가루 조금을 선지자에게 드렸을 때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벳세다 광야에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를 주께 내어 놓았을 때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교역자와 성도는 서로가 따뜻한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목회자(牧會者)를 크게 만들어야 합니다. 크게 일하도록 함께 뛰어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칭찬해 주고 용기를 주고 받들어 주어야 합니다.
금세기의 최대의 부흥사인 빌리그래함 목사의 배후에는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군단이 있고 용기를 주고 후원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것은 빌리그래함을 위해가 아니고 주의 복음(福音)과 그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잘 사는 일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볼 때는 말씀듣기를 좋아하고 목회의 방침을 순종하는 성도를 볼 때 기쁨이 있고 저만치 멀찌기 따라오는 사람을 볼 때는 가슴이 아프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5절 말씀에 보면 "또 저희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네도라는 초신자가 늘 마음에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첫번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의 가슴에는 이전부터 예수 믿는 사람도 귀하지만 처음 예수 믿어 자라는 사람들을 볼 때 참 눈물겹도록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린애기가 출생해서 점점 자라가면서 예쁜 짓을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을 때 부모의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초신자들이 예수 믿어서 진리를 깨닫게 되고 신앙의 깊은 자리에 나가면서 순종과 감사의 삶을 배워갈 때 교역자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그것은 교역자의 기쁨이기 전에 우리 주님의 기쁨이요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 가운데는 아시아에서 처음 예수를 영접했던 에배네도가 늘 마음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또한 6절 말씀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 마리아란 여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흔한 이름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영자, 순자, 춘자같은 일반적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리아란 한 여인의 남몰래 수고한 그 수고를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주방에서 봉사를 했는지 청소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복음을 위해서 수고한 것도 귀한 일이며 그 수고를 알아주고 마음에 깊이 담고 있는 목회자 바울의 마음도 참으로 귀합니다. 그 외에도 7절에서 16절까지 계속해서 한분 한분 이름을 거명하면서 그들의 노고와 수고에 대해서 격려를 하고 안부를 전하고있습니다.
1절에서 16절까지 살펴보면 14번 정도의 안부란 말이 나옵니다. 바울은 아직도 로마에 가보지도 않았지만 교회를 섬기는 여러 성도들을 이토록 정확히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수고를 칭찬하고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는 이 본문을 상고하면서 목회자와 성도와의 사이에 애틋한 사랑과 협력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론 목회자와 성도와의 아름다운 사랑은 인간적인 교제 때문이 아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고 하나님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요 자매입니다. 오히려 때로는 혈육보다도 더 끈끈한 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 지체(肢體)가 되고 주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떡과 포도즙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좋은 목자가 된 이유는 보이지 않게 기도하고 순종하고 협력하는 성도들이 한 군단을 이루어서, 그를 도왔던 것을 살폈습니다. 우리도 부족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성도들은 목회자를 위해서 뜨거운 정과 정성으로 서로 보살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더욱 부흥케 하시며 은혜가 충만한 교회로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료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