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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적 사고의 청산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945
철학 작품들은 현실에서 급박하게 벌어지는 사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인류의 영원한 문제들을 다루며 세계의 혼란을 여유 있게 무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지 선입견에 불과하며 이러한 선입견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을 통해 인상적으로 반박되었다. 위대한 철학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그때마다 직접적으로 자극을 받으며 이러한 사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한다.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획득한 지 5년이 지난 1938년 3월 12일, 히틀러의 군대는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3일 후 히틀러는 빈의 호프부르크의 발코니에서 대중들에게 모습을 나타냈다. 그곳에서 그는 환호하는 수십만 명의 추종자들에게 '위대한 독일 민족 공동체'를 위한 오스트리아의 충성을 요청했다. 지구 반대 편에 있는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는 빈으로부터 이민 온 유대 출신의 한 학자가 세심한 주의와 걱정을 가지고 중유럽의 이러한 정치적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서른여섯 살의 철학자 칼 포퍼였다. 그는 자신의 부인과 함께 1년 전 강사로 취임하기 위해 영국을 거쳐 뉴질랜드에 도착했었다. 빈에는 그의 어머니와 다른 많은 친척들이 있었다.
히틀러가 자신의 고향에 입성하는 사진들을 목격한 포퍼는 전 유럽을 어둠에 휩싸이게 한 히틀러와 스탈린의 독재 정치에 대항하여 철학적으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유배와 전쟁이라는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철학서인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카데믹한 책이 아니다. 매우 중요한 관심사를 대변하는 한 사람이 온갖 정성을 기울여 한 줄 한 줄 쓴 책이다. 이 중요한 관심사란 서구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서 가치 투쟁을 벌이고 있는 두 대립적 정치 문화 투쟁에서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였다. 적은 지금 대학의 벽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를 가지고 문명을 짓밟고, 죽이고, 고문하고, 강제 수용소를 건설하고 있었다.
포퍼는 전체주의의 철학적 창시자들을 포괄적으로 비판할 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전후 세계에 건설되어야 할 원칙들을 한 가지 공식으로 제시했다. 그는 '열린 사회'라는 개념을 권력이 제한되고 개인적 자유의 기초 위에서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핵심어로 삼았다.
그것은 매우 야심에 찬 시도였다. 포퍼 자신은 이 시도를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다.
"모든 것을 가장 명백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철학적 주제들의 범위는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책에서보다 더 폭넓은 것이다. 그것은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다루고 있으며, 윤리의 토대를 비판하고, 문명사에 새로운 빛을 던지며..... , 현대 논리학의 문제를 다루며, 사회 과학적 방법론에 새롭고 실천적인 관점을 도입시키며.... 그리고 그것은 결코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20세기 이데올로기적 투쟁들에 대한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적 정치철학의 응답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응답 이상으로 훨씬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빈의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키가 작고 자의식이 무척 강했다. 그는 일찍부터 정치적 사건들의 참여자였고 세심한 관찰자였다. 포퍼는 젊은 시절부터 전체주의적 사고와 대결해왔다. 1902년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도나우 양국(옛 오스트리아, 헝가리 왕국의 별칭)의 최후를 직접 경험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특히 '붉은 빈(1차 대전이 끝나고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한 오스트리아 통치를 일컬음)'이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원년에 지배하게 된 것을 환영했다. 열여섯 살 때 그는 도시에선 빈곤, 실업, 노숙이 일상화되는 것을 보고, 사회적 정의와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투쟁 목적으로 하는 공산주의적 노동 운동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1년 후인 1919년 6월, 그는 그가 나중에 이념적으로 '결정적인 체험'이라고 불렀던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공산당이 이끄는 시위에 참가했는데, 그때 열두 명의 시위 참가자가 경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포퍼는 이런 유혈 사태를 비극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도 공범이라고 느꼈다. 희생자들은 미래에 도래할 필연적인 세계 혁명을 위해 죽은 것이라는 당 간부의 해명은 포퍼의 도덕적인 근본 신념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세계 혁명과 '필연적인 역사적 진보'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신념과 그것을 위한 인간의 희생은 필연적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는 그가 보기에 인간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었다. 결국 포퍼는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그는 그때부터 역사는 불변의 법칙에 의해 규정되며, 역사의 진행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고, 또한 몇몇 선택받은 자들의 과제는 인간들을 '이끌어' '(역사적) 필연성에 대해 이해'를 시키는 것이라는 신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년 포퍼는 사회적 참여와 포괄적인 사회 개혁의 목적을 자신이 수행해야 할 의무로 생각했다. 그는 일용 노동자로 일을 하는 동시에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로 결심했다. 그는 또한 심리학과 철학을 대학에서 공부했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30년 고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었을 때 그는 당시 모리츠 슐리크와 루돌프 카르나프를 중심으로 하는 유명한 빈 학파가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다음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쏟았다.
- 과학적으로 확실한 인식론적 발전은 어떻게 이룰 수 있으며, 어떻게 과학적 이론과 비과학적 이론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빈 학파의 증인이자 비판가로서 포퍼는 한 권의 책 속에서 이러한 물음에 대한 독창적인 대답을 펼쳤다. 그 책은 완고한 강단 철학권 내에서 커다란 인정을 받았다. 1935년 <탐구의 논리>가 출판되었고, 이 책으로 그는 현대 과학 이론의 창시자가 되었다. 포퍼에 의하면, 세계에 관한 앎은 이론들을 경험과 직접 맞부딪치게 해서 경험에 맞지 않으면 그러한 이론들을 버리고 더 나은 이론들을 추구함으로써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포퍼가 말했듯이, 만약 이론들이 그러한 실패를 경험하고, 반증 가능하다는 '실패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학문적인 것이다. 따라서 비판, 즉 반증 가능성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진보를 위한 동력이 되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 즉 구체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노력은 이제부터 포퍼의 사유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탐구의 논리>를 통해 명성을 얻게 되자 그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갖게 되었고 외국에서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러셀, 닐스 보어 그리고 루돌프 카르나프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와 학자들이 그를 위해 추천서를 써주었고, 결국 그는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켄터베리 대학의 철학과 강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30년대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첨예화된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는 그에게 그러한 길을 걷도록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학에 발을 들여놓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포퍼는 뉴질랜드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적국으로부터 온 외국인' 취급을 당했다. 처음에 그는 그곳에서 정치와는 먼 생활을 했다. 그는 조용한 삶을 살았고 대학 강의에 몰두했으며 논리학 교과서를 집필했다. 그는 뉴질랜드에 정치철학자가 아니라 과학 이론의 떠오르는 '별'로 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행 짐 속에 원고를 지니고 다녔다. 이 원고 속에서 그는 계속해서 공산주의 비판에 대한 작업을 하면서 그러한 비판을 중유럽에서 확대되고 있는 파시즘에 대한 경험을 통해 보완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공통적인 근본 신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공통적인 근본 신념 가운데 하나를 그는 '역사주의'라 명했다. 역사주의란 사회적. 역사적 진행의 법칙성과 예측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포퍼는 이러한 역사주의적인 사관과 전체주의적 위협 사이에서 밀접한 연관 관계를 보았다.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이며 국민의 운명적인 주인임을 주장했다. 선택된 계급을 통해서든 선택된 인종을 통해서든지 간에, 소위 '열린 사회의 적들'인 히틀러와 스탈린은 국가를 신성화시켰고, 전쟁을 찬미했으며 개인과 개인의 자유를 무시했다. 그들은 여러 생각과 재화의 개방적인 교환으로 특징지어지는 민족들의 평화로운 공동의 삶 대신에 민족주의적인 종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종족 의식은 그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점과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는 오만과 연결되어 있다.
포퍼 자신이 뉴질랜드로 가지고 온 원고는 1936년 런던에서의 강연원고였다. 그는 강연 원고에서 역사주의적 근본 이념을 비판했다. 그는 몇 년 후 그 원고를 <역사주의의 빈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게 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과학 이론적 인식을 역사와 사회학 그리고 정치 행위의 영역에까지 적용한다.
포퍼에 의하면 자연 과학적 법칙에 대한 학문적 요청과 비교될 수 있는 역사적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개별적인 역사의 추세에 대해 파악할 수 있을 뿐이지. 19세기의 위대한 역사철학자인 헤겔과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전체로서의 역사의 진행을 결코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포퍼는 1938년에 <역사주의의 빈곤>의 내용을 더욱 확장시킨 영어판을 완성시켰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위한 작업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역사주의의 빈곤>의 주장들에 기초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합병 이후 고향에서 포퍼에게 점점 더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많아졌고 친구들과 친지들은 그에게 뉴질랜드로 여행을 할 수 있는 허가서를 부탁했다. 그는 우선적으로 실현 가능한 도움을 주기 위한 방법들을 찾았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유대 망명자 위원회'를 설립해 약 서른여섯 명의 가족들이 출국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은 관료주의와의 부단한 싸움이었다. 뉴질랜드는 매우 엄격한 입국 정책을 수행했고 망명자들을 포용하는 정책이 없었다. 나치에 의한 12월 유대인 학살 이후 뉴질랜드 정부는 비로소 그들에게 비자를 교부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이러한 방식의 도움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포퍼의 어머니는 1938년 빈에서 사망했고 아직 살아 있던 그의 누이는 프랑스를 거쳐 겨우 스위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논리학의 문제들과 과학 이론은 이제 그로부터 영원히 멀어졌다. 그 대신에 1938년부터 몰두하기 시작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가장 열악한 상황 속에서 집필되었다. 그 책의 집필 당시 전쟁은 바로 그의 코앞에 닥쳐 있었다. 참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는 오랫동안 전쟁의 참화로부터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이 태평양에 진출했을 때, 이젠 뉴질랜드도 더 이상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그의 계획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포퍼의 강사직은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강의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도록 계약되어 있었다. 대학 당국은 강의를 목적으로 고용한 외국인이 자신의 저술에 몰두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전쟁 중에 종이가 귀해지자, 그는 자신이 대학에서 가져온 모든 종이에 돈을 지불했다. 게다가 자신의 저술에 필요한 문헌들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도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빈에 있는 아버지의 서고로부터 겨우 가져온 몇 권의 책과 크라이스트처치의 대학 도서실에 있는 많지 않은 책들은 그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질 않았다. 전쟁 중에 외부에서 문헌들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개인적 생활 환경도 매우 열악했다. 그는 빚을 내어 집을 얻었고 우편 요금과 전보에 많은 돈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주 검소하게 살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절약했다. 난방, 의류 그리고 심지어 음식까지도. 포퍼는 대학의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조차 없었다. 어떤 편지에서 썼듯이, 그는 자신의 텃밭에서 나오는 것과 '쌀과 당근의 식이 요법'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고난에 찬 저술의 과정이었다. 부족한 수면, 결핍된 영양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해져가는 우울증 증세는 그를 만성적인 의기소침과 절망 상태로 만들었다.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반복적으로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만 했다. 이따금씩 그는 한 쪽 눈밖에 뜰 수가 없었고 농양으로 인해 아홉 개의 이를 잃기도 했다.
포퍼가 자신의 강의와 더불어 저술한 거의 1,000쪽 분량의 책은 엄청난 열정의 산물이었다. 항상 자신의 저술 계획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포퍼는 대단한 의지를 가지고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청교도적 생활 태도를 지닌 '일 벌레'였다. 그는 담배와 술도 하지 않았고 결코 쾌락적인 삶을 살지도 않았다. 이따금씩 하는 등산만이 그가 누리는 유일한 기분 전환이었다. 그 외에 그는 분초를 아껴 밤과 주말에도 원고를 쓰는 데 모든 시간을 보냈다. 그의 부인인 헨니는 그의 원고를 입력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3년 2월 드디어 그는 이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열린 사회'라는 개념을 포퍼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에게서 차용했다. 동시에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철학이 아니라 영어권의 문명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었다. '열린 사회'가 일상생활에서 의미하는 바를 포퍼는 뉴질랜드 체류에서 그리고 뉴질랜드로 오기 이전에 영국에서 보냈던 9개월간의 체류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존엄성, 자유, 세계 개방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비판을 수용할 줄 아는 정치 체제에 대한 경험이었다. 포퍼는 자신이 계몽주의적 전통에 속한다고 보았다. 계몽주의적 전통은 인권의 보호와 관용 그리고 법앞에서의 평등을 강조한다. 이러한 이념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인간성의 철학자'인 칸트가 정초한 것이고, 포퍼는 나중에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독일어판을 칸트에게 헌정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치철학의 탁월한 대표자들을 다루고 있다. 제1권 <플라톤의 마술>에서 그는 우리에게 전승된 국가 유토피아를 최초로 주장한 플라톤과 비판적이고 선동적인 대결을 한다. 제2권 <거짓 예언자>는 헤겔과 마르크스 그리고 역사주의에 대한 청산이다. 이 세 명의 사상가 모두를 포퍼는 전체주의의 선구자로 간주한다. 또한 이 책은 철학사와의 비판적 대결 그 이상의 것을 수행하면서, 전체주의적 독재가 지배하는 닫힌 사회의 대안으로서 현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이론을 발전시킨다.
그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저술할 때 항상 영감을 주었던 책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였다. 포퍼는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세계와 '전체주의적'인 스파르타와 '민주주의적'인 아테네가 전쟁을 했던 그 시기의 그리스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싸움의 대리인으로 두 명의 아테네 귀족 계층 출신의 뛰어난 대표자인 정치가 페리클레스와 철학자 플라톤을 들었다.
페리클레스는 열린 민주 사회를, 플라톤은 닫힌 계급 사회를 대변한다. 포퍼는 자신의 저서에 이러한 두 명의 대표자들의 말을 인용해 표어로 실었다. 페리클레스의 인용문은 시민의 성숙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단지 소수만이 정치적인 구상을 계획하고 관철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이와 반대로 플라톤의 인용문은 전체주의적 통솔자의 원칙과 함께 시작된다.
"모든 것 가운데 최고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여자거나 남자거나 그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통솔자 없이는 안 된다."
책의 의도는 플라톤과 그의 추종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전통이 가진 가면을 벗겨버리고, 페리클레스적 전통 속에 있는 열린 사회의 원칙을 밝히며 그러한 원칙들을 방어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유의 적인 '예언자적 철학자'들에 대한 기원을 단지 플라톤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 철학에까지 추적했다. 이미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그는 하나의 전형을 보았는데, 그것은 가장 최근에 등장한 열린 사회의 적들에게서 반복되는 것이었다. 사회가 변화하는 시기에 변화를 반대하는 적들은 확고한 방향 또는 어떤 하나의 이론이나 법칙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을 통해 그들은 역사적 변화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들은 원하지 않는 변화 대신에 변하지 않는 확고한 질서에 대한 구상을 대립시킨다. 그들은 지속적인 사회의 개역을 거부한다. 그들은 모든 정치적 근본 문제가 일순간에 해결될 수 있는 거대하고 최종적인 '투기'를 선호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주저인 <국가>에서 그러한 거대한 투기를 제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플라톤이 열린 사회에 대한 최초의 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많은 독자들이 놀랄 만한 일이었다. 플라톤은 국가의 청사진에 있어서 이성과 정의를 중요시했던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자 전체 유럽 철학의 아버지가 아닌가? 많은 완고한 강단 철학자들은 이러한 포퍼의 플라톤 비판을 신성 모독으로 생각했다.
포퍼는 결코 플라톤의 철학사적 의미와 싸우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첫 권에서 그는 플라톤을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했다. <플라톤의 마술>이라는 제목은 포퍼가 플라톤에게서 느꼈던 모순적인 태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플라톤은 포퍼에게 매력적인 사상가이자 예술철학자이고 자신의 독자들을 사로잡는 공상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플라톤은 전체주의로 이끄는 위험한 안내자였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영혼 속에서 사유하고 저술했다고 하지만 포퍼는 이에 대해 항상 이론을 제기했다. 그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다르게 서술했다. 그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유를 지키는 강직한 대표자였으며,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전해주는 것처럼 국가적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엄성과 양심의 결정을 주장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포퍼에게 그는 '비판의 원칙'을 자신의 삶과 철학함의 추진력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포퍼에 따르면 오래된 아테네 귀족 가문의 후예인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반대로 전통적인 계급 통치의 정당함을 처음부터 주장했다. 그의 관심은 항상 아테네의 오랜 귀족들의 관심과 일치했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한 후 스파르타에 부역해서 아테네를 지배했던 30인의 참주들 가운데는 플라톤의 가까운 친척들이 있었다. 귀족 통치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 진행된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플라톤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포퍼는 플라톤을 자신의 철학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변혁들이 정당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길 원했던 (민주주의에) 실망한 보수주의자로 표현된다. 따라서 , <국가>는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 없는 이상적이고도 안정적인 사회 질서에 대한 설계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회 질서 속에 이미 '정의의 이상'이 최종적으로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포퍼에 따르면 플라톤의 정의는 계몽주의 이래 우리가 사용하는 표어인 '자유, 평등, 우애'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이라는 플라톤이 제기한 정의의 근본 이념은 오히려 정반대를 뜻한다. 각자는 이미 자신의 계급과 출생으로 구분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직분에 충실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정의란 개혁 가능성이 없는 신분 사회의 안정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상 국가의 설계 속에서 수많은 불길한 발전들이 감지되었는데, 그것은 20세기 전체주의적 사회 속에서 실현된 것들, 즉 검열, 부자유, 국민 대다수를 노동하는 노예로 격하시키는 것과 사회의 철저한 군사화였다.
포퍼에 따르면 플라톤의 사회 설계는 인간의 평등이 아니라 자연적 불평등에 기인한다. 그러한 불평등은 생물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법적. 도덕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물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인간은 더 많은 권한과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당시에는 비그리스인을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란 의미에서 '이방인'이라 불렀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한 국가 내에 상이한 그룹 사이에서도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 정치철학의 이러한 서술은 그 당시 독자들에게 명백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더욱 분명한 시대적 사건들에 대해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 포퍼가 보기에 플라톤은 나치의 인종 이론의 선행자이다. 그리고 실제로 포퍼는 '생물학적 인종 이론'의 책임이 플라톤에게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플라톤은 국가를 이끄는 소명을 지닌, 소위 '감호자'라 불리는 지배 계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테네에서는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오래전부터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귀족 계급의 통치에 대한 의문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감호자라는 지배 계층은 아테네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와 과정에 대한 플라톤의 응답이었다.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우수한 인종에 대한) 생물학적인 선택과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게 감독되고 교육받은 새롭고 안정된 통치 계층이 양성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통치 계층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은 스파르타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통치 계층이 아예 모든 변화에 대한 시도를 그 싹부터 차단할 수 있고, 아테네 귀족주의를 굳건히 할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에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 '전체'였다. 그는 '유토피아적 사회 공학'의 창시자가 되었는데, 그의 사회 공학은 모든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하고 개인들에게 거대한 전체 설계도에 들어갈 역할들을 지정하는 것이다. 개인은 여기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사회라는 구성물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포퍼에 따르면 플라톤의 국가 설계는 무엇보다도 두 가지 근본 원리에 위배된다. 먼저 자유와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개인주의'적 원리에 위배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보편주의'적 원리에도 위배된다. 포퍼에 따르면 열린 사회의 근본 원리는 계몽주의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플라톤의 동시대인들에 의해 대변되었다. 무엇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아테네에 살며 가르쳤던 소위 '위대한 세대'라 불리는 지식인 그룹이 그러한 기본 원리를 주장했다. 포퍼에 따르면 그들은 최초로 자기 자신의 운명을 위하여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했다.
이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와 데모크리토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아테네 민주주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들 수 있다. 특히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유명한 장례 연설에서 법 앞에 인간의 평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리스의 계몽주의자들 다수가 소피스트 운동에 참여했다. 플라톤은 그들을 사기꾼과 아첨꾼으로 묘사했지만, 포퍼는 반대로 그들을 현대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창시자로 생각했다. 포퍼가 볼 때 플라톤 자신은 그들과 반대로 '이성에 대항하는 반란'을 꾀한 최초의 인물이다.
포퍼는 제2권에서 이러한 '이성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킨 철학자들을 다루었다. '거짓 예언자' 헤겔과 마르크스는 역사주의의 고전적 철학자였다. 플라톤의 제자이자 플라톤처럼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도 포퍼의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적 불평등에 기초해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 모든 사물 자체는 애초부터 확정된 목적으로 발전한다는 그의 이론은 헤겔과 마르크스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합법칙적으로' 그것의 완성을 향해가는데, 그 완성이 헤겔에게는 근대 국가에 있어 자유의 실현이었으며, 마르크스에게는 계급 없는 사회였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에서 인간 개인은 단지 상위 개념인 세계 이성의 수단에 불과하다.
과학 이론가 포퍼는 특히 헤겔에 의해 주창된 '변증법'적 방법론에 대해 반발한다. 변증법에 의하면 진보란, 한 명제(테제)는 반명제(안티테제)와 투쟁을 하게 되고 두 명제는 하나의 종합으로 '지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테제와 안티 테제의 진리를 서로 결합한 하나의 새로운 명제에 의해 지양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발전은 더 높은 단계로 매번 새롭게 시작한다. 변증법은 헤겔과 마르크스에게서 '학문적' 사유의 방법론일 뿐만 아니라, 현실이 발전해 가는 법칙이다. 포퍼에게 이러한 방법론은 논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상호 모순적 명제들이 동시에 참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포퍼에게 헤겔은 '마술적인 변증법의 도움으로 순수한 형이상학적 원통에서 현실적인 실제의 토끼를 끄집어내는 논리의 마술사'인 것이다. 헤겔에 대한 포퍼의 판단은 단지 학문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적. 정치적인 이유에서 가차 없는 것이었다. 헤겔은 기회주의자로서 프로이센 정부의 철학적 대변인 노릇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신성시했고 세계사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전쟁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변증법의 법칙을 경제와 물질적 관계로 바꾼 마르크스에 대한 포퍼의 판단은 헤겔에 비해 한층 부드러운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가 '유물론적이며 동시에 신비한 종교'이지만,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에는 적어도 진정한 휴머니즘적 사상, 즉 사회 정의의 현실화가 내포되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에 대해 예견했던 모든 것은 오류로 밝혀졌다. 자본주의 미래는 노동 계급의 빈곤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 혁명을 개혁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포퍼에 의하면 열린 사회는 유토피아적 거대 기획이나 어떤 종류의 역사 예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과학 이론의 근본원리와 정치철학 사이의 밀접한 연관을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그것의 토대를 역사적 합법칙성이 아니라 시민의 자유와 자기 책임에 둔다.
플라톤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물음은 '누가 지배해야 하는가'이다. 그러나 포퍼에 의하면 이러한 물음은 완전히 다른 물음, 즉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사회적 정의를 촉진시킬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은 어떤 성질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학문에서처럼 민주주의에서도 비판은 포퍼에 있어서 결정적이 역할을 한다. 민주주의는 반대 입장과 공개적 비판을 위한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정치가들의 잘못을 제어할 수 있는 제도를 발전시켜야만 한다. 그러므로 포퍼의 민주주의 이론은 오늘날 '시민 사회'라고 불리는 것과 연관을 맺는다.
무엇보다도 국민과 그들의 대표자들은 정부를 평화로운 방식으로 선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포퍼가 볼 때 바로 이 점이 민주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특징이다. 누가 통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을 평화로운 방식으로 다시 선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중요한 것이다. 모든 독재는 권력자가 자신의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하고 단지 폭력을 통한 압박에만 굴복한다고 하는 특징을 지닌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비판 가능성과 합법적 행위를 통해 정부를 교체하는 것, 이것이 독재와 구별된 민주주의의 표시이다.
한 사회란 마치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옷처럼 그런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형태를 가질 수는 없다. 열린 사회의 구상에는 한 사회가 정상적 상태로 되기 위해서는 개혁과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 고려되고 있다. 포퍼는 거대하게 계획된 유토피아적 사회의 기획 대신에 개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개혁을 주장한다.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포퍼가 사용한 '점진적인 공학'이라는 개념을 독일어판에서는 '미완성의 개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는데, 이 개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그것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기인하는, '점차적으로' 전진하는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학문적 탐구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결코 닫혀질 수 없으며 최종적인 완전성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다.
포퍼는 '비판적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이러한 태도를 학문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위에도 요구했다. 그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비판적 합리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그가 창시한 철학적 방향을 나타내는 이름이었으며, 2차 대전 이후 몇십 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수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포퍼는 1942년에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제1권을, 그리고 1943년 2월에 제2권을 완성했다. 포퍼는 자신의 책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출간되도록 최대의 관심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그 책이 민주주의적인 전후 질서의 건설에서 정치적 가치를 설정해주는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곧바로 그는 출판사를 찾는 일을 시작했지만 먼 곳에서 (즉 뉴질랜드에서) 그러한 일을 조직해야만 했다. 영국인지 미국인지 확실하지 않은 단 한 명의 출판인만이 관심을 보였다. 다시금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고, 원고를 여러 부로 복사해 미국과 유럽에 보냈다. 포퍼는 우선 빈에서 살았을 때 알게 된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원고를 확실한 출판사에 넘길 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했다. 그는 초조해했고, 자신의 친구들의 노력에 불만족스러워했다. 결국 그는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절망했다.
결국 이 책이 1945년 영국에서 출판되었을 때, 전쟁은 이미 몇 달전에 끝났지만, 영어권에서는 이 책의 획기적인 의미를 곧바로 인식했다. 그는 자신의 열린 사회 이론을 통해 대학보다는 오히려 사회에서 서구를 대변하는 철학적 목소리가 되었다. 중유럽과 동유럽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의 붕괴를 통해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은 저자가 살아 있는 동안 또 한 번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늦어도 이 시점부터 포퍼의 정치철학이 유럽 대륙에서 그에 걸맞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이전의 아주 적은 수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억압에 맞선 자유의 투쟁에서 철학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커다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첫댓글 오! 포퍼행님! 아니 포퍼 할아버지! 대단하신 분이시군요! 농양속에서도 집필의지를 꺽지 않았던 대목이 참 감명 깊군요! 아무튼 역사주의, 전체주의, 이런식으로 대중을 선동하여 독재정치 하고 싶어하는 분들에 대한 직설적 공격이 담긴 저술! 참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포퍼형님께서 박정희 대통령을 봤다면 열린사회의 적들에 포함시켰을가요? 안시켰을가요? ㅎㅎ 당연히 시켰겠죠? ^^; 개인을 부속물로 본것임엔 틀림없으니까요, 대표적인 예로 삼청 교육대! 하지만 요즘같은 경기침체 상황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것은 참 아이러니 하네요~
당연히 포함시켰겠죠? ^ㅡ^ 저는 박 전대통령 하나도 안 그리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