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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鄭泰春, 1954년 10월 10일 ~ )은 사회성 짙은 "한국적 포크"를 추구해온 대한민국의 가수, 시인, 작사가, 작곡가, 문화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서정성과 사회성을 모두 아우르는 노랫말을 직접 쓰고 이를 국악적 특색이 녹아 있는 자연스러운 음률에 실어서 작품을 발표하기 때문에 한국의 대표적인 음유시인으로 불린다.
음악 활동에 그치지 않고 각종 문화운동과 사회운동에 열성적으로 헌신하는 운동가이기도 한 정태춘의 활동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1990년대 초에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전개하여 1996년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 일이다
출생에서 가수 데뷔까지
1954년 농사가 주업인 평범한 가정의 5남 3녀 중 일곱째로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평택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 매형이 기타를 구해와 어린 시절부터 기타를 가지고 놀았다. 악보를 몰라도 한 번 들은 노래는 곧바로 연주를 할 만큼 타고난 음악성은 주목을 받았다. 평택중학교에 입학하자 그의 음악성을 눈여겨보았던 넷째 형의 권유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매형 집에서 클래식 음반을 들으면서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평택고 2학년 때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이 되면서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담배를 몰래 피우는 등 동네 음악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정태춘은 이 시기에 접한 팝송과 1970년대 초반 김민기를 포함한 포크송 가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성에 낀 버스 창문에다 시조 등을 즉흥적으로 지어 쓰는 등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을 할 만한 실력은 없었다.
1972년 서울대 음대에서 정식 레슨을 받으며 재수생활을 시작했지만 공부보다는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갖는 등 사춘기의 열병으로 방황했다. 말도 없이 가출해 밀양의 목욕탕 보일러 화부로 일하다 셋째 형에 이끌려 고향 집으로 돌아와 농사일로 한동안 소일했다. 하지만 가시지 않은 열병 때문인지 삭발을 하거나 목포, 울릉도, 제주도로 가출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곡들은 대부분 대학생에게 늘 위축감을 가지고 방황하던 이 시기에 쓴 곡들이다. 고향 마을의 풍경과 방황하고 싶은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기를 쓰거나 시처럼 쉽게 노래를 만들 때 그는 유일하게 행복을 느꼈다. 1975년 입대 후 인천부근 해안가와 고양경찰서 기동 타격대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기타도 없이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서해에서〉 등 많은 곡들을 쓰며 허무감에 방황하는 마음을 달랬다.
1978년 제대 후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자작곡으로 데뷔음반을 준비하던 중 신인가수 박은옥과 운명적인 만남 끝에 결혼을 함으로써 음악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정태춘, 박은옥, 30주년 기념공연, 첫차를 기다리며
'창문을 음 열고 내다봐요. 저 높은 곳에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 혹은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 으로 시작하는 '시인의 마을', '촛불'을 들으며 20대를 보냈다. 그 때는 녹음테이프를 돌려 계속 그 노래들만 반복해 들었다. 아침에 출근준비를 하면서 들었다. 시인의 마을을 들으면서 어찌 이렇게 사람의 폐부까지 들어올 수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노래가 어려워서 따라 부르지도 못하고, 팬클럽 회원도 아니지만 그들의 노래만큼이나 그들의 이름은 친구처럼 가슴 켠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삶이 녹록치 않은 젊은 시절을 보냈기에 노래나 가수에 대해서 열광 할 시간은 없었지만, 정태춘씨의 노래는 계속 곁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인사동'을 듣는 순간 무릎을 쳤던 기억과 '침발라 기름 발라 인사동'으로 끝나는 부분에 방점을 준 노래를 속으로 웅얼웅얼 따라하며 그 음에 고개를 주억거렸던 기억도 난다. 정태춘씨와 박은옥씨는 그렇게 내게 천천히 알아져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콘서트를 다녀왔다. 정태춘, 박은옥 30주년 기념공연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다.
조촐한 무대가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느낌이다. 무대를 압도하는 대나무 사람 조각이 한 구석에서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설치 예술가 최평곤씨의 작품이 들어와 있다고 정태춘씨가 소개를 한다.
그들이 노래를 부른다. 기타를 치면서, 세월이 거꾸로 흘러서 젊은 시간으로 되돌아와 있는 느낌이다. 프로그램에 대한 것은 주로 박은옥씨가 소개를 한다.
관객들은 화려하게(?) 생겼거나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편안해 보인다. 무대에 올라서 있는 정태춘이나 박은옥 또한 관객만큼이나 평범한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른다.
40대 이후의 남성들이 표를 많이 예매했다는 소리에 "아 정태춘씨의 팬들은 주로 남자구나 했더니 누군가가 정태춘의 팬들이 아니고 박은옥의 팬들이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고 하는 박은옥씨의 멘트에 사람들은 슬며시 웃어준다.
20대인 딸은 전혀 그들의 노래를 모른다. 이름도 사람도 낯설어 한다. 그래도 그들의 콘서트에서 노래를 함께 듣고 싶었다. 세대를 같이 공감하고 싶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HOT나 동방신기보다 더한 느낌으로 우리 세대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 놀란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노래를 들었다. 박은옥씨가 소리를 내고 숨도 쉬라고 농담을 해도 다들 자꾸 진지해졌다. 알록달록한 풍선은 없었어도, 오빠, 언니를 외치지 않았어도, 관객과 가수는 서로 통했다. 들려주는 음악과 들어주는 진지함 속에서...
영화배우 문소리씨가 찬조출연을 했다. 딸이 의아해 한다. 무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문소리가 찬조출연을 해 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가 해서, 문소리가 아닌 줄 알았다고 한다. 그 말에 내가 더 놀랐다. 이것이 세대차이구나 싶어서... 문소리의 복장은 또 어떠했던가, 순순한 모습에 그녀가 낭송하는 글은 가슴 속에 남았다.
막간을 이용해 관객들에게 '20주년 골든 앨범' 시디를 주는 차례가 있었다. 정태춘씨가 어눌하게 사회를 보고 관객에게 후딱 시디를 주어 버렸다. 누군가가 "아까 김제동씨가 있었는데, 김제동씨가 했으면 재미있었을 텐데"한다. 할 수 없이 정태춘씨가 "김제동씨 갔어요?" 하고 누군가에게 묻는데, 저 뒤쪽에서 등산복 차림의 김제동씨가 일어난다. 등산을 하고 등산복 차림 그대로 오게 되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면서 앞으로 나온다.
졸지에 불려나온 김제동은 이웃집 총각 같아서 그냥 말을 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김제동의 깜짝 5분간 진행에 딸은 역시 김제동이야 한다. 그것이 컨셉이라도 좋았다. 왜냐면 정태춘과 박은옥을 기억하고 찾아온 관객들에 대한 배려일 테니까. 딸은 '문소리'와 '김제동'을 보았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려 했다.
바로 뒤에는 홍세화씨가 앉아 있었다. 홍세화씨를 책과 신문의 칼럼을 통해서 알게 된 딸은, 정태춘과 박은옥은 몰라도 홍세화씨는 알아본다. 그리고 내게 알린다. 나는 반갑다고, 칼럼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알고 있다고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숫기가 없어서 그냥 목례만 보냈다. 서로 안면이 없어도 글을 통해서 만난 독자라는 것을 충분히 알테니까. 정태춘, 박은옥의 콘서트는 그랬다. 어떤 설명이나 겉치레가 필요 없었다. 그냥 눈빛들로 몸짓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자리였다.
'첫차를 기다리며'를 들을 때는 가슴이 짠한 눈물이 살짝 삐져나왔고, '우리들의 죽음'에서는 눈물을 한바가지나 흘렸다. 영화도 아니고 콘서트에 와서 눈물을 흘리다니, 옆에 있던 딸에게 조금 창피했지만, '우리들의 죽음'에서는 딸도 울었다고 했다.
문소리씨가 읽은 글에서 정태춘씨를 '불가능이 가능으로 가게 하는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박은옥씨는 남편을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런 정태춘씨가 아내 박은옥씨에게 편지와 꽃다발을 주었다. 주는 과정도 참으로 어눌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참기름 흐르듯 매끄럽지 못하다. 자기 때문에 가수 박은옥으로 살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적은 편지였다. 그래서 30주년 기념공연도 박은옥을 위한 공연이라고 했다.
첫날 공연이다 보니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겼나 보다. 늦은 시간이 되어 팬사인회를 못했다. 그러면 또 어떠랴 그들의 20주년 앨범 시디를 사들고 나오면서 보았던 덕수궁 돌담은 차가워 보이지 않았고, 인적 드문 길가에 떨어져 밟혀진 낙엽도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정태춘과 박은옥을 알고 있는 아빠, 엄마의 세대를, 딸에게 설명하면서 자꾸 어깨가 펴졌다.
정태춘과 박은옥은 중년의 잊혀져가는 아이콘으로 사라질 것이 아니라 젊음의 아이콘으로 되새김 되어 역사에 새겨져야 할 이름들이다.
출처 : 젊음의 아이콘으로 되새김 되어야 할 이름 - 오마이뉴스
정태춘, 그 서정적이고 전투적인 이름이여-정태춘 박은옥 릴레이 에세이 6
오 광수
내가 정태춘을 만난 건 대학 입학과 함께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학 입학과 함께 정태춘의 노래를 만났다. 그의 데뷔 앨범 '시인의 마을/ 촛불'이 1978년 말 서라벌레코드사에서 발매되었고, 1979년 봄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유행했다.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 / 창가에 촛불 밝혀 두리라 외로움을 태우리라 /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 /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데뷔곡 '촛불'은 '시인의 마을'과 함께 정태춘의 서정시대 노래를 대표하는 곡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가에 즐비한 음악다방에서 리퀘스트가 많았던 가요 중의 한 곡으로 기억한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은 가요보다는 팝송을 많이 듣던 시대여서 대중가요가 음악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일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뭔가 허무적 색채가 짙은 보이스 칼라로 시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노래를 부르는 정태춘을 좋아했다.
정태춘은 데뷔와 함께 대중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MBC 신인가수상과 TBC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촛불)을 수상했으니 비교적 행복한 출발을 한 셈이었다.
훗날 정태춘의 술회에 의하면 데뷔 앨범의 수록곡들은 치열한 20대 초반의 방황과 좌절에 대한 기록의 산물이었다. 70년대 초, 평택에서 올라온 재수생은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기엔 생각이 너무 많았다. 수 차례의 가출과 방황, 낭인처럼 떠돌던 20대를 보냈다는 정태춘의 술회를 읽다 보면 묘하게도 시인 고은의 방황과 중첩된다. 실제로도 정태춘은 고은의 허무적인 초기시를 좋아한다고 썼고, 초창기 작품의 노랫말은 고은의 초기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사려된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 문득 팔짱 끼어서 /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고은 '문의마을에 가서'
왠지 모르게 정태춘의 고민은 그보다 한 세대 전에 청춘의 낭인시대를 거쳤던 고은의 그것과 똑같았으리라는 추측이 들었다. 고은이 삭발을 한 채 탁발승이 되어 이 절 저 절을 떠돌고, 한때는 제주도에 내려가서 훗날 예술계를 뒤흔드는 친구들과 어울렸듯이…. 정태춘도 밀양과 제주도, 울릉도, 목포 할 것없이 끊임없이 가출과 귀향을 반복하면서 훗날 노래활동의 기초가 되는 자양분을 쌓았다.
인천의 바닷가에서 기동타격대로 근무하던 군시절에 그는 데뷔앨범에 필요한 노래들을 썼다고 했다. '서해에서'와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여드레 팔십리' 등이 군대에 있을 때 만든 노래들이다.
80년대 중반 그는 '떠나가는 배'와 '북한강에서'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상업적인 성공과 서정성을 동시에 확보한 가수로 꼽혔다. 그중간에 발표한 몇 장의 앨범에서 음악적 실험을 감행했지만 아쉽게도 대중의 외면을 받은 후였다.
내가 그를 만난 건-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건-그러던 그가 소위 노동운동의 현장에 뛰어들면서로 기억한다. 첫 상면 장소는 기자가 되고 나서 86년경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이었다. 그날도 여성백인회관에서 구속된 노동자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행사가 있었고, 그 행사의 초청가수로 정태춘이 나타난 것이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복도에 나왔다가 그를 만났다. 검은색 개량한복에 흰고무신을 신은 그가 참 허무적인 표정으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었다. 기타 케이스를 옆에 두고 담배를 피우던 그의 모습을 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말을 붙여볼 수도 있던 지근거리에 있었지만 나는 평소 좋아하던 스타를 눈 앞에 두고 말문이 막혀버린 여고생처럼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냥 그의 흰고무신이 검은 개량한복과 어우러져 유난히 하얗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 전문 공연장도 아닌 그곳에 유명가수가 나타난 건 나로서는 의외의 사건이었다. 게다가 가수 대기실도 없는 그곳에 그가 노래를 부르러 온 것이다.
나는 철없게도 그가 '시인의 마을'이나 '촛불' 등 그때 그 노래들을 해줬으면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정태춘은 1985년 1월부터 시작하여 '정태춘·박은옥의 얘기 노래마당'으로 방송이나 음반이 아닌 민중들의 곁으로 파고든 가수로 변신해 있던 시기였다.
그는 그날 행사에서 당시 노동운동 현장에서 자주 불렸던 몇 곡의 민중가요를 불렀다. 서정적인 음색이 아닌 아주 당차고 힘 있는 목소리로 강당이 떠나갈 듯 열창을 했다. 누군가가 정태춘은 데뷔시절 '시인의 마을'이나 '촛불'의 정태춘으로 기억되는 걸 싫어한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그 시절은 낭만이나 서정이 자칫 태만한 정신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던 시기였다.
여하튼 나는 그날을 계기로 정태춘을 '양복 입은 정태춘'이 아닌 '한복 입은 정태춘'으로 기억하게 됐다. 서정가수에서 투사 정태춘으로 변신한 그를 보면서 서정적이면서도 전투적인 가수라는 생각을 품게 됐다.
이후 나는 가요담당 기자가 되어 몇 차례 정태춘과 인터뷰를 했다. 새앨범을 선보였을 때, 혹은 가요사전심의 철폐운동 등을 펼칠 때였다. 그리고 그의 공연장을 찾아 유장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옛일을 회상하곤 했다.
따지고 보면 지난 수년간 그가 침묵하게 만든 건 '우리'의 책임이다. 그가 펴낸 시집 '노독일처'를 읽으면서도 가슴 한 켠에는 앨범이 아닌 시집이라는 게 마음이 걸렸다. 여전히 그가 필요한 세상에서 우리는 너무 사는 데 바빠서, 혹은 정신보다는 물질에 현혹돼서 그의 노래를 잊었다.
벌써 30년. 그의 인생도 내 인생도 참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가 여전히 우리 앞에서 노래한다는 사실이다. 자, 어서 빨리 그의 노래를 들으러 가자. 가서, 느슨해진 정신 한가운데 찬물 한 바가지 끼얹고 다시 뛰어보자. 북한강에서 서해까지, 종로에서 시인의 마을까지 마구 내달려보자. 정태춘 그 이름처럼, 가슴은 서정적으로 이성은 전투적으로…. 다·시·살·아·가·보·자.
'고집불통' 늙은 가수가 쏘아 올릴 처절한 희망가-정태춘 박은옥 릴레이 에세이 5
문화 연출가 탁현빈
아마도 이것이 정태춘, 박은옥의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노래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우리의 그늘진 마음의 벗이 되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여, 그가 준비한 이번 공연이 또 다른 시작이거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 것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에 어떠한 희망이라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이렇게 떠날 것이다. 떠나서 오지 않을 것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내내, 나는 정태춘, 박은옥과 싸우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정태춘과 싸우고 있다. 아니 그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태춘은 먼산만 쳐다보는데 나만 혼자 지쳐가고 있는 중이다. 싸움이란 뭔가 미련이라도 남아있을 때 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이 욕심만큼 채워지지 않을 때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정태춘은 나에게 아무런 욕심이 없다. 그러니 그는 나와 싸우지 않는다. 그저 나만 혼자 '악악'거리고 있을 뿐이다.
'정태춘, 이 고집불통,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늙은 가수 같으니'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가수가 공연하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한 일이라고 하느니 안 하느니로 몇 해를 끌어오고, 결국 그의 공연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먼저 판을 만들고 더 이상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은 후에야 무대에 서기로 해서는, 이 공연으로 모든 음악활동, 사회적 발언을 접을 것이라 시시때때로 이야기하면서, 기대도 고대도 말라며 선을 긋는다.
그런 그의 말에 나도 지지 않고 언제부터 사람들이 들어주는 노래만 했느냐고, 여전히 당신의 노래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도 이렇게 있지 않느냐고 대거리를 하지만 그가 그어놓은 선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다. 답답하고, 미안하고, 죄스럽고, 화도 난다.
애초부터 각오했던 일이긴 했었다. 더 이상 노래하지 않겠다는, 이제 자신의 노래는 세상에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을 들어 온지 7년이 훌쩍 넘었다. 아마도 자신의 작품이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그런 아티스트를 무대에 세우겠다는 생각부터가 문제였던 것일까? 그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의 노래를 기다리는 관객들을 모아내는 일보다 이미 떠나버린 그의 마음과 노래를 세상의 자리에 돌려놓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이제 정말 그는 떠나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7년 전, 그때는 달랐다. 그는 노래하고자 했다. 노래로 세상을 위로할 수 있고, 노래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는 그의 노래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왜 아직도 그런 강팍한 현실을 쳐다보며 괴로워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은 이쯤 되었으면 괜찮다고들 생각했다. 아니 세상이 바뀌어서 이제 살만하다 생각했다.
노무현의 승리와 함께 우리는 그간 우리가 추구해왔던 모든 가치들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고, 그 승리를 찬양하지 않는 노래들은 듣고 싶지 않았었다. 노무현,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그의 노래가 조금씩 사위어 가는 것을 그저 무감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니 관객들이여 아마도 이번 공연은 그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공연의 성패를 떠났다. 공연의 연출자인 나는, 마음 떠난 가수의 몸만 붙잡고 앉아, 그의 노래에 위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뒤늦은 마음들을 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떠나겠다는 가수와 다시 기다리겠다는 관객들을 사이에 두고, 그의 노래 어느 구절처럼 이제 나는, 아니 우리는, 막차가 떠나버린 텅 빈 정류장에서 언제 올지 모를 첫차를 기다리는 심정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지난 밤,
놓쳐버린 것은 막차만이 아닐 것이다. 그 밤, 우리는 노무현을 놓쳤고,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를 놓쳤고, 꿈을 놓쳤고,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을 놓쳤다. 이 텅 빈 정류장이 절망스러운 것은 지나간 막차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더 이상 첫차가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연출가로서, 관객으로서, 아니 그저 이 정류장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 끝내 정태춘을 보내지 못하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로와 무기가 되어 주었던 그의 노래를 들으며, 혹여 마음보다 일찍 올지도 모르는 그 첫차를 기다리는 것만이 오늘 이 처절한 희망이라도 지켜낼 수 있는,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미안한 일이나 나는 아직, 그를 보낼 수가 없다.
관객들이여 그대들은 어떠하신가…….
정태춘, 묵직한 중년의 매력이여-정태춘 박은옥 릴레이 에세이 4
소설가 조 선희
노무현 49재 겸 안장식이 있었던 지난 7월 10일 봉하마을. 며칠째 퍼붓던 장마비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한여름 햇볕이 쨍쨍했다. 하얀 종이모자에 노란 플라스틱부채를 든 사람들이 마을을 그득하게 메우던 그 날, 주차장에 임시로 설치한 가설무대에서는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연출을 맡은 정태춘씨는 출연진의 한 사람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그날 그가 부른 노래는 <떠나가는 배>였다.
가사를 다 욀 정도로 귀에 익숙한 노래였지만, 이 날 이 곳에서 이 노래를 들을 때는 가사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한 것이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정태춘씨가 노무현 추모곡으로 이번에 새로 만들었나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 없이 꾸밈 없이 홀로 떠나가는 배
바람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아래 서서 노래를 듣는데 느닷없이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노래가 돌아가신 이에 대한 추억을 건든 것인데, 단순히 노래가사만이 아닌, 무대에 서 있는 저 가수의 뭔가가, 사람의 마음을 깊이 흔들어놓고 있었다. 약간의 떨림이 있는 남저음의 음색부터 표정까지 총체적인 뭔가가! 50대 중반에, 저 연배에, 무대에서 저렇게 분위기 있는, 저렇게 폼 나는 가수가 또 누가 있나.
그 아우라는 대중적인 인기나 음반판매량, 또는 불철주야 연습과 오랜 작품활동, 또는 특별한 무대매너 같은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작곡을 접은 지 몇 년이든, 그가 요새 기타 대신 주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건 말건, 또는 음악스튜디오보다 가죽공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건 말건, 그는 여전히 우리 대중음악에서 다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하고도 독보적인 어떤 자리를 갖고 있는 자작곡가수인 것이다.
지난해 연말에 신사동 한 지하 카페의 정태춘 데뷔 30주년 파티(정태춘씨 몰래 부인 박은옥씨와 왕년의 공연팀이 준비한 깜짝파티 겸 콘서트였는데)에서 "정태춘은 OO다"의 빈칸을 채워보라는 사회자의 주문에 가수 김씨는 "정태춘은 희망이다"라는 다소 뻔한 대답을 내놓아 좌중을 실망시켰는데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여서 사태를 역전시켰다.
"한국에서 남자가수가 외모와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희망이죠."
실제로 사춘기 시절의 정태춘씨는 가수 할 외모가 아니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하고 20-30대 시절의 사진을 지금 보면 콤플렉스도 무리는 아니다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지금의 그는, 봉하마을 무대 위에서 그는, 분위기 있는, 묵직한 중년의 매력을 풍기는, 심지어 잘 생겼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그런 캐릭터다. 그러니까 그는 멋있게, 잘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에게 왜 <떠나가는 배>를 골랐느냐고 물어보았다. <떠나가는 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즐겨 부르던 노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야인으로 지내던 시절이었는데, 정태춘 박은옥씨가 부산지역에서 행사를 마치고 그와 함께 노래방에 가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여하튼 봉하마을 가설무대의 강렬한 감흥은 쉬이 버려지지 않아 서울로 돌아온 나는 <떠나가는 배>를 아코디언으로 연주해 정태춘 박은옥 커플의 비공개카페에 올림으로써 작가에 대해 오마주를 바쳤다. 그런데 연주를 위해 <떠나가는 배>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새삼 내가 놀란 것은, 정태춘씨가 고작 서른 나이에 이 노래를 작곡했다는 사실이었다.
서른이 걸작을 쓰기에 이른 나이였다는 얘기가 아니라, A마이너-가단조의 처량한 곡조와 어딘가 노년에 어울리는 비감한 가사의 이 노래를 만들어서 부른 이가 이제 군대 제대하고 갓 데뷔한 파릇파릇한 젊은이였다는 것이다.
정태춘씨는 1954년생이고 나보다 여섯 살 위다. 내 대학 시절에 군대 갔다오고 데모하다 휴학도 좀 하고 그렇게 느릿느릿 대학을 다닌 선배들 중엔 54년생들도 있었으니… 뭐, 나하고 같은 세대라고 해도 전혀 엉뚱한 얘긴 아니다. 하지만 내겐 일찍부터 정태춘씨가 한 세대쯤 훌쩍 위쪽이라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고 정태춘씨가 바로 앞에 있을 때조차 한참 웃 어른을 모시고 있는 것 같은 부담감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나이에 대한 현실감을 회복하기 위해 속으로 '54년생이라니까. 나보다 그저 몇 살 더 많다니까.' 그렇게 되뇌어 보기도 한다. 내가 언젠가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그들도 정태춘 박은옥씨 부부를 실제보다 훨씬 더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이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닌 것이, 그것이 외모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정태춘씨는 우리 나이로 고작 스물다섯에 데뷔 음반을 냈다. <시인의 마을> <서해에서>가 실려 있는 이 음반은 크게 히트했다. 1978년인데, 내가 대학 1학년생 때였다. 설상가상, 그는 1980년에 박은옥씨와 결혼했다. 내가 타임지 읽으면서 취직시험 준비할 때 그는 벌써 부부가수로 활동했고 TV에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말하자면 재능을 타고난 조숙한 음악 영재(?)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30대 초반까지, 그 초창기에 부른 노래들이 <서해에서> <촛불>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등, 나이에 비해 과하게 원숙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우리들이 아직 제 앞가림도 못할 때 그는 이미 노숙한 노래들을 히트시키고 있었으니 우리 세대가 정태춘씨를 아저씨뻘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태춘씨가 1980년대 후반 이후 <버섯구름의 노래>나 <나 살던 고향> <92년 장마 종로에서> 같은 정치적 사회적 서사를 지닌 모던한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가 다소 데카당했던 청년기의 감상주의를 졸업하고 당대 사회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섰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가 잃어버렸던 자신의 사회적 나이를 소급해서 되찾아온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착실히 공부를 해서 원래 목표대로 서울대 음대, 또는 그 어느 훌륭한 음대를 들어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스물 무렵의 그 지독한 방황은 강도가 퍽 줄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주류 음악교육의 세례가 그를 '정태춘 박은옥 음악세계'와는 전혀 다른 어떤 길로 이끌었을 것이 틀림없다.
또는 그가 대학의 꿈을 접어버렸다 해도 서울 명동에서 기타 메고 돌아다녔다면 그는 도회적인 포크송을 만들면서 당대의 통기타 가수들 중 그저 하나가 되었을지 모른다. 평택 농촌의 고향 마을에 청춘을 당분간 묻어야 하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국악과 양악이 버무려진, 정태춘 특유의 '국산 컨트리 풍' 노래들은 나오지 못했을지 모른다.
내가 정태춘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94년 무렵, 한겨레신문 문화부에서 아주 잠깐 대중가요 담당을 맡았을 때였다. 정태춘씨는 음비법(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불법 음반'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낸 뒤 기소당해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또한 그는 이미 TV를 떠나 '독립' 공연활동으로 대가 반열에 올라 있었다.
1994년 3월, <한겨레21> 창간홍보 전국투어 콘서트가 기획되었을 때 정태춘씨에게 전화해서 출연해달라고 부탁한 적 있다. 그는 흔쾌히 그러마고 했고 덕분에 순회공연이 성황이었다. 십수 년 묵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외곬 정태춘'...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들의 공연 - 정태춘 박은옥 릴레이 에세이 3
시인 박후기
정태춘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 끄트머리에 있는 갯마을 도두리이다. 일제강점기 때, 사람들은 갯물이 들고 나던 곳에 둑을 쌓았다. 소유와 경작의 문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제 손으로 일군 땅에 대한 애착만으로도 너끈히 궁색한 살림의 고단함을 버텨낼 수 있었다.
마치, 식도처럼 깊숙이 육지를 파고들어온 서해의 끝자락에 도두리가 있었다. 둑을 쌓아 만든 간척지 위에 위태롭게 세워진 마을이어서 비만 오면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중에 징이 울리고 마을이 소란스러워지면 어김없이 둑이 터진 것, 어른들은 횃불로 어둠을 밝히며 가마니와 삽을 들고 터진 둑을 막기 위해 바닷가로 달려가곤 했다.
집에 남겨진 아이들은 열린 대문을 바라보며 밤새 알 수 없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고, 너나 할 것 없이 흙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동이 튼 뒤였다. 어른들은 그제야 비로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바다가 곁에 있었는데도 이 마을 사람들의 정서는 바다를 끌어안지 못했다. 고기를 잡는 대신 농사를 지었고,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곤궁을 겨우 면했다. 바다는 생활의 터전이라기보다는, 생활의 터전을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정서는 어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으니, 밥만 먹으면 바닷가로 뛰어가 고기를 잡거나, 개흙 진창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곤 했다. 더러 돌투성이 돌산에 올라가 해지는 서해를 바라보며 외부에 대한 동경을 품기도 했으리라.
정태춘의 시와 노래는 이러한 도두리의 정서가 출발점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 속에 녹아 있든 간에 그의 노래에 담긴 '애절' 혹은 '울림', '자유'의 정서는 도두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절창들은 대개 유년기의 정서와 이후 청년기의 '떠돎'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그에 관한 이야기 또한 도두리를 아주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정, 박을 만나다
1집 <시인의 마을>을 내고 음악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9년 어느 날, 정태춘은 박은옥을 만난다. 이후,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부부가 함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왔는데, 어느덧 30년이란다. 무탈하며 같이 살기도 힘든 시간을 노래를 부르며 함께 지나온 것이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라, 나는 지금 3년은 너무 짧고 30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긴 탓에 오로지 외길 함께 걸으며 노래한 30년이라는 시간만이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1978년 초가을 어느 날, 아직 어린 나는 한 손에 신문지로 돌돌 말린 돼지고기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엔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케키를 들고 먼지 폴폴 날리는 아리랑고개를 넘고 있었다. 아리랑고개는 버스 정류장, 뚱뚱한 표씨 아줌마네 정육점, 다방이 있던 함정리라는 마을과 도두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도두리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야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고, 돌아올 때도 이 고개를 넘어 다시 선말고개와 말랭이고개라 불리던 비탈길을 두 개나 더 지나야 비로소 집에 닿을 수 있었다.
그때, 아는 얼굴 하나가 비스듬히 기타를 둘러메고 개척 교회가 있던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흰 고무신을 신고, 신발이 투정이라도 부리듯 먼지를 일으키며 고갯길을 내려오던 황톳길의 기타맨, 정태춘이었다. 열두 살 소년의 눈에도 고독과 우수가 비쳤을까. 왠지 외로워 보였다. 아니, 지루해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살짝 아는 체를 하곤 곧바로 버스정류장 쪽으로 발을 끌듯 걸음을 옮겼다.
며칠 후, 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 '시인의 마을'을 들을 수 있었다. 어찌나 신기했던지 갑자기 쌀을 씻던 엄마를 큰소리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 사랑방에서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불렀던 형 친구가 라디오에 나오다니….
이듬해, 나는 그의 얼굴을 텔레비전에서도 보게 되었고, 삼촌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의 조카를 통해 듣기도 했다. 열두 살 소년의 나이도 어느새 마흔을 넘겼으니, 벌써 30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정·박, 거짓말 같은 30년 세월
정태춘 박은옥이 함께 노래한 지 30년이 되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들린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늘 우리 곁에 있었기에 30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천생 시인인 한 남자와, 그 남자와 노래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밖에 모르는 한 여자가 30년 동안 함께 노래를 불렀다. 30년이란 시간을 재가며 그들의 나이를 가늠하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영원한 청년이요, 또 다른 한 사람은 한없이 부드러운 4B연필 같은 순한 소녀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들과 이야기할 때면 한참 어린 내가 더 늙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 정태춘 박은옥을 이야기할 때 초기의 서정성 짙은 노래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현실 참여적인 노래들로 연대표적인 구분을 짓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가 듣고 보는 그들의 삶은 재미없을 정도로 늘 한결같다.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듯, 수많은 예술가들이 다음 세대에게 제자리를 내어주며 사라져갔다. 하지만, 정태춘 박은옥은 '묵묵부답' 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살아서 묵묵히 제 갈 길 걷는 걸음걸이로 사표가 되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당사자가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타인이 보는 눈은 비교적 자기 자신보다 객관적이다.
몇 해 전,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문화예술운동을 함께 하며 나는 답답할 정도로 곧은 그의 의지와, 더불어 아주 작은 냉소에 힘들어하는 정태춘의 내면을 훔쳐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의 노래 인생 30주년이 되던 지난해에도 그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 기념공연도 하질 못했다. 박은옥씨를 비롯한 주변 지인들이 그냥 지나치기에 너무도 서운해서 몰래 조촐한 축하 자리를 준비하기도 했었다.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가 30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먹먹한 우리네 가슴 속을 읽어주는 따뜻하고 서글픈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들이 욕을 한다 해도 나는 충분히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박 30주년 기념공연'은 이번 한 번뿐이다. '한 고집' 하는 '외곬 정태춘'을 생각하면 다시는 그들의 공연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를 테니, 가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새겨야겠다. 첫차는 모르겠지만, 떠나간 버스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므로.
바우 황대권, 우리시대 음유시인 정태춘을 만나다 - 정태춘 박은옥 릴레이 에세이2
바우 황대권
살아가면서 만나야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는가 보다. 정태춘 박은옥 선생도 그랬다. 그러니까 2001년 내가 영국 런던에 있을 때였다. 당시에 나는 런던 남쪽 지역에 있는 한 농과대학에서 늦은 나이에 생태농업을 공부하고 있었다.
3월 어느날인가 서울의 민가협 총무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수 정태춘씨가 딸(정새난슬)을 런던으로 유학 보냈는데 아이를 낯선 곳에 보내놓고 부모가 몹시 걱정하고 있다며 내가 좀 돌보아주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나 역시 런던에서 곁방살이 하는 처지였지만 우리시대의 음유시인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언들 못하겠느냐며 그러마 했다.
전화를 통해 슬이의 연락처를 알아내고 그 후 며칠 동안 아무리 노력을 해도 통 연락할 수가 없었다. 뭔가 사연이 있으려니 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여름이 되기 전에 또 다시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엔 정 선생 부부가 직접 런던에 가니 안내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내게 정태춘은 그냥 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70년대 말 엄혹한 시기에 서정적인 노래를 들고 가수로 데뷔했지만 그 이후의 행적을 보면 가수라기보다 기타를 둘러맨 치열한 사회운동가였다.
더욱이 나 같은 양심수 출신에겐 친근한 벗이요 동지기도 했다. 그가 사회운동가로 입문할 무렵에 나는 기나긴 감옥살이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좋아하고 만남을 원한다 해도 인연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결국 정선생의 맨 얼굴을 처음 본 것은 출소했던 해 겨울에 열린 양심수 석방을 위한 인권 콘서트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연출연자와 관객으로 만난 것이어서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다음해에 나는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초청으로 유럽으로 가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이역만리 외국 땅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마도 정선생 부부는 여름방학을 맞아 딸의 안부도 물을 겸 간만에 외유를 하는 듯 싶었다. 공항에서 만난 두 분은 평소에 사진으로 보던 소탈한 모습 그대로였다. 만나자마자 내가 부탁받은 임무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사연을 늘어놓으니 우리 딸이 원래 그렇다면서 허허 웃는다. 녀석은 제 아비와 관련된 사람은 무조건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해에 성공회대학에 입학을 해놓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짜고짜로 영국엘 왔단다. 자세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유명한 아버지를 둔 슬이의 심경과 신세대 자녀를 둔 아비의 걱정이 어렴풋이 잡히는 듯 했다. 이틀 동안 나는 정선생 부부와 런던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오래간만에 제법 관광다운 관광을 했다. 첫날은 시내와 박물관 등지를 방문하고, 둘째날은 공원과 궁전을 둘러보았다. 떠나기 전에는 런던 한인학생회 모임에 얘기손님으로 초대받아 유학생들과 친교의 시간도 가졌다.
정선생은 성격대로 번듯한 관광지보다 시끌벅끌한 시장구경을 좋아했다. 이미 <인사동>이라는 노래를 통해 선생의 골동취미를 짐작한 바 있으나 외국에까지 와서도 이렇게 열심인 줄은 몰랐다.
시장을 거닐다가 만물상처럼 난전을 펼친 곳은 빠짐없이 들러 유심히 바라보기에 무엇을 찾느냐고 했더니 칼을 찾는단다. 오래 전부터 칼을 수집하고 있었다나. 그나저나 도검류는 비행기 반입이 어려워 수집 품목으로서 적절치 않을 텐데 참 유별나기도 하네. 가슴에 칼을 품고 사는 시대의 반항아로서 자연스러운 수집취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선생 부부와 함께 돌아다니다 보니 두 사람의 취미와 성격이 너무도 달라서 내심 놀랐다. 그동안 막연히 부부 듀엣이면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많을 거란 추측이 여지 없이 부서졌다. 정선생은 선이 굵고 수줍음이 많은 전형적인 조선 남성인데 비해 박선생은 세심하고 인내심 많은 조선 여인이었다.
변변한 수입 없이 소위 '운동권 가수'로 살아온 정선생 곁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직업상 파트너이기도 하지만 나름의 인내심과 남편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았다. 길거리를 많이 걷다 보니 박선생이 몸 여기저기가 저리고 아프다며 푸념을 하기에 정선생더러 좀 주물러 드리라고 권유하고 서울에 가서도 계속 좀 부인을 위해 서비스 하시라고 했더니 박선생은 펄쩍 뛰며 저 사람은 그런 짓 절대 안 한다며 눈을 흘긴다.
정선생 부부와 헤어지면서 품 안에 간직하고 있던 귀중한 CD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노르웨이의 민중가수 안네 그레테가 한국의 민중가수 정태춘에게 꼭 전해주라고 받은 물건이었다. 그녀는 내가 엠네스티 초청으로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며 인권 관련 증언과 강연을 하고 있을 적에 노르웨이에서 만난 여인이다.
노르웨이 국영방송은 1년 중 하루를 완전히 비워두고 그 해에 선정된 건실한 시민단체에게 방송권을 주는데 2000년에 노르웨이 엠네스티가 선정되어 하루종일 방송을 이용하여 모금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TV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국영방송이 시민단체에 일일방송권을 주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프로그램 중간 중간 방송되는 라이브 공연을 위해 스튜디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출연자들이 모두 노르웨이 최고의 인기가수들인데 무료출연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당시에 그들은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인권다큐를 만들어 방영하고는 생방송을 통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위문편지를 보내준 엠네스티 지부 회원들과의 깜작 상봉을 연출했다. 그들과 감격적인 만남을 가진 뒤 진행자와 짤막한 토크쇼를 하고 무대를 내려오니 웬 장신의 여성이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를 건넸다.
자신이 그날 하루 종일 울려 퍼진 엠네스티 로고송을 만든 가수라며 자기 집에 나를 꼭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다. 키가 어림잡아 2m는 되어 보이는 그녀는 한 시절 노르웨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라는데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그녀가 부른 노래의 가사를 읽어보니 우리의 <오월의 노래>보다 더 과격했다.
며칠 뒤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짐작대로 독신이었고 집은 초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응접실 벽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큰 그림이 마음에 걸렸다. 어린 소녀가 자신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의 머리를 들고 서있는 그림이었다. 우리 눈으로 보면 지독히 반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그림이었다. 그런 그림을 집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걸어 놓을 정도로 그녀는 기성사회에 대해 도전적이었다.
서재엔 가수답지 않게 사회관련 서적이 빼곡했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소수자의 인권 옹호를 위해 활약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정선생을 떠올렸다. 칠레에 빅토르 하라가 있고 노르웨이에 안느 그레테가 있다면 한국에는 정태춘이 있다며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정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건넌방에서 자신의 CD를 들고 와서는 손수 서명을 한 뒤 한국에 돌아가거든 이 CD를 그에게 꼭 전해주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선생은 어찌 알았을꼬? 내가 한국엘 돌아가려면 아직 멀었는데 미리 영국에 와서 받아갔으니!
귀국 이듬해에 펴낸 <야생초 편지>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내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즈음에 만난 정선생이 농담 섞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정태춘은 가고 황대권의 시대가 오는가."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을. 나는 그저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과 이렇게 사적인 농담을 나눌 만큼 교분을 튼 것만도 큰 영광으로 알고 있는 것을. 소원이 있다면 언젠가 우리 농장에서 환상적인 저녁노을이 펼쳐질 때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가 기타를 튕기며 직접 부르는 <시인의 마을>을 듣고 싶을 뿐이다.
'시인의 마을' 부른 음유시인에게 '태춘아'라니 - 정태춘 박은옥 에세이 릴레이1
배우 오 지혜
그들과의 인연을 말하기 전에 일방적인 인연을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연예인 이야길 할 때 식당 갔다가 옆 옆 테이블에서 밥 먹는 거 봤다, 실물이 어떻더라 하는 수준의, 그야말로 당사자들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관심도 없는 일방적 인연 말이다.^^;;
먼저, 박은옥 선생. 68년생인 내가 열 살을 조금 윗도는 나이였을 때다. 이제 막 연예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이고 '쑈쑈쇼'쯤 되는 티비프로를 보고 있을 때였다. 흑백시절이었지만 여가수들의 화려한 드레스(그 당시엔 딱히 시상식이 아니어도 무대에서 노랠 부르는 여가수들은 그렇게 '드레스'들을 입었던 걸로 기억한다)는 꼬마숙녀의 눈을 충분히 달뜨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화려한 연예인들 사이로 웬 옆집 대학생 언니같이, 뿔테 안경에 소박하다 못해 촌스런 바지차림으로 통기타 하날 들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있었다. 그때 부른 노래 또한 온통 떠나간 님을 향해 울어대는 다른 가요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그야말로 동요같은 노래 '윙 윙 윙'이었다.
충격, 그 자체였다. 뭐지 저 여자? 그리고 저 노래는 또 뭐지? 하지만 그때 이미 나는 가수 양희은을 언니라고 불렀다가 아줌마로 불렀(요즘은 '언니'는 너무 건방진 호칭이라 하셔서 '아줌마'로 굳혔다)다가 할 정도로 그녀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참! 희은 언니도 가수지' 하고 놀란 가슴을 바로 쓸어내릴 순 있었다.
그래도 그 비주얼과 그 목소리와 그 노랫말과 멜로디는 내 감성의 연대표에 확실히 각인됐다.(그 후 그녀와 '희은 아줌마'가 친하단 소릴 듣고 드레스는 드레스끼리, 바지는 바지끼리 친하다는 사실이 재밌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정태춘 선생. 대학로 연극배우로 살던 이십대 시절. 내 십대 때의 우상 김민기 선생 밑에서 뮤지컬 <지하철 일호선>을 공연할 때였다. 사십이 넘어가면서 조기치매증상을 보이는 나로서는 단체사진까지 남아 있는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한 가지 정확히 기억나는 건 우리 팀이 어딘가엘 함께 갔는데 그 자리에 우연히 지나가던 정태춘 선생을 김민기 선생이 "태춘아!" 하고 불렀다는 사실이었다.
"태춘아!"라니!! 나의 사춘기 때는 <시인의 마을>이나 <촛불>로 감성을 자극한 음유시인이었고 이십대 때엔 <아!대한민국>과 <일어나라 열사여> 같은 노래로 내 양심을 불편하게 했던 내 의식의 영웅이 아니던가. 하긴 김민기 또한 그러한 사람이니 한낱 무명의 어린 배우들이었던 우리들은 영웅이 영웅을 영웅이 아닌 것 같은 말투로 불러 세우는 광경이 너무 신기해서 입을 헤 벌린 채 그 상황을 '구경'했더랬다.^^;;;
세월이 흘러 나는 출연섭외보다는 원고청탁을 더 많이 받는 이상한(?) 딴따라가 되었고 시사주간지에 연재하는 인터뷰꼭지를 빌미로 박은옥 선생을 찾아가 그녀를 인터뷰했다. 그들을 인터뷰 자리에 불러내는데 성공한 매체가 그리 많지 않지만 그 와중에도 일부러 '정태춘을 뺀 박은옥'을 만난 건 내가 전무후무하지 않나 하는 자평을 하고 있다.^^;;
암튼 그 지면을 통해 투사이미지 이전에 가정 안에서의 남녀평등실천은 썩 잘해내지 못하고 있는 정태춘의 실체를 폭로(!)하고 항상 남편의 반 보 뒤에 서 있으면서 끝내 자기들은 듀엣이 아니고 독립된 가수인데 그저 공연을 같이 했을 뿐이라고 우기는 박은옥 선생의 귀여우신 모습에 정이 확 들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그들과 나는 정식 공연장보다는 문화행사를 가장한 거리 집회무대에서 자주 마주쳤는데 저 양반들이 없었다면 어쩔뻔 했나 하는 생각을 마주칠 때마다 하곤 했다.
그리고 2009년 5월. 지금도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는 노짱의 죽음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 있던 나는 정태춘 선생으로부터 반갑고 고맙고 영광스러운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봉하마을에서 노짱의 49재 때 올릴 공연을 준비 중인데 사회를 봐달라는 거였다. 아! 집회와 각종 행사사회 십년 세월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다들 같은 심정이었겠지만 나 역시 노짱에게 뭔가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차였기에 고맙기 이를 데 없는 자리였다. 출연료가 없다고 미안해 하시는 정선생께 '출연료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한 건 당연한 것이었고.
나의 사회적 오라비인 권해효 형과 함께 보는 사회인데 진행방식은 출연자를 소개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자도 막간마다 공연을 하듯 하는, 말하자면 추모공연 자체가 하나의 시극처럼 한다는 거였다. 대본을 받아 본 나는 그의 희곡마저 잘 써내는 재능에 새삼 감탄한다. 그 짧은 시간에 노짱의 삶과 철학을 슬프디 슬픈 시극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노짱의 입장이 되어 독백을 하는 권해효 형을 판소리 고수처럼 받쳐주는 역할이었는데 내 분량은 전체가 짧은 민요식 노래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틀만에 노래를 익혀야 했기에 그가 보내준 악보를 받고 나서 딸아이의 리코더로 음을 찾아가며 정신없이 연습을 했다.
그런데 한참 노래 연습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만 있어보자. 이게 아무리 전래민요처럼 단순하고 짧은 곡조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정태춘 작사 작곡의 노래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그 어떤 가수들도 평생 한 번 받을까 말까한 그의 곡을 받은 딴따라가 된 셈이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살아서는 권위주의를 온몸으로 깨부수는 걸 보여준 고마운 대통령이었던 노짱이 죽어서까지 내게 선물을 주는 것 같아 이래저래 울컥 했더랬다.
어쨌든 김혜수는 극 중에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해서 목에 힘을 줬다면 난 "나, 정태춘한테 곡 받은 여자야"라고 잘난척 할 셈이다.
이번 달 말이면 그들이 오랜만에 무대에 선다고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들의 위로가 필요한 지금 나 역시 위로받고자 객석에 앉아 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양평은 진즉부터 밤바람이 차가워졌다. 이 깊어가는 가을, 난 다시, 첫 차를 기다린다.
[출처 : 블로구 '진실의 힘' http://blog.daum.net/ellsha/14936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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