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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한 사람들을 연구 분석한 심리학자 도브슨(J. Dobson) 박사는 그들 가운데 약 80%가 개인 기술이나 능력 부족보다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능력과 수준 높은 학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료들과 협력하지 못해 인생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모아 협력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1:10)는 고백을 통해 로마로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로마로 가려는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정말로 간절히 가기를 원하는데, 하나님께서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던 것처럼, 그 동안 로마로 가는 것도 막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열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로마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간절함이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는 그의 기도는 전혀 예상치 않은 방법으로 응답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그는 소아시아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에 의해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하게 확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아시아의 유대인이었던 원고들이 어느 순간부터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로 바뀌었습니다. 재판의 성격도 종교적인 문제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종교범이 정치범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송사 하는 사람들 가운데 바울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내 놓은 사람들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열릴 때마다 바울의 무죄만 확인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구금된 채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재판관들은 바울의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고려해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결국 가이사에게 상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로마로 가게되었지만, 그 과정 또한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거의 죽을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로마 행은 육신적으로 상당히 괴로운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분명 가장 좋은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죽음의 고비가 있는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길을 열어주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안전하게 로마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를 선교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의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1:12-13)라는 고백을 통해 그것이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응답은 반드시 평안을 보장하는 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육신적으로는 불행한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다가 혹시 환난과 시험을 만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해 예비하신 가장 좋은 방법임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끝까지, 죽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열매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 바울이 간절히 소망하던 로마에 입성한 것은 A. D. 60년경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대략 64년에서 68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순교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가 로마에서 길게는 8년 짧게는 4년 정도 생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그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허용되는 구금생활을 했습니다. 마음대로 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택연금 정도의 수감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까지 고생하며 로마로 가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왜 고난을 자초하면서까지 로마로 가려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① 그는 롬1:11절을 통해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로 가게되면 반드시 로마의 성도들에게 풍성한 영적인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롬15:29)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어떤 것이든 그것에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충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사명을 감당할만한 신령한 은사 곧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섬기게 될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수많은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그렇게 간절히 로마로 가려고 했던 이유는, 로마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에 동참케 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그리스도안에서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순전히 로마 교회와 성도들을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② 그는 또 롬1:15절을 통해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대로....원하노라”는 말씀을 다르게 번역하면 “내게 달린 것은...뜨거운 소원이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는 도무지 포기할 수 없는 뜨거운 소원이 있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린 후에야 그 소원대로 행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간절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오랜 세월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간절한 소원은 로마의 성도들과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롬1:14절에서 그는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는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그렇게 간절히 로마로 가려고 했던 이유는 이미 믿은 성도들을 격려하여 견고하게 세우고, 또 로마의 복음화를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세계 복음화의 전진기지인 로마 복음화를 위해 자신이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를 가슴에 품었고, 수많은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계를 품은 일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일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류를 품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주님의 유지대로 세계를 가슴에 품고 자신의 삶을 투자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얼마만큼 세계를 가슴에 품고 있습니까? 세계 복음화를 위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을 얼마나 가슴에 품고 있습니까? 오늘 자신이 속한 삶의 현장을 가슴에 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환난과 핍박이라도 기꺼이 당하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하는, 또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서로 협력하여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해 버린 형제, 자매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드디어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들은 바울을 환영하기 위해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달려나왔습니다. 15절입니다.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謝禮)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이미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숱한 고난과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천신만고 끝에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것도 죄수의 몸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크게 기뻐하며 자신을 환영하려고 나왔습니다. 특별히 “맞으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판테시스”(ap-an'-tay-sis)는 어떤 도시의 대표단이나, 왕이나 장군을 맞이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로마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얼마나 뜨겁게 환영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 교회 형제들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감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로마에 왔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큰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죽기까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형제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롬16장에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먼저 뵈뵈가 있었습니다. 롬16:1-2절입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작은 항구 도시인 겐그레아는 고린도 동쪽 15km 지점에 있는 고린도의 관문도시로 무역과 상업이 성행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을 하던 바울은 고린도의 복음화를 위해 관문도시(Gate city)인 이곳에 교회와 일꾼들을 세웠습니다. 뵈뵈는 고린도 복음화를 위한 전진기지인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요 바울의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뵈뵈는 여자로서 집사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녀를 자신의 보호자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호자”란 “누구를 위하여 앞장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 어렵고 위급할 때 도와주는 “후원자, 조력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헬라 문화권에서 후원자와 보호자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부유하고 지역사회에서 유력한 인사여야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역의 유지로 사회적인 명성까지 갖춘 부유한 여성이었던 뵈뵈는 바울과 어렵고 힘든 성도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선교 후원자였던 것입니다.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3-5a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로마에 거주하던 그들은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가 유대인 추방 명령을 내리자,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내려와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평소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그들의 집에 유하며 함께 장막을 만들었으며, 복음도 함께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자신의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바울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사형 집행자의 도끼 밑에 자기 목을 내어놓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굴라 부부가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빠진 바울을 건지기 위해,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위험을 자초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바울의 고난에 함께 동참한 그야말로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그들은 돈 몇 푼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 곧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송두리째 바쳐 바울을 섬겼던 것입니다. 또 에배네도가 있었습니다. 5b절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그는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아굴라 부부와 함께 회심한 최초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그후 자연스럽게 아굴라 부부의 가정 교회에 속해, 함께 일을 도우며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복음의 동역자로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에배네도”는 “칭찬을 받을 만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또 이미 언급한 대로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였습니다. 이는 그를 통해 많은 복음의 열매들이 맺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울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만큼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6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신약 성경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7명 나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본문에 소개된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소개된 이들은 한결같이 훌륭한 믿음의 여인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마리아를 소개하되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이란 수식어를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 초창기의 회원이었던 마리아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많은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뵈뵈나 아굴라 부부처럼 배후에서 바울의 선교사역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던 것입니다. 로마의 형제 자매들 가운데는 바울의 친척도 있었습니다. 7절입니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그들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입니다. 바울의 친척인 그들은 함께 옥에 갇혔습니다. 유명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에게까지 인정받을 정도로 구별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그들이 특히 사도들에게까지 귀감이 될 정도였다는 점을 들어, 기독교 역사 초기에 회심하였던 그들이 스데반으로 인해 일어난 환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함으로, 지도자로 알려지기에 충분한 여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또 바울보다 먼저 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8-15절입니다.
“또 주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 중 주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서로 동역자였습니다. 사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정받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루포의 어머니, 곧 구레네 시몬의 아내도 있습니다. 시몬은 우연히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주님의 모습을 지켜보다 졸지에 십자가를 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그의 온 가족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아내는 바울에게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26명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었습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습니다. 부부도 있었고 싱글도 있었습니다. 직업과 학벌도 다양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와 살고 있는 형편도 다 달랐습니다. 그야말로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거듭나기 전에는 모두 바울의 원수였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개종하기 전, 그들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싫어했습니다. 고문하고 투옥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죽이는 일에까지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들은 서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협력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단 한가지,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오직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됨과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는 로마가 복음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로마 복음화가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와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전2:3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는 강력한 이교도들과 철학자들의 사변과 교만한 태도, 도덕적인 타락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덴에서의 전도에 실패한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고린도로 갔었습니다. 그때 밤중에 그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행18:9b-10a)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성공적으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성공적인 사역 이면에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동역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한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과 협력하고 있습니까?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까?
결론 스펄전 목사가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교회에서 목회 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 그는 변변한 음향시설 하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수천 명을 상대로 매번 그야말로 능력 있는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는 배경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말없이 강단 밑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성도들이 그가 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후에 새로 입교한 20명의 성도들과 자신을 위해 매일 기도하던 성도의 장례식을 인도하면서 “그는 나의 가장 훌륭한 동역자였습니다. 나는 오늘 나의 사역에 있어 가장 귀한 동역자 한 분을 잃었습니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기도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건물을 지탱하는 데 있어서 기둥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기둥이 기둥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춧돌입니다. 기둥이 제 아무리 튼튼하다 할지라도 주춧돌이 약하면 기둥은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상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춧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은 주춧돌과 같은 성도입니다. 그들의 기도와 수고와 희생과 헌신이 없다면, 능력 있는 사역자도, 교회성장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성공적인 선교사역의 배경에 바로 주춧돌과 같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하며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역시 복음을 위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까? 이름도, 빛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능력과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 붓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