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210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서산문(서산문하)에 들어와
(망기(忘機, 옛 것(몸)을 잊다))
보응 영허(普應暎虛) 선사
일입서문고로망
一入西門古路忘
수류수처몰사량
隨流隨處沒思量
산중세월수능기
山中歲月誰能紀
지견괴음청우황
只見槐陰靑又黃
단 한 번 서산문(불교가문)에
들어와 옛길(세속)을 잊었으니
흐르거나 머물거나 하는 곳
모두 잊고 아무 생각 없다네
깊고 깊은 산중의 세월을
그 누가 있어 기억해주랴
단지 보이는 것 흙먼지 마시고
또한 푸르며 노랗게 물들 뿐
"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는
보응 영허(普應暎虛,
1541~1609) 선사(禪師)
스님(僧, 沙門)의
시(禪詩)이다.
보응영허(普應暎虛) 대사는
조선조 중엽
사대부(四大夫)의 가문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聰明)이 뛰어나서
글(文章)을 잘 하였다.
8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공부하고
※
사서(四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
삼경(三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또는 주역(周易))
※
그 담겨진
뜻과 의미(意味)을
모두 이해(理解)하였으며
어른들로 부터
수많은 칭찬(稱讚)과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15살(十五歲) 때
과거(科擧試驗)에
응시(應試)하였으나
낙방(落榜)을 하고는
커다란 충격(衝擊)을 받아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고
19살(十九歲) 때
세속(世俗)을 멀리하고
출가(出家) 한다.
변산 능가산(楞伽山)
실상사(實相寺)에 계시던
인언 선사(印彦禪師) 스님을
은사(恩師, 스승님)로 따라서
축발(逐發)을 하고
5년간(五年間)
시봉(侍奉 모시고 받들음)을
실천(實踐修行) 하면서
수많은
불교서적(佛敎書籍)과
여러 고승대덕(高僧大德)
스님(禪師)들의 경론(經論)을
스승(恩師)
인언 선사(印彦禪師) 스님
곁에서 열람(閱覽)한다.
이후(以後)
물처럼 바람처럼
운수납행(雲水納行)을 하고
제방(諸方, 모든 방면,
동서남북 사방팔방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며
참선(參禪)
명상(瞑想修行)과
부처님 공부와
가르침(敎)을 배우며
선(禪)과 교(敎)를
두루 널리 포용(抱用)하고
섭렵(攝獵)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마침내
묘향산((妙香山)
서산 대사(西山大師)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선사 스님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서래밀지(西來密旨,
부처님이 서쪽에서 주신 뜻,
禪旨(선(禪)의 종지(宗旨))를
터득(攄得)하고
다시 천하(天下)를
두루 널리 주유(周遊)하다가
65세 때
다시 변산 능가산(楞伽山)
실상사(實相寺)로 돌아와
대법회(大法會)를 열어
경론(經論)을 강(講)하였다.
보응 영허(普應暎虛,
1541~1609) 선사(禪師)
스님(僧, 沙門)이 남긴
문집(文集)
《영허집(暎虛集)》에는
주옥(珠玉)같은 글(문장)과
수많은 시(詩, 게송, 禪詩)가
수록(隨錄)되어 있다.
위(上記)의
시(게송, 禪詩)는
서래밀지(西來密旨,
부처님이 서쪽에서 주신 뜻,
禪旨(선(禪)의 종지(宗旨))를
터득(攄得)한 후
읊은 시(詩, 게송, 禪詩)로
원제목(源題目)은
번뇌(煩惱 망상)를 일으키던
모든 것(一切煩惱)을 잊었다는
망기(忘機)로 되어 있다.
사람 사는 것
본래 그 자체(本來自體)가
그저 세상(娑婆世上)을
옳고 바르게 관조(觀照) 하면서
물이 흐르듯(上善藥水)
흘러가는 것이다.
※
보응 영허(普應暎虛,
1541~1609) 선사(禪師)는
속성은 김씨(金氏)
법호는 영허(暎虛)
또는 보응(普應)이다.
전라도 김제 출생으로
유가(儒家, 선비)의
집안(家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
파초잎으로 책갑을 만들고
늘 글 읽는 소리를 하였다.
8세에
사서삼경 가운데
대학(大學)의 내용 증
증자(曾子)가
“
열 눈으로 보며
열 손가락으로 가리키나니
그 것의 엄할진저.
”
라고 한 부문을 읽는데
어른들이
그 엄(嚴)하다는 뜻을 묻자
“ 두렵다는 말입니다 ”
라고 답변(答辯)을 하여
모두 기동(奇童,
천재, 신동)이라고 불렀다.
15세에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였고
19세에 출가하여
변산 능가산(楞伽山)
실상사(實相寺)에 들어가
인언대사(印彦大師)를
5년 동안 받들고 시봉하며
경론을 공부하였다
그 뒤
지리산의
부용(芙蓉) 선사를 참방하여
선(禪)과 교(敎)를 탐구하며
3년 동안 시봉하였고
금강산의
조징(祖澄) 선사를 참견하고
선(禪) 공부를 하였으며
다시 묘향산의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참배하고
8만 법장(法藏)의
의혹된 것을 문답하였다.
상비로암에
10년을 머무른 뒤
1589년(선조 22)
능가산의 옛 절(실상사)로
돌아와
《지장경》을 독송하며
정진(修行精進)하던 중
꿈에서
지장보살이
감로수(甘露水)를
정수리에 부어주는 상서를
얻었다.
3년 뒤에
은사 인언스님이
열반하시자
장사지낸 뒤에
다시 8도의
여러 절을 순방하였고
묘향산에서
한철 안거(安居)하면서
승려나
신도에게 염불정진을
적극 권면하였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언제든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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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