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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 24 기쁨을 돕는 자
고후 1: 24 기쁨을 돕는 자 -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 계획의 변경을 해명하면서 자신을 ‘너희 기쁨을 돕는 자’라고 겸손히 표현하였다.
이단자들이나 사이비종파의 교주들은 그들의 잘못된 교리들을 가지고 교인들의 믿음을 주장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겸손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주관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시고 보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사든지 교사든지 권찰이든지 다른 이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속죄 신앙에 굳게 서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1]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여기에는 바울의 목회관이 나타난다.
'주관한다'(*, 퀴리유오멘)는 것은 '지배한다'는 뜻이며(lordover, NIV), 이는 바울이 자기의 복음 전도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신앙적 기쁨을 위해 돕는 봉사자로 나아가기를 원했음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그의 신학적 이해가 깔려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신앙을 갖게 된 성도들에 대하여 일정한 사도적 권위를 가지기는 하지만(10: 2-8), 궁극적으로 신앙인의 실존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만 규정된다고 보았다.
* 고전 5: 4-5 –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 딤전 1: 20 -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또한, 신앙은 지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인 만큼 바울은 그들 스스로가 신앙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목회라고 보았다.
이처럼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육체적 이익을 따라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의 주장이 어불성설(語不成說)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3] 아멘으로 삽시다. (고후 1: 12-24) : 박조준 목사
본문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기로 했었는데 사정에 의해서 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고린도에 있는 교회 성도 중 일부가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이렇게 온다고 해 놓고 오지 않는 데는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어떤 정치적인 복선이 깔려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생활에서 숨은 행동, 안과 밖이 다른 행동은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산상수훈의 팔복의 말씀이 있지만 한 가지 축복을 더 첨가시키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면서 “숨길 것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데 숨길 것이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어떤 사람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발각되었으니 빨리 도망가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소리지르며 다녔더니 전혀 뜻밖의 사람이 도망을 가더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기꾼이 고관 댁에 전화를 걸어서 부인에게 “당신 남편이 그 동안 하던 일에 문제가 생겨서 걸리게 되었는데 기소되기 전에 손을 써야겠으니 빨리 얼마를 만들어 가지고 아무 곳에 나오라”고 하면 열이면 열, 거의가 요구하는 액수를 만들어 가지고 나오더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정 없이, 밝게 내놓고 사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 사회입니다.
어떤 건축가가 헬라의 한 철학자에게 밖에서는 절대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집을 지어 드리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철학자는 “어느 방도 밖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집을 지어 준다면 그 두 배의 돈을 지불해 드리지요”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진실’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퍽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쓴 낱말은 ‘에일리크리네이아’(εἰλικρίνεια)라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햇빛에 드러내어 햇빛에 비추어 보아도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주에 그 행동이 드러내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그렇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바울과 같이 자신의 생활에 숨긴 행동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행동에는 숨은 동기가 있고 복선이 깔려 있다며 그를 불신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은 인간적인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지배받아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의 생활에는 숨은 동기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그 동기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에도 “열 길 물 속은 들여다 볼 수도 있어도 한 길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나 해도 거기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사이 흔히 세상에서 무슨 좋은 일을 하나 했다고 합시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가령, 선거철이면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서 표를 하나라도 더 얻어 보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금품이 오가는데 그것은 직접적인 부탁입니다. 사실은 국민의 신성한 한 표를 우롱하는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위신상 하지 않으려고 하다 할 수 없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안하면 사업에 유익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갈이나 협박에 의해서 마지못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동기를 다 깨닫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행동을 보지만 하나님은 의도를 보십니다.” 사실 순결한 행동도 어렵지만 순결한 동기를 갖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에도 그 봉사의 동기가 순결하지 못할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모독하는 일이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옛 사람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실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순결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에 쓴 것은 진실되게 말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숨은 뜻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말이란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사람은 그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서 말을 하지만 아울러 자기의 생각을 숨기기 위해서 말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동의할 만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시에 곤란한 입장을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하지만 이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사실 편리한 것일수록 위험도가 높습니다. 전기가 얼마나 편리함을 우리에게 제공합니까?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자동차가 우리 일상 생활에 얼마나 편리를 줍니까? 그러나 자동차 사고가 안고 있는 위험 부담이 얼마나 큽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혀에는 말하는 편리함이 있지만 생의 바퀴를 불사르게 하는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울은 말이나 행동에 숨은 동기와 숨은 뜻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인격과 사도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양심의 증거에 호소합니다. 그래서 12절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수천 개의 다른 증거보다 양심의 증거에 호소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양심의 눈은 하나님과 함께 보는 눈입니다. 원수들이 괴롭히기 위해서 별의별 비난을 했고 중상과 모략이 있었지만 바울의 양심은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들이 하는 말에 대해 양심상 아무런 가책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양심이 이렇게 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젊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목양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강한 추진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양심은 배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나침반이 바른 방향을 지시해 주지 못하면 아무리 큰 배라고 할지라도 암초에 부딪쳐 파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착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착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의 지혜가 아니고, 육신의 술책이 아니고, 세상의 견해가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에게 와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때 우리의 삶이 바르게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희생과 확신을 가지고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의 지식에 호소합니다. 13~14절에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거룩하게, 얼마나 정당하게, 얼마나 흠없이 행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부담 없이 즐거워하고 사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정말 이상적인 목양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가 바로 이렇게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어디 가나 생각할수록 마음에 기쁨이 되고 누구한테나 자랑할 수 있는 교회라면 이것 이상의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회자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고, 피하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어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를 생각할 때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역사가 깊은 교회도 아닙니다. 예배당이 훌륭한 교회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바로 믿어 보겠다고 모인 사랑스러운 무리입니다. 어떤 분은 다른 교회에서 중책을 지고 계시다가 그것 다 포기하고 하나님 잘 믿어 보려고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교회의 직분을 세상적인 지위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사 앞에서 집사가 말한다고 야단을 맞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교회의 직분은 세상의 직위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서로 섬기는 직분입니다. 자세하는 직분이 아니라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하는 직분입니다.
우리 교회를 보세요. 서로 섬기려 하고, 서로 위해 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기에 저는 어디 가나 우리 교회를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한 말씀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여러분은 저의 기쁨이요, 면류관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가 이렇게 되는 것 이상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서로 완전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제 목자장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아쉬움이 없이 완성될 것을 믿습니다.
이제 본문 15절 이하에 보게 되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배후에는 바울에 대한 또 다른 비난과 중상이 있습니다. 바울은 전에 자기가 고린도에 방문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 방문을 연기했습니다. 23절에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원수들, 바울을 괴롭히려 하는 사람들은 뭐랬어요? “바울이란 사람은 한 입으로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다”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시적인 충동으로 경솔하게 약속했고 그의 말은 예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헐뜯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처럼 바울의 일상적인 약속도 우리가 믿을 수가 없는데 더구나 그가 하겠다고 한 일도 과연 그가 할지 안 할지 알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데 하물며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한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예’와 ‘아니오’ 사이에 동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한 ‘예’가 됩니다.” 본문 17~20절을 읽읍시다.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만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 귀한 약속을 모조리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그가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실, 이 세상에서 지내신 사실, 이 모두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그렇다. 그것은 진실이다”라고 하는 보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크거나 작거나 간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해 그것이 모두 틀림없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증인입니다. 그러한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도 아무 의심 없이 절대적으로 믿고 의뢰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고린도 교인 중에 바울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사람이 있었지만 거기에도 또한 유익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신뢰성이 곧 말씀 자체의 신뢰성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말씀은 항상 “인격을 통해 나오는 진리”입니다. 말씀 전하는 사람을 믿을 수 없으면 그 말씀 전하는 사람이 전한 말씀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교사의 행동과 품성에 관한 유대교의 규범에는 교사는 자기가 하지 못하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은 결코 학생들에게 약속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만일에 선생 자신도 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을 학생들에게 약속하게 되면 그것은 학생에게 거짓말하는 습관을 길러 주게 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약속은 가볍게 깨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약속이든지 약속하기 전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희생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 희생을 치를 능력과 그만한 의지가 있는가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사도 바울은 두 가지 큰 사실에 대해서 말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끝맺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났을 때에도 우리는 “아멘”이란 말로 화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아멘”이란 말로 말씀을 받습니다. ‘아멘’이란 말은 ‘그렇게 되어지이다’ 하는 뜻입니다. ‘아멘’이란 단순한 형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드릴 수가 있고,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위대한 약속을 내 것으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한 보증이십니다. 하나님의 깨어지지 않는 약속에 대한 ‘예’가 되십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그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의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며, 모든 위대한 약속은 참되다는 것을 믿는 우리의 확신이 ‘아멘’이란 말로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멘’하는 것은 참으로 감격 어린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보증”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는 ‘아라본’(ἀρραβών)이란 말인데 어떤 계약을 할 때 얼마를 주기로 계약한다면 그 일부를 계약금조로 지불하는데 그것이 ‘아라본’입니다. 그 말에는 처음으로 얼마를 지불했지만 잔금도 반드시 지불할 것이라는 보증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 당시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의 개념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에 대해서 말할 때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증, ‘아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는 우리의 현재의 삶은 말하자면 천당에서 사는 것의 계약금 같은 것이고 장차 우리 앞에 전개될 삶을 완성시켜 줄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보다 큰 은사에 대한 하나님의 증표이며 보증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 22절에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보증이 되시고, 성령이 또한 보증이 되시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너무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아멘’으로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3~24절을 보십시다.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했습니다.
이미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 교회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교회는 당파로 분열이 되었고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이런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바울이 고린도를 잠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태의 개선은 고사하고 더 악화되어서 바울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슴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매우 엄한 책망의 편지를 써 보낸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다시 방문하겠다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도리어 바울 자신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처만 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바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 오해가 생겼습니다.
진실하게 삽시다. 우리도 서로 자랑하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예,’ ‘아멘’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믿음에 굳게 서십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며 서로를 단순함과 하나님의 진실함으로 대해야 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이거나 위선적이어서는 안 된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며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인치셨고 구원을 보증하셨다.
모든 신자에게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다.
* 요일 2: 27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위로자와 돕는 자이시다. 그는 우리를 끝날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지키실 것이다.
셋째, 우리는 남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남을 섬기는 자로 처신하며 겸손히 그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