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29】 4
<10> 회향하는 바를 밝히다
1) 십신위(十信位)를 나타내는 수행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如是廻向時에 發歡喜心하나니 爲令一切衆生으로 得利益安樂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得平等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能捨心故며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회향할 적에 환희한 마음을 내느니라.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평등한 마음을 얻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능히 버리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보살이 선근을 닦아 회향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다. 기쁨은 곧 행복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행복을 보살은 어디서 찾는가. 선근을 닦아 회향할 때 행복하다. 만약 사람이 악한 짓을 저질렀을 때는 그 악이 상대에게 닿기 전에 이미 자신에게 먼저 괴로움이 닥친다. 선과 악의 성질은 이와 같다. 선근을 닦아 회향하는 것은 무슨 일을 하기에 보살이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 하는가. 그 까닭을 110구절로 밝혔다.
먼저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평등한 마음을 얻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능히 버리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다.”라고 시작하였다. 일체중생이 성숙하여 보살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살이 기뻐하는 것이다.
청량스님은 소(疏)에서 “회향하는 바의 뜻을 따라 따로따로 나타내는 내용 중에 위령일체중생(爲令一切衆生)으로 시작하는 글이 모두 110구절이 있다. 72구절은 원인과 결과를 펼친다는 항포(行布)의 내용을 이루어서 원인을 닦아 결과에 이르는 뜻이다. 38구절은 원융(圓融)을 이루어서 원인도 원만하고 결과도 원만함을 밝혔다. 이 두 가지 무애(無碍)가 회향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항포(行布)란 ‘항포문’, 구족하게는 ‘차제(次第)항포문’이라고 한다. 화엄종에서 수행하는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묘각 등을 세워서 이 차례를 지내며 마지막 이상 경계인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보는 관찰법이다. 반대로 원융문은 10주, 10행, 10회향, 10지 중 하나의 지위를 얻으면 그 지위에 일체의 지위가 원융하게 갖춰져 있다고 보는 관찰법이다. 즉 처음 발심한 지위가 곧 정각을 이룬 지위[初發心時便正覺]라고 보는 관찰법이다. 원융문과 항포문은 존재의 본질과 현상의 입장과 같다. 또 열반경에는 “처음 발심한 것과 필경의 성불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두 가지 마음 중에 처음 발심이 어렵다.”라고도 하였다.
爲令一切衆生으로 住一切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歡喜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永離貧窮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一切財寶施心故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보시하려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게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빈궁을 여의는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보물을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보살이 선근을 닦아 회향할 때에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한 까닭을 110구절로 설명하였는데 모두가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실로 무엇으로 기쁨이 충만하겠는가. 중생이 기뻐하므로 보살이 기뻐하는 것이다. 유마경에는 “중생이 아픔으로 보살이 아프다.”라고 하였다. 반대로 보살은 중생이 이익하고 기뻐하므로 보살도 또한 기뻐하는 것이다.
중생들이 성숙하여 보살의 선근회향으로 인하여 중생들도 따라서 모든 것을 보시하려는 마음에 머물게 되며, 환희하게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며, 영원히 빈궁을 여의는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며, 보물을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니 보살이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는가. 자식이 바르고 유능하게 성장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일체 인민에게 큰 이익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부모는 얼마나 기쁘겠는가.
爲令一切衆生으로 住無數財寶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普施無量施一切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盡未來劫無斷施心故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무수한 재물을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널리 보시하고 한량없이 보시하고 모든 것을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간단없이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또 보살의 선근회향으로 인하여 일체중생이 무수한 재물을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며, 널리 보시하고 한량없이 보시하고 모든 것을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며,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간단없이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니 보살은 또한 얼마나 기쁘겠는가. 중생들이 성숙하여 이와 같은 마음을 내다니, 보살은 그 기쁨 이길 수 없으리라.
爲令一切衆生으로 住一切悉捨無悔無惱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悉捨一切資生之物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隨順施心故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것을 버리되 후회와 번뇌가 없이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살림살이의 물건을 모두 버려서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수순하여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또 보살의 선근회향으로 인하여 일체중생이 온갖 것을 버리되 후회와 번뇌가 없이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며, 모든 살림살이의 물건을 모두 버려서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며, 수순하여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니 그 또한 얼마나 기쁘겠는가. 중생들이 성숙하여 보살을 닮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중생의 성숙이 보살의 성숙이며, 중생의 기쁨이 보살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爲令一切衆生으로 住攝取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廣大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捨無量莊嚴具供養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無着施心故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거두어 주어서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광대하게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무량한 장엄거리를 버려서 공양하고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집착이 없이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보살이 보시할 때에 쓰는 마음을 중생이 다 따라서 그 마음을 쓰기 때문에 보살은 당연히 기뻐하는 것이다. 중생이 이러이러한 마음에 머무는 것은 곧 보살이 머무는 마음이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다 한다. 심지어 죽음도 불사한다. 만약 알아주는 것을 넘어 자기의 일을 함께 하겠다고 목숨을 건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겠는가. 기쁨을 넘어서 일체를 다 바칠 것이다. 그 일이 만약 만인을 정직하고 선량하고 행복한 길로 이끌어 가는 일이라면 보살은 아마도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爲令一切衆生으로 住平等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如金剛極大力布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如日光明施心故며 爲令一切衆生으로 住攝如來智施心故니라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평등하게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금강(金剛)처럼 아주 큰 힘으로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태양의 광명과 같이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여래의 지혜를 포섭하고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강설 ; 보살이 선근을 닦아 회향할 때에 기쁨이 충만한 것은 일체중생이 평등하게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며, 금강(金剛)처럼 아주 큰 힘으로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며, 태양의 광명과 같이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며, 여래의 지혜를 포섭하고 보시하는 마음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청량스님은 소(疏)에서 “72구절이 항포(行布)를 이루어서 원인을 닦아 결과에 이르게 하는 것에 여섯이 있는데, 그 처음 21구절은 선근을 닦아 삼현(三賢)의 앞인 십신(十信)의 행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순전히 보시의 행만을 밝혔다. 또 초(抄)에서는 삼현(三賢)의 앞인 십신(十信)의 행이란 곧 원융한 십신위(十信位)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