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로 가는 도중에 점심을 먹고 5.18 묘역에 들렀다. 그곳에서 광주에서 오신 역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5.18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광주 항쟁이 일어나면서 일찍 돌아가신 분들 중에 몇 분의 사연을 들려주셨다. 임신한 몸으로 총알이 방 창문을 뚫고 들어와 머리를 맞으셔서 돌아가신 분. 하교길에 총 맞고, 몽둥이 찜질당해 죽은 초중고등학생들. 수많은 무덤만큼 사연도 많았다.
묘역을 둘러보니 의외로 상당히 많은 분들이 돌아가셔서 조금 놀랐다. 나는 광주 항쟁 때 돌아가신 분들이 묻혀있는 묘역에서 사진을 찍을까 생각했지만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이지만 허락 없이 찍는다는 게 미안한 맘에 차마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선생님께 5.18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5.18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경찰이 시민들의 질서를 유지 시키다가 계엄령이 떨어지면서 경찰이 해체되고 공수부대가 광주에 왔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항쟁이 막바지쯤 들어갈 때 20사단이 합류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데, 그래서 유일하게 특수부대만 미국의 허락없이 움직일 수 있어서 광주에 보낸 건데, 항쟁 막바지에 20사단은 어떻게 광주에 온 건지 아직까지도 미국과 우리 정부는 비밀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한다.
묘역 탐방을 마치고 가는 길에 돌길이 보였다. 그 돌길 바닥에는 전두환 이름의 글씨가 있었다. 역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니, 전두환이 예전에 광주에 왔는데 묘역지에 있는 시민들이 전두환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여기는 못 들어 온다고 필사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대로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묘역 인근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고 갔다. 그 마을 이장은 마치 중세시대에 임금이 어떠한 마을에서 자면 엄청난 영광으로 아는 듯이 전두환이 이 마을에서 자고 갔다는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민들이 비석을 발견하자마자 중장비를 동원해서 비석을 파내서 묘역 출구쪽 돌길로 만든 것이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하도 많이 밟아서 다 부서져서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고 설명해주셨다.
우리는 5.18때 징역형을 받으신 분들이 끌려갔던 영창에서 계엄군들이 그 당시에 시민들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체험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매일 운동장을 오리걸음으로 ‘폭 도, 폭 도’ 라고 외치면서 걷고 잘못 걸으면 방망이로 죽도록 맞았다고 했다. 체험해 보니 너무 힘들었다. 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 광주 시민들이 “억울하다. 우리는 그냥 시위만 했다”고 하면 바로 옆에 있는 교관들이 저건 거짓말이라면서 반박했다고 한다.
아직도 몇몇 사람들은 광주 항쟁에 대해 ‘북한이 땅굴 파고 들어온 만행이다. 광주 폭도들이 계엄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가했다’ 그러는 사람도 있다. 나는 여기서 더 놀란 것은 전두환을 사랑하는 모임, 즉 ‘전사모’라는 카페를 보고 매우 놀랐다. 회원 수는 대략 1만 8,0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람 중엔 거짓된 말을 바로 잡으려고 들어간 사람들 수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아직도 이 카페에는 전두환을 ‘각하’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여전히 전두환을 신격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어서 빨리 5.18의 진실이 거짓 없이 밝혀지길 바란다. 그리고 전두환은 5.18 민주화 항쟁에 대해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하길 바란다.
첫댓글 이미 <울산 저널>에서 읽었는데, 여기서 또 읽었습니다. 우리 광주역사문화기행의 전부를 쓰지는 않았지만, 광주항쟁 관련 부분을 깔끔하게 잘 정리해 썼군요. 우리 강찬이 학생은 기행을 마치자마자 바로 글을 쓰는 좋은 습관을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