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세계 시인선 056
슬픈 암살
이능표 시집 신국판 변형, 128쪽, 8,000원 ISBN/ 978-89-97150-96-0 02810
1984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능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슬픈 암살』이 출간됐다. 등단 30년, 첫 시집을 낸 지 27년, 마지막 작품 발표 이후 실로 20여 년 만에 펴내는 신작 시집이다. 데뷔 초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하면서 의욕적으로 시작 활동을 펼치던 이능표 시인은 1994년 『작가세계』에 「간지럼을 탄다」 「나는 이사 간다」 등의 작품을 발표한 후 돌연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시적 간지럼과 망명시인의 귀환
그의 시는 “체험의 여러 조각을 지각의 특수화라는 방식으로 재배열해 놓은 시, 짧은 호흡 속에 독특한 인상을 창조하도록 응축된 시, 그리하여 침묵의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시”(이광호, 「침묵에 둘러싸인 시적 언어」, 1988년)라는 평가를 받았고,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암시적”이며 “심리적 삶에 충실한 유형의 시인”(오규원, 「나무 속의 물과 밖의 물」, 1988년)으로 분류되었다. 이에 앞서 신경림 시인은 그의 데뷔작들에 대해 “흔히 어떤 시를 가리켜 쏙 빠졌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능표의 시들은 거의가 이런 표현이 그대로 들어맞는 시들이다. 아마 지용에게서 많이 배운 것 같지만 날씬하기는 그 윗길 간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구성이 완벽하면서도 노래적 성격을 잃지 않고 있는 것도 장점”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능표 시인이 돌아왔다. (중략) 그는 첫 시집 『이상한 나라』(1988)를 펴내고 나서 새로운 서정시의 문을 찾아 고된 순례를 떠났다. 1994년 무렵 이후 그는 “연필을 버리고 종이에 수갑을 채운”(「종이」) 서정시인으로 살았다. 첫 시집의 말미를 장식한 ‘종이’의 마성 탓이었을까? 혹은 “천 년을 살아도 그리움이 없는 나라”(「이상한 나라」)에서도 서정시는 가능한가, 라는 곤혹스런 질문 때문이었을까? 또는 “이마 위에 칼비가 쏟아”(「최근의 형벌」)지는 상황에서 “꽃들이 슬픔에만 매달리고/ 사람이 벌떼보다 따”(「이상한 나라」)가운 ‘이상한 나라’의 망명시인을 자처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시단을 떠난 것처럼 보였고, 그러다가 20여 년이라는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 다시 돌아왔다. 시집 『슬픈 암살』로.
― 우찬제, 해설 「시적 간지럼과 망명시인의 귀환」 중에서
그의 두 번째 시집 발간을 ‘시적 간지럼과 망명시인의 귀환’으로 파악한 우찬제(평론가, 서강대 교수)는 시집 해설의 모두에 다음과 같이 이어 적고 있다.
『슬픈 암살』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비록 오랜 시간 동안 시를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서정시인이었음을, 예민한 시혼으로 고단한 현실의 바다에 깊은 그물을 드리웠던 시인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하게 된다. 오로지 시인으로서 세월을 견디어오면서 그는 자기 시의 세계를 더 넓고 깊게 천착해온 것으로 보인다. 시적 대상도 다양해졌고,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도 깊어졌다. 어조와 스타일도 다채롭다. 특히 침묵의 여백에서 심원한 이야기성을 구축하려 한 시도가 참으로 어지간하다. “심리적 삶에 더 충실한 유형의 시인”에서 일상적 경험과 생활을 재발견하고,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인 삶의 지혜를 통해 동시대를 재성찰하는 확산의 깊이를 도모한다. “그리움이 없는 나라”에서 철저히 절망하면서 그리움의 정조를 역설적으로 구성한다. 삶의 진실에 대한 그리움, 정녕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 무엇보다 시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세월을 벼리고, 시적 연금술을 벼리며, 그렇게 20여 년을 견디어온 것이 아닐까 싶다.
― 해설 중에서
이능표의 시는 역사적 현실과 현실 정치에 대한 각성, 실천적 삶이 가치의 주류를 이루던 198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구체적 삶의 풍경이 잘려나간 과도한 침묵의 간격으로 인해 다소 접근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의 첫 시집 『이상한 나라』를 평했던 이광호 비평가는 “너무 과중한 침묵의 무게 때문에 오히려 시가 그 불모성의 일부로 편입되어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탄식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 속으로 들어온 “일상적 경험과 생활의 재발견”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시 전반에 주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바로 “문화적 적층과 이야기성”이다. “자아와 세계 사이의 경계를 열어둔” 채 “자아의 감정의 유로流露를 최대한 절제”하면서 “더 넓고 깊은 역사적 문화적 적층에서 두텁게 숙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슬픈 암살』에서 시적인 것의 확산과 심화는 이야기성과 관련된다. 그 첫 번째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심연에서 시간의 그물코를 작동케 하는 것이다. 흔히 서정시는 보이는 현재의 특정한 지점을 영원한 현재로 재현하려는 상상적 노력의 소산이다. 그런데 그 현재의 시점에 시간성을 부여하면 이야기의 성격이 형성된다. 현재의 현상 이전 과거의 행로에 대해 서사적으로 탐문하다 보면 오늘의 특정 국면도 새로운 맥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이야기성 지향 창작방법론의 두 번째는 눈앞의 현실에 대해 즉각적으로 느끼고, 발 빠르게 판단하기보다는 더 넓고 깊은 역사적 문화적 적층에서 두텁게 숙고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2부를 시작하는 「톡,」, 「톡, 톡」, 「톡, 톡, 톡」에서부터 이능표의 이야기―시는 본격화된다.
― 해설 중에서.
시집의 제1부가 첫 시집 『이상한 나라』를 출발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 브리지이면서 그 출국 과정에 대한 영사라면 제2부부터는 그가 도착한 새로운 나라에 대한 “이야기―시”들이다. 새로운 나라에 도착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귀가 큰 사내는 언제나 오시는가?」). 시인의 “간지럼”은 여전하다. “정해진 모양이 없”는, “통로가 통로의 꼬리를 물고 말려들어가는 우스꽝스런 모습”(「슬픈 암살·1」)들뿐이다. 일찍이 최인훈 소설가가 설파한, “순수하게, 완전하게, 투명하게, 추상적으로, 상징적으로 살리라, 하는 놀라운 결심!”(「공명」, 『문학과 이데올로기』)대로 살다 간 완전한 인간, 공명을 세상으로 이끌어낸 “귀가 큰 사내”를 기다리는 어느 새벽, 유리창 밖 목련나무를 바라보며 시인의 고뇌는 깊어진다. 어쩌면 그와 같은 삶을 꿈꾸지만 그것은 곧 “무서운 역행”이며, “화려한 배반”이자 “고독한 생육!”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아는 시인의 귓가에 “달그락달그락. 수레소리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데.
형체가 사라지고 빛이 가득한 어떤 곳으로 흘러갔다. 나는 액체이면서 기체이기도 한 무엇이고 생각이나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이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고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단지 그뿐, 모든 체계는 정지한다. 그런 시간이 잠시 흐르고 무언가 선택을 해야 했을 때 단지 있을 뿐인 그 있음에서 벗어나기로 하고 다시 살아 있음의 상태에 돌입한다. 모든 것이 분명하다. 확정된 사건만 존재할 뿐 생사의 경계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 시 「슬픈 암살·1」 부분
시인 이능표의 시적 인식은 도저하다. 나도 죽이고, 세계도 죽이면서 “다시 살아 있음의 상태”에 대해 열린 도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닫힌 체계들, 억압적 경계들을 넘어서기 위해 우선 주체 스스로가 죽음을 선언하고, 다시 인식한다. 그런 면에서 ‘슬픈 암살’은 일차적으로 자기 암살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개벽에 가까운 상상력으로 열린 경계를 돌파하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경계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기에 시인의 ‘슬픈 암살’은 새로운 섭리를 모색할 수 있고, 나에 대해서, 시에 대해서, 처음인 듯 본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망명시인의 자리에서 시인의 터전으로 귀환을 예비한다.
― 해설 중에서.
해설자의 말대로 이능표가 시인의 터전으로 온전하게 귀환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시집의 마지막 구절을 시인은 “이제 삶을 돌아보는 일은 없으리라.”(「산골」) 쓰고 있다. 해설자는 “이 5행으로 된 짧은 시에서 우리는 망명시인의 귀환을 역설적으로 감지한다.”고 전망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연필을 버리고 종이에 수갑을 채운”(「종이」) 첫 시집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시집의 자서를 대신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작품도.
유리창 밖은 봄이다.
새들은 날아오르고
나무들은 잎사귀를 내민다.
십 리 밖 강물 속에서
물고기들이 물고기들의 삶을 살듯
새들은 새들의 삶을 산다.
나무들은 나무들의 삶을 산다.
말 걸지 말자.
물고기들은 강물에
새들은 하늘에
나무들은 숲속에
나는 유리창 안에 있다.
말 걸지 말자, 말 걸지 말자.
느린 듯 더딘 듯
불쑥 왔다 울컥 가는 봄.
― 「봄」 전문
이능표 시인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와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문예중앙』 겨울호에 「스물여섯 번째의 산책」 「눈」 「미완의 풀」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이상한 나라』 『슬픈 암살』 외에 몇 권의 동화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