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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21장 15-17절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은 많은 부분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를 부르신 일과 흡사합니다.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지만 잡을 수 없었다는 것,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신 것,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졌을 때 많은 물고기가 잡힌 것 등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 5장에서 그들을 부르시면서 복음 사역자로 세우신 것처럼 세 번째로 자신을 나타내신 일 가운데서도 다시금 그들을 불러 복음 사역자로 세우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처음 그들에게 나타나실 때부터 사명을 주셨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그들은 주께서 주신 사명을 위하여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본래 해 오던 일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다시금 불러 복음 사역자로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을 위하여 떡과 생선을 주신 일은 단지 물고기를 잡는다고 수고한 저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만 주신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떡과 생선을 주신 일은 요한복음 6장을 비롯하여 사복음서 전체에서 다루고 있는 오병이어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 사건 역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지만 단지 그것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그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결국 오병이어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는데,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그 떡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구약 만나 사건에서부터 알리신 내용이었는데,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신8:3). 물론 육신을 위하여 떡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삽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진정으로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만으로는 죽은 자로서 산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담의 첫 범죄 이후 모든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를 먹어야 한다고 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만을 먹고 마시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알리고자 하신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너희의 사명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전하는 것이요, 그가 아니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할 때 하나님 나라의 일의 핵심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생명이 된다는 것, 그래서 사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부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15절에서 17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지금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 사실을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떡과 생선을 다 먹은 뒤 일곱 명에 제자 가운데 특별히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그에 대한 답변을 들으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염두 해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가 다 주를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에 더하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의하면 부인하고, 맹세하여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주를 버린 것도 문제지만, 주를 부인했다는 것을 더욱 치명적입니다. 어쩌면 베드로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 사명을 주셨지만, 그 사명을 위한 준비보다는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런 베드로에게,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들을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은 무엇보다 제자들 자신에게도 필요하고, 사도들의 복음을 듣게 되는 청중들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따라 베드로에게 이 일이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부과된 소명을 확신하고 그의 임무를 더욱 더 열심을 다해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청중을 위해서도 필요한데, 그의 치명적인 실수 혹은 실패 때문에 그가 전하는 복음이 멸시를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금 세우고자 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는다는 것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혀 가실 때 부인했던 자들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오셔서 다시금 그들을 세워 보내고자 하십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이 사도로서 결격사유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먼저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비교하자면 15절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시면서 비교 차원에서 물으시고, 16절과 17절에서는 그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지난 시간에도 봤지만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열정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허탕만 치고 있다가 누군가의 말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그리고 사도 요한이 “주님이라”고 말하자마자 주를 뵈옵기 위해 곧바로 바다에 몸을 던졌던 것이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도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시금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26:35)
어쩌면 이런 베드로의 성정을 아시고서 15절에서는 비교적으로 물으신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후 16절과 17절에서 비교적으로 묻기보다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만 물으실 때 이렇게 물으시는 근본 이유는 그의 사도로서의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어는 누구도 인간적인 수준 이상의 안목이 없고서는 교회 봉사와 양떼를 먹이는 임무를 제대로 충실하게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특히 칼빈은 무엇보다 먹이는 임무 자체가 힘들고 괴로운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멍에 아래 두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마디로 인간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 아래 살아가기보다는 하나님의 법과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매우 연약합니다. 경솔하고 미덥지 못합니다. 또한 둔하고 게으릅니다.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르치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가 어렵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사단까지 합세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한다는 데 있습니다. 즉 부패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의 말씀을 따라 내 양을 먹이라는 이 명령을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우리 스스로의 결심으로 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베드로, 그리고 그런 베드로를 따라 모든 제자들이 주와 함께 죽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들은 다 주를 버리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결코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내 결심에 따라 되는 문제가 아니더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거짓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조차 그의 결심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즉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베드로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가? 자신을 베드로 대신에 죽음으로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입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요, 오늘날 교회와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그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그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완악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모든 제자들은 그래서 넘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그들을 일으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찾아오신 것이고, 그들로 하여금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또 물으시는 것입니다. 특히 묻고 또 물으실 때 세 번째 대답에서 베드로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이 거짓은 아니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또 물으실 때 거기에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 주를 사랑한다는 것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도 우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주를 사랑한 자가 되었어도 그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3-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도 바울과 그의 동료들의 마음을 강권하여 충성됨으로, 열심으로 일하게 하는 것이지, 사람으로부터 출발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여기에는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사실과 함께, 그 사랑은 사람으로부터 출발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속해서 사랑하시는 결과로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말씀 사역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데도 주의 종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말씀 사역자만이 아니라 주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백성이라는 이 명칭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자들이 주의 백성이라면, 주의 백성의 마땅한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숨까지 내어놓으시고 죄인 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셨는데 어떻게 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주의 백성이라는 명칭 안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그 이름 안에 우리의 마땅한 바가 주를 사랑하는 자로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를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고 해서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한결같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를 배신하고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것처럼, 또한 베드로가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한 것처럼, 우리 역시 주를 버리고 부인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염려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주를 버리고 도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모든 삶이 주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보이십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십니다. 배신하고 배반했다고 해서 주께서 우리로부터 돌이서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이런 우리의 본성을 아시고서 사랑하기로 하셨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배신하고 배반하더라도 그 사랑을 거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확인할 때마다 다시금 더욱 주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의 사랑을 배신하고 배반하지만, 주께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주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주를 향한 충성과 열심으로 주를 더욱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물으시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에 이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5절에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고, 16절에서는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시며, 17절에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먹이라’는 말은 다스리라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는 ‘치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영적으로 다스리라, 통치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사도의 직무, 더 나아가 오늘날 목사의 직무가 있습니다. 그 직무란 예수 그리스도의 양을 먹이고 치는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을 먹이고 양을 치기 때문에 성경조차 말씀 사역자들에 대하여 목자라는 칭호를 돌리지만, 교회의 유일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미 이 사실을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1절 이하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1-16) 특히 16절에서 ‘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유일한 목자는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럼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목자인가? 지난 시간 오병이어 사건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떡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양식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요, 이 양식이 아니고서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오시기 전 선지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 그리고 승천하시고 난 뒤 사도와 목사를 사용하십니다. 즉 사람을 사용하여 자신의 목자 됨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을 사용하여 그렇게 하시는가? 그들이 잘나서인가? 그들이 흠 잡을 데 없어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누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20:18-19)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에 대한 말씀 직후에 나오는 말씀인데, 쉽게 말해 사람을 세우시는 이유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세워 일하시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인가? 우리의 연약함에 맞추어서 그렇게 하신다는 측면에서 우리를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이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구약의 경우 참된 선지자만이 아니라 거짓된 선지자도 있었다는 것, 신약의 경우도 거짓된 사도들도 나타났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연히 오늘날 목사라고 해서 모두가 참된 목자인가?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때문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할 때 아무 거나 먹이고, 아무렇게나 치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먹이고 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무엇을 먹이느냐, 무엇으로 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자신으로, 자신의 말씀으로 먹이고 치기를 원하시는데, 목사가 세상의 사고와 방식을 따라 먹이고 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목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시지만,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고 해서 사람이 무엇을 먹일지를 판단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를 세우시고, 사도를 세우시고, 목사를 세우신다고 할 때 자신의 양떼를 맡기시면서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그의 말씀을 통해 다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그런 예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으로만 먹이고 치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으로 가시면 이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10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0-15) 우선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 터는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의 사역은 에베소서 2장 20절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라는 터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를 향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 에 세우심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이후 그 터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이 있게 됩니다. 오늘날 목사가 그들입니다. 이때 목사는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무엇으로 세우는지가 중요하기에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전3:10)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 금, 은 보석과 나무, 풀, 짚이라는 재료가 나오는데, 쉽게 말하면 어떤 재료로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건축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13절 이하 15절은 불에 타느냐, 타지 않느냐에 대한 것으로 결국 금, 은, 보석의 경우는 불에 타지 않지만, 나무, 풀, 짚은 불에 타서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전체적인 상부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기초를 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금으로 다져놓은 기초 위에 값싼 재료들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의 터 아래 매장시키는 악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그는 ‘금이나 은’, 그리고 ‘보석’의 교훈으로써 그리스도를 방어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기초와의 조화에서 상부구조를 의미하고 있다. 더구나 이 교훈이 그리스도 아닌 다른 근원에서 끌어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며, 오히려 그 건물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가 계속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할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다른 한편, 나무나 풀, 짚으로 묘사되어 온 그 가르침은 기초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귀결이 나온다. 말하자면 그 가르침은 인간에게서 날조되어 나온 것이며,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인간의 날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선포에 의하여 이룩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막13:31, 눅21:33)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15:13)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때문에 터 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어울리지 않는 모든 가르침, 나무와 풀과 짚과 같은 가르침은 뽑힐 것이요, 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말씀 사역자는 그런 가르침을 위하여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할 때, 내 양을 치라고 할 때 나무와 풀과 짚으로 먹이고 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는가?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그 터와 어울리는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가르침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의 가르침만이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할 때 남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위하여, 그런 가르침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 이 말씀을 오늘날 교회에게 준다고 할 때 목사만을 위한 말씀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 사역자의 마땅한 자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양을 먹이고 치는 것처럼, 그것도 아무렇게나 먹이고 치는 것이 아니라 터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가르침으로 먹이고 치는 것처럼, 그런 가르침을 받는 모든 성도는 무엇만을 먹고 마셔야 하는가? 터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가르침만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가르침을 사모해야지, 나무와 풀과 짚과 같은 가르침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남는다고 할 때 그런 말씀을 사모해야지, 아버지께서 심지도 않은 말씀 그래서 뽑힐 수밖에 없는 그런 말씀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도 그렇고 성도도 그렇고 금과 은과 보석보다는 나무와 풀과 짚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16절과 1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오늘날 사람이 들어서 좋아할 말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교회 안에 그런 말들이 없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런 말씀이 있으면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선지자들이 그 시대 백성의 죄를 폭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재앙 외에는 없다는 것이고, 회개한다면 주의 긍휼과 용서가 약속되어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내용으로 가득합니까? 인간의 부패성은 죽음으로 완전성화에 이르기까지는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 본성을 안다면 어떻게 평안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뜻과 상관없는 평안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어떻게 웃고 즐길 수만 있겠습니까?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데, 그분을 떠나서 어떻게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만이 우리의 생명이요, 소망임을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 외에 교회가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목사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을 주님의 것으로 먹이고 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이는 일입니다. 그의 말씀만으로 주의 백성을 가르치고 권하는 일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것이 아닌, 내 양식, 내 견해, 내 판단으로 먹여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것으로 먹여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할 때(고전4:2) 충성은 열심을 다하는 것, 최선을 다하는 것, 누구보다 열정을 갖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답게 순수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것으로 먹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것과 상관없는 것으로 먹인다면, 그것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의 사명이 그러하다면 교회와 성도가 사모해야 할 양식도 동일한 데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목사의 학력, 목사의 언변, 목사의 외모, 이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규모, 교회의 헌금, 예배당의 크기, 이런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전하는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주께서 사도 베드로를 세우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관련해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가톨릭교회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베드로의 수위권을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지위가 베드로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베드로에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여러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이 베드로에게나 이후 베드로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특별히 그를 대상으로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그를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더불어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이 고백을 한 사람은 분명 베드로입니다(마16:16). 그리고 그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권을 주시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7-19) 이때도 해석상의 내용에서는 베드로 개인이 아닌 ‘회’에 주셨다는 것이 중요한데, 좀 더 분명하게 마태복음 18장으로 가면 동일한 천국열쇠권에 대하여 베드로 개인이 아닌 사도들에게 주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요한복음 20장 2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사역의 핵심으로 죄 사함을 말할 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로 부르신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때문에 비록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으로 있지만, 이 말씀은 베드로 개인이 아닌 나머지 제자들, 나아가 오늘날 모든 말씀 사역자들에게 공통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본문에 대한 베드로의 수위권은 결코 합당한 이해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들은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하면서 교황의 수위권까지 주장하지만 베드로의 수위권이 합당한 이해가 아닌 것처럼 교황의 수위권 역시 합당한 이해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결코 사람이 앉을 수 없습니다. 그가 사람을 세워 일하시긴 하시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교회의 머리가 되도록 하신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고 모든 성도는 오직 하나의 머리만을 가지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목사가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도 그리스도요, 성도가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도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목사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을 한다면 거기에는 귀를 기울이 가치가 없습니다. 그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말씀에 합당한 것만을 내놓을 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부디 주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시고, 그 음성만을 들으면서 주를 따라갈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