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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놓고 풀어놓아야 할 하나님의 뜻
1959년 6월 14일(日), 전 본부교회.
마태복음 10:34-39, 18:15-20
<기 도(Ⅰ)>
본연의 동산을 지어 놓고, 본연의 참다운 자식들을 품고,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 즐겨야 할아버님의 이념은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 인간들은 사망에 사로잡힌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본연의 심정으로 하늘을 노래한 때가 없었던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본연의 한 개체로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서지 못한 불쌍한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본연의 심정을 갖추어 나의 아버지라고 간곡한 심정에 어리어 부르지 못한 것을, 아버지, 긍휼히 여겨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본연의 동산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사망의 세계에 떨어져 흑암과 싸웠사옵고, 원수들의 장중에 사로잡혀 탄식과 절망 가운데 있었사오나 본연의 마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양심을 통하여서는 본연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역사적인 싸움을 거쳐오면서도 시간 시간 느껴지는 하늘의 감촉을 통하여 하늘의 생명의 한 줄기를 찾아 나온 저희들을 협조해 주신 아버지, 감사하옵니다.
지극히 어리고 부족한 저희들이 이 한 노정에 시달려 지쳐 있음을 아버지 아시오니, 이 시간 다시 긍휼의 손길을 펴시옵소서. 재창조의 능력을 허락하시고 본연의 심정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본연의 모습으로서 아버지께 접근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는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끊고서라도 하늘이 소망하시는 본연의 세계를 향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이제 저희에게 본향을 그리워하는 간곡한 마음이 사무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이, 저희의 다리가 피곤하게 될지라도 본향을 향하여 달릴 수 있는 자리로, 아버지, 몰아 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하늘의 심정을 사모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최후에 저희 인간들과 더불어 즐거워하실 수 있는 행복의 동산을 저희로 하여금 건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대의 억천만인이 말리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의 마음을 갖고 그것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타락한 무리들이오니, 어차피 복귀노정을 거쳐서 본연의 자체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본연의 고향을 찾아, 본연의 아버지를 모시고, 본연의 세계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이 악한, 타락한 저희는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몰랐사옵고, 본연의 고향을 몰랐사옵고, 본연의 인격과 본연의 한 자체를 몰랐사오니, 아버지시여! 다시 말씀을 통하여, 인격을 통하여,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본연의 그 한 자체가 될 수 있는 전체 요소를 구비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저희 한 자체를 영광의 모습으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 수많은 원수 사탄들은 역사적인 노정에서 선조로부터 오늘의 저희 자체에 이르기까지 때와 시기를 개의치 않고 침범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이를 거부하고 이를 제재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선 저희들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무장하고 아버지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원수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 자체들이 본향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저희의 가정과 저희의 사회와 이 강토 위에 살고 있는 삼천만 민중, 지구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인류,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까지 잃어버린 본향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시여, 저희들로 하여금 아버님의 심정과 통하는 본향을 건설할 수 있는 책임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원수의 세계에서 참다운 아들딸들을 찾아, 그들을 규합시켜, 본연의 동산을 건설할 수 있는 하늘의 일꾼,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일주일 동안 상한 심령을 그냥 그대로 지닌 채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옳지 못한 모든 것은 제거시켜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요소만이, 아버지의 본성에 화할 수 있는 본질적 요소만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최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고, 찾아 드려야 할 본연의 한 자체를 찾아 즐길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부족한 몸들이 아버지 앞에 모여 경배드리는 시간이오니 성별시켜 주시옵고, 억천만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 천군천사가 옹위하여 아버지를 친히 모시고, 심정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이후의 전체 시간도 아버지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운행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기 도(Ⅱ)>
이 땅을 섭리하시는 아버지! 탕감복귀해야 할 서글픈 역사상의 죄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인류가 당신을 찬송하였사오나 당신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한 채 슬픈 역사는 흘러 6천년이 경과했사옵니다. 그 모든 것이 누구 때문인가를 생각하올 때 황공한 심정을 금할 바 없사오니, 저희의 이 심정을 보시고 친히 찾아와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헝클어진 마음과 몸을 가지고 아버지의 존전에 무릎을 꿇었사옵니다. 저희들의 주인은 당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저희들의 모든 사정을 통할 수 있는 분은 당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사랑의 아버님이시여, 이 시간 당신이 주관하여 주시옵고, 당신이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인간들이 아버님을 찾기 위하여 역사노정에서 허덕였다 해도 아직까지 아버님을 모시고 산 자들이 땅 위에 없었사옵니다. 이 땅의 어느 한 귀퉁이가 아버지 것이며, 어느 한 가정이 아버지 것으로 어느 것 하나 이 땅 위에 찾아 세우지 못한 아버님의 그 슬픈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 있사옵니다.
당신께 슬픔이 있다 할진대, 이 땅의 주인인 당신이 주인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이 땅을 책임져야 할 당신이 책임지지 못하는 입장에 계신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땅의 인간들을 책임져야 할 입장에 계시되 책임지지 못하는 섭리를 이끌고 나오신 아버지, 저희의 심정을 통하여 직접 주관하시고 직접 명령하셔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입장에 계시지 못한 아버지, 저희의 생활을 통하여 저희의 전부를 주관하셔야 할 아버지이심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내적인 생활과 사정을 주관하지 못하시는 아버지, 저희를 두고 선의 결실이라고 찬양하여야 할 아버지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한 날, 한 때 한 사람을 찾지 못하신 아버지, 이런 서글픈 입장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저희들은 몰랐사옵니다.
이제 저희가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서글픈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사정과 곡절을 친자녀의 입장에서 느낄 수 있고, 아버지께서 눈물 흘릴 때 같이 눈물 흘리고, 어려움을 당할 때 같이 어려움을 당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러한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아버님께서는 오랫동안 수고하셨사오나 인간을 대표할 수 있는 주인공을 만나지 못하셨사옵고, 하늘을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의 법도의 주인공을 만나지 못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가운데 아버님께서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시켜 놓고 아버님을 대신하고 아버님의 심정을 붙들고 움직일 수 있는 실체 메시아를 땅 위에 보내셨사오나,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모시지 못하고 메시아와 더불어 동거하지 못함으로 인해 세계를 유리고객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끝날, 다시 오셔야 할 주의 재림의 한 날을 바라고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하늘을 대신할, 하늘이 찾고 계시는 그 하나의 모습은 하늘이 슬퍼하실 때 같이 슬퍼하는 자요, 하늘의 사정을 붙들고 하늘과 같이 싸우는 자요, 하늘의 기쁨을 대신하여 하늘과 더불어 노래하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사오나 역사와 더불어 시대와 더불어 미래를 대신할 하나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이 시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 한 존재를 맞이할 수 있는 소망의 한 날을 바라보고 오늘날까지 무릎을 끓고 아버지 앞에 기도드렸사오니, 간곡한 사랑의 심정을 갖고 오실 귀한 실체를, 아버지시여! 허락하신 동산에, 허락하신 때에, 이 천지간에 맞이할 수 있는 기쁨의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의 마음이 부족한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의 몸이 속된 것을 알았사오며, 저희의 욕망이 사탄과 더불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사옵니다.
이러한 내적인 요소를 가진 저희들, 하늘을 대신하여 허락하신 한 때, 한 시대, 한 시기에 오시는 하나의 주인공을 기다릴 수 없는 처참한 모습들이오니, 불쌍한 자신을 걸어 놓고 탄식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가정과 불쌍한 사회와 불쌍한 인류와 불쌍한 하늘땅을 걸어 놓고 탄식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슬픈 심정으로 하늘땅 앞에 속죄해야 할 때가 왔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심정은, 아버지, 당신의 심정을 대할 줄 모르는, 대할 수 없는 입장이오니, 이러한 저희의 몸과 마음을 아버지의 형상과 아버지의 심정에 화할 수 있는 실체로 다시 빚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러한 저희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사망세계에서 사탄의 밥밖에 되지 못할 것이옵니다. 6천년을 섭리해 오신 아버지시여! 이 끝날에 저희들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희를 통하여 승리의 표적을 세우고 승리의 동산을 건설하여 원수 앞에 자랑하려 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남아 있음을 알고 있사오니, 어떠한 수고의 자리라도 동참하여 영광의 모습이 되게끔 이끌어 주시옵소서. 어떤 난관에 부딪쳐 깨어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뜻 대한 일편단심의 심정을, 하늘 앞에, 땅 위에 남길 수 있는 하늘의 충신들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날 저희들 모였사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가 아버님의 심정을 헤아리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뜻 앞에 합당치 않은 것이 있다 할진대 그 일체를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심정이 저희의 심정이 되어 아버지 실체의 움직임에 저희의 몸이 아니 움직일래야 아니 움직일 수 없고, 저희가 아버지 앞에 회개하지 않을래야 회개하지 않을 수 없고, 저희의 사정을 털어놓지 않을래야 털어놓지 않을 수 없게끔 직접적인 능의 손길을 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늘이 용납할 수 없는, 지금까지 갖고 나온 일체의 세상적인 관념이라든가 주의주장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그 모든 것을 아버지 것만으로서 화할 수 있게 본질적인 감성의 기준을 높여 주시옵고, 양심적인 기준을 높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심정을 연결시키어서 아버지의 심정과 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천적인 사정과 통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 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 인간들이 제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죄악된 인간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변명할 어떤 내적 조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하늘 앞에 변명의 조건을 내세울 수 없는 타락의 후손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을 보내시어 저희의 주위를 성별시켜 주시옵고, 저희의 심정 심정을 깨뜨리시어 아버지의 능의 손길로 다시 빚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재창조의 말씀과 더불어 재창조의 성품을 받아 사망의 실체인 저희가 생명의 실체로 화하여 영광과 환희가 기쁨 속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기쁨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날은 거룩한 날, 만민이 당신을 높이 찬양해야 할 날인데도 불구하고, 이 민족은 당신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고 인류의 대부분은 당신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사옵니다. 이러한 인류를 붙들고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곡절의 심정을 알아야 할 때가 왔사오니, 외로우신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하지 못하고 외로우신 아버지의 모습을 대신하지 못한 역사적인 죄상을 느껴, 이 시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하염없는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심정의 억울함을 느껴 저희의 몸이 사라지는 한이 있을지라도 아버지의 심정을 노래할 수 있으며 그 심정을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불쌍한 자들이옵니다. 이들에게는 땅 위의 어떤 친구도 없사옵고 변명자도 없사오며 동역자도 없사옵니다. 외로운 고개, 외로운 길, 외로운 가시밭길을 지나 맞고 맞고 맞으면서 이 길을 찾아왔사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가야 한다고 느낀 바가 있기에, 쓰러지고 죽더라도 이 길을 지켜야 할 뜻을 알았기에 오늘 아버지 앞에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생명의 고갈을 느껴 아버지를 대신한 천적인 이념을 고대하고 있는 아들딸들, 이들의 생명을 책임질 분도 당신뿐이옵고, 이들의 사정을 위로할 분도 당신뿐이오니, 이들의 심정, 이들의 사정, 이들의 환경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들 위에 아버지께서 운행하시는 거룩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거룩하게 예배하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끝날, 시각을 재촉하는 이 시대에 당도한 저희들, 이제 저희의 머무른 자리, 머무른 그 위치가 어떠한 곳인가를 제3자의 입장에서 비판해야 할 때가 되었사오니, 나는 어떤 곳에 머물러 있으며 어떤 방향에서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걷고 있는가 스스로 비판해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바람과 저희들의 바람에 차이가 있다 할진대 그것을 해소하기에 수고하는 저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 저희의 마음과 몸이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동하면 저희도 동하고 아버지께서 정하면 저희도 정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경륜의 귀일점을 세워 주시고, 저희는 하늘의 심정을 대신한 하나의 모습을 갖추어 하늘의 영광을 노래하여 천상의 천천만 성도들까지 움직여 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날 쌓고 있는 수많은 제단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아버지 앞에 심정 심정, 가슴 가슴을 헤쳐 놓고 자기의 과거 모든 것을 털어놓아, 아버지로 말미암아 새로운 혈연적인 형제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아버지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복귀의 한 날이 어서 속히 이 땅 위에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도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을 줄 아오니 그들에게도 같은 은사로써 역사하여 주시옵고, 심정이 미어지는 사정을 갖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곳곳마다, 아버님, 친히 사랑의 손길을 펴 주시옵고 생명의 움직임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 시간 부활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주관권 내로 인도하여 주시옵고, 사랑의 심정으로 품어 주시옵소서. 어린이와 같은 심정으로 아버지를 흠모하고 갈급한 심정에 사무칠 수 있는 몸 마음이 되어 아버지 앞에 바쳐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Ⅲ)>
아버님, 나의 아버님!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은 아버지께서 빚으신 흠 없고 티 없었던 본연의 아담 해와와 같은 모습인 것을 저희들이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과 몸이 하나로 화합하여 영광의 결실체로서 아버지께 바쳐져야 할 자신들이라는 책임감을 이 시간 스스로 느끼면서 나의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늘의 은사를 이 시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은 아버지의 사랑과 인연맺지 못한 것이요,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본연의 양심을 잃어버린 것이며, 그 심정과 양심이 화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 화합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한 것임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타락한 연고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감각이 저희에게서 떠나갔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여 만상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저희들에게서 없어졌사오니, 아버지, 그 심정을 회복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저희 것이 아버지의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것을 다 아버지 앞에 세워 놓고 자랑스런 모습으로서 사랑의 활개를 펴서 만물을 품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의 심정을 가질 수 있도록, 아버지! 이 시간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나의 아버님! 이와 같은 심정에 통하게 할 수 있는 말씀이 이 시간 절실히 필요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잃어버린 것은 말씀이옵고, 그 다음은 실체요, 그 다음은 심정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말씀을 통하여 잃어버린 저희의 본연의 심정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본연의 말씀에 머리 숙일 수 있는 마음이 되고 본연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몸이 되어 아버지의 영광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은사를, 이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일을 시작하신 분이 당신이셨사오매 이를 성취하실 분도 당신인 것을 알고 있사옵고, 선으로 시작하였으니 선으로 결말을 지어야 할 것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하셨고 처음과 나중이라 하셨으며 시작과 끝이라 하셨사온데, 처음에 본연의 심정을 잃어버린 인간이기에 끝에 가서도 천적인 심정을 통할 수 없사옵니다. 이제 끝날에는 본연의 심정을 붙들고 심정을 연결지어야 할 터인데, 타락의 원한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고 있는 저희들임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저희의 마음이 저희 것이 아니고 당신의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 몸이 저희의 것이 아니고 당신의 것임을 알게 하시며, 저희들의 심정, 감성, 이 모든 것이 저희에게 속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속하여 움직인다는 사실을 실체적이고 실증적으로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전하는 자의 마음과 듣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주관적인 무엇을 세워 헤아린다 할진대 천성의 은사를 가로막기 쉬운 줄 알고 있사오니, 응함도 당신을 위하고 화함도 당신을 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저희들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돌아가 들리는 대로, 또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아버지 장중에서 시작하여 끝을 맺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허락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이 당시에 말씀하시던 그 심정을 통할 수 있고, 사정을 통할 수 있으며, 그의 이념과 소망의 실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을 맞이하여, 그의 사정과 심정에 화하여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기쁨의 조건을 찾아 세우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허락하신 이 한 시간 아버지의 영광의 은사에 잠길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는 자신을 세워 놓고 볼 때에 나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과 어떠한 곡절의 인연을 갖고 있는 사회가 있고 가정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 양심을 중심삼고 볼 때에는 크고 높은 선을 지향하는 어떤 인연 가운데 서로 얼크러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얼크러져 있는 인간과 하늘의 소망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해명하기를 원하고 완전히 안정된 위치에 서기를 원한다면 지금까지의 환경적인 모든 인연을 정리하고 새로운 가치와 절대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또 심적인 이념의 세계와 절대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오늘날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결정지어 그것을 하늘의 것으로서, 혹은 인류의 것으로서, 완전한 자기 것으로서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최대 희망이요 최대의 임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탄식이 있다 할진대는 하나님께서 그런 입장에 계시지 못한 것이 아니라 친히 창조하신 인간이 천적인 가치와 화합할 수 있고, 만우주의 존재가치와 화합할 수 있는 존재, 안정된 위치에서 절대적인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탄식이요, 인류 역사의 탄식이요, 오늘날 우리의 마음 세계에 탄식의 조건으로 남아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절대적인 인연과 그 행복을 노래하고 싶고 자유와 평화의 이념을 노래하여 살고자 하는데, 그것이 마음과 몸 전체의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그런 세계를 이룬 자가 없고 몸이 그런 환경에서 살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여러분의 생활이 증명하고, 여러분의 생애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헤아려 보고 제3자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비판해 볼 때에, 우리는 행복스러운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불행하다면 하늘을 대신하여 불행한 자요, 인류를 대신하여 불행한 자요, 사회를 대신하여 불행한 자라는 것을 우리는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 이러한 우리 자신을 해결짓든가 보충시킬 어떤 방안이 우리에게 없다 할진대, 우리는 절대적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안정된 자리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을 종교적인 말을 빌어 타락한 세상에서, 속된 죄악권 내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늘이 계신다 할진대는 이러한 사람을 자유의 실체로 해방시켜 해방의 동산으로, 이념의 세계로 이끌고자 하실 것입니다. 만상을 대신하여 자기 자신의 가치를 존중시하며 만우주의 실존 세계와 더불어 움직일 수 있는 화동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천상의 창조주가 스스로 우리의 움직임에 화하여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절대적인 모습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인류가 바라는 최후의 소망일 것입니다. 하늘의 섭리의 뜻이 있다 할진대 그 한 존재가 찾아 세우려는 섭리의 최고 목적일 것입니다. 또 역사의 흐름이 있다 할진대는 이런 하나 하나의 사람들이 서로 통할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그 흐름의 목적일 것입니다.
오늘의 나 자신을 놓고 보게 될 때에 어떠한 인연의 세계가 관여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의 내가 있음은, 오늘의 나로 말미암아 시작되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인연을 통하여 있고 시대적인 인연을 통하여 있습니다. 또 미래의 인연도 가져야 할 운명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인연의 곡절, 시대적인 인연의 곡절, 미래적인 인연의 곡절, 더 나아가서는 천상과 내가 인연을 맺고 있는 이 곡절들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어떠한 철학자가 있다면 이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고심해야 할 것이고, 어떤 종교가가 있다 할진대는 이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고심해야 할 것이며, 양심과 정적인 어떠한 인격자가 있다면 이런 이념을 갖고 노래하고 이런 주의와 사상을 갖고 주장하여야만이 과거의 역사와 현시대와 미래에 있어서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이념을 지니고 그 가치를 대신하여 나타날 수 있는 자격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후 온 세계 존재물 가운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의 어떠한 생애역사를 막론하고 이런 가치적인 실체로서 만우주와 더불어 노래하고 만우주의 행복을 찬양하여 그것을 인간 앞에 제시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목적, 하늘의 소망, 또는 창조의 이념도 그러한 한 존재를 찾아 세우고자 하는 것이 기준이라 할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이러한 이념의 조건, 우리가 심정으로 찾고 인연 맺고자 하는 체휼적인 감정을 인간 세계에 나타낼 수 없었고, 또 우리의 역사적인 모든 위인들은 이러한 사정을 우리에게 소개하여 줄 수 없었던가? 인류역사가 우리들이 바라는 본질과 본성이 화합된 선의 세계를 재촉할 수 있는 발판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도 선의 이념의 실체를 세워 그의 가치를 노래하고, 또 그의 가치를 배양하며, 그가 있는 곳에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을 갖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역사와 사회는 우리의 이념세계와 상응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상반되고 상충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상반되고 상충된 이것을 해소시킬 수 있는 어떠한 하나의 행사라든가, 어떠한 하나의 주의라든가, 어떠한 하나의 주장이 나와야만 됩니다. 그냥 이대로는 모든 인간이 본심으로, 본연의 심정으로 헤아리는 이념세계에 도달할 수 없기에 어떤 하나의 주의나 하나의 이념의 그 방향을 제시하면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상충되고 상반되는 그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는 어떤 역사적인 조건과 시대적인 환경의 조건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통한 섭리역사의 목적
그런데 역사에 있어서 대중이 관심을 두지 않는 한 분야를 개척해 나오고, 그 시대에 있어서 대중이 호응치 않는 가운데 한 분야를 붙들고 나오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왈 종교라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거예요. 역사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그 역사노정에 상반되고 상충되는 일로를 걸어오면서 역사의 배후에서 전체의 선의 이념을 호응시켜 나오는 역사적이요, 사회적이요, 조건적인 하나의 기반이 있으니, 그것이 왈 종교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역사와 더불어 우리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 나오시는데, 역사노정에 그러한 인연적인 발판과 조건적인 환경을 갖추어 놓지 않았다 할진대, 그 하늘은 오늘날 역사적인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취시켜 놓지 않았다 할진대 하늘은 오늘날 우리들의 양심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 나오고 환경적인 기반을 조성해 나온 종교는 당시의 사회와 상반되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제창해 나왔습니다. 본인도 현실과 화합할 수 없는, 이 시대의 흐름에 상반되는 입장에서 제창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까지나 이 사회와 화합되지 못하는 한, 역사적인 종말에 있어서 혹은 섭리적인 종말에 있어서 나타나는 행복의 동산, 다시 말하면 하늘이 동하고 인류가 동하고 온 우주가 동하는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평화의 동산은 건설될 수 없고, 또 그러한 이념은 성립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깨져 나가면 우리의 양심의 절대적인 선의 기준도 깨져 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절대적인 선도 역사적인 인연의 과정을 거쳐야만 역사적인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겠기에 이러한 섭리를 해 나오는 것입니다.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면서 하늘은 무엇을 하였던고? 역사상의 인류를 대하여 하늘은 새로운 선의 이념을 세우고 또 그것을 기반으로 종교의 형태를 갖추어 얽혀진 역사상의 모든 조건, 역사상의 모든 인연을 개방하기 위해 선의 이념을 제창하여 나오셨습니다. 개인의 역사성과 더불어 엉클어져 있는 것, 또는 민족이 세운 전통에 고착되어 있는 것을 개방시키는 운동을 해 나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푸는 역사를 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시작은 선이 아니고 악이었습니다. 악이 먼저 출발하였습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은 변증법의 논리를 세워 그것의 핵심인 정반합(正反合)의 논리로써 역사를 해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반정합(反正合) 논리를 적용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정이 있는데 거기에 모순적인 무엇(반)이 나와 갖고 투쟁 과정을 거쳐 하나의 새것(합)을 빚어낸다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 옳지 못한 것(반)이 나왔으니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참된 형태(정)가 나와 가지고 그것과 화합하여 새로운 무엇(합)이 나온다는 논리를 적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시작은 선이 아니고 악이었으니, 그 악에 대치하는 새로운 무엇(정)이 나와 그것에 악을 융합 시켜 나오는 것이 역사의 발전 과정입니다.
어차피 하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에 가서는 최대의 선이 자리를 잡고 최대의 해결점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날이 역사의 종말이요, 종교의 종말이요, 그 시대의 인류가 품은 소망의 종말이요, 천적인 섭리의 종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개인을 붙들고는 개인을 개방시키기 위하여, 민족이 다르고 환경이 서로 다른 입장에서 잘못된 습관과 고루한 전통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개방시키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겪어 나오셨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우리 선조들로부터 오늘의 우리들까지를 이끌고 계시는 하늘이 있음을 우리는 고맙게 생각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인류역사가 맺힌 역사인 고로 하늘은 지금까지 이 맺힌 인류역사를 푸는 섭리를 하고 계십니다. 엉클어지고 맺혀진 역사, 그 역사가 하나님의 선의 이념과 화할 수 있는 인연의 역사가 되지 못하고, 거기에 상반되는 정적인 타락의 내용을 중심삼고 인연되어 있는 역사인 연고로 하늘은 이것을 개방시키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역사를 개방시켜야 할 뜻이 있기에 하늘은 개인을 붙들고는 개인을 개방시키고, 가정을 대해서는 가정을 개방시키고, 민족을 대해서는 민족, 국가를 대하여서는 국가, 세계를 대해서는 세계를 개방시킬 수 있는 한 날을 찾아 나오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풀어 놓고 풀어 놓아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맺히고 막힌 이 모든 인연의 역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역사적인 종말시대를 바라보면서 이 세계가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 풀리는 그 날까지 싸움을 계속하면서 섭리해 나가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개방운동을 해오신 하나님의 섭리와 오늘의 양상
풀고 풀어야 할 하나님의 뜻, 이런 하나님의 뜻이 역사를 개방시키는 일이라 할진대, 역사적으로 관찰해 보면, 과거의 모든 주권 형태는 개방운동을 통해 점점 무너져왔고 이 시대에 와서는 민주주의 형태까지 개방운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은 중세시대에는 농노를 해방시키고, 그후 봉건사회를 개방시키고, 군주국가를 멸망시켜 오늘의 민주주의 형태를 이루어 나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늘은 전체가 국가를 대신하고, 전체가 세계를 대신하고, 전체가 이념을 대신하고, 개체가 전체를 대신할 수 있고 전체가 개체를 대신할 수 있는, 전체가 개체를 무시할 수 없고 개체가 전체를 능히 대할 수 있는 그러한 기준을 향하여 개방운동을 해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적인 방향과 상응되는 방향이 아니라 상반되는 방향으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종말시대인 오늘날 2대 조류가 대치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공산주의요 하나는 민주주의입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대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실증으로 보아 민주 진영은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옹호하는 기반 위에서 움직이는 진영입니다. 그러면 공산 진영은 무엇이냐? 외적인 것, 즉 물리적인 기반 위에서 움직이는 진영이요, 심적인 기반을 갖고 있는 우리 인간 세계에서 용납할 수 없는, 우리와는 반대적인 입장에 있는 진영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면서 쌍방이 세계적인 개방운동을 표방해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표준에서 쌍방이 개방운동을 표방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두 진영이 부딪치게 될 텐데 그 때에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 어떤 것이 정(正)인가 부(否)인가 반(反)인가 하는 것이 판단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가치를 논하게 될 때에 그 외적인 모양이 잘났다고 해서 그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를 평하게 될 때에는 무엇을 중심삼고 평하느냐? 그가 갖고 있는 사상과 양심 기준입니다.
그리고 그 사상과 양심 기준에 심정문제가 어느 정도까지 개재되어 있는 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을 논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인격도 그렇거니와 주의 사상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외적인 형태만으로 이념을 세운다 할진대 인간은 그것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에만 만족할 인간은 절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낄 때도 내적인 행복의 기준을 세워 놓고서야 외적으로 행복하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오늘의 현실사회를 토대로 한 주의와 사상은 최고의 선을 향하여 움직이는 인간을 대해 그들이 소개할 바, 그들이 연결지을 바를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신을 인정하고 신의 움직임에 따라 양심을 움직이고 이 양심을 기반으로 주의와 사상을 제창해야 합니다. 평화와 행복, 사랑을 앞세워 무조건 봉사하고 무조건 희생하는 본질적인 요소를 지닌 이러한 주의와 사상을 갖지 않고는, 양심을 통해 선을 자동적으로 감촉하고 자동적으로 체휼하지 않고는 우리 인간 세계에서 행복의 조건을, 행복의 이념을, 행복의 주의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아는 바입니다.
역사는 흘러 민족주의 사상은 지나갔고 지금의 때는 세계주의 사상이 전체를 대신하여 설 수 있는 시기입니다.
이 세계는 어떠한 기구나 어떠한 대표적인 인물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 형태, 평등한 입장에서 만민이 이 세계는 내 것이야, 주권도 내 것이야, 이념도 내 것이야 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이런 경지까지 나아가도록 역사를 개방시켜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돌이켜보면, 시대의 조류와 상반된 위치에서 내적인 면에서 섭리해 나오십니다. 각각 다른 민족이지만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선의 방향을 세워 민족을 단결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움직일 수 있는 중간적인 새로운 종교 형태를 갖추어서 민족과 민족을 규합시켜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천적인 섭리의 뜻을 대표할 수 있는, 하늘의 섭리 앞에 나설 수 있는 어떠한 종교가 있다 할진대 이는 오랜 인류역사의 전통적인 기준과 더불어 역사적인 모든 기준과 시대적인 환경과 더불어 앞으로의 소망적인 이념에 응하여 나갈 수 있는 내용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각 종교를 살펴보면 어떠한 종교보다도 기독교가 더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입니다. 연면한 전통을 갖고 있는 동시에 섭리의 뜻을 대신한 이 기독교의 역사는 인류역사의 움직임에 있어 변혁 혹은 혁명 과정을 거치면서도 연면히 계속되어 오늘의 시대도 움직일 수 있고, 미래의 소망의 기반도 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역사가 발전하고 진보함에 따라 인간이 고취하는 주의와 사상, 혹은 민족적인 모든 전통도 변혁해야 되겠기에 섭리의 뜻을 대하는 모든 종교인들에게는 세상과 인연맺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시대적으로 보면, 외롭고 형편없이 불쌍한 자리에 그들이 처한 것 같지만 역사를 알고 변혁해 나오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게 막고 이끌어 나오는 것이 도리어 사랑인 것입니다.
과거 구약시대에는 법도를 통하여 하늘 앞에 나아가게 했고, 신약시대에는 인격을 표방하는 믿음을 통하여 하늘 앞에 나아가게 하는 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시대가 끝났듯이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면 신약시대도 끝이 납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도 최후에는 개방적인 역사관을 포섭할 수 있는 형태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종교를 보면 기독교를 위시하여 불교, 유교, 회회교가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터뜨릴 것이냐 하는 것이 앞으로 하나님의 섭리 프로 가운데 중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개방역사를 통해 본 기독교의 사명과 그 본질
하늘이 개방역사, 해방역사를 제시해 나온다 할진대 교주를 중심삼은 시대, 교주를 존경하는 시대는 지나가야 됩니다. 군주를 높이는 봉건사회를 깨치기 위하여 투쟁역사를 전개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시대에는 자기들이 숭배하는 교주와 평등한 가치를 논의할 수 있는 종교가 필요합니다. 모든 종파를 통할 수 있는 인격자를 하늘은 찾으실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만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개방섭리의 뜻을 종결지을 수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를 믿는 크리스천들은 이방 종교를 열교(裂敎)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그 형태로 있게 되면 새로운 한 때에 가서 그것을 개방하려 할 때 천만 배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합해서도 안 되지만 끝에 가서는 그것을 하나로 청산 짓고 개방시켜, 역사도 이념시대, 주의 사상도 이념시대, 우리의 마음도 이념시대, 하늘도 이념시대에 들어갈 수 있는 이러한 개방역사를 제시하는 주인공이라야 하나님 것이 됩니다. 또한 그런 주인공이 움직여 나오는 종교라야 세계 인류가 숭상할 수 있는 종교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하늘의 섭리가 이런 개방운동을 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할진대 자신의 신앙 관념을 개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박한 문제입니다. 동시에 사회의 전반적인 조건들이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인연의 조건이 되지 못하였으니 그 모든 조건들을 개방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나왔지만 앞으로는 종교와 정치가 규합되어 들어갈 것입니다. 구교인 바티칸 왕국은 머지않아 정치적인 형태를 갖추고 나와서 이념이나 사상을 내세우는 체제와 싸울 때가 올 것입니다. 두고 보세요.
그런 연고로 개방, 이 개방의 방향은 하나는 오른쪽이요 하나는 왼쪽으로, 좌우의 방향으로 역사가 갈라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대로 갈라져 파괴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두고 너도 필요하고 나도 필요한 입장으로 이끌어져야 할 것입니다. 즉 좌우로 갈라진 목적은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하나로 규합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사상에서도 그렇거니와 종교의 이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종교임을 자처하고 있는 기독교, 또 자기들에게 그런 가치관이 있다고 자처하는 크리스천들, 그들이 그들의 마음과 교파를 어느 정도까지 개방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언젠가 하늘이 시대적인 종말의 첨단에 서서 각 종교와 교파, 또 신도들을 대하여 제창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를 살펴보면 기독교 역시 과거의 구교의 의식을 중심삼고 행하던 것처럼 어떤 형식과 관념에 얽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식과 형식에 얽매어서는 하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형식과 의식을 주관할 수 있는 인격자는 하늘 앞에 설 수 있으되 형식과 의식에 구애받는 자는 하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루터는 어떠한 형식이나 관념을 타파하고 성서를 위주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런 고로 말씀을 의지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 말씀에 지배받는 사람들, 말씀에 구애받고 말씀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못됩니다. 말씀을 지배할 수 있고 말씀을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예수였기에 그 대신 설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늘의 아들딸이 될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사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가 신교나 구교를 막론하고 고대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성경의 말씀도 필요하지만 말씀의 중심인 실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 한 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한 분을 고대해야 합니다. 말씀은 지나가도 좋거니와 지나가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말씀의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의 최후의 목표는 무엇인가? 성경 완성이 아닙니다. 말씀 완성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과하여 말씀을 좌우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입니다. 그가 왈 재림주요, 그가 왈 기독교의 소망의 표본일 것입니다. 또 그 실체는 비단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불교나 유교 모든 종파의 소망의 표본일 것입니다. 그 한 실체를 바라보는 각도는 달랐지마는 그들이 증거하고 소개한 내용은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종파든지 반드시 재현해야 할 그 한 실체에 대한 인격 기준을 명시해 놓은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성약시대는 평신도들이 책임을 감당해야 할 시대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즉 6천년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시대인 율법주의 시대가 있었고 신약시대인 믿음의 시대가 있었으니, 이제 앞으로는 새로운 뜻을 이룰 성약시대가 와야 합니다. 종적인 역사가 그렇게 움직여 나오고 있습니다. 어떠한 제도나 주권을 갖고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개인에 의하여 주권이나 조직이 좌우될 수 있는 시대로 바뀌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보면 교직자들을 위한 교인, 교직자를 위한 단체 같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인들을 위한, 양떼들을 위한 목자요 지도자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시대는 지나갑니다. 지나가요. 때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거예요. 하늘은 그렇게 섭리해 오십니다. 뜯어 놓는다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목사시대가 지나가면 장로시대가 옵니다. 무슨 장로, 무슨 장로가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집사시대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무슨 집사, 무슨 집사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집사시대가 지나가서 어떤 시대로 갈 것이냐? 평교인시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역사적인 종말도 평등하게 찾아오는 것이요, 섭리적인 종말도 평등하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시대를 대표한 교단도 평등한 기준에서 움직여 나갑니다. 예수도 나를 위하여, 목사들도 나를 위하여, 교인들도 나를 위하여 있다는, 그러한 하나의 기준 앞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존중해 가지고 전체적인 가치에 대비할 수 있는 존재를 찾아 헤매는 것이 하늘의 섭리역사입니다.
한국 교계는 어떻게 될 것인고? 그렇게 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이제 한국 교회 앞에, 세계 교회 앞에 부르짖어야 될 것은 무엇이냐? 교권자들의 위신은 내려가고 평등 형태를 갖추어야 되고, 세계의 종교는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세계니, 무슨 연합이니, 기독교의 무슨 연합이니 하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평신도들이 책임을 감당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그렇지 않아요?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직접 섭리하시던 때요, 신약시대는 아담 해와 대신 예수와 성신이 섭리하시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끝날은 우리들이 섭리하여야 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의 손으로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권자의 지배 밑에 살던 생명은 필요 없습니다. 나의 가치를 세계적인 가치와 평등하게 대비하여 즐길 수 있는 생명의 가치를 우리는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청년 남녀들은 오늘날의 현실 교회를 대하여, 교파주의를 대하여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서야 될 것이며 평신도의 단결을 외쳐야 되겠습니다. 평신도는 단결하여 옳지 못한 모든 교직자들을 추방하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시대사조는 이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주권자나 제왕 혹은 군주들이 하나님을 대신한 행세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에요? 그 사람들만 하나님 행세를 해야 돼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만민이 하나님의 혈육을 받고 난 아들딸인 고로 어느 누구든지 하늘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형태가 나왔습니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하나님의 아들 딸 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시고 개방역사를 전개시켜 나오셨습니다. 전부다 개방시켜 나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까지 왔으니 이제 개방시켜 나온 이 역사를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역사와 섭리와 종교가 개방되고 평등의 형태를 갖추어서 움직이고 있거늘, 세계 사조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거늘, 이렇게 움직이는 세상을 어떻게 조정할 것이냐? 이것이 오늘날 정치가의 고민이요, 역사가의 고민이요, 종교가의 고민인 것입니다. 어떻게 수습할 것이뇨?
하나님은 죄악의 역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6천년을 수고해 오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선열을 희생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독생자 외아들까지 희생시키면서도 참아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방시켜 온 이 세계를 다시 한번 질서 있는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야 할 천적인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어떠한 종교도 어떠한 종파들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회와 종교가 이렇게 움직여 나오거늘 끝날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제 우리들이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하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평화의 왕으로, 만민의 죄를 속죄해 주기 위한 구세주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놀랄 만한 선언을 해 버린 것입니다. 민족적인 면에 있어서도,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도, 국가적인 면에 있어서도, 가정적, 개인적인 면에 있어서도, 즉 존재하는 모든 것에 걸릴 수 있는 일대의 선언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마 10:35)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이 있을 수 있어요? 더 나아가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하셨으며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순 중의 모순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이후 2천년 역사가 경과했지만 우리가 예수님 당시를 섭리의 종합시대요 섭리의 규합시대로 안다 할진대, 그 시대에 제창했던 말씀은 어차피 종말시대에 풀려야 됩니다. 성경 66권의 풀려지지 않은 모든 말씀도 종말시대에 풀려야 됩니다. 얽혀진 이 세계가 풀려야 되고, 얽혀진 어떠한 주권도 풀려야 되고, 얽혀진 어떤 사회, 어떤 가정, 어떤 개체를 막론하고 종말시대에는 풀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과연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여러분은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혁명의 언사 중의 혁명의 언사였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관념이 개재되지 않았고, 사랑하는 아들딸에 대한 관념도 개재되지 않았고, 사랑하는 부부에 대한 어떤 관념도 개재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이 세계가 타락한 세계인 것을 인정하십니다. 이 역사는 어디서부터 출발하였느냐? 아담 해와가 사탄을 중심삼고 혈연관계를 맺어 벌어진 역사입니다. 천사장과 맺은 정을 기반으로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기반을 통하여 번식된 우리, 악을 중심으로 악의 씨를 번식하고 있는 국가와 민족을 하늘은 용납 하실 수 없습니다. 하늘의 고충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만 남겨 놓고 전세계를 쓸어버린 노아심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하늘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노아의 여덟 식구만 남겨 놓고 당시의 인류와 번식되었던 모든 것을 물로 심판해 버리셨던고? 하늘이 사탄의 피를 받고 난 그 때의 인류와 만물을 심판하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연결될 수 있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마음과 몸을 화합하여 혈연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혈족과 만물이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인연을 맺은 혈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맺을 수 있는 혈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노아의 여덟 식구를 남겨 놓고 전세계 인류를 멸해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가 만민의 구세주로 오셨는데 어떤 구세주로 오셨느냐? 어떠한 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러 오신 구세주가 아닙니다. 사회 환경을 개척하여 행복한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구세주가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구세주였느냐. 만민의 생명을 하늘 생명으로 옮겨줄 수 있는 구세주, 하늘의 이념을 갖추게 해줄 수 있는 구세주, 하늘의 생명과 하늘의 이념을 갖추어서 하늘의 사랑을 즐길 수 있는 입장으로 만민을 옮겨 줄 수 있는 구세주였습니다. 이런 내용을 갖고 오신 예수의 생애를, 그런 심정을 갖고 오신 예수의 생명을, 그런 내용을 갖고 오신 예수의 사랑의 심정을 인간 중에 어느 누구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께서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고 탄식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기반으로 하신 말씀인가. 오늘날 세상의 어떤 주의나 사상, 혹은 어떤 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혹은 자신의 가정적인, 어떠한 정적인, 인정적인 기반을 중심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은 제도를 생각하면서, 그 새로운 제도권 내에서 즐길 수 있는 생명의 실체를 꿈꾸면서, 나아가 그 실체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때를 그리는 심정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는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지극히 외로운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세상과 정반대, 세상과 180도 반대 방향의 내적인 심정과 세계관을 갖고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머무르던 장소도 원수의 땅이요, 그가 살던 생활 환경도 원수의 환경이었고, 그가 지배받던 주권도 원수의 주권이었고, 그가 사랑을 찾고자 하는 곳도 원수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움직이는 데는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딪치는 것마다 원수였습니다, 원수.
그런 가운데서 하늘의 생명적인 기반을 세워 놓고 하늘 대신 개방운동을 해야 할 책임을 짊어진 예수, 하늘의 영원한 이념적인 기반을 세워 놓고 그 이념을 중심삼고 혁명을 일으켜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어서 만민을 구원한 졸장부 예수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억천 만민의 심정 심정과 양심을 꿰뚫어 가지고 예수가 우하면 그들도 우하고 예수가 좌하면 그들도 좌할 수 있는 운동을 일으키려 했던 예수였습니다. 예수의 관심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개방역사를 규합시킬 수 있는 내용과 기준
하늘은 개방운동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대도 개방, 역사도 개방, 이 세계의 모든 주의나 사상도 개방, 종교도 개방, 이 모든 것을 개방시켜 놓고 무엇으로 이것을 규합시킬 것이냐? 인간 세상에 없었던 하나의 심정으로 규합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인간이 타락의 인연에서 빚어진 인종인 연고로 그릇된 관계의 세계를 타파시키는 역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예수께서 과거에 주창하신 것과 같이 나의 부모, 나의 자식이, 즉 부자지관계가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 부부, 네 가정 자체가 원수라 하셨거늘, 오늘날 가족을 단위로 사회적인 형태를 보세요. 부자지관계의 의리가 깨져 나갑니다. 그렇지 않아요?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부의 의리가 깨져 나갑니다. 가정적인 의리가 깨져 나갑니다. 인간들이 제창하던 윤리 도덕도 깨져 나갑니다. 종교의 교리도 깨져 나갑니다. 그리하여 이것인지 저것인지 알 수 없는 시대에 봉착했습니다. 다 흔들렸어요.
이런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낙망하고 탄식해야 할 입장에서 ‘아버지여, 어서 이런 시대가 오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무리가 삼천만 민족 가운데에서 나타나야만 되겠습니다. ‘어서 그런 시대를 만들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께서 선언하신 말씀이 자동적으로 그 외적인 형태나마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고? 어차피 지나가야 할 역사요, 지나가 버려야 할 정적인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께서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정을 품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습니다. 천정을 대신하여 우리 신도들을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끝날 이 시대에 전세계 인류는 무엇을 느껴야 될 것인고? 하나님께서는 개방운동을 펴셔서 역사도, 종교도, 우리의 가정적인 기반도 개방하셨거늘, 이제 이것을 규합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은 무엇일 것인고? 그것을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앞에 만물을 주관하라는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인간의 주관권 내에서 움직일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세계는 인간들이 주관할 수 있는 세계 형태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복귀한다고 말하였으니, 복귀하는 데는 하나님으로부터 복귀할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부터 복귀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가정복귀로 들어가 형제를 복귀하고 부모까지 복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예수를 대신할 수 있고 예수께서 제창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정적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체를 그리워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한 자체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여기에 수많은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적인 세계는 두 사람이 주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움직이고 있는 사회역사, 이 모두를 총합하여 역사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민족, 시대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민족, 종교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민족, 그 가운데에서 그러한 주의와 사상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것을 벌려 놓고 수습해 나오시는데 여기에 하나의 중심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4천년 역사를 벌려 놓고 그것을 다시 수습하기 위한 대표적인 사명자로 오셨던 분이 예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6천년 역사의 모든 것을 벌려 놓고 다시 수습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재림주라 하였거늘, 그 재림주는 어떠한 주의 사상을 갖고 오실 것인고? 심정주의사상을 갖고 오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상주의시대 이전까지는 진리주의시대였습니다. 어떤 철학적인 기반이라든가 어떤 지식적인 기준을 갖고 사회를 지도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상주의시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철학적인 기반에서 움직이고 있으되 그것도 사상권 내에서 서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이 갖고 오실 내용과 그 역할
그 다음에 이 사상주의시대가 지나고 인간이 요구하는 최후의 시대는 정적인 주의시대입니다. 인정이 아니라 천정을 통할 수 있는 정적인 주의시대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잘났다고 하는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런 시대가 와야만 역사는 해결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적 종말시대가 온다 할진대, 종교이념을 지닌 세계적 종교를 헤아려 보면 기독교가 이것을 잘 간파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기독교의 정적인 기반은 무엇인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여 신랑 신부의 횡적인 관계를 세운 그 주의,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라 하여 부자 관계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그 주의, 만민이 형제라 하여 온 세계 인류를 형제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그 주의, 그것은 관념주의가 아니라 양심을 넘어선 정적인 주의입니다. 이 시대가 천정을 통할 수 있는 천주주의시대인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의 온전한 것을 찾기 위하여, 완전한 하나가 나오게 하기 위하여 거짓된 것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부패하는 듯하다가 새로운 혁명의 깃발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가 분열되는 듯하다가 내적으로 통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세계가 반드시 올 것이어늘, 이러한 세계가 전체로 오는 동시에 개체로 올 것이어늘, 문제는 전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를 존중시하는 우리의 관념, 나에 대한 관념이 문제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은 여러분을 대해 어떤 주의, 어떤 종교, 어떤 역사적인 사조,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여러분이 ‘아버지여!’ 하고 나타나는 데는 옛날에 이스라엘 선민을 대하여 주장하고 나선 예수와 같이 ‘화평케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고 할 수 있는, 또 그런 자신을 갖고 늠름한 모습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늘을 더 사랑하라.’고 하며 나타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해방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역사도 해방, 종교도 해방, 심정세계도 해방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주의와 사상과 이념을 대신한 새로운 이념, 지금까지의 생활 환경에서 갖고 있던 생명력을 대신한 새로운 생명력, 이 생명력과 이념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사탄세계에 오셨던 연고로 그 시대에 환영받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어떤 친구나 동조자를 가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몰림받은 예수요, 혈혈단신 십자가까지 넘어가신 예수였습니다. 하늘을 대표하여 오신 분이었지만 원수의 땅 사탄세계에 오셨기에 사탄세계의 원수였습니다. 원수를 환영할 수 있어요? 원수를 환영하는 것, 그것은 거짓입니다.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그 사회를 반대하는 어떤 대표자가 나오면, 공산사회에서 그 사회를 반대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의를 갖고 나오면, 기독교 사회에서도 그 기독교의 사상으로부터 반대를 받을 어떤 주의를 갖고 나오면, 심정세계의 어떠한 주의를 갖고 나오면 모든 인간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시대가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를 해결하고 시대와 미래를 해결하고 천륜을 해결지을 수 있는 것은 오늘날 기성적인 세계 형태가 아닙니다. 여기에 반대받는 새로운 형태, 우리의 양심을 넘어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내용, 인륜 도덕을 초월하여 천륜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새로운 형태라야 되는 것입니다. 기성 관점에서 기성 논법을 변증하려는 논리 말고 기성논법을 새로운 논법에 융합시키고 화하게 할 수 있는 논리적인 내용을 갖춘 주의라야 합니다. 양심을 가진 천만인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 앞에 그런 말씀을 전하고 그런 이념을 소개하면, 오늘날 그들의 양심 방향을 180도 돌릴 수 있고 양심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이념뿐만 아니라 그 양심이 돌아선 후에는 그 양심을 꿰뚫고 있는 천정이 우리 마음과 영원히 갈라질 수 없는 정적인 인연을 맺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주의, 하나의 이념이 나타나면 마지막 시대입니다.
예수의 신랑 신부의 이념과 하나님의 사랑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무지한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제창하기를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신랑 신부, 오늘날 세상에서 말하는 남녀의 정적인 이념 이상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양심의 방향과 정적인 이런 움직임이 하늘을 대하여 움직일 수 있는 자리에서부터 역사는 새로운 관문을 거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정도까지 개방시켜야만 하늘의 일이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 과정에서 정적인 문제는 혁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2천년 전에 주장하시기를 ‘어미나 자식이나 누구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면 더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그 내용은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내용을 찾고자 하는 때가 우리의 소망의 때요, 재림의 때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말씀은 하셨으나 말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그 내용이나 주의 사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것이 나타나는 날에는 세계는 평화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은 양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주관하지 못하십니다. 여러분이 양심을 가진 선한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마음대로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정적인 인연을 맺었다 할진대는 얼마든지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의 타락은 양심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것이 타락입니다. 그러니 양심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정적인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늘의 원한이 풀리고 복귀섭리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 인류 앞에 나타나야만 하늘을 대신한 인류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주의와 사상, 그런 종교적인 이념을 실천해야만 하나님께서 이 땅 위의 모든 만물권에까지도 운행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분파적인 종교는 추방해야 합니다. 통일교회 이전에도 종교란 명사는 무수하게 많았습니다. 우리는 교파의 탈을 벗겨 버리고 형태적인 교회를 없애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적인 교회, 개인적인 교회를 고대하십니다. 만물권까지도 선의 성전, 지성소가 되어 자유자재로 운행하실 수 있게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런 동산을 바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인간이 가진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이 결합된 인연을 잃어버린 것이 타락인 연고로, 그러한 인연을 맺으려 하는 것이 하늘의 복귀섭리요 인간의 소망의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섭리와 소망의 대표로 오신 예수는 자신을 신랑이요 우리를 신부라 하셨습니다. 그런 경지를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여러분에게 신랑 신부 이상의 감정과 충격과 흠모와 사모의 심정으로 하늘을 중심삼고 체휼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엇이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못 넘어갑니다.
이렇게 개방시켜 나온 인류 앞에 하늘은 다시 무엇을 내놓으려 하시는가? 지금까지의 역사는 인간의 사랑이란 두 글자로 메꾸어 나왔습니다. 이것을 깨쳐 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란 두 글자로 메꾸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여러분의 사랑의 감정은 그것이 존재세계 전체의 감정을 총합한 것임을 느꼈을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의 감정이란 것은 존재세계 전체의 의식을 총합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그 순간은 존재세계 전체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가치를 가진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경지는 개체가 전체, 전체가 개체를 통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영계는 이런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초자연적인 인식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그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태양 빛을 중심삼고 만물이 그 빛을 흠모하여 방향을 돌리는 것과 마찬 가지로, 어느 누구든지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정적인 기반을 갖고 나타나면 그 앞에 만민이 머리 숙일 것입니다. 그런 때가 반드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건을 제시하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였습니다. 그 예수께서 돌아 가셨기 때문에 정적인 인연의 기준을 지상에 내놓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탄식이며 하나님의 6천년 원한이요, 예수의 2천년 원한입니다. 그래서 이 원한을 해원성취할 수 있는 한 날을 바라보고 나오는 것이 6천년 섭리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때가 그렇고, 개방역사를 규합하시려는 하늘의 뜻이 있다 할진대, 타락된 우리는 ‘하나님이여! 당신의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교파, 당신이 좋아하는 종,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딸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기도해 봐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이 시대에 몰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늘은 알파요 오메가라 했으니 형태가 작고 크고 차이는 있을망정 처음과 끝이 같은 모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실 때 느끼셨던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야 됩니다. 그가 하나님 대신자입니다.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면서 만민을 대하여, 이스라엘 선민을 대하여 슬퍼하신 하늘을 붙들고 역사를 대신하여 울어줄 줄 아는, 그런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심정의 소유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망권 내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모르고 헤매고 있는 인류를 바라보고 그 시대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같은 심정을 느끼고 자기 몸 둘 바를 몰라하며 하늘 대해 애달피 축원하던 무리, 참다운 양떼들이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자기 위신이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고 허덕이는 심정을 가졌던 무리는 그 시대에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하늘 역사가 그렇거늘, 개방과 더불어 다시 규합해 들어가는 종말시대에 하늘의 심정과 통하고자 하는 심정이 아무리 갈급하다 하더라도 심정을 통하는데는 대번에 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심정을 잃어버릴 때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몸뚱이를 잃어버렸습니다. 몸뚱이를 잃어버린 이 후에 하나님의 사랑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엉클어졌던 모든 것이 풀어지려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에, 본성에, 본정에, 양심 깊이 숨어 있는 심정에까지 미치어 영원히 영원히 움직여 나가게 할 수 있는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양심을 놓고 양심 가운데 숨어 있는 심정을 일으켜 하늘의 사랑을 흠모할 수 있는, 이런 내적 능력을 갖춘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지금까지의 어떤 주의, 어떤 사상, 어떤 관념적인 인식까지도 일시에 무너뜨려 버리고 새로운 심정이 우러나와 천적인 일을 하겠다고 할 수 있는 이런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가 있고 기독교가 있는데,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해야 할 일은 그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영원히 붙들리게 할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과 화합한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세계와는 인연맺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와 인연 맺어야만 그 생활이나 심정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하나의 인격을 갖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것 아니에요. 좋지도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것 같아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랑 신부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외적인 말씀이요 편지와 같은 것입니다, 편지. 지금까지의 종교는 양심종교였습니다. 심정종교가 아니었어요. 심정적인 표적은 세워 놓았으나 심정적인 내용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양심적인 형태요 약속의 편지였어요. 그러니 이 편지 말씀의 내용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그 말씀에 영원히 취할 수 있는 심정의 말씀, 그 말씀을 그리워하고, 그 말씀과 더불어 즐기고, 그 말씀과 더불어 사랑하고, 그 말씀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런 내용의 말씀은 없을 것인가 찾아봐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아버지의 말씀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만우주를 대신하고 하늘이 부정할 수 없는, 예수께서 신부라고 아니할 수 없는 실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천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제 여러분이 믿고 있는 성경 말씀을 모르겠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말로만 알지 심정적으로는 모르겠다, 관념적으로는 예수를 알지만 체휼적으로는 모르겠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래 가지고는 예수와 하등의 관계가 없어요.
오늘 이 때를 말하기를, ‘찾아야 할 때’라고 하였습니다. ‘구해야 할 때’ ‘문을 두드려야 할 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높은 벽돌집이나 넓은 문을 왕래하면서 찾기를 수십년 했지만 못 찾았습니다. 그러니 반대 방향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늘은 뒤에서 우리를 밀어주며 나오는 것입니다. 마주쳐 옵니다, 마주쳐 와요. 그래서 하늘은 선한 사람을 끌어다가 악한 세상으로 몰아내는 거예요. 핍박받는 무리에게 하늘의 새로운 역사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무리가 통일교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온 사람들은 ‘에이, 통일교회 저저 에이….’ 그럴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나름대로 생각하세요.
앞으로 이 세계의 종말시대에는 공산주의도 반대하고 민주주의도 반대하는 어떠한 이념을 가진 주의나 사상이 나와야 됩니다. 기필코 나와야 돼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합동작전을 하여 ‘저 주의를 몰아내자.’ 또 교파나 종파, 무슨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하여 40여파가 있는데 전부 통합하여 ‘그 하나의 단체를 몰아내자, 그 하나의 움직임을 몰아내자.’ 하는 하나의 주의나 사상이 역사의 종말시대에 나타나야만이 새로운 역사는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의 주의나 사상이 나타나면 거기에 가고 싶고, 있고 싶고, 살고 싶은 감정이 여러분의 마음에 우러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보고 싶은 감정, 움직이고, 살고 싶은 감정이 우러나고 또 말하는 것, 사는 것에서 그럴 수 있는 감정이 유발되어 나온다면, 그것이 나타나는 그곳은 인류역사의 최종점일 것입니다. 최종의 주의일 것입니다. 심정의 내용을 소개할 수 있는 최종적이고 역사적인 것일 것입니다. 엉클어졌던 모든 것을 개방시키고 그것을 다시 규합시켜 하나의 심정과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생명체에 결부시킨 하나의 인격자, 그 이념에 의한 하나의 세계관, 그 심정을 노래할 수 있는 만우주를 화동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의나 사상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개방시켜 나오신 하나님의 전체의 뜻이 비로소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안식할 수 있고, 하늘이 안식하므로 만민이 안식하고 역사도 안정점을 잡아 새로운 시대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하늘의 역사노정은 푸는 역사노정인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의 몸과 저희의 마음에는 식욕과 정욕과 탐욕이 있는 것을 아옵고, 수면욕도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러한 것들을 가진 인간을 중심삼고 하늘이 역사 노정에서 섭리하시고자 얼마나 많이 허덕이셨던가를 생각할 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되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푸는 역사노정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탄들은 반대로 얽어매기 위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푸는 역사라고 말했으나 반대의 세계에서는 얽어매는, 다시 새로운 곳으로 못 나가게 하기 위하여 얽어매는 역사의 일면도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매기 위한 슬픔의 역사와 풀기 위한 기쁨의 역사가 교차되는 환경에 처해 있는 저희들, 몸은 매기를 고대하고 마음은 풀기를 고대하는 탄식권 내에 있는 저희들, 이 마음을 들어 몸을 쳐서, 몸이 마음 앞에 굴복하는 기쁨의 한 시간을 가져야 할 슬픈 역사의 종점을 바라보고 있는 저희들, 이런 경지에 있는 자신들임을 망각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이런 천운권 내(天運圈內)에 있는 자신들임을 망각지 말게 하여 주시오며, 이런 복귀섭리의 해원 과정에 들어서 있는 자신들임을 잊어버리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아버님이여! 참으로 오랫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하나의 사상을 중심삼고 얽어매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으며, 하나의 이념을 예고시켜 민족 민족을 움직이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또한 이것을 외적으로 세워 놓고 내적으로는 역사의 배후에서 이것을 생명적인 선의 기준과 연결시키기 위해 종교를 세워 놓고 그 종교를 움직여 나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까? 안팎으로 희생자를 내면서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오늘 이렇게 개방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저희들의 마음, 듣고 알고 깨닫고 보니 황공하고 망극하옵니다.
아버님이여! 본연의 실체의 한 자체가 이렇게 원한의 역사를 개척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저희들, 죄악된 자들이요, 아버지의 수고 앞에 빚진 자들이요, 아버님 앞에 용납받고자 나서기에 말할 수 없이 민망스러운 자 들이온데, 이런 환경을 모르고 도리어 하늘을 배반하기를 일삼았고, 하늘은 풀고자 하시는데 매기를 몇천만 번,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들의 마음이 무엇에 매어지기를 바라고 있사옵니까? 이들의 몸이 무엇에 매어지기를 바라고 있사옵니까? 오늘날 아버님이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념에 매어지기를 바라는 자들도 있사옵고, 주의나 사상, 혹은 인륜 도덕에 자기의 양심과 몸이 매어지기를 원하는 자들도 있사오나, 본성을 통하여 헤아려 보면 그들은 영원히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는 서글픈 환경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옵니다.
이러한 노정을 앞두고 나아가는 인류 가운데에는 자기도 모르게 스며드는 초조와 불안과 서글픔의 심정을 체휼한 자들이 많사오나 그것을 막을 자가 없사오니, 아버지, 역사와 더불어, 때와 더불어, 주의와 더불어 즐거워하지 못하고, 생의 원칙을 모르고, 생의 방향을 모르고, 생의 노정을 모르고, 생의 목적을 모르고 허덕이는 인류를 누가 책임져 주겠습니까?
아버지, 참다운 청년 남녀들을 불러 삼천만 민중 앞에 세워 주시옵소서. 몰리고 맞는 저희들의 인연이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남다른 길로 몰아내신 아버지의 섭리의 손길에, 수고의 손길에 역사의 피어린 자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역사적인 슬픔의 자리를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고, 역사적인 핍박과 과정과 역사적인 죽음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말씀을 이루어야 될 것이요, 나를 위하여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때가 온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오늘 저희들은 남이 아니라 하는 길을 걷고 있사옵니다. 맞고 맞으면서 막고 막는 수많은 담을 밀고 넘고 나와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슬픈 심정을 붙들 줄 알고 슬픈 사정을 붙들 줄 아는 천정과의 인연을 가졌다 할진대, 그 인연을 통하여 서로 존중하고 서로 생각하는 마음이 커서 세상에 있을 수 없는 하나의 천적인 인연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희들은 그 인연이 이 땅 위에 처음 나타나는 인연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저희들 끼리끼리 서로 풀어야 되겠습니다. 맺힘이 있다 할진대 푸는 것이 역사노정의 원칙인 연고로, 예수는 원수를 대하여 맺힌 원한의 심정을 나타낼 수 있는 자리에서 원수 대하여 풀려 하셨기에, 원수 세계를 푸는 해원의 동산을 건설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늘도 이 일을 기뻐하시어 예수를 부활의 자리에 내세우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민족 앞에 배척받고 민족이 원수의 자리에 선다 해도 그 민족을 원수시하는 저희들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계가 저희들을 반대한다 하더라도 원수시하지 말고 그들 앞에 개방된 하늘의 심정만을 남겨 놓기 위하여 원수의 심정을 넘어설 수 있는 천적인 심정의 소유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천적인 생명의 지도자가 되게 하여 주시오며, 생명의 주권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모인 당신의 아들딸의 몸 마음에 역사적인 서글픔을 느끼는 대신 역사의 해원 기준을 찾을 수 있는 심정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영광의 은사, 영광의 생명, 영광의 이념, 영광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으며, 우주 전체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으며, 이념의 세계에서 하늘을 대신한 내 개체성을 존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저희의 영광의 가치, 절대적인 가치를 만물 만상 앞에, 사탄 앞에 내어 보여 자랑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