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3장 통일교, 세계로 뻗어나가다 8. 종교자유를 향한 거대한 프로젝트 문선명이 수감된 교도소는 그다지 삼엄한 곳은 아니었다. 건물 주변에는 벽도 없었고,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있을 뿐이었다. 다른 교도소보다 훨씬 나은 환경이었지만 엄연한 교도소였다. 재소자들은 2개의 간이침대가 있는 개방된 정육각형 감방에서 잠을 잤다. 홀수 날에는 면회실에서 방문자들을 만났으며 그 외의 날에는 화장실을 청소하거나 식당을 청소하는 등의 노역을 했다. 문선명은 감옥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표현대로 감옥은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지옥 중의 지옥이었다. 수감자들은 자신을 스스로 가두었고, 아주 더러운 환경, 언어 그리고 가치로 자신을 타락으로 떨어뜨렸다. 비하, 나약함, 불평, 분노, 착취가 만연했다. 북한에서 수감 생활을 한 이래로 문선명은 결코 감옥에서 불평하지 않았다. 겉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조차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항상 감방을 비롯해 화장실과 식당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심지어 자신이 맡은 노역이 아닌 일들을 했고, 마루를 걸레질하고, 널려 있는 담배꽁초들을 열심히 주웠다. 감옥 곳곳을 다니며 매일 청소하는 문선명을 지켜본 사람들은 차츰 존경심을 갖게 됐고 함께 이야기도 나누었다. 어느 날 문선명이 성경을 읽고 있을 때 한 재소자가 다가와 포르노 잡지를 던지고는 "이것이 나의 성경이야"라며 조롱했다. 후에 그는 친구가 됐다. 가미야마와 문선명에게 주어진 일들 중 하나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두 사람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했다. 재소자들이 식사를 하는 때면 밖으로 나가 첫 햇살을 맞았다.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문선명이 감옥에 있는 동안 한학자 총재는 반석과 같았다. 사람들은 한 총재가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녔으며, 결단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선명이 입감된 지 3일째 되던 1984년 7월 22일, 첫 번째 주일 설교를 했다.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이 날을 기억하기 위해 함께 금식하자고 제안했다. 문선명은 아내와 통화하면서 곧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특히 문선명을 감옥에 보내고 통일교 신도들을 짓밟으려 했던 이들에게는 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문선명이 감옥에 수감된 뒤 7천 명의 기독교 성직자들과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자유를 침해했다며 미국 정부를 비난하고 문선명을 석방시키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 중에는 미국 보수교단을 대표하는 제리 폴웰(Jerry Fallwell) 목사와 진보 계열의 조셉 라우리(Joseph E. Lowery) 박사도 있었다. 후에 라우리 박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축도를 했다. 이들은 문선명을 구명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 무고하게 옥중생활을 하는 문선명과 고난을 함께하자는 뜻에서 동고회가 조직되었다. 기독교 성직자들은 일주일 동안 수차례에 걸쳐 동고회에 참석했다. 모임이 끝날 때마다 많은 이들이 문선명을 위로 하기 위해 교도소를 방문했다. 하지만 문선명은 위로 받기를 원치 않았으며 종교자유는 결코 침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30만 명에 이르는 기독교 목사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편지와 자료를 보냈다. 편지와 함께 보낸 자료는 「원리」에 관한 비디오테이프 3개, 통일운동을 소개하는 책 자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제목의 문선명의 연설을 담은 책 등이었다. 이것은 45명이 몇 달에 걸쳐 완료한 아주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자료의 무게는 총 500톤이 넘었고, 미국 곳곳의 공직자들에게 전해졌다. 이 프로젝트는 1985년 2월에 완료됐다. 문선명은 편지에서 하나님의 뜻과 종교자유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중 일부를 발췌해서 싣는다. 친애하는 우드 목사님께 코네티컷 댄버리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실한 마음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이것은 아마도 옥중에 있는 한 성직자로부터 받은 첫 번째 서신일 것입니다. 이 편지가 문선명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 목사님이 편지를 끝까지 읽는 데는 많은 관용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국세청은 제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탈세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정부의 관계에서 위험한 선례를 만든 것입니다. 법무부는 판사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 배심원들에 의한 재판을 받도록 강제했습니다. 배심원들은 언론으로부터 저를 반대하는 잘못된 정보의 홍수 속에 방치되어 있었고, 세금 관련 사건의 복잡성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게 함으로써 미국 국세청은 미국 헌법 수정 제1조에 의해 그들이 금기해온 일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 내에 있는 모든 종교단체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는 위험한 선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신생 종단의 지도자를 감옥으로 보낸다면 머지않아 기독교를 포함해 다른 종교단체의 지도자들에게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 목사님께 이 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개인적 종교권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우선시 하는 소명은 첫째, 전 세계의 기독교 교단을 하나로 만드는 것, 둘째, 가정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 셋째, 하나님을 중심으로 무신론적 물질주의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옥중에서 편지를 쓰며 저는 위대한 사도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그 역시 신앙을 이유로 오해를 받아 옥에 갇혔으며 옥중에서 신약성서에 기록된 서신을 썼습니다. 저는 여기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강하게 느껴왔습니다. 저는 지금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12절과 13절에 기록한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리라." 아시는 것처럼 저는 십대에 한국의 어느 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 뒤 공산주의 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거의 3년 동안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곳은 살아서 나온 자가 거의 없는 정말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로서 그곳에서 죽어가는 한국인들을 인도해 하나님과 예수님의 애통해 하시는 심정을 알게 했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끔찍한 시련 속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품었던 신앙이 오늘도 저를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우드 목사님! 지금 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서 제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것은 정말 저에게 명예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저를 이곳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시킨 이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당신께서도 알고 계시듯이 미국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면, 미국을 영적으로 소생시키기 위해서라면 저는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사옵니다. 부디 우드 목사의 심정을 더 빨리 움직여 주시옵고, 성령의 은사가 그를 더욱 강건하게 하시어 당신의 챔피언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1985년 8월 20일, 문선명은 댄버리 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꼭 13개월만이었다. 자유의 몸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출감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하나님과 자유의 만찬회'에는 무려 1,700여명이 세계 여러 곳에서 왔다. 문선명은 1년 넘게 교도소에 있었으나 꾸준히 운동을 하고 언제나 감사기도를 올렸기에 건강은 아주 좋았고 마음도 편안했다. 세계의 여러 지도자급 인사로부터 축하편지도 받았다. 또 미국과 캐나다에서 원주민들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는 국제 포우와우 소사이어티(International Pow-wow Society) 회장인 로버트 고퍼(Robert Gopher) 추장은 원주민들이 특별한 의식 때 사용하는 북을 선물로 주었다. 그 북은 하나님께 가장 헌신하고 모든 인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만찬회가 끝난 뒤 문선명은 참석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었다. 문선명의 설교 중 38개를 엄선해서 실은 「하나님의 뜻과 세계」라는 문집이었다. 먼 길을 수고롭게 와준 그들에게 문선명이 선물해 줄 수 있는 것은 금은보화나 값비싼 장식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작은 책이었다. 그 이후 미국에서 통일교는 꾸준히 성장했으며 뉴욕, 워싱턴 뿐만 아니라 알래스카, 하와이 등에도 교회를 세웠다. 현재 미국은 세계선교의 거점으로서 그 역할을 맡고 있다. ● 남미 : 원시림에 심은 하나님의 꿈 1. 험난한 곳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다 문선명은 1970년대에 지구촌 거의 모든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고 또 자신이 직접 세계 순회를 했다. 남미 역시 많은 선교사들이 맨몸으로 건너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남미 여러 곳에서도 통일교회가 들어섰다. 특히 남미는 1990년대 들어 카우사(CAUSA: Confederation of Associations for Unification of Societies of Americas, 남북미통일연합)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문선명은 1991년 봄 남미를 방문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브라질이었다. 그리고 4월 24~27일까지 우루과이를 찾았다. 방문의 주된 목적은 4월 27일 1,000명의 청중 앞에서 카우사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문선명은 여러 선교사들과 카우사 지도자들, 언론인들 그리고 우루과이 정부 대표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서 신문을 창간하고, 인쇄회사를 인수하고, 복합 컨벤션센터를 건설하는 일을 협의했다. 가톨릭 신자인 라카예(Luis Alberto Lacalle) 대통령은 문선명 부부를 초대해 집무실에서 1시간 이상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 날인 4월 27일, 복합컨벤션센터 준공식이 열렸다. TV와 라디오, 신문기사들을 비롯해 대통령 부부, 정부 각료들, 중앙은행 총재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행사 후 문선명은 빅토리아플라자 호텔로 700여 명의 손님들을 초대해 '참사랑의 전통과 그 전통을 상속받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본인은 이전보다 더욱더 라틴아메리카가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평화롭고 번영하는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본인은 하나만으로부터 이러한 목적을 완수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고 죽음의 고비를 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늘의 천명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참부모의 심정으로 인종의 울타리를 넘어 전 세계인들을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과 평화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 각자가 모든 것을 헌신하기를 소망하십니다." 우루과이를 떠난 후 문선명은 몇 년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한국과 알래스카, 미국과 캐나다 등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했고 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도 만났다. 몇 차례의 국제축복결혼식도 거행했다. 1992년에는 처음으로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남미에 대한 연민과 숙제가 남아 있었다. 그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4년 12월, 다시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하여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남미 섭리를 시작했다. 그때 만 75세였으나 의욕적으로 일을 했다.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에서 문선명이 할 일은 참으로 많았다. 이후 20년 동안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강연을 하고, 산업을 일으키고, 개간을 하고, 개척을 했다. 또 교육과 주요 선언도 여러 차례 했다. 울창한 밀림,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거대한 습지에 뿌린 이러한 씨앗들은 나날이 커져 훗날 큰 열매를 맺었다. 그중 하나는 브라질에 새소망농장을 세운 것이다. 1996년 8월 브라질 서부에 있는 판타날의 자르딘에 새로운 농장을 설립했다. 문선명은 그곳을 뉴욕의 이스트가든과 비교해 '새소망 이스트가든(New Hope East Garden)'이라 명명했다. 농장이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나 사진에 나오는 멋지고 낭만적인 곳을 떠올리지만 새소망농장은 그런 곳이 아니라 광활하고 척박한 대지였다. 판타날 지역은 수천 만 평의 땅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수천 년 동안 내려온 곳이다. 드문드문 가난한 마을이 있고 거친 강과 끝을 모르는 습지가 가득하다. 길이라 해봤자 사람 한 명이 겨우 다닐 수 있는 구불탕거리는 진흙길이 전부였다. 그런 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태고의 자연과 더불어 살기는 하지만 사는 형편은 아주 척박했다. 반면 자연환경은 세계 어느 곳보다 아름다웠다. 울창한 아름드리나무에는 앵무새와 마코앵무새가 살고 오리, 하얀 브라민 암소, 긴코너구리 등의 야생동물들이 뛰어다녔다. 또 사람들이 기르는 개와 고양이도 아주 많았다. 해거름이 되면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고 개구리 우는 소리가 밤새 귀를 때렸다. 온갖 파충류와 양서류, 곤충들은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진귀한 동물들과 식물들 덕분에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세계를 볼 수 있어 경이롭기는 했으나 험난한 자연을 견디어내기엔 인간은 너무 미약했다. 특히 모기는 악다구니처럼 달려들어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문선명은 바로 그 원시의 터전에 농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세계 여러 곳에서 달려온 신도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마을을 건설해 나갔다. 우선 대나무를 이용해 비를 피할 수 있는 오두막을 짓고 길을 넓히기 시작했다. 포클레인이나 전기톱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다. 그저 삽이나 곡괭이 등으로 땅을 파고 나무들을 일일이 톱과 도끼로 잘라 집을 지어나갔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아스팔트 도로가 만들어졌고 건물도 몇 채 지었다. 원시부족 마을이 환한 불빛으로 반짝이는 아담한 마을로 변모했다. 1,000명이 함께 머물 수 있는 숙소와 욕실도 마련되었다. 또 대규모 식당도 만들었다. 1,200석 규모의 아름다운 수련소도 지었다. 그곳에서 수련회도 열고 특별 모임도 할 수 있도록 했다. 건물들을 짓고 길을 내면서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작은 건물 하나라도 왜 그곳에 지어야 하며, 어떤 모습이 되어야 자연을 보존하면서 인간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 문선명에게 사람들은 왜 남의 나라 오지에 가서 농장을 짓고 돈을 들여 건물을 짓느냐고 물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인가?혹은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서인가? 문선명이 자르딘에서 마을을 개척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교육이었다. 문선명은 수련소 뒤에 현대식 건물을 6채나 지었다. 그것은 전부 학교였으며 판타날 지역의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모든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했다. 문선명은 그곳에서 전 세계의 축복가정들을 불러들여 40일 수련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수련회 주제는 '세계평화이상 가정교육'이었다. 수련회에 참석한 신도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다시 전수 받았고, 멀어졌던 부부의 사랑도 확인했다. 교육만 받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들을 위한 봉사활동, 타조 기르기, 달팽이 농장에서 일하기, 아마존 강에서 낚시하기 등 다양한 체험을 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가족의 가치가 소중하다는 것도 아울러 깨달았다. 그때 문선명은 남미 섭리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르딘은 불편한 곳입니다. 다시 가고 싶은 않은 곳이지요. 그러나 어떤 곳보다 더 그리워해야 합니다. 자르딘은 원초지입니다. 창조물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처럼 모여 있는 곳이지요. 원초물이 서식하는 이곳에 와서 3년 이상 피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물 가운데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파괴된 것들을 복귀시키고 옛날에 멸종됐던 종자를 다시 살려내 세계에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박물관도 만들고, 곤충박물관도 만들어야 합니다. 새만 해도 1,500종류가 넘고, 곤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걸 만들어 놓으면 세계 사람 모두 아들딸의 교육장소로 방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고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자르딘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자르딘은 에덴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셨고 아담이 살던 세계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물을 사랑했다(사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바다의 사나이"라고 말해도 무방했다). 자르딘을 흐르는 강 400km 안팎을 조사해서 무슨 물고기가 살고 있는지 전부 알아냈다. 억센 모기를 쏘이면서 조사했는데 돈이나 명예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 일을 했다. 강에 사는 물고기들을 일일이 조사해서 이것은 먹을 수 있는 고기, 저것은 먹을 수 없는 고기라는 것을 알려주고 또 잡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또 자르딘에 풍부한 물고기들을 보고 생선 파우더 공장을 고안했다. 물고기를 잡아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식량으로 사용하는 것을 연구했다. 또 다른 식량계획으로 자르딘의 광활한 평야에 콩 심고, 옥수수 심고, 만추카 심고, 무슨 곡식이든 심었다. 그 곡식들을 가루로 만들어 20배 확대한 식량으로 생산해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제공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