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신옥순(辛玉淳) - 두 세계에서 살다
2. 민족을 위해 살리라
1 16세 되던 해 3월에 나라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해보자고 결심하고 200리를 걸어서 서울 안국동 수성 국민학교 앞집에 살고 있는 교사 부부 이 씨네 집에 들어가서 집안일을 도우며 친딸처럼 귀염 받고 살았다.
2 그 후 반일 지하운동을 하는 청년단원들의 집에 들어가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제야 나의 꿈이 이뤄지는가’라고 잘 자지도 않고 밤낮 기도하며 그들에게 힘이 되려고 노력했다.
3 교회는 나가지 않고 하나님만 자꾸 불렀다. 그러다가 교회에 나가면 인생을 바로 살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같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가서도 자꾸 하나님만 부르니 주위에서 ‘이단, 사탄이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4 그런 말을 듣고 나서 ‘이단이기 때문에 내가 집에서 뛰쳐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즉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끊어져 버렸다. 생각을 고쳐먹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민족 앞에 덕망을 쌓을 수 있는 참된 사람이 될 것인가 하고 밤이면 혼자 생각하며 기도하였다.
5 얼마 후에 거기서 나와서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왔다 갔다 하니까 수상하게 보았던지 형사가 뒤따라 다니며 잡으려고 해서 다시 반년 만에 서울로 되돌아와 지하운동하는 청년들을 돕기 위해 장사를 했다. 장사라야 노상에 물건을 벌려 놓고 파는 노점상을 하였는데, 잡상인들을 심하게 단속하여 발붙일 곳이 없어서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6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의 20대 청년들을 징용으로 모조리 잡아갔다. 이러다가 우리나라에 남자가 한 명도 남을 것 같지 않아서 밤이면 잠도 자지 않고 창고 같은 곳에 들어가서 우리나라의 번영을 위하여 기도했다.
7 이미 결혼할 나이가 지나버린 내가 시집갈 생각은 안 하고 떠돌아다니니까 집에서는 아무래도 사람 하나 망치겠다고 걱정했던지 어머니가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나를 찾아오셨다. 할 수 없이 돈암동의 어느 집에까지 따라가서 앉아 있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8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나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을 당하셨던지 나의 신랑 될 사람을 미리 선보고 마음에 들어서 그 남자의 아버지에게 나를 보이려고 데리러 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도 모르게 그날 약혼을 하고 말았는데, 남자는 이기붕 씨의 사촌 동생으로서 집안이 부자였다.
9 20살 되던 해 6월 20일에 결혼을 하고 다음 해 6월에 첫 딸을 낳았다. 그런데 그 딸에게 사랑이 가지 않았다. ‘이미 큰 사람도 사람 노릇 못하고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데 자식을 낳으면 뭘 하느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여 아기에게 관심을 쏟지 않으니 어떻게 슬슬 앓다가 생후 8개월 만에 죽었다. 내 딸이 죽었는데도 슬프기는커녕 오히려 ‘이제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잘 됐다’고 춤을 추듯 기뻐하였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