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오직예수훈련원<교회/기도원/은사/능력/집회/기적/종말/환난/> 원문보기 글쓴이: 오직예수
슬픈 노래
에스겔 19장 1-14절
2012년 6월 3일 주일설교
설교자 : 곽노아 목사
뉴스를 들으니깐 우리나라 부채가 774조원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부채 국가입니다. 그런데도 엊그제 연후 때 도로들은 정체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였다고 합니다. 기름 값이 올라도 아랑곳 하지 않는 이 백성들입니다.
해외 여행객도 월 100만명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인천공항에 가보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에도 가보니깐 거의 한국 사람들뿐 이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 백성들은 분명히 경제 불감증에 빠져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마지막 때에 대한 무지함과 불감증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는 자들조차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바 없이 마찬가지로 불감증에 빠져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눈 앞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어려움이 잠간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시대의 불감증, 영적 불감증이 인간을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자로 만드는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무지한 자들을 향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슬픈 노래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그들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선포하는 노래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대 어디를 보아도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 또한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슬픈 기도와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 젊은 사자 비유를 통한 애가
(겔19:1-9) "너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2) 부르기를 네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3)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4)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5)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취하여 젊은 사자가 되게 하니 (6) 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 왕래하며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7) 그의 궁실들을 헐고 성읍들을 훼파하니 그 우는 소리로 인하여 땅과 그 가득한 것이 황무한지라 (8) 이방이 둘려 있는 지방에서 그를 치러 와서 그의 위에 그물을 치고 함정에 잡아 (9) 갈고리고 꿰고 철롱에 넣어 끌고 바벨론 왕에게 이르렀나니 그를 옥에 가두어서 그 소리로 다시 이스라엘 산에 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애가는 히브리어로 “퀴나”라고 하는데 죽은 자를 위하여 장례식에서 비탄조로 읆어지는 슬픈 노래입니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그런 마음과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슬픈 노래의 시작은 “네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라고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왜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는지 깨달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미 암사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요시야 왕의 부인이며 여호아하스 왕의 모친인 하무달을 가리킵니다.
(왕하23:31) “여호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삼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다시 말해서 여호아하스 모친 하무달이 어린 아들 뒤에서 나라를 섭정한 것입니다. 그 암사자가 새끼를 키워 젊은 사자로 키웠는데 어떻게 키었습니까?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젊은 사자는 식물 움키기를 배웠고, 사람을 삼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무달의 남편 요시야 왕은 31년 동안 남유다를 통치하면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의 정치를 보며 지낸 그의 아내 하무달은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한 정치를 한 요시야 왕의 모습을 아들에게 가르쳐야 하건만 그녀는 아들을 포악하고 군림하는 왕으로 가르쳤습니다. 4절에서 여호아하스 왕의 종말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에 남유다는 애굽의 속국이었습니다.
(왕하23:32-35)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33) 바로느고가 저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일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34) 바로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 (35)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저가 바로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국민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늑봉하였더라"
그러므로 4절의 말씀은 곧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5절에서 보면 암사자인 하무달은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끌려가자 다른 새끼 사자 하나를 젊은 사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물론 열왕기하 23장에 보면 애굽왕 바로가 남유다 왕을 세우지만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암사자에게 가르침 받은 아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을 주목해서 보시면 앞에서 하였던 말씀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아하스 왕은 요시야의 넷째 아들이었고(대상3:15) 다음으로 왕이 된 여호야김은 요시야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여호야김 역시 왕이 될 때 25세 였습니다.(왕하23:36)
3개월을 다스린 여호아하스 왕보다 여호야김은 11년 동안 왕노릇을 하였는데 여호야김 역시 모친의 영향으로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친이 여호아하스의 모친이 아닌 다른 여자였습니다.
(왕하23:36)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여호야김 왕이 11년 동안 얼마나 악한 왕이었는지 7절에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궁실들을 헐고 성읍들을 훼파하니 그 우는 소리로 인하여 땅과 그 가득한 것이 황무한지라"
(왕하24:4)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여호아하스나 여호야김이나 이렇게 악한 왕이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암사자 즉 그들의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던 므낫세 왕을 아시죠? 이사야를 톱으로 온 몸을 잘라 죽였던 왕이기도 한 므낫세도 그 모친이 영향을 받아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왕하21:1)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 오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12살 때 왕이 된 므낫세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므낫세 역시도 그 모친이 섭정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런 어머니에게서 모든 악한 것을 배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한 왕들이 모친에게 순종하고 배웠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당시에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선지자들의 말보다는 인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라를 다스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다스림 받기를 싫어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악한 영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고 내 생각과 판단과 수단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인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가 얼마나 깨닫게 하려고 울면서 목이 터져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왕들과 백성들은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하나님의 종들이 목이 터져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듣는 자들이 진실로 귀담아 듣고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까?
부모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가르침은 더욱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9절을 주목해서 보시면 남유다의 마지막을 하나님은 슬픈 노래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시드기야 왕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멸망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지금 바벨론에 끌려온 자들은 1차 2차 공격 때 포로로 잡혀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슬픈 노래를 그 누구보다도 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야김 때에 바벨론의 1차 공격이 시작되었고 시드기야 왕 시대에 2차 공격이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이 바벨론 1차 공격 때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는데 여호야긴 역시 모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왕하24:8) "여호야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느후스다라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18살의 왕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여호야긴 왕은 3개월 뿐이 왕노릇을 하지 못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세상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들과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습니다.
9절도 주목해서 보면 남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 왕의 마지막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와서 감옥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모든 것이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깨닫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눅17:26-30)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앞에서 잠간 해외 여행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여행 다니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해외에서 긁어대는 카드가 490만장 이라고 합니다. 불경기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마트나 백화점에 가보면 사람들이 붉적대는 것을 보게 되는데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 이러한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온통 빠져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외면하고 무시하고 살았기 때문에 비참한 멸망을 가져오고 말았듯이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을 외면하고 순종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결과는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는 멸망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슬픈 노래를 부르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법에도 굴복하지 아니한다" (롬8:7-8)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히11:6)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마음은 어떤 마음일가요? 예루살렘의 마지막처럼 하나님의 마음은 슬픈 마음일 것입니다.
나 한사람이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가 될 때 하늘에서 기쁜 찬송이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시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두 번째. 포도나무 가지를 통한 애가
(겔19:10-14) "네 피의 어미는 물 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실과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11) 그 가지들은 견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 만한데 그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서 뛰어나서 보이다가 (12) 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매 그 실과는 동풍에 마르고 그 견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탔더니 (13) 이제는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든 땅에 심긴바 되고 (14)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서 그 실과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만한 견강한 가지가 없도다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두 번째 슬픈 노래는 “네 피의 어미”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시작은 “물 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실과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포도나무 모습입니까?
비유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척박한 땅에서 옮겨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심으셨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강대하고 탁월한 국가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왕들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로 좋은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와 같이 계속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11절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가지들 중에 하나가 “키가 크고 굵은 가지 가운데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중에서 뛰어나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가지는 시드기야 왕을 의미하는데 다른 왕에 비해 그의 통치력이 탁월하다는 의미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시드기야의 교만과 악한 모습을 지적하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간곡한 말도 무시했고 외면하면서 교만하게 행동하였습니다.
9절에서도 시드기야 왕의 마지막을 예언하였지만 12절에도 다시 또한 시드기야 왕의 마지막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게 될 것이고 포도나무 실과는 동풍같은 바벨론 세력에 의해 마르게 될 것이고 포도나무 가지는 꺾이고 말라 불에 타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포도나무 같은 남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
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불에 타서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13-14절도 보세요.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 예루살렘은 더 이상 권세 잡은 자의 왕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14절 끝 절을 주목해 보세요.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의 슬픈 애가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예루살렘이 버림을 당하였습니까?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 또한 슬픈 애가 속에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한번 구원받았으므로 다 끝난 것이라고 알고 있고 가르치고 있다면 정말 불법을 행하고 있는 자입니다. 성경 어디에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처녀 비유를 보세요. 10명이 다 믿음을 상징하는 등을 가지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름 준비 못한 5명에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마25: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계시록 일곱 교회 중에서 두 교회에 주어진 말씀을 보겠습니다. 첫째 에베소서 교회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은 곧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둘째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예수님 입에서 통하여 내쳐버린다는 것은 곧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서 얼마든 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빌2: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모두 다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문은 결코 넓은 문이 아닙니다.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그런데 오늘날 구원이 바겐 세일화 되어 선포되고 있습니다. 구원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는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택함 받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 교회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자들에게 해당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성령으로 시작한 신앙을 육체로 마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세월이 갈수록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과 불의와 타협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배도가 분명하게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살후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즉 배도가 난무할 때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딤후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마지막 때에 사람들은 20여 가지를 즐기며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럴수 있는가?” 느끼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이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로 여러분에게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라는 말씀이 해당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때에 많은 자들이 이러한 애가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씀도 그렇지만 특별히 계시록의 말씀은 일곱 교회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즉 택한 자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때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슬픈 애가의 노래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는 나를 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날마다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날마다 내 영혼 속에 흐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떠나 살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들이 모두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어떤 노래를 부르며 사십니까? 누가 말했는지 모르지만 노래 부르는 가수들은 자기가 부른 노래대로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 볼 말입니다.
옛날 배호라는 가수는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르고 저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또 차중락이라는 가수는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이라는 부르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김정호 라는 가수도 “하얀 나비”를 부르고 하얗게 안개처럼 저 세상으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를 믿은 송대관은 “해뜰 날”을 부르고 쨍하고 돌아와서 지금도 활기차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믿은 태진아도 “동반자”를 부르면서 주님은 나의 동반자라는 마음으로 작사 작고하여 활기차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노래를 부르며 사시겠습니까? (시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고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신 것은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노래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 마음은 어떠실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슬픈 마음을 아니실까요?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라는 말씀이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무엇일가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단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나의 삶의 초점을 오직 그분에게 두고 살아간다면 기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엡5: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나를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일가?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그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직 예수 신앙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예수님 생각에 젖어서 살아간다면 나를 위한 인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날마다 기쁜 노래를 부르며 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삶의 목표를 오직 예수께 두고 힘들고 어려운 세성 속에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날마다 시간마다 오직 예수 신앙을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시32: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 오직 예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