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타보 "כי תבא"샤밭예배
신29:1-9(To), 계4(신약)
והיה כי תבא 베하야 키 타보
베하야는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목적이라고 하는 부분들이 하나님의 뜻, 아버지의 뜻, 목적은 베하야이다. 아버지의 모든 계획이 이미 이루어져 있다. 물론 수단도 다 베하야이다. 결과조차도 다 베하야이다. 이미 다 있는 것이다. 받은 줄로 믿으라.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미래도 이미 있는 것이다. 미래라고 하는 것이 지금 존재하지 않으면, 올 수가 없다. 존재해야 온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존재하고, 앞으로 올 것이다.
어떻게 과거가 앞으로 오게되느냐? 과거가 미래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과거를 통해서 살아낸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는 행동 모든 것은, 오고 있는 과거이다. 과거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 여러분들이 지금 있는 행동들은, 앞으로 과거가 되어서 미래에 나타날 것이다. 또 우리가 지금 하는 행동들은 미래의 것을 예측하고, 나타난다.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미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건물 안에 와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있는 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미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앉아서 이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미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 지금을 산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최소한 몇십년 내에 죽을 것이라는 미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결혼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결혼한다는 현재를 가져오는 것은, 미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어떻게 할지 모른다면, 우리는 뭘 할 수가 없다. 미래라는 것이 존재한다. 소망이라는 것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간다.
왜 놀란 토끼눈을 뜨고 저를 보시는가? 실제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런 것들을 그려내려고 한다.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하나, 미래가 과거에 영향을 미친다고는 생각을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가 과거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서로 붙어있어서, 언제나 동시에 존재한다. 모든 공간들은 동시에 또한 존재한다. 우리가 살아내는 모든 시간들은, 공간과 함께 세상으로 존재를 한다. 우리가 살아내는 모든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공간의 형태로 저장되어진다.
과거 - 현재 - 미래
목적 - 수단 - 결과
아버지 - 아들 - 성령
베하야라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모든 목적과 뜻이 다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목적과 뜻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의 길이 나온다. כי 키가 나온다. 그런데, 사실 이 목적과 수단, 길에서 결과가 나온다. 과거 현재 미래, 아버지 아들 성령은 에하드이다. 현재는 미래 속에 있고, 과거 속에 있어야 한다. 목적 속에 결과가 들어있지 않으면, 목적이 될 수 없다. 목적이 수단 속에 들어있지 않으면, 수단이 아닌 것이 된다. 아버지 속에 아들이 있고, 아들 속에 아버지가 있다.
사탄은 이 시간, 베하야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 이것을 거짓 아비라고 한다. 거짓 아비는 인간을 속인다. 이것은 늙은 왕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닮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은 아주 위대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위대한 선택은, 내 스스로를 제한하고, 내 스스로가 받는 존재가 아니라, 주는 존재가 되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는 중요한 이유이다. 가난하기 위해 이 땅에 온다. 받으려고 하지 않고 주려고 오기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하고, 가난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스스로 잃어버린다. 더 이상 아버지께 받지 않는다. 그리고 받으려고 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가난한 자로 이 땅에 오는데, 늙은 왕이 그런 우리를 속여서, 너는 받아야 산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속임 때문에, 받아서 살게 된다. 그런데 이 거짓 아비가 우리의 본성을 바꿔버렸는데, 우리의 본질, 본성, 우리는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고, 주는 시스템,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존재인데, 어떻게 우리의 본성을 바꿔버렸냐는 것이다. 그것을 시간이라고 한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느끼시기 바란다. 놀란 감독이 테넷이라는 영화를 만든 다음에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느끼라고 한다. 시간이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의 본성을 바꿔버린다. 우리의 본성은 영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일되어있고, 영원 속에서 미래를 보고, 과거를 보고, 현재를 산다. 사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강물 속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나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강물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우리는 현재라는 것이 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순간과 영원 속에서 산다.
케뎀 - 영원 - אין 에인(없음)
거짓 아비와 늙은 왕은 시간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데, 우리가 영원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는 케뎀이고, 우리의 현재는 영원이고, 우리의 미래라고 하는 것은 없음이다. 에인, 무이다. 그것이 우리 삶의 결과이다. 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다. 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끌어안기 위함이다. 모든 것이 내 안에 다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의 거짓 : 육체의 경험 - 지금의 내 감각이 느끼는 나 - 나의 성공
내가 산다고 하는 것은 다 미래이다. 내가 살려고, 그 미래 때문에, 미래에 이러이러한 나를 살려고 과거와 현재를 이용한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는 무엇인가? 내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내 안에 담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탄은 지금의 나를 현재라고 한다. 지금 육체를 가지고 있는 나, 이 육체를 현재라고 한다. 영원을 현재라고 하지 않고, 순간을 현재라고 하지 않고, 지금 내 감각이 인식하는 이 때를 현재라고 한다. 그리고 과거란, 아버지의 목적과 뜻이 아니라, 내 육체의 경험이라고 한다. 내가 과거에 받았던 상처, 거기서부터 끊임없이 현재가 결정되고, 미래란, 나의 성공, 자기 소유, 나의 있음,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나의 완전한 평화, 행복이 나의 미래이다.
그래서 현재는 과거의 경험에서 받은 모든 상처를 동원해서, 그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내 과거를 치유해서, 내가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주님은 네 과거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적이 없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보면, 주님이 참 희한한게, 상담을 한번도 안 하신다. 창녀가 왔다. 간음한 여자가 와서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데, 가서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말만 하고 보낼 수 있는가? 상담을 하면서, 치유를 해주고, 가서 죄 짓지 말아야지 하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이것이 거짓 아비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거짓 아비란, 시간이라는 것을 가지고선, 시간을 육체의 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시간이란, 결코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이 육체가 느끼는 것을 시간이라고 만들어논 다음에, 이런 패러다임을 만든다. 우리는 키 타보에 오면, 베하야 키 타보라고 하면서, 베하야라고 시작한다.
목적 : 베하야 = 케뎀
수단 : 키 = 수단
결과 : 타보 = 오는 것, You will come.
키 타보는 이 구조로 되어있다. 베하야가 성경에 122구절이 있는데, 이 숫자값은 레아브다브이다.
לעבדיו 레아브다브 : 그의 종들을 (가르칙디) 위하여
모든 베하야의 가르침들은 주님께서 그의 종들을 위해서 마련하신 것이다. 이것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의 종들을 가르치기 위하여이다. 뭘 가르치시기 원하신가? 열역학 제2법칙과 엔트로피의 법칙을 가르치기 원하시는게 아니다.
반드시 이 땅에서의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 어떤 경우에도 시간이 뒤로 가는 경우는 없다. 박스 안에 따뜻한 물을 넣으면 이 열이 나와서 물이 식게 된다. 이 물은 보존된다. 그런데 차가운 물을 넣는다고 따뜻하게 되지 않는다. 이것을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한다. 뜨거운 물은 식는데, 차가운 물이 거꾸로는 가지 않는다. 차가운 물은 뜨거워지지 않는다. 이것을 열역학 법칙이라고 한다.
과거 -> 미래
열역학 제2법칙 : 뜨거움 -> 차가움
이 원리로 치면,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무질서를 향해서 간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른다. 이 컵도 질서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얘도 부서진다. 소멸해간다. 모든 것은 그렇다. 여러분들이 앉은 의자도,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다 무질서를 향해서 간다.
질서 -> 무질서
이것이 마치 이렇게 정해진 것 같다. 이것이 바로 고전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 진리인 것 같다. 그런데, 이름을 왜 놀란이라고 지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놀랄만한 일이, 양자역학에서는 이게 바뀔 수 있다. 우리가 과거를 자신의 육체라고 놓아버리면, 이게 자기 자신이 신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버린다. 내가 시간을 사는데 있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미래에 의해서 과거를 살고, 미래에 의해서 현재를 사는 것을 할 수가 없다. 그냥 육체대로, 육체의 법칙대로 살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결국 현재는 나이고, 이 내가 또 미래의 어떤 내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나의 과거의 것들을 버리지 못한다. 여기서 내가 나왔기 때문이다. 또 내가 되어야 할 미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버리질 못한다.
불가능 -> 가능
변화하지 않는 것 -> 변화
베하야 키 타보에서는 그의 종들에게 주님이 뭘 가르치기 위함이냐면, 불가능한 것이 가능케 된다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변화한다. 주님이 이것을 가르치기 원하는 것이다. 시간의 육적 패러다임에서, 시간의 영적 패러다임으로 넘어오기 원하신다. 시간의 영적 패러다임으로 넘어오면, 과거-현재-미래는 에하드, 하나이다. 자유롭게 왔다갔다한다. 과거-현재-미래는 우리를 결코 사망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시간의 패러다임 속에서 질서가 무질서로 바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냥 אין 에인, 무이다. 개별에서 전체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체는 끊임없이 개별에 역사한다. 우리 주님은 끊임없이 개별에 역사한다. 불가능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을 불가능이라고 한다. 아직 시간이 오지 않은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변화시킬 수 있다.
키 타보에서 주님은 축복과 저주를 이야기한다. 이것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왜 축복과 저주가 필요한가? 그 종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왜 축복과 저주가 필요한가? 거짓 아비의 패러다임을 깨는데는 반드시 저주가 필요하다. 저주가 없으면, 사람은 이게 성공할 줄 안다. 저주가 있어야지, 이게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키 타보에서 저주를 통해서 우리를 놀라운 영원의 시간의 패러다임 속으로 집어넣는다. 죽지 않는 시간의 패러다임 속으로 집어넣는다 . 과거-현재-미래를 육체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가 과거-현재-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는 아버지-아들-성령이다. 내 시간을 중심으로 과거가 아니다. 그런 과거는 없다.
우리는 모두 나를 중심으로해서 과거를 세운다. 그런 과거는 없다. 우리는 미래도 나를 중심으로 해서 미래이다. 아니다. 미래에 무엇인가 올 것이다? 그것은 내 욕망이다. 미래는 지금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 결과이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으면, 그게 미래이다. 하나님의 결과를 가지고 있으면, 그게 미래인 것이다. 이게 성공이다.
사람들은 다 나를 중심으로해서 과거와 미래를 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와도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가 없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오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았으면, 그것은 나에게 저주이고, 내가 원하는 것들이 사라지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키 타보에서 저주는 축복을 가르쳐준다.
키 타보에 나오는 모든 저주들은 축복의 변장이라고 이야기한다. 키 타보에 나오는 53개의 저주가 있다. 53은 גן 간, 동산이다. 이 저주는 에덴 동산의 변장이다. 축복을 저주처럼 보이도록 변장한 것이다. 왜 그런가? 저주가 없이는 축복을 알아차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거짓 아비와 늙은 왕의 시간의 패러다임에서 나와서 이 영혼의 패러다임으로 가려면, 이 과거와 미래를 결정하는 중간에 있는 수단, 길이 나의 육체가 되면 절대 안된다. 현재가 내가 되면 안된다. 지금을 현재라고 하는 이유는, 내 육체가 그것을 결정한다. 아니다. 우리의 현재라고 하는 것은, before chreist, after christ이다. Christ가 있는 때가 현재이다. 주님이 오신 때가 현재이다. 그리고 그때는 영원히 현재이다. Christ가 이 땅에 오시고, Christ가 메시아이신, 마쉬아흐로 기름부음받은 그때가 현재이다.
우리는 Before-after란 말을 많이 한다. 나의 Before-after라면, 내가 Christ가 된다. 이 중앙에 있는 분을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들을 우리는 ברך 바라크,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축복은 그 아들이 축복이다. 이 아들이 현재이고 길이고 수단이다. 이것을 영접했을 때, 우리는 거짓 아비와 늙은 왕의 시간에서 벗어난다. 이 아들을 현재로 해서 살게 된다. 내가 만약에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산다면, 더 이상 내가 사는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에게는 현재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는 케뎀의 아버지가 온다.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면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축복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보려면, 저주를 알아야 한다. 이 저주는 나를 현재로 놓았을 때 오는 것이다. 나를 현재로 놓으면,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라고 해버리면, 53개의 저주가 모든 인간에게 다 온다. 벗어날 길이 없다. 우리는 어떡하면 53개의 저주가 안 오나 하는데, 그 저주가 온다. 이 저주에서 벗어나서, 저주를 통해서 주님이 가르치는 축복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왜 이 저주는 축복의 변장이라고 하냐면, 이 저주가 진짜 저주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것들이 막 나타나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변장이다. 눈 멀고, 미치고, 온갖 질병에 걸리고, 적들에 의해서 죽고, 그게 실제 삶인 것 같지만, 축복의 변장일 뿐이다. 그것은 육체한테 저주이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는 저주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육체를 벗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나의 현재로 하고, Reality로 하면 그것이 축복인 것이다
이 놀란 감독이 크리스천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를 토라적으로 만들었더라. 미래에서 온 사람을 대표하는 주인공의 미래의 모습이 온다. 그 미래의 모습을 한 사람이 마지막에 주인공을 두고, 자기는 다시 미래로 돌아가는데,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 자체가 막 헷갈린다. 미래와 현재가 왔다갔다한다. 열역학 법칙에 의해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이야기이다. 이게 뭐냐? 했더니, 미래로 가는 남자가 한 마디를 남긴다. Reality이다. 실제라는 것이다.
육체는 그 어떤 실제로 가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53개의 저주를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그 어디서도 Reality, 실제를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되면, 육체는 회개를 한다. 회개를 해서 내 안에 계신 주님에게로 돌이킨다. 그러면 Reality를 가진다. 모든 것이 실제가 된다. 하나님의 모든 목적과 뜻이 실제가 되는 것이 수단이다. 하나님이 계획해놓으신 모든 것들이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육체를 통해서 시간을 살지 않도록, 주님을 통해서 영원을 살도록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현재를 얻는다. 현재라고 하는 것은, Present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만이 얻는다. 그래서 주님을 사는 자들만이 현재가 있다. 현재란 무엇인가? 그분의 목적과 뜻은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이 나타나고 드러나는 것이 현재이다. revelation, 드러난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Blueprint 속에 있던 것이 드러나고, 나타나지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를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과거만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래서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 그 육체가 나타나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은, 지금 모습인 것 같지만, 과거이다. 과거의 모습을 그렇게 오늘날까지 산다.
제가 맨날 경춘이 이야기를 하는데, 그냥 과거에 있는 그 모습을 계속 산다. 그 과거를 미워하고 버린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몇일 전에는 경춘이 저한테 와서, 동생이 암에 걸렸다고 한다. 물론 1기이지만, 간암이라 심각한 암이다. 참 희한하다. 엄마도 암, 경춘도 암, 동생도 암이다. 사탄은 우리를 육체로 살게하면, 그냥 과거를 가지고 고대로 현재가 되게 한다. 과거의 그런 고통과 스트레스와 그렇게 버림받음과 누구를 미워함과 증오함, 그것은 다 암으로 나타난다. 그냥 그게 현재가 된다.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주님은 저주를 통해서 우리가 육체를 벗기 원하신다. 저주를 통해서 내가 시간의 주관자가 아니라, 주님이 시간의 주관자로 받아들이면, 메시아를 받아들이면, 시간이 갑자기 변한다.
이 놀란 감독이 만든 테넷이라는 영화를 보면, 싸토르라고 하는 악역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싸토르라는 이름이, 창조주라는 뜻을 가진다. 창조주는 그 아들을 이야기한다. 창조의 주관자이다. 모든 Blueprint를 있게하는, 현재로 만드는 자가 창조주이다. 이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가 자신을 싸토르라고 한다. 그렇게되면, 그 육체가 창조주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러면 이 육체는 온갖 저주를 다 불러온다.
그래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는 시간을 항상 가져야 한다. 현재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현재라고 하는 것, 생명이라고 하는 것, 삶은 그리스도이다. 오직 하나의 생명은 그리스도이다. 오직 하나의 실제 삶은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야한다. 그래서 키 타보가 지나면, 니짜빔이 오는 것이다. 니짜빔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왕 앞에 서는 것을 이야기한다. 너희들이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때가 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산 것에 대해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다. 심판석 앞에 선다는 것은, 나의 입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나의 육체를 닫아버리고, 당신이 현재이고, 당신이 그리스도이고, 당신이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심판석 앞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선다. 물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은 심판석 앞에 서지도 않는다. 그냥 심판받을 뿐이다. 고린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이야기이다. 그분을 현재로 받아들이고,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받아들이게되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라서, blueprint에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을, 가치를 매기는 것을 appreciation이라고 한다. 감사하다는 말은 thank you가 있어서 잘 설명이 안된다. 감사로 동일하게 번역하지만, appreciation은 보통 감사와는 다르게, 너의 가치를 내가 정확하게 안다는 말이다. 정말 감사합니다란 것은, 네가 나에게 한 것에 대해서 가치를 정확하게 인식했고, 그것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회사가 신입 사원을 뽑았는데, 그 사원이 일을 너무 잘한다. 그래서 너무 기쁘고, 상사가 보기에 대만족이다. I appreciate you란 말은, 그냥 일 잘해서 고맙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 가치를 안다는 것이다. 그 가치를 충분히 enjoy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말로 에레크라고 한다
ערך 에레크 : appreciation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목적을 과거에 놓기 때문에, 이 사람은 그리스도가 보여주는 모든 현재에서 하나님의 목적의 눈으로 바라본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눈으로 바라본다. 만약에 자기 자신을 현재에 놓게되면, 자기의 과거의 경험이 과거가 된다. 자기의 과거의 경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런데 키 타보에 오면, 사람이 저주에 의해서 자기의 육체를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면, 완전히 아들의 삶이 온다. 그러면 그 사람은 케뎀에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던 목적과 삶을 다 계시받고, 그것에 따라서 모든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그 모든 것들을 새로운 가치로 바라볼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에레크의 뜻에는 가치를 안다는 뜻도 있지만, 정렬하다, 질서를 주다, 정돈하다, 이런 뜻이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
육체로 살 때는, 이 땅에 가능한 일보다 불가능한 일이 더 많았다. 가능한 것은 몇개 없다. 이 육체가 할 수 있는 것, 가능한 것은 진짜 몇개 없다. 아주 사소한 것, 쪼잔한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것, 나 좀 행복하게 할 것, 이만한 것에 목숨을 건다. 그걸로 막 죽인다. 금 한 덩어리에 목숨을 건다. 나 좀 기쁘게 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육체가 있을 때는 불가능한 것들이 내 삶에 수두룩하다. 그리고 뭐가 가능한지도, 뭐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뭘 위해서 불가능한지? 오직 나를 기쁘게하는데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만 안다. 사모님과 제가 오늘 대판 싸웠다. 폭력을 쓰거나,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면서 소리도 가끔 질러가며, 째려보기도 하면서 싸웠다. 그리고선 결론이, 우리는 안되겠다. 당신은 나를 모르고, 나는 당신을 모르고, 안되겠다, 이 지경까지 갔다. 그러고나니까 오히려 더 사랑스러워졌다.
왜 그런가? 육체로 있으면, 저것이 왜 존재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냥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으면, 뭔지 모른다. 그냥 괴물이다. 나를 기쁘게하지 않으면, 저 가치가 0가 된다. 어디 둘지도 잘 모르겠다. 가버려라.
에레크라는 말은 변호사란 말이 된다. 너희를 위해서 변호하는 분이 계신다. 그리고 보혜사라는 말도 있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다. 그 이야기는, 아들이 현재가 되면, 성령은 자연히 결과로 온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번도 떨어지신 적이 없다. 과거-현재-미래는 한번도 떨어진적이 없다. 육체가 망령되이 만드는 것이다. 그분이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된다.
그래서 키 타보에 오면 우리는 진짜 감사하게 된다.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 가치를 충분히 누리고, 단순히 시간을 내 육체가 살기 위한 것으로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에 대해서 감사하다. 하나님이 시간을 만든 것에 감사한다. 공간을 내 육체가 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현재이다. 그래서 현재에는 수많은 공간이 있다. 미래를 담고 있는 공간, 과거를 담고 있는 공간, 현재란 어마어마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키 타보는 감사를 통해서 왕 앞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키 타보를 통해서 니짜빔에 가면, 우리는 로쉬 하샤나를 맞이하게 된다. 로쉬 하샤나는 심판의 날이다. 7월 1일은 쇼파르가 불리우고, 심판석 앞에 서는 것이다. 왕 앞에 서는 것이다. 우리는 왕 앞에 서는 연습을 하게 된다. 궁극적은 그 날에 왕 앞에 서게 될 것인데, 그 앞에 서는 훈련을 한다는 것은, 그냥 지옥에 안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육체를 벗고, 모든 저주에 대해서, 나에게 축복을 달라고 하는 것들을 다 벗어던지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이 신랑이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받아들이고, 그 앞에서 육체의 말을 닫는 것이다. 왕 앞에 서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왕 앞에 서서 에레크, 감사하는 것이다
이 육체는 늘 왕 앞에서 불평불만한다. 감사할 것이 있어야 감사하죠! 53개의 저주밖에 없었고, 늘 상처와 아픔 뿐이었는데, 뭘 감사해요?! 이것이 육체가 로쉬 하샤나 때 심판석 앞에서 툴툴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육체의 입을 닫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를 하나의 입으로만 세우신다. 그분을 이다라고 한다. 있었다도, 있을 것이다도 아니고, 예흐예, 이다이다. 그분만을 왕으로 세우신다.
키 타보를 통해서 우리는 로쉬 하샤나,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내 육체가 얼마나 주님의 가치를 떨어뜨렸고, 주님의 창조를 몰라보았고, 내 마음대로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로 세상을 채웠으며, 주님의 창조를 더럽혔는지 알게되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고, 현재에 대한 회개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회개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회개를 과거의 것을 가지고 하는 줄 안다. 로쉬 하샤나 때 하는 회개는 과거에 대한 회개가 아니다. 로쉬 하샤나라는 것 자체는 영원한 심판석이기 때문에, 거기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과거의 나를 끄집어온다는 것은, 그 자체가 육체임을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과거를 끄집어온다는 것도 육체를 이야기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현재만이 있다. 어느 누구의 과거도 끄집어오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과거도 끄집어오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현재이고, 하나님 아버지만이 과거이고, 성령님이 미래이시다.
이제 더 이상 육체로 살지 말고, 더 이상 육체의 과거로 살지 말고, 아버지로 사시고, 링컨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아버지의, 아들에 의한, 성령을 위한이라고 살게 되어있는 것이다. 과거에 의해서도, 현재 육체에 의해서도도 아니고, 나의 미래의 허상의 성공, 보이지 않는 허상의 성공을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나됨으로 사는 것이다.
of the father, by the Son, for the holy spirit이다. 키 타보는 그 종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위대한 선물인 것이다
* 기도
점점 주님께 진정한 감사, appreciation이 나오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사탄에게 속아서, 내가 시간의 주관자가 되고, 내가 현재가 되고, 내가 창조주가 되고, 그 속에서는 어떠한 appreciation도 없고, 원수에 의해서 그런 어이없는 삶을 살았다. 이제 나오자. 이제 그 신성한 땅으로 오자. 베하야 키 타보, 이제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여, 일어나자. 사탄에게 속아서 끌려다니지 말고, 거짓 아비에 속아서 끌려다니지 말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 속으로 깨어나자.
이제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이제 로쉬 하샤나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육체의 과거를 가지고, 육체적인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육체의 미래를 위하여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위한 걱정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현재이고, 그리스도가 현재이고, 생명이고, 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에하드가 나의 세상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에레크, 모든 것의 가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돈할 수 있습니다. 이제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샤밭에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종들을 위한 말씀을 창세 전에 예비해놓으신 주님. 당신의 정말 사랑스러운 이들을, 당신께 모든 생명을 드리고, 당신만을 사랑하는 이 종들을 위하여 그 먼 케뎀에서부터 이 말씀을 준비하셔서, 오늘, 이 말씀이 또한 현재가 되도록 내리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제 완전히 거짓 아비를, 원수를, 대적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당신의 종들을 삼키려했으나, 그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우리의 축복되신 우리의 바루크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바룩 하바 베쉠 아도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