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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라는 벤처기업의 대표인 최은석씨는 촉망받은 벤처기업인이었습니다. 지난해 말 세계 첫 4D 테마파크로 대통령상을 받았고 그 전에도 독창적인 멀티미디어 디자인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는 출장지인 미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서가 있는 지 확인이 안 되어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개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벤처 투자 유치 후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만약 벤처투자 유치후 받은 스트레스때문이라면 우리 나라의 벤처 문화를 되돌아봐야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벤처기업인들은 투자를 받은 이후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쫓긴다고 합니다. 투자자가 재촉하지 않아도 이렇다니 얼마나 성공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지 짐작을 해봅니다.
고 최은석 대표는 150여억 원을 투입한 사업 성과가 저조하자 크게 상심했다고 합니다. 벤처는 기본적으로 성공 확률이 높지 않은 사업입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어야하는 것이 벤처 사업입니다. 하지만 우리 벤처 문화에선 성공 압박이 심하다고 합니다. 물론 벤처의 성격상 외국 벤처기입인도 성공 스트레스를 받지만 우리나라처럼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는 아니랍니다. 특별히 벤처에 대한 그릇된 시각도 그렇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자로 낙인이 찍히는 사회 풍토가 더 큰 문제입니다. 실패했더라도 독특한 창조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외국의 분위기와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는 벤처에 투자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벤처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다시는 투자를 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지고 결국은 실패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것입니다. 고 최은석 대표의 죽음을 계기로 이런 한국의 벤처기업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언제 이런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지 못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지난해 3월에도 한 코스닥 등록 벤처기업 대표가 경영 악화에 상장 폐지까지 몰리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때엔 더 복잡한 사건이 겹쳤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디스트릭트라는 기업의 경우는 투자유치가 안 되었다든지 사업의 전망이 불투명하다든지 하는 불안한 요소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벤처기업인 스스로 느끼는 스트레스는 극히 심각하다고 합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지만 얼마나 심적인 스트레스가 그를 짓눌렀으면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을까라는 마음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의 아들들과 야곱은 강한 스트레스로 인해 극단적인 결정을 유혹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도 사실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이런 상황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같은 압박이 우리를 삶에서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의 상황을 살펴보며 우리는 이런 상황속에서 어떻게 결정하며 인생을 헤쳐 나갈 것인 지 잘 판단하고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경험하며 위기를 잘 대처해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생을 절망적으로 보며 살아가고 있는 첫 번째 인물로 야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8절과 2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이 베냐민에게 집착하며 베냐민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민감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속에서 마음이 불편한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베냐민이 애굽으로 갔다가 혹시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애굽으로 가는 것을 한사코 막아섰었습니다.
이렇게 베냐민에 집착하는 이유는 예전에 요셉을 잃었던 경험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받았던 상처가 현재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현재의 일에 대한 불안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TV를 보는데 ‘하이킥3-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일일시트콤에서 김범이라는 배우가 백화점 사장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백화점 사장 김범은 극중에 각종 공포증으로 인해 불안한 생활을 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제일 처음 등장했던 공포증은 폐소공포증이었는데요. 김범은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멈추자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이 때 안수정이라는 극중 인물이 김범을 보살펴주고 공포감을 떨쳐버리는데 조금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안수정과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처음 간 레스토랑에서 김범은 모서리가 있고 날카로운 칼과 포크를 집지 못한다면서 자신이 선단공포증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두 사람은 결국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스테이크를 먹어야만 했고 김범에게는 그 밖에도 광장공포증등 각종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에 수정은 점점 실망하였습니다.
이렇게 김범이라는 인물이 공포증을 가지게 된 이유는 다양했는데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불이 나서 멈춰서 폐소공포증이 생겼고 조각하다가 칼에 베인 후 선단공포증이 생겼으며 고2 때 어머니를 잃어버린 후 광장공포증에 시달리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또한 두 명 이상 동시에 말하면 일어나는 소음공포증에,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면 일어나는 주목공포증,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하는 고소공포증, 둥근 무늬를 보지 못하는 무늬공포증 등 공포증만 107개에 달하는 모습을 보여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포증을 가지고 생활을 하지 못하는 김범을 보며 사람들은 실소를 자아내며 재미있는 소재거리로 드라마를 보았을런지 모르지만 정작 이런 공포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하나가 참 이겨내기 힘든 현실인 것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 또한 예전에 경험했던 좋지 못한 경험들이 뇌리에 박혀 현재의 생활속에서 공포로 가득하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생을 절망적으로 보며 살아가고 있는 두 번째 인물로 야곱의 아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0절과 31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본문을 보면 야곱은 베냐민이 애굽에 잡혀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고통스러워하고 할 것이고 힘든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야곱의 아들들도 강박관념과 공포심이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베냐민을 다시 데려가지 않았을 때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이 야곱의 아들들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될 지... 일어나지 않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이미 아버지 야곱에게 예견되어 지는 심정인 고통과 극단적인 행동이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려움을 결코 우리를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불안은 결코 우리에게 기적을 안겨다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레슬리 렘키(Leslie Lemke)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952년에 태어났는데 뇌성마비와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눈에 세균이 감염되어서 두 눈을 다 빼야만 했어요. 그러니까 앞도 보지 못하지요, 정신지체에 뇌성마비입니다. 6개월이 되었을 때에 이 아기를 가져다가 부모가 병원에 버렸습니다. 아무도 이 아이가 살아난다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병원에서 고민이 생겼어요. “어떻게 이 아이를 돌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저들이 생각하다가 독실한 크리스천인 은퇴한 간호원 메이 렘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흔쾌히 이 메리 렘키가 이 아이를 집에 데려왔는데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요. 얘가 젖을 빨아야 사는데, 그니까 튜브를 넣고 우유를 넣어주고, 이유식을 만들어 넣어주고, 계속 아이를 주물러 주면서 기도합니다. 돌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겨우 입을 열어 오물거리면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도 일곱 살이 될 때까지는 어떤 동작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감정 표현도 하지 못하고 식물인간처럼 누워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다 포기하라고 그랬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매일같이 찬송을 부르며 아이를 붙잡고 기도합니다.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절망 가운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저는 성경의 기적을 믿습니다. 이 아이에게도 기적을 허락해주옵소서. 정신적인 감옥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기적을 주시옵소서.” 친척들도 포기하라고 그러고 다 포기하라 그러는데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그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홉 살 때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열두 살 때 일어서게 되고. 할렐루야. 열다섯 살 때 걷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이 아이가 굉장히 음악에 잘 반응하는 것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레슬리에게도 재능을 주옵소서.” 그런데 열여섯 살이 되었던 때인데 어느 날 밤에 한밤중에 음악소리가 들려서 ‘내가 라디오를 켜놓고 깜빡 잊어버렸나’ 하고 깨어나서 이 엄마가 내려가 보니, 이 열여섯 살 난 웨슬리가 거실 피아노에서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있는 거예요. 이 아이에게 정식으로 피아노를 가르쳐 본 적이 없어요. 근데 이 아이의 특이한 증상을 설번트 증후군이라고 그래서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어가지고 그러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한번 음악을 들으면 아무리 어려운 음악이라도 듣고 난 다음에 그대로 연주하는 거예요. 돈 들여서 피아노 레슨 할 필요 없겠어요.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처럼 특이한 하나의 재능을 받아가지고 IQ가 58입니다. IQ가 58. 그러니깐 뭘 가르쳐줘도 제대로 깨닫지 못해요. 그런데 음악에만은 특별한 재능이 있어 가지고 아주 긴 거, 어려운 거, 한번 탁 틀어 놔주면 들은 다음부터는 그대로 외워서 그대로 다 쳐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메리 렘키가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메이 부인의 사랑과 기도의 기적”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시편 43편 5절에는 시편기자가 불안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의 노래를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43편 5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힘든 일들, 어려운 환경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봐야함에도 우리는 이전의 어려웠던 상황에 더 집착하고 나를 짓눌렀던 그 환경이 뇌리에 박혀 항상 초조하고 불안하게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공포가 우리를 어렵게 만들게 됩니다.
얼마 전 끝난 ‘해를 품은 달’이라는 드라마에서도 보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전이 항상 초조하고 불안하고 공포에 휩싸여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히면 정신줄을 놓게 되고 힘든 현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극단적인 결정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도 베냐민에게 큰 일이 생기면 목숨을 버릴 것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게 됩니다. 사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지 살아서 좋은 해결책을 찾아야지라고 말하기 쉽지만 정작 본인이 그 상황에 생기면 다른 방법은 생각이 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릴 생각만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결코 두려움으로 살지 말고 솟아날 곳이 있는 지 잘 살피며 항상 솟아날 곳으로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옛 속담에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말은 다 분히 성경의 진리와 상통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어려움속에서 우리가 찾아내야할 솟아날 구멍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9장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 구절보다 앞절에는 뭐라고 적혀 있는 지 한 번 보십시오.
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비록 지금 이 순간 환경이 어렵고 절박한 위기를 경험했다고 우리의 인생을 포기하고 완전히 끝났다고 단정지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처럼 어떤 위기를 겪게 될 때 미래를 단정짓고 불안하며 초조하고 극단적인 결정을 하려는 생각을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그 때도 하나님보시기에는 마지막이 아니라 오히려 전화위복의 중요한 시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완전히 인생이 끝나기전까지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단언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고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우리는 어떤 결단을 해야할까요?
사람을 잡는 불안한 현실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할까요?
현실을 이기기 위해 나의 권리와 욕심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면서 불안한 현실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33절, 34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야곱의 아들들 중 유다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포기하면서 베냐민을 구해낼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특별히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베냐민과 형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자신을 죽음가운데 던져서 온 가족과 형제들을 살리려는 유다의 열심을 보게 됩니다.
유다의 죽음을 보는 사람들은 각자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유다의 이런 헌신에 대해 두 가지 견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유다는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으로서 이것은 정말 훌륭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몸을 그런 식으로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보는 견해일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목숨과 몸을 가장 아끼며 할 수 있는대로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고 합니다. 유다처럼 남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치고 자기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밖에 없는 몸이나 목숨을 잘 간직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이것을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풍성한 삶보다 더 귀한 삶은 사랑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드라마얘기가 나와서 좀 그렇습니다만.. 우리가 보는 드라마에서도 최종 결말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이 등장할 때 우리는 애뜻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해를 품은 달의 최종회에서 대립과 갈등의 요소라고 생각했던 양명군이 임금 훤을 위해 어느 누구보다 더 뜨거운 피로 맺어진 형제애를 보여주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안타까움과 함께 고귀한 죽음의 감동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연우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에 자신의 목숨으로 저주를 막아낸 신모 장녹영의 죽음을 보면서도 안타까움과 함께 뜻 깊은 죽음으로 시청자의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드라마에서도 그런데 실제 역사속에서 죄가 없는 한 분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지시고 모든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분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우리 주님,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이 직접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죽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것을 보여주며 가족을 살리고 형제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유다일까요?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3절을 펴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유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실 예수님의 조상이 될 유다는 예수님의 하실 사역을 미리 예언하여 보여주는 삶을 오늘 본문에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혹시나 현실속에서 불안과 초조로 살아가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극단적인 결정을 마음에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결코 우리의 인생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을 찾으면 불안한 미래, 초조한 미래가 아니라 평안과 기쁨의 미래가 우리에게 놓여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내려놓으며 희생을 각오하고 나아갈 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것만 움켜지고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고 내 것을 포기할 때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의지하면서 하나님 때문에 미래를 준비하며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딪히면 결국 하나님께서 해결해신다는 것을 믿고 낮아짐으로 이번 한 주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