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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본은 예수님 / 골 2:6-7
사람에게는 망각의 속성이 있습니다. 잘 잊고 사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잊고 살고,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던 은인을 잊고 살고, 또 감사해야 할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위기에서 도움을 받을 때는 결코 잊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불과 몇날이 못되어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다시 회복해야만 합니다. 감사를 회복해야 하고, 받은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이 귀한 것을 망각하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지만, 작은 것들을 다시 기억하며 감사하게 될 때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아름답습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이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아왔고, 은혜를 받아왔는지 모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받은 사랑, 감사를 기록하고 쌓아둔다면 산더미같이 많을 것입니다. 부모님께 받은 은혜, 이웃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과 은혜,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응답과 기적같은 은혜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감사함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 한 분이 늘 원망과 불평에 차 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것에 대한 불만입니다. 일상사 좀 어려울 때마다, 좀 힘들 때마다 이렇게 넋두리를 합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 선악과는 왜 따먹어 가지고, 오늘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킨담. 에덴동산에 고이 살았으면, 힘든 농사도 하지 않고, 길이 평안하게 잘 살 수 있었을 것을... 뭣 때문에 그렇게 해서 후손들을 두고두고 고생을 시킨단 말인가! 아담 할아버지, 하와 할머니가 원망스럽다.’ 늘 이렇게 원망 불평을 하는데, 그 도가 좀 지나쳤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저렇게 여러 모로 설명을 해 주었지마는 영 들어먹지를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저녁식사에 이 장로님을 초청했습니다. 음식을 잘 차려 놓고 식사기도를 하고 막 수저를 드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밖으로 나가면서 하는 말씀이 "자, 감사기도도 드렸으니, 다들 식사를 먼저 하세요. 그러나 여기 있는 것, 가운데 요 그릇, 뚜껑 닫아 놓은 이것은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두세요. 제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이것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그 동안은 참으시고, 다른 것만 드시도록 하세요. 다른 것은 다 잡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나갔습니다.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장로님이 영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건드리지 말라는 이 그릇에 든 것이 무엇일까?’ 그는 기어이 그것을 살짝 열어 보았습니다. 그 그릇 속에는 뜻밖에도 새 한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뚜껑을 살짝 여는 순간, 그 새가 그만 푸드럭 하고 날아올랐습니다. 헌데 이걸 도로 잡을 재간이 없습니다. 목사님 들어오기 전에 잡아서 다시 집어넣어야 하는데, 허겁지겁 일어나서 요리조리 쫓아다녔지마는, 방안에 먼지만 자욱해졌습니다. 잠시 후 목사님이 들어왔습니다. "아니, 여기 다른 음식도 허구하게 많은데, 하필 그것을 열어 보았습니까?" 짐짓 한마디 던지고는,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장로님은 분명 아담의 후예십니다 그려." “남 탓할 일 아닙니다. 나도 똑 같습니다.남 뭐라 할 거 없습니다. 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말이 운명을 바꿉니다. 한 마디 말이 내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오래 전의 일이고 우스꽝스런 일입니다. 어떤 초신자가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부흥강사의 설교가 길어지니까,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강사가 한 성질했던 모양입니다. 그 형제를 향해, “차라리 집에 가서 밥이나 한 사발 먹고 똥이나 싸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 호통 치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여, “아멘” 했습니다. 실은 그게 그 형제의 소원입니다. 늘 속병이 있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변비까지 심했습니다. 그래 집에 가서 그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부터 속병이 고쳐지고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아멘”이란 한 마디가, 그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6-7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감사하라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감사함을 넘치게 할 수 있을까요? 믿음에 굳게 서야 가능합니다. 감사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오늘 본문은 신앙 성장의 단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① 첫 단계는 6절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라고 하는 단계입니다.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지만, 거기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알고 믿었다는 뜻이요,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로 인정하여, 그 분에게 절대 순종하며 충성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또한 이 말은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뜻이고, 예수님을 내 심령에 모셨다는 말이며,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내 멋대로, 내 고집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뜻이 주님 뜻으로 바뀌었습니다. 말이 바뀌었습니다. 노래가 바뀌었습니다. ② 신앙성장의 두 번째 단계는 예수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거기에 대해 6절은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합니다. “그 안에서 행하라”는 말씀은 예수 안에서만 생각하고, 예수 안에서만 행동하고, 예수 안에서만 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이란 범위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예수 중심으로 산다는 말이요, 내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쁨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요,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행하여 산다는 의미요, 세상 나라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산다는 의미요, 이 세상의 풍조나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③ 신앙성장의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는” 단계입니다. “주 안에 뿌리를 박으며”라는 말씀은 신앙성장을 식물에 비유한 것입니다. 왜 뿌리를 박아야 합니까? 뿌리가 있는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해서입니다. 뿌리를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아야 나무가 잘 자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뿌리가 있어야 나무가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강한 바람이 불 때 뿌리가 약한 나무는 넘어지거나 뽑히기 쉽습니다. 뿌리가 깊게 넓게 자리 잡고 있어야 나무가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게 성장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죠. 우선 성도의 믿음의 뿌리는 말씀입니다. 말씀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면 그 말씀을 통해서 영의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말씀의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면 영양실조에 걸려서 성장하지도 못하고 열매를 맺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면, 잘 자라고 건강하게 자라고, 열매 또한 풍성해 질 수 있습니다. ④ 신앙성장의 네 번째 단계는 “주 안에서 세움을 받는” 단계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성장을 건축에 비유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신령한 건축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유다서에도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신앙의 집을 지으므로 믿음이 수시로 바뀝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감정에 신앙의 집을 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기분에 신앙의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지식에 신앙의 집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한 집들은 쉬 무너지는 집들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견고한 기초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철학적인 이론이나, 신학적인 논리, 또는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는 자신의 감정이나 체험에 신앙의 기초를 두면 어느 날 반드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지나도 견고하여 변함이 없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신앙을 세울 때, 그것은 영원히 견고한 것이 될 것입니다. ⑤ 신앙 성장의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단계입니다. 7절에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말은 감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16절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곧 감사를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말로, 노래로 표현할 수 있으면 노래로, 몸으로 표현할 수 있으면 최고의 헌신으로, 물질로 표현할 수 있으면 물질로 그렇게 표현하라는 말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17절에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모든 시간에, 모든 상황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감사가 넘치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감사가 넘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감사가 마음에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사람은 그 얼굴에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마음에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사람은 입에서 찬송이 나옵니다. 감사가 손으로 흘러나올 때에는 봉사가 되고, 감사가 발로 흘러넘칠 때에는 전도가 되고, 감사가 가득차서 지갑에서 흘러나올 때는 아름다운 예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얼굴에 기쁨이 있어야 진정한 감사입니다.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와야 진정한 감사입니다. 손으로 봉사가 흘러나와야 진정한 감사입니다. 발로 전도가 흘러나와야 진정한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흘러나와야 진정한 감사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감사는 넘치고 있습니까? 혹시 억지스럽지는 않은가요?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단계, 곧 본문이 말씀하는 가장 성숙한 신앙 단계인 감사함을 넘치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감사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께 배울 것이 많습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언제 어떻게 감사하셨는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감사기도한 기사가 4번 나옵니다. 물론 그분은 범사에 감사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4번이란 말입니다.
1) 마가복음 6:41-44절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내용을 보면 감사 기도할 상황이 아닙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앞에 두고 감사기도 한 것입니다. 자기가 5천 명의 먹거리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스런 상황에서 감사기도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무슨 죄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겨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벳새다 들녘에 모여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흠뻑 빠졌습니다.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나고, 어느 새 날이 어둑어둑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는데, 먹을 것은 준비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촌과 마을로 보내어, 무엇을 사먹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대책이 없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떡이 몇 개나 있는지 알아 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어린아이의 도시락 안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백 명씩 오십 명씩 앉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손에 들린 것은, 가난한 어린아이의 도시락입니다. 그런데 지금 먹어야 할 사람들의 숫자는 남자만 오천 명입니다. 아니 그걸 누구 입에 부치겠습니까?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도시락을 들고, 무슨 감사기도를 한단 말입니까?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예수님은 믿음으로 감사기도 하신 것입니다. 배고픈 상황, 무엇하나 넉넉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믿음으로 감사기도를 하십니다.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로 가득한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믿음으로 감사기도를 하십니다. 꼭 기억십시오. 넉넉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풍족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먼저 감사하니 풍성해졌습니다. 그랬더니 어린아이 도시락에 지나지 않았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이게 감사의 기적입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부족한 것에 감사하라. 더 부족하면 지금이 그립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가졌어도 부족합니다. 넉넉해지면 감사하겠다고 하면, 평생 감사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중에 믿음으로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부담스런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2) 요한복음 11:39-4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내용을 보면 감사기도할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은 친구의 무덤 앞에서 감사기도한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나는 상황입니다. 나사로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좀 특별합니다.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시면, 꼭 들르시는 곳이 베다니 마을입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부담없이 들르실 수 있는 곳, 맘 편히 쉬었다 올 수 있는 곳이 나사로의 집입니다. 아마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삼 남매가 의가 깊었습니다. 특히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의지의 대상입니다. 오빠지만 아빠 같은 존재였습니다. 특히 예수님과는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였습니다. 그런 나사로가 죽었으니,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실 만도 합니다. 나사로는 사람 좋기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온 동네 사람들이 위문을 하러 왔습니다. 여기저기서 곡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거운 분위기였겠습니까? 예수님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마르다가 얼른 마중을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는 흐느끼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예수님은 별 것 아닌 듯 그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 다시 살아날 거라고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깜짝 놀라 고백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는 마리아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한테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안내를 받아,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감사기도를 하셨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니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이런 감사기도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호상이 아닙니다. 9988 234가 아닙니다.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아프다가 사망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감사기도 하셨습니다.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감사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나사로가 위중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보인 반응이 있다. 요 11:4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르다에게 보인 반응도 봅시다. 요 11: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주님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감사한데는, 하나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테니 감사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다면 가슴을 칠 일입니다. 우리는 뭔가 이득이 생길 때 감사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뭔가 이문을 얻었을 때 감사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감사의 기준이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각을 나에서 하나님으로 옮기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감사합시다. 예수님처럼 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면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3) 마태복음 11:25-27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내용을 보면 감사 기도할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특히 권능을 많이 행하신 곳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입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마태 11:21-24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고라신과 뱃새다에서, 가버나움에서 전도에 실패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 상황에서 감사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렇게 애써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권능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돌처럼 딱딱하기만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문은 닫혀져 도무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복음이 나타난 것에, 어린아이처럼 감사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상반기를 결산하는 감사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올 상반기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혼추수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위해, 반년 동안 말씀의 씨를 뿌렸고, 물을 주었습니다. 감사 절기는 영혼 추수하는 것이 포함돼야 합니다. 누구나 알듯이 추수도 철이 있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었어도, 추수할 시기를 놓치면 안 됩니다. 농사와 달리, 영혼 추수의 열매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합시다. 예수님도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에서 별 다른 열매가 없었습니다. 내가 영혼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감사할 일입니다. 내가 영혼을 품고 기도하고 있다면, 더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그 영혼을 추수했다면, 그보다 더 감사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감사는 환경과 형편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입니다.”
4) 누가복음 22:17-20절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내용을 보면 감사 기도할 상황이 아닙니다. 임박한 자신의 죽음 앞에서 감사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의 자리입니다. 특히 그 자리가 부담스러운 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밝혀야 합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도 알려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공치사 해주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분신과 다름 없는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을 드러내야 합니다.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인 셈입니다. 더군다나 몇 시간 후면, 자신이 체포 당하게 됩니다.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불법 심문을 받게 됩니다. 최후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이 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심경은, 너무나 복잡 미묘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심경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마가 14:34절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런 심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나 좀 살려 달라”고 합니다. “내 재산의 절반이라도 줄테니 살려 달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더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씁니까?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덜 됐기 때문입니다. 심판자 앞에 설 준비가 미처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표현처럼 ‘자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잠들었다가,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곳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 앞에서 감사가 진짜 감사입니다. 그게 진정어린 감사요 순수한 감사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올려지는 숭고한 감사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합시다. 감사도 연습입니다. 감사는 이론이 아닌 실천입니다. 감사는 감정이 아닌 의지의 문제입니다. 마음은 심히 고민하여 죽을 거 같았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잃지 않았던 예수님의 감사를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1년 조지 워커 부시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이 된 뉴욕 빈민가 출신 파월 장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뉴욕시립대학교와 조지워싱턴대학교를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녔습니다. 어느 날 공장에서 다른 인부들과 함께 도랑을 파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회사의 정직원인 한 사람이 몸을 삽에 기댄 채 회사가 충분한 임금을 주지 않는다며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정직원인 한 사람은 삽으로 묵묵히 도랑을 파고 있었습니다. 몇 년 후 다시 그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을 때, 불평을 늘어놓던 그 사람은 여전히 허드렛일을 하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가 또 다시 그곳에 갔을 때 삽에 기댄 채 불평만 하던 그 사람은 원인을 모르는 병으로 장애를 입어 회사에서 나갔고, 열심히 일하던 그 사람은 그 회사 사장이 되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일은 콜린 파월의 인생에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불평을 일삼는 사람은 불평의 열매를 따먹고, 감사하는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과 성공은 감사에 비례한다는 것이죠. 성경도 감사하는 사람에 대하여 약속합니다.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물이 그릇에서 흘러넘치면 아무 쓸모가 없어지는 것처럼 감사도 지나치면 허비되고 말까요? 그냥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요? 성경은 감사가 넘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자에게 은혜를 넘치도록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감사가 넘치는 사람에게 복이 넘치도록 해 주십니다. 소망이 넘치게 해 주십니다. 사랑이 넘치게 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감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그 구하고 바라는 것들을 응답해 주십니다. 문제의 문이 열립니다. 꿈꾸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복을 받되 계속적으로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축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고 했습니다. 감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의 문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복은 항상 감사라는 문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십시오. 넘치도록, 지나치도록,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감사하십시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우리의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 안에 거하며,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담대한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감사를 본 받아 감사체질로 변화되어 항상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