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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호매절륜 豪邁絶倫
호걸 호豪 뛰어날 매邁 끊을 절絶 인륜 륜倫
호방하며 고매한 성품이 매우 뛰어나다
이 성어는 고려 말기의 충신이며 성리학자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선생의 시문집 포은선생집(圃隱先生集)에 행장 함부림(行狀 咸傅霖)에서 발췌하다
歲在乙酉 세재을유
先正文忠公權近上書請加封贈 선정문충공권근상서청가봉증
錄其子孫以勵後人 록기자손이려후인
殿下嘉納 전하가납
贈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증대광보국숭록대부 령의정부사
修文殿大提學 監藝文春秋館事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益陽府院君 謚文忠 익양부원군 익문충
公天分至高 豪邁絶倫 공천분지고 호매절륜
少有大志 好學不倦 소유대지 호학불권
博覽羣書 日誦中庸大學 박람군서 일송중용대학
窮理以致其知 反躬以踐其實 궁리이치기지 반궁이천기실
眞積力久 獨得濂洛不傳之秘 진적력구 독득렴락불전지비
故其措諸事業發於議論者 十不能二三 고기조제사업발어의론자 십불능이삼
而光明正大 固已炳燿靑史 이광명정대 고이병요청사
眞可謂命世之才矣 진가위명세지재의
태종(太宗) 5년 을유(1405)년에
선정 문충공 권근이 상소 글을 올려 봉증을 더하고
자손들을 기록하여 후인들이 권장하기를 청하니
전하께서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시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 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증직하고 문충(文忠)공이라 시호 교지하였다
공은 타고난 품성이 지극히 높고 호방하며 고매한 성품이 매우 뛰어났었다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많은 서적을 널리 두루 보고 날마다 대학과 중용을 암송하고
이치를 궁구하여 그 아는 것을 지극히 하여 돌이켜 몸소 그 진실을 실천하였다
참된 진리가 쌓이고 힘씀이 오래되어 전해지지 않았던 염락의 비결을 홀로 터득하였기에
고로 모든 사업이 시행되고 의론하고 그만둔 것이 열에 두셋도 되지 않았지만
광명하고 정대함은 진실로 이미 청구역사에 빛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 시대를 바로잡을 재주라 할 만하다
염락(濂洛): 유학이 온 세상에 펴졌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고려 말기의 충신이며 성리학자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선생의 행장 일부분을 발췌하였는데 행장을 쓴 난계 함부림(蘭溪 咸傅霖1360~1410)선생님은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윤물(潤物) 아버지는 검교중추원학사(檢校中樞院學士) 함승경(咸承慶)이다 우왕 11년(1385) 문과에 급제해 예문검열(藝文檢閱)을 거쳐 좌정언으로 승진하고 1389년 고려 공양왕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재직중 정지(鄭地) 이림(李琳) 왕안덕(王安德) 우인열(禹仁烈) 우홍수(禹洪壽) 등 구신들을 탄핵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춘주지사(春州知事)로 좌천되었으며 그 뒤 다시 기용되어 형조정랑이 되었으나 중방(重房)의 무신들이 문신을 멸시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파직당하고 1392년(공양왕 4)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병조정랑 겸 도평의사사경력사도사에 복직되고 그 해 이성계 추대에 참여해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된 후 형조의랑에 이어 대사성 좌산기상시로서 상서소윤(尙瑞少尹)을 겸하고 명성군(溟城君)에 봉해지고 태종 초기에 충청도관찰출척사 예문관제학 동북면도순문사 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 등을 역임하고 태종 4년(1404) 참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에 오르고 다음 해 노비변정도감제조와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06년에 계림부윤 경상도관찰출척사를 지냈으며 다음 해 다시 참지의정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08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410년 파직되었다 성격이 강직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서리를 다스리는 데에 능숙해 관직을 맡을 때마다 칭송을 받았으며 1405년에는 앞서 1398년(태조 7)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왕자 방석(芳碩)을 옹립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은 일이 있다 시호는 정평(定平)공이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선생은 고려 공민왕때 23세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서 30세에 성리학을 국학에서 강론하고 35세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난 후 더욱 신진 유학에 정진하며 꿈을 펼치던 중에 안타깝게도 55세에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어 생을 마감하게 되었지만 선비로서 지켜 온 절의는 시대가 아무리 흐르고 변해도 후손들의 귀감이 되니 “이 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고려에 대한 변하지 않는 충성심 나라의 한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굳는 절개에서 나온 단심가 이 한 수의 시조를 감상하면서 포은 선생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해 본다
호방하며 고매한 성품이 매우 뛰어나다의 오늘의 성어 호매절륜(豪邁絶倫)의 성격을 가지신 포은선생은 개성의 선지교(善地橋)에서 변을 당하셨지만 아마도 터럭만큼도 비굴하시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죽임을 받아들이셨을 것 같은 느낌은 나만 느끼는 것은 필시 아닐 것이라 믿고 선생이 피살되던 날 밤 선지교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 하여 나중에 선죽교(善竹橋)로 고쳐 불렸다하니 삼성신 하나님도 선생의 절의에 감탄하셨으리라 믿어지며 호매절륜(豪邁絶倫)의 성품을 지닌 포은 선생님과 이런 멋진 성어를 쓴 정평공 함난계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선현들이 남긴 멋진 성어를 함께 공유하고자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아 놓는다
桓紀 9217년 10월 6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