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歸路)에서
이번에 나는 진주(晉州)에서 회합을 마치고 귀로의 코스를 생각하다가 역시 버스를 타고 남강 사유의 계곡을 따라서 산청(山淸) 함양(咸陽) 진안(鎭安)을 거쳐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정류장에는 함양까지 가는 차가 대기하고 있고 차장 아이는 목청을 높이며 열심히 손님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보나마나 포장도 안 된 지방의 부실한 도로에다 버스도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는 털털이 차로 몇 백리 산속을 달릴 일을 생각하니 다소 어두운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낯선 고장에 대한 호기심이 결국 나를 이 길로 몰아세운 것이다. 그러나 지나다 보면 가끔 생각지 않게 물 좋고 숲 좋고 거기에 기암괴석이 깔린 계곡을 달릴 수도 있어 이런 것들을 다 그날의 부수입으로 친다면 산길을 달리는 그 싱싱한 멋은 다소의 불안쯤은 메우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1년에 몇 차례씩은 모임이 있게 되어 그때마다 다른 지방을 돌아볼 기회가 생긴다.
시일에 쫒기는 일만 없으면 나는 대개 철도나 큰 국도를 버리고 지방의 등외 도로를 누빈다. 한 장의 안내도를 벗삼아 구석진 고장의 인정도 살피고 산정(山情)도 돌아보며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떠다니는 묘미는 정말 매력을 느끼곤 했다.
이 소로를 누비는 방랑취미가 혹시 세세한 데까지 마음을 써야하는 접장이라는 직업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다른 동업자들에게는 꾸중을 들을 엉뚱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가령 우리 여러 직업들을 길에 비긴다면 교직생활은 확실히 화려한 고속도로나 포장이 잘 된 일등국도 축에는 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성’이라는 굴레만 벗긴다면 정말 하찮은 소로 일 수밖에 없는…….
어떤 이들은 수천억의 예산을 주무르고 삼천만 겨레를 장중에 놓고 정책을 다루는데 우리는 때로 어린이의 콧물을 닦아주고 옷의 먼지를 털어주며 판서의 줄이 비뚤어지지 않았는가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교실안의 게시물의 조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이 직업의 높고 낮은 것을 따진다는 뜻도 아니고 더구나 내가 남의 직업을 넘겨다본다는 뜻도 아니다. 말이야 바로 말이지 큰 길만 골라 다니는 여행처럼 멋없고 싱거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우리네 직업에서도 말이다.
진주에서 함양까지 오는 동안 길가의 마을마다에는 빨갛게 익은 감들이 지붕을 덮었고 아름다운 계곡들은 시야를 즐겁게 해주어서 몇 시간 동안 심심찮은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함양에서 갈아 탄 버스가 몇 십 분쯤 달렸을 때 장마당이 있고 옆으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조촐한 마을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때 어떤 골목에선가 얼굴이 희고 예쁘장한 소녀가 밝은 미소를 띠며 차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고장의 환경처럼 티 없이 맑고 순박하게 보이는 이 소녀는 산골 아가씨답지 않게 옷차림이나 태도가 아주 세련되고 한 송이 꽃처럼 마냥 향기를 풍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나그네의 점수가 후했을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서울에 있는 딸 연아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이 소녀를 지켜보았다. 이 소녀는 이 차의 운전기사와 잘 아는 사인가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 쌍의 종달새처럼 즐거운 대화가 벌어지고 있었고 점수가 헤픈 한 나그네는 그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얼마 뒤에 운전기사는 작별의 신호라도 하듯이 호주머니에서 빨간 사과를 하나 꺼내서 소녀에게 던져주고 이내 핸들을 잡고 떠났다. 소녀는 미소를 띤 채 꽃잎 같은 손을 연방 흔들고 있었다. 이 구김없는 애틋한 정경이 나의 마음속에 긴 여운을 남겼다.
다시 떠난 버스는 아름다운 계곡을 몇 구비 돌았다. 나는 두 젊은이에게서 이 계곡의 맑은 물보다 더 청순한 애정의 샘물 같은 것을 느끼며 이 두 사람이 꼭 다정한 애인이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얼마 뒤에 버스는 이제 무척 가파른 고갯길에 다다랐다. 한동안 숨을 헐떡이며 산마루에 올라서자 차는 숨을 돌리기라도 하듯이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곳이 정류소인지 노파 한분이 내릴 채비를 하고 입구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쭈그러질 데는 하나도 남김없이 온통 다 쭈그러진 것 같은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얼굴과 손등은 지금 허덕이고 올라온 이 버스처럼 무척 어려운 인생의 고갯길을 기어올라온 자취를 역력히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런 고갯길과 저런 할머니 사이에는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통히 인연이 없는 것 같기도 한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할머니의 걸어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한손에는 허름한 보따리를 들었고 다른 손에는 술병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내리는 찰나에 술병을 쇠붙이에 부딪쳐서 병이 두 동강이로 깨지고 말았다. 그 순간 나와 할머니는 동시에 병 깨지는 소리보다 더 비통한 소리를 질렀지만 술은 아랑곳없이 온통 버스바닥에 번져 흘렀다. 할머니는 엉뚱하게 흘러가는 술의 행선지를 원망스럽게 되돌아보며 내렸고 진땀을 뺀 버스는 생각잖게 한 병의 술을 송두리째 들이켜고는 그대로 떠나버렸다. 바닥의 술은 자취도 없이 흘러갔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할머니 일그러진 표정이 오래도록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이 야위고 가련한 저 할머니에게는 한 병의 술이나마 정말 귀하고 소중할 터이다. 집에서는 누군가가 목이 마르게 저 술을 기다리고 있을는지도 모르는데…….
이제 길은 아찔한 낭떠러지를 끼고 도는 내리막길이었다. 그러나 차는 이제야 술 취한 기분이라도 내듯이 양장(羊腸)의 굽이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차는 지금 도계(道界)를 지나서 다음 행선지를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는 것이었다.
안계(安溪)라는 곳에 왔을 때 골목에서 제복의 어린 중학생들이 떼를 지어서 하학길에 오르고 있다. 얼마 전에 전국체전에서 맨발의 축구선수로서 화제에 오른 학교가 바로 이 학교였던가? 이런 생각을 하며 중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우리 집의 두 학생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조금 전에는 귀엽고 순박한 소녀에서 딸 연아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는 두 아들 지야와 준이의 모습이 떠 오른 것이다. 여행 중에는 가끔 이런 일이 있게 마련이다. 나의 머릿속은 세 아이들 생각이 가득 차온다.
혹시 이번 공휴일에는 연아가 다녀갈는지도 모른다. 햇병아리 교사 노릇하기에 일과가 바빠서 여간 벼르지 않고는 집에 한번 다녀가기도 어렵다고 했었다. 두 동생이 늘 보고 싶다고 했었다. 혼자 떨어져서 그대로 별 다른 불평없이 지내고 있는 것이 다행한 일이다. 내 욕심으로는 연아는 꼭 과학을 시키고 싶었다. 나는 퀴리 부인전을 즐겨 읽었고 연아도 어려서부터 크면 한국의 여류 과학자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서 아빠엄마를 즐겁게 해 주었었다. 그래서 별명도 ‘퀴리부인’이었다. 그때 지야는 ‘나폴레옹’이었다. 방 속에서도 고사리같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병정놀이를 하면서 재롱을 부렸다.
지야는 누나가 퀴리 부인된다고 자랑하는 것이 샘이 나서 하루는 이름을 지어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너는 사내대장부니까 나폴레옹 이지 뭐.” 했던 것이 우리 집 꼬마 대장의 간단한 즉석 명명식이 된 셈이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난 일이다.
우리내외는 퀴리와 나폴레옹의 커가는 모습을 보면 살아오는 동안 안생의 계단을 꽤 많이 기어 올라왔다. 그동안 퀴리는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서 교직에 발을 들여놓아 마담 퀴리보다는 페스탈로치와 인연이 더 가까워졌다. 나폴래옹은 이제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어서 대학시험을 눈앞에 두고 있어 온 식구가 날마다 마음을 조이고 있다. 우선은 장군코스와는 거리가 먼 공과를 지망하고 있지만.
퀴리의 이름은 아빠가 지었고 나폴레옹의 작명은 엄마가 한 셈인데 둘이 다 오행도 모르는 아마추어 작명가들이라 애당초 이름에 큰 기대는 안 걸고 있었지만 두 아이들이 가는 길이 이름과는 아주 다른 길을 걸을 것이 뻔하다.
이제 연아는 어린이들 콧물 씻어주고 지도안 쓰는데 열중하다가 마땅한 자리가 나서기만 기다리면 되겠고 지야에게는 우리 가정 중흥의 건실한 건축가쯤으로 상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집에서 응석받이 노릇만 하던 막내둥이 준이란 놈이 올 봄에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하고 의젓해졌다. 아빠를 첫 주자로 해서 누나, 형에 이어서 우리팀 인생계주(人生繼走)의 마지막 주자가 된 셈이다.
연아나 지야에게는 실로 너무나 거창한 이름을 걸어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놈에게는 별다른 이름을 붙여 줄 생각도 않고 두 아이들 그늘에 묻혀서 자라왔다. 그런데 이제 어차피 이 놈에게도 직업이름이건 위인의 이름이건 무언가 하나를 따로 지어서 보이지 않는 호신패마냥 매달아 줄 때가 왔다. 아빠나 엄마 중 누군가가 작명가의 실력을 한 번 더 발휘하지 않으면 안될라나보다.
며칠 전에는 학교에서 준이의 신상조사서에 장래의 직업이나 희망을 적어내라고 독촉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직 중학 1학년 짜리 어린 아이의 직업을 고르라는 학교 측의 의도가 결코 뼈 있는 다짐이 아닐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급한 다짐에 한참 고소를 지었다. 우리식구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이 마지막 주자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놈에게는 어떤 이름의 코스를 지목해주는 것이 가장 평탄하고 행복한 길일까 하고 생각에 골몰했었다. 우리 모두의 뒤떨어진 계주를 어린 준이에게 기대라도 걸기나 하듯.
과연 우리 준이에게 어떤 길을 골라주어야 할까? 정치가. 행정가, 은행가, 실업가, 공무원, 외교관, 의사, 법관, 교원, 기술자. 무역업, 신문인, 항공사, 출판업, 농업, 상업, 공업, 예술가, 연예인 ……. 흡사 어떤 인생의 정류장에 서서 멀리 늘비하게 적힌 인생의 행선지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나는 가끔 버스정류장에 서서 행선지의 표지를 바라보면 이상한 착각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여행하는 나그네, 어떤 행선지를 골라서 제각기 떠나야 할, 또 떠나고 있는 승객들이 아닐까하고. 그리고 우리 모두 표를 사서 버스를 타듯이 가벼운 기분으로 평탄한 인생가도를 바르고 안락하게 달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우리 준이에게는 어떤 길을 골라주어야 할까?
나는 아직도 명상에 잠겨 있고 우리의 차는 가도 가도 끝없는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인생의 여행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現代文學,19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