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時調
시조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먼저 노래를 뜻하는 말인 가요(歌謠)·가곡(歌曲)·영언(永言)·시절가(時節歌)·신성(新聲)·시여(詩餘) 등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문학 갈래로서의 명칭은 단가(短歌)가 널리 사용되었으나, 용어의 지칭 범위가 넓고 다양하여 사용되지 않고, 가곡으로 부르는 창의 사설이라는 뜻으로 가곡창사(歌曲唱詞)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으나, 문학적 갈래 명칭은 시조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노래로 부르며 즐기던 갈래로 곡조는 16세기 무렵부터는 장중한 가곡(歌曲)창으로, 18세기 경에는 시조창으로 노래하기 시작하였으며, 20세기에 창작된 것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음악적 특성은 변했어도 문학 갈래로서의 특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조의 연원 및 변천
‘시조’라는 명칭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영조 때, 신광수(申光洙)가 그의 문집 『석북집(石北集)』「관서악부(關西樂府)」15에서 “일반으로 시조의 장단을 배열한 것은 장안에서 온 이세춘일세(一般時調排長短 / 來自長安李世春).”라고 한 구절이다.
그 뒤부터는 ‘시조’라는 명칭이 종종 쓰였음을 볼 수 있다. 정조 때 이학규(李學逵)가 쓴 시 「감사(感事)」 24장 가운데 “그 누가 꽃피는 달밤을 애달프다 하는고. 시조가 바로 슬픈 회포를 불러주네(誰憐花月夜 時調正悽懷).”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한 주석에서는 “시조란 또한 시절가(時節歌)라고도 부르며 대개 항간의 속된 말로 긴 소리로 이를 노래한다.”라고 하였다.
‘시조’라는 명칭의 원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이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시조는 문학 갈래 명칭이라기보다는 음악곡조의 명칭이다. 1920년대 후반 최남선의「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를 필두로 전개되었던 시조부흥운동과 더불어 문학 갈래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학으로서의 시조는 14세기경인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정제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있는 우리 고유의 정형시이다. 고시조로부터 현대시조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조 작품이 창작되고 정리되었다.
고시조의 경우는 조선 후기까지 대부분이 구전되었는데, 1728년(영조 4) 김천택(金天澤)이 역대시조를 수집하여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였다. 시조 998수와 가사 17편을 곡조(曲調)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한 것이며, 이후 많은 가집과 시조집이 편찬되었다. 이를 모두 정리하여 1972년 심재완이 『교본역대시조전서』로 출판하였다. 여기에는 3,335수의 고시조가 수록되었는데 43개의 가집(歌集)과 개인문집 및 판본, 사본 75종에 실린 시조로서 각 편의 이본관계도 밝힌 것이다. 1992년에는 박을수의 『한국시조대사전』이 간행되었는데 『교본역대시조전서』이후에 발굴된 자료와 개화기 신문·잡지 소재의 개화기 시조를 합한 5,492수를 정리하고 한역가(漢譯歌)를 덧붙였다.
근현대 시조의 경우는 개화기로부터 1950년까지 국내와 일본에서 발행된 한국잡지 500여 종에 수록된 창작시조 2,500여 편, 6,000여 수가 1981년에 임선묵의 『근대시조대전』으로 정리되었다.
현대로 올수록 잡지는 물론 개인 창작 시조집이 활발하게 발간되었는데, 최초의 개인 창작 시조집은 1926년에 발행된 최남선의『백팔번뇌』이다. 개인 창작 시조집은 출판사인 태학사에서 정리하였다. 1950년까지의 주요 시조집은 『한국시사자료집성』으로, 이후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으로 발간되어 2007년 102권 째인 『현대시조 100인 선집』이 출판되었다.
1990년대에는 해외에서도 창작시조집이 발간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연변대학에서 『중국조선족 시조전집』을, 미주지역에서는 미주시조시인협회가 미주시조시인 선집 『사막의 달』·『사막의 민들레』·『사막의 별』등을 발간하였다.
시조의 형식
시조는 현존하는 우리 고유의 정형시로서 그 정형성을 밝히는 작업은 오랜 과제이다. 정형성을 논의하는 형식의 문제는 문학적인 형식과 음악적인 형식 두 측면에서 모두 밝혀져야 한다. 문학적 형식으로 말하면 시조의 정형성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율격적으로 구수율·자수율·음보율 등으로 검토되었다. 어느 쪽이든 대부분 동의한 것이 3장 45자 내외로 구성된 정형시이며, 그 기본형은 다음과 같다.
초장 3·4 ∨ 4·4
중장 3·4 ∨ 4·4
종장 3·5 ∨ 4·3
이를 중심으로 시조의 정형성을 규정하려는 논의를 살펴보자. 첫 논의는 구수율(句數律)로서 초기 연구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이광수(李光洙)·이은상(李殷相)은 3행을 인정하고 각 음보를 구로 파악하여 시조의 형식을 3장 12구체라 하였고, 이병기(李秉岐)는 초장과 중장을 각각 2구로 보고 종장의 특이성을 살리기 위하여 종장만을 4구로 보아 8구체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확(安廓)·조윤제(趙潤濟) 등은 6구체를 주장하여 시조의 형식을 3장 6구체라 정의하였다.
자수율의 경우는 각 음보의 기준 음수를 결정하여 규칙성을 발견하고자 한 것인데 두 음보를 단위로 3·4조 또는 4·4조를 기본 운율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기본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기본운율에 1음절 또는 2음절 정도를 더 보태거나 빼는 것은 무방하다. 그러나 종장은 음수율의 규제를 받아 제1구는 3음절로 고정되며, 제2구는 반드시 5음절 이상이어야 한다. 이 같은 종장의 제약은 시조형태의 정형(整型)과 아울러 평면성을 탈피하며 고유의 시적 종결형식을 형성한다.
다음은 음보율로 1행이 4음보로 구성되며 세 번째 행인 종장의 경우 둘째 음보가 음수가 늘어남에 따라 두 음보 이상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시조의 정형성을 규명하기 위하여 음보의 성격을 구성하는 기저자질을 밝히려 하였다. 음보의 성격으로 정병욱과 이능우는 강약율, 황희영과 김석연은 고저율, 정광은 장단율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였으나 운율 자질의 대립이 정형성으로 규정하기에는 미흡하여 1행 4음보의 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뚜렷한 형식적 정의가 된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제시한 기본 형식 가운데 현대시의 행(行)에 해당하는 장(章)은 한결같이 3장이라고 하니 시조가 3장으로 구성되었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시조의 기본 형식은 초장(初章)·중장(中章)·종장(終章)의 3행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엇시조에서나 사설시조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이 장을 현대시의 개념인 행으로 보아 시조의 형식은 3행으로써 1연을 이루며, 각 행은 4음보격(四音步格)으로 되어 있다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4보격은 다시 두 개의 숨묶음으로 나뉘어 그 중간에 사이쉼이 있으며, 각 음보는 세 개 또는 네 개의 음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형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상적인 기준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절대 불변하는 고정적인 제약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 자체의 성질에서 오는 신축성이 어느 정도 허용되는 기준이다.
위에서 제시한 기준형을 중심으로 시조를 분류해 보자. 기준형에 해당하는 시조를 단형시조(短型時調) 또는 평시조(平時調)라고 부르는데, 그 보기는 다음과 같다.
이시렴 브디 갈
아니가든 못
쏜냐
無端이 슬튼야
의 말을 드럿는야
그려도 하 애도래라 가는
을 닐러라(『해동가요(海東歌謠)』)
그리고 종장 제1구를 제외한 어느 구절이나 하나만 길어진 것을 중형시조(中型時調) 또는 엇시조(旕時調)라 부르고, 두 구절 이상이 길어진 것을 장형시조(長型時調) 또는 사설시조(辭說時調)라고 부른다. 사설시조는 대개 중장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엇시조와 사설시조의 보기를 차례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압못세 든 고기들아 뉘라셔 너를 모라다가 넉커늘 든다
北海 淸沼를 어듸 두고 이못세 와 든다
들고도 못나
情은 네오
오 다르랴『화원악보(花源樂譜)』
개를 여라믄이나 기르되 요 개
치 얄믜오랴
믜온 님 오며
리를 홰홰치며
락
리
락 반겨셔 내
고
고온 님 오며
뒷발을 버동버동 므르락 나오락 캉캉 즈져셔 도라가게
다
쉰밥이 그릇그릇 난들 너 머길 줄이 이시랴 (『청구영언(靑丘永言)』
이 세 종류 중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이 창작된 시형은 단형시조이다. 그리고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정철(鄭澈)의 「훈민가」등과 같이 한 제목 아래에 내용상 연결되거나 관련된 몇 편의 시조로 구성된 연시조(聯時調)가 있다.
현대적 형식으로는 1930년대 초 이은상(李殷相)이 초장·종장 2행으로 창작하여 발표한 양장시조(兩章時調)가 있으며 한시 형식을 염두에 둔 사장시조(四章時調)도 시도되었다. 더욱 극소화된 형태로 종장만으로 이루어진 단장시조(單章時調)가 창작되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전통 정형시인 와카[和歌]의 영향으로 여겨지며, 지나친 작위성으로 인해 지속되지는 않았다.
시조의 형성
시조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형식의 연원과 형성시기를 따져야 하고, 형식은 다시 문학적 형식과 음악적 형식의 연원이 규명되어야 하는 복잡한 문제이다.
문학적 형식으로 논의하자면, 시조가 무엇인가 정의하는 데에 따라 그 형성시기를 달리 할 수 있다. 3행이고 1행이 4음보이며, 1음보를 이루는 기준음절수가 4음절인 형식을 갖춘 노래를 시조라고 한다면, 이러한 형식을 갖춘 시조는 일찍부터 있어 왔다. 백제노래라고 여겨지는 「정읍사(井邑詞)」나 고려 속악가사인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에 그런 형식이 보인다. 현대시라고 쓴 작품에도 동일한 형식을 사용한 사례가 더러 있다. 그런 것은 어느 때든지 있게 마련이고, 독자적인 특징을 가진 문학갈래라고 의식되지 않았다. 이를 ‘유사시조’, 혹은 ‘광의의 시조’라고 한다.
어느 시기에나 존재하는 4음보 3행시의 ‘광의의 시조’보다 한 가지 요건이 더 있어 셋째 줄인 3행의 첫 음보가 기준음절수보다 적은 2자나 3자이고, 둘째 음보가 기준음절수보다 많은 5자나 6자인 것은 ‘협의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광의의 시조에 좀 특별한 규칙, 장치를 적용한 인공의 창조물이 ‘협의의 시조’이다.
이 협의의 시조는 문학사의 일정한 시기에 특정 문학담당층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창조물로, 그 시기가 언제이며 창조한 집단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 논의의 초점이 되는데 자료 사정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바로 이 협의의 시조 형성시기에 집중된 논의를 하고 있는데 대개 이 시기를 14세기 경인 고려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현전하는 시조집 중에는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나 백제의 성충(成忠), 신라의 설총(薛聰) 등의 작품이라고 실려 있는 경우가 있으나, 거의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런데 「청구영언」 이하 여러 시조집에 수록된 자료를 보면 고려 후기에서 조선초의 작가로는 충숙왕 때의 우탁(禹倬)과 충혜왕 때의 이조년(李兆年), 공민왕 때의 이존오(李存吾)·길재(吉再)·원천석(元天錫)·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과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정도전(鄭道傳)·변계량(卞季良) 등 비교적 많은 작가들이 있고 작품도 많아 적극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즉 이들은 고려말 조선초의 유학자들로 당대의 정신적 정치적 중심인물이 되면서 이들의 지도이념이 문화계의 전면적인 개편을 유도하였고, 문학에서는 새로운 서정시인 시조를 성립시키는 동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후기 이들은 이미 세련된 문화와 예술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이시기 형성된 시조시형이 그보다 앞선 시대의 문학이나 음악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시조의 형식적 기원에 대한 연구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외래기원설이다. 중국의 불가(佛歌)에서 수입되었다는 설과 한시(漢詩)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이 두 설은 모두 오늘날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재래기원설이다. 이는 다시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신요(神謠)나 무당의 노랫가락이 시조의 원형이라는 설이고, 둘째는 시조의 기원을 향가에서 찾을 수 있다는 설이다. 셋째 「정읍사(井邑詞)』와 같은 6구체가(六句體歌)가 그 기원이라는 설과 고려가요와의 관련 속에서 시조시형이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만전춘 滿殿春』의 제2연과 제5연에서 광의의 시조 형식이라고 볼 수 있는 형식이 발견되는데 다음과 같다.
耿耿孤枕上에 어느
미 오리오
西窓을 여러
니 桃花ㅣ發
두다
桃花
시름업서 笑春風
다 笑春風
다 (제2연)
南山에 자리 보와 玉山을 버여 누어
錦繡山 니블안해 麝香각시를 아나 누어
藥든 가
을 맛초
사이다 마초
사이다(제5연)
반복되는 가사의 문제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1행 4음보의 3행시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어 협의 시조 기원과의 관련성을 논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짧은 2행 형식의 민요가 모태가 되어 한 행이 더 첨가되어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무당의 노랫가락의 경우는 도리어 시조의 영향으로 성립되었다고 보며, 나머지의 경우 어느 한 설로 구체화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며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하겠다. 다만 2행의 짧은 서정민요를 모태로 하여, 광의의 시조에서 협의의 시조로 상승하는 가운데 향가, 특히 10구체 향가의 감탄사를 이용한 종결 형식과 광의의 시조 형식이 보이는 고려가요의 영향으로 세련된 형식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시조의 전개[1. 고려 후기 발생기의 시조]
고려후기 14세기 시조는 성리학을 중요 이념으로 하는 유학자들이 전대의 문학 및 음악·예술의 형식을 극복하면서 창작되었다. 노년의 지혜를 말하는 탄로가(嘆老歌)류나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시조와 같이 주위에서 흔히 보는 경물을 노래한 것과 소망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 번민하는 심정을 토로하는 작품을 흔히 볼 수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이룩되는 과정이나 그 직후의 상황에서 시조가 긴요한 구실을 했다. 특히 조선의 건국을 앞두고 태종이 될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부르자,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로 응답했다는 일화가 후대 문헌에 전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시조를 창작했다는 것은 시조의 구실이 크게 확대된 증거이다.
또한 정치적 격변기라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고려에 대한 절개를 노래하는 절의가(節義歌), 고려 멸망 후 지난날의 왕조를 추억하면서 옛 도읍지인 송도(松都)를 찾은 느낌을 읊은 회고가(懷古歌)들이 나타난다. 이 시기 당대의 정치에 관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둘러서 은근하게 나타내는 것이 한시에서는 가능하지 않아 새로 등장한 서정시인 시조가 소중한 기여를 했다.
[2. 조선 전기의 시조]
개인 서정을 노래하는 시조는 정치적인 변동과 관련되어 있더라도 공식적인 발언과는 무관하다. 조선왕조가 창건된 이후에도 시조는 개인의 서정을 노래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공적인 기능이 없는 시조에서는 왕조 창업에 대한 칭송보다는 고려유신들의 비탄적인 회고가들이 고려후기의 작품을 이었고, 단종의 퇴위(退位)에 관련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 등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의 절개를 읊은 절의가류가 주를 이룬다.
15세기 시조 작품은 절의가류와 함께 조선왕조가 비교적 안정되고 모든 기구가 정제됨에 따라 사대부들의 여유 있는 생활이 시조의 주된 소재를 이루었고, 시조는 그들의 정신적 자세를 표현하는 그릇이 되었다.
그 시발점을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로 볼 수 있는데, 사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군주의 은혜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을 담은 종장이 반복되는 연시조로서, 강호에서의 조화로운 삶을 노래하고 네 계절의 경물을 노래하는 사시가의 한 전형이 되었다. 언뜻 보아 경치를 노래하는 서경시(敍景詩)처럼 보이는 이들 작품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유교적인 이념이다. 즉, 자연 속에서 자연미를 즐기며 감상하면서도 유교의 이념이나 인간의 도리를 중심으로 하는 사대부 정신을 노래하였던 것으로 소위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전통을 수립하게 된다.
이는 시조를 통해 자연 속에서 이치를 발견하여 내면을 수양하는 덕목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사대부란 현실, 벼슬길에 나아가면 대부(大夫)가 되며, 물러나 수양을 하면 선비인 사(士)가 되는 양면적인 성격을 지녔다. 이상실현을 위한 정치참여와 마음 수양을 위한 자연완상의 조화로운 화합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힘들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왕조를 건국한 공신들보다 더욱 유학의 본질적 이념에 투철한 신흥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 신흥세력의 역량이 축적되며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가운데 많은 갈등을 유발하여 권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시조는 마음이라는 추상적 실체를 구상화하여 스스로의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심리적 갈등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거나, 자기 수양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으로서의 자성(自省)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양살이를 하든지, 강호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조선조 사대부들은 유교적인 이념을 잊지 않았으며,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아 시조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16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세 방향으로 시조는 전개된다.
첫 번째는 이른바 사화와 당쟁으로 인해 은거하는 선비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완상을 유교의 본질적인 이념, 도학(道學)을 추구하는 강호가도가 융성하게 된다. 영남가단의 중심을 이루는 이황(李滉, 1501~1570)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대표 작품으로 하여 이이(李珥, 1536~1584)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까지 많은 작품들이 창작된다.
이들은 자연과 자연 속에 담겨 있는 유교적인 이념들을 조화롭게 우아한 품격으로 노래하는 것으로 “강호시조”라 하여 시조의 중심축을 이루게 된다. 영남가단의 강호시조와는 달리 호남가단에서는 송순(宋純, 1493~1583), 정철(鄭澈, 1536~1593) 등에 의해서 도리보다는 흥취를 담는 풍류(風流)를 자랑하였다.
두 번째 경향으로는 유교 이념의 실천적인 면을 노래하는 것이다. 오륜(五倫)이라는 윤리적 덕목을 주제로 한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오륜가」를 들 수 있으며, 정철(鄭澈)의 「훈민가(訓民歌)」가 있다. 이들은 사대부의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잊지 않고 있으며, 자기성찰 혹은 백성을 계몽하기 위하여 유교적 윤리관을 담아 교훈적인 시조를 창작하였다. 「훈민가」는 훈계하는 사람의 자세를 버리고 백성의 처지에서 노래하여 시조에서의 언어적인 면에서나 사회윤리적인 면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이와 같은 사대부 정신의 두 방향은 그들의 이념을 실천하는 벼슬길에 있거나 수양을 위한 자연에 있거나 어디에 있건 간에 재지(在地)적인 향촌사족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조에 성리학적인 질서를 표현하였다. 특히 단형시조로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이들의 규범적인 미의식을 드러내는 형식으로 여러 계통의 연시조 창작에 적극성을 보였다.
마지막으로는 사대부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새로운 담당층에 의해 새로운 내용이 등장하는데 바로 황진이(黃眞伊)와 같은 기녀들의 시조 작품이다. 사대부의 풍류에 참여하는 기녀들은 사대부들의 문학세계에도 참여하여 시조 작자층의 확대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애정을 참신한 발상으로 창작함으로써 서정시의 영역을 크게 넓혔다.
이와 같이 조선전기의 시조는 사대부라는 시조 창작주체의 역사적·철학적 조건들과 관련된 사대부 정신을 담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미적인 체험과 정서표출이라는 구체적인 인간의 서정성을 담아내기에 적합하여 융성하게 되었다.
[3. 조선 후기의 시조]
시조의 경우는 조선 전기에 이미 사대부의 문학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형식이나 표현이 한시와 맞설 수 있을 만큼 정비되어 사대부들의 조화로운 세계관을 우아미로서 구현했다. 시조는 물러나 강호에 은거할 때는 정신적인 위안을 얻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며 윤리적 교화를 펴고자 하는 의지도 나타내도록 하는 구실을 했다.
조선 후기 임진·병자 두 차례의 병란을 겪으면서 사회가 급변하고, 따라서 시조의 내용이나 표현도 변화하게 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정치·사회체제의 모순이 드러나고, 유학도 비판을 받게 되는 등 사대부들 사이에서 반성적 자각이 일어나기도 하고,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서민들의 자각도 이루어졌다.
조선전기에 주류를 이룬, 자연을 유학적 이념으로 노래하는 강호가도적 경향은 조선후기까지 지속되는데, 17세기에 강호가도의 모습은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서 절정을 이룬다.
「어부사시사」는 고려조부터 계속되는 「어부가」의 전통을 이으면서, 4계절마다 10수씩 모두 40수로 된 연시조이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드높이고 간결하면서도 대구법(對句法), 자연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詩想)의 전개 등 품격 높은 표현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움을 노래하는 시조문학사의 극치를 장식하였다.
정권다툼에서 물러나 진출할 길이 막힌 사대부들의 경우는 몰락을 막기 위해 성현의 가르침을 강조하기도 하고, 위기를 인식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과정에서 연시조가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고응척(高應陟, 1531~1605)의 「대학곡(大學曲)」을 비롯한 박선장(朴善長, 1555~1616)의 「오륜가(五倫歌)」류는 유교이념에 더욱 충실한 시조를 지어 전시대의 정신을 되살리고 고착시키고자 하였다.
한편으로는 변화하는 시대를 담는 시조들이 등장한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가노라 삼각산아…”, 이덕일(李德一, 1561~1622)의 「우국가(憂國歌)」 28 수 등 일찍 체험하지 못했던 전쟁을 겪으면서 우국(憂國)의 충정을 토로하는 시조가 창작되었다.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과 일상생활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대부 시조가 등장하였는데, 김광욱(金光煜, 1580~1656)의 「율리율곡(栗里遺曲)」에서는 엄숙한 사대부의 체모를 버리고 삶의 곤궁을 노래하는가 하면, 위백규의 「농가구장(農歌九章)」에서는 순우리말로 농민의 마음과 농사현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전기에 등장한 기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이들에 동조하는 풍류객까지 참여한 애정시조류의 작품이 많아졌는데, 입에 담기 어려운 말과 절묘한 말장난을 담거나 역설적이며 참신한 표현을 개척했다. 이런 경향은 많은 무명씨들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18세기를 넘어서면서 사대부들의 시조 감상과 향유, 인식 등에서 변화가 일어나는데 따라 시조의 연행공간이 형성된다.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유흥공간이 확대되며, 전문적인 가객의 등장과 이를 후원 혹은 향유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 들이 그 중심을 이룬다. 경화사족들은 경화세족(京華世族) 혹은 경화거족(京華巨族)으로도 불리는데, 서울 근교에서 거주하는 근기(近畿) 남인, 소론, 북학을 수용한 노론 낙론계 학자들이 중앙학계의 주류를 이루면서 여러 대에 걸쳐 관료생활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여 벌열(閥閱)을 형성하기도 한 집단이다.
이들은 이전의 성리학자들이나 같은 시기 재지(在地) 혹은 향촌(鄕村)의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학문교류에서 학파의 정파, 신분을 뛰어넘어 행해졌으며 음악이나 골동 등 예술동호회를 구성하기도 하였는데, 서로 취향이 같고 동질적인 문예 배경을 가진 자는 모두 구성원이 될 수 있어 당대의 전문 가객들과의 교유가 가능했다.
이런 시기의 시조는 강호자연이나 전가(田家)에서 이룩한 시조의 역량을 이어가면서 시정의 유흥공간에서 연회용 전문 공연음악으로서의 가곡창과 대중적 풍류음악으로서의 시조창과 같이 성악으로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서울 중심의 시조향유 상황을 반영하는 가곡의 분화, 가집 편찬 등이 전개된다.
또한, 조선 후기 왕족이자 사대부인 이세보(李世輔)가 개인 시조집 《풍아(風雅)》를 비롯해서 459 수의 작품을 남겼다. 현실 고발과 비판적인 주제의 시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주면서 삶의 현실과 체험을 노래하여, 시조의 우아하고 조화로움을 강조한 전통을 혁신하고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조선 후기까지의 시조는 가집(歌集)으로 정착되기 전까지는 대부분이 구전되고 있었으며, 창작 또한 연행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시조를 구성하고 있는 공식구(公式句) 혹은 관습적인 표현, 상투어라는 요소를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시행 종결(詩行終結)의 방법으로 3행 첫 음보에 ‘어즈버, 아희야, 두어라’와 같은 감탄사가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까마귀와 같은 어휘의 공식적 이미지를 사용하거나 ‘나도 이럴 망정·그를 슬허 하노라·함께 늙자 하노라’등의 반복되는 표현이나 문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식적인 표현은 문학담당층간의 경험을 공유하여 시조와 같은 짧은 시형에 표현의 경제성을 추구할 수 있었던 반면, 개성적인 표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습적인 요소와 개성적인 표현이 잘 어우러져서 문학성이 뛰어난 시조들이 창작되어 시조사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시조의 전개과정에 조선 후기에는 시조 작품 내적인 변화를 넘어서 외연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단형 시조의 형식을 파괴하는 장형 시조 즉 사설시조가 등장하며, 사설시조 등장의 주역인 전문 가객들에 의해 그 때까지 구전되던 시조가 수집되고 국문기록으로 정착하게 된다. 또한 한문학·국문문학·구비문학이 활발하게 교류하는 가운데 시조가 한자로 번역되어 소악부(小樂府)라는 형식을 이루게 된다.
[4. 사설시조의 등장]
평시조, 단형 시조 형식에서 벗어나 두 행 이상이 6음보 이상이며 어느 한 행이 8음보 이상 늘어난 것부터 사설시조라고 할 수 있는데, 약 400여 수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사설시조는 길이가 길어 장형시조(長型時調)라고도 하고, 평시조의 형식을 파괴했다고 해서 파형시조(破型時調)라고도 한다. 사설이란 음악적으로 말을 촘촘히 박아 넣는다는 뜻의 ‘엮음’을 다르게 일컫는 말이다.
사설시조가 언제 처음 생겨났는지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대체적으로 17세기에 이르러 나타났으리라고 추정되나, 구체적으로 성행되었던 사실은 18세기 자료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김천택이 『청구영언』에 사설시조를 ‘만횡청류(蔓橫淸類)’라고 하고, 「만횡청류서」를 써서 말씨가 음란하고 뜻하는 바가 옹색하지만, 예로부터 전해지기 때문에 수록한다고 하여 구체적으로 존재를 확인하게 했다.
사설시조의 형식의 정의와 기원에 관한 논의는 문제로 남아 있지만, 조선 후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담당층과 변화하는 문화와 맞물려 사회 저변에 전승되다가, 상승하는 여러 형태의 노래에서 요구하는 바를 받아들여, 문화의 전면으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16~17세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조선왕조의 정치·사회체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모순과 허점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에 사대부 자체내의 비판적 시각을 지닌 세력이 나타나고, 미미하나마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평민의식으로부터도 저항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도전과 저항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은 이 땅의 정신생활면에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켜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 하나의 분수령적인 구획을 긋기에 이르렀다. 문학예술부문에 이 실학사상이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과거의 율문 전성시대를 극복하고 현실과 밀착되어 사실적인 성격을 위주로 하는 산문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바탕을 닦아주었다는 데 있다.
이런 경향 가운데 일부 비판적 사대부들에 의해 단형시조의 정형률을 깨고 새로운 가치관에 의하여 사설시조를 창작하게 되었으며, 전문 가객 등의 새로운 담당층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하여 더욱 발전한다. 전문 가객을 비롯한 평민들은 일부 비판적인 사대부에 못지않게 날카로운 현실의식으로 시조의 전통적인 미학을 변혁하고 기존의 지배이념을 극복해 나갔던 것이다.
이들은 한편에서는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이념과 통치방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숭고하거나 우아한 사대부의 미의식을 수용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그들이 배경인 평민, 피지배 계층의 가치관을 유감없이 표출하였다.
사설시조의 내용으로 볼 때, 남녀간의 파격적인 행동을 대단한 입담과 재치로 담아 내면서, 납득할 수 없는 규범으로 위장된 질서를 부수어 놓거나 기존질서에 대한 반발과 비판을 여러 겹으로 얽어 표현하였다. 여기에 농사꾼·장사꾼의 사설도 한몫을 하도록 해서 사회 저층에서의 항변을 다양하게 나타내는 등 사대부시조의 고매한 품격과 반대가 되는 잡소리라면 무엇이든지 등장시켜 희극적인 미학을 실현하였다.
사설시조의 비유는 그동안 관습적으로 인식되어 온 세계상을 버리고 자아에 누적된 관념도 씻어 내려고, 서정시와는 맞지 않을 듯해서 버려두었지만 사실은 생활을 통해서 나날이 부딪치는 갖가지 구체저인 사물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또한 사설시조에서 주로 사용한 해학과 풍자 또한 관습적인 설명을 젖혀 버리고 삶의 실상이 부조화스럽고 불합리한 대로 그냥 노출하여 골계미를 기발하게 표현하였다. 이는 작자층이 저층으로 확대되고 다변화되어 그런 소재가 풍부하게 마련되었으며, 다양한 표현 방법이 개척되었다.
이와 같이 사설시조는 조선 후기에 문화의 전면으로 상승한 판소리·탈춤과 함께, 삶의 실상, 시정에서의 생활을 거침없이 있는 그대로 나타내 웃음을 일으키면서 삶의 실상을 시비하는 점에서, 언어구사나 표현방식에서 많은 유사점을 지닌다.
사설시조는 판소리처럼 좌상객을 의식해야 하는 공연물이 아니었으며, 탈춤처럼 전래된 내용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다채롭고 기발한 표현을 더욱 적극적으로 개척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상생활의 구체성과 사실성에 기반을 둔 사실주의적 문학정신, 해학과 풍자정신, 권위에 도전하고 윗 사람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비판정신이라는 조선 후기의 시대정신을 표출하면서, 근대의 사실주의 문학으로 전개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5. 전문 가객의 출현과 가집 편찬]
이와 같이 기존 사대부들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새로운 시조형, 사설시조를 창작하게 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전문 가객들이다.
시조는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문학이면서 음악이기도 하여 공연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노래는 작자 자신이 부르기보다는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맡겨서 부르도록 하는 경우가 더 흔했다. 한동안 주로 기녀들이 그 일을 맡았다가, 차차 가객(歌客) 또는 가자(歌者)라고 하는 기능인이 큰 몫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전문가객이라 할 수 있는데 언제부터 있었던지 알기 어려우나, 18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가곡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조창(時調唱)을 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는데 좀더 낮게 평가되는 활동을 했다.
이들 전문가객들은 자신도 전문 가객이었던 김수장(金壽長, 1690~?)이 편찬한 가집 『해동가요』에는 17, 18세기에 걸쳐 활약한 가객 56인의 명단이 실려 대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들은 대개가 중인보다 한 등급 낮은 서리 정도로 문벌이나 지위가 낮은 인물들이며, 사회적으로 크게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대의 예술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경화사족들과의 교류를 통해 유형이든 무형이든 관계 속에서 활동했다. 이와 같이 16세기 이래 시조의 창작에 참여한 기녀들과 함께 시조문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이들의 업적을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로, 이들은 끊임없는 연수를 통하여 시조의 작법과 가곡 창법을 전수하고 있다. 역사적인 문헌에 나타난 바로는 『광해군일기』에 당시 고부군수를 지냈던 이승형(李升亨)이 『고금가사 古今歌詞』라는 한 권의 책을 가지고 기녀인 은개(銀介)에게 5, 6년 동안 노래를 가르친 기록이 있다.
김수장이 소개하고 있는 가객들 가운데 가장 시대가 앞선 인물인 허정(許珽)은 이승형이 은개에게 노래를 가르쳤던 17세기 초엽에 태어나서 승지·부윤(府尹) 등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광해군일기』에 보이는 이승형에 대한 기록은 평민가객들이 활발하게 배출되기 이전에는 일부 선구적인 사대부들이 노래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들 일부 선구적인 사대부들과 그 뒤의 전문가객들 사이의 관계는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8세기의 전문가객들이 시조를 부르는 가곡 창법과 작법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한 흔적은 다수 발견된다.
장안으로부터 관서지방으로 시조의 장단법을 가져갔던 이세춘(李世春)이나 영남지방에 가서 시조의 창법을 전수하였던 김유기(金裕器), 김유기의 집을 방문하여 시조를 논하였던 김천택(金天澤) 등은 모두 18세기의 가객들이다. 이외에도 18세기 가객들로는 박상건(朴尙健)에게서 창법을 익힌 김우규(金友奎)와 김성기(金聖器)에게 거문고와 퉁소를 배운 김중열(金重說)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19세기의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등의 활동도 18세기의 가객들이 수립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이들은 사설시조라는 새로운 시형을 발굴하고 발전시켰다. 현전하는 사설시조는 작자를 알 수 없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또 가객들이 창작한 작품도 평시조가 대부분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18세기의 평민가객을 대표하는 김수장이 36수의 사설시조를 창작하였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당시의 문학과 음악은 이들 평민가객에 의하여 발달하였고 동시에 이들의 독자적인 미의식인 희극미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시기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성행, 가사문학의 변화, 판소리사설의 완성 등 일련의 문학 내적·외적 변이과정과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셋째로,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 가단(歌壇)을 형성하고 가집을 편찬함으로써 시조문학의 항구적인 발전을 꾀하고 있다. 전문가객들은 특히 서울에서 시조 애호의 열의에 힘 입어 자신들이 전수하고 발전시킨 가곡 등을 공연하고 다니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애호가들을 즐겁게 하고 공연을 풍성하게 하자면 작품이 많아야 하겠기에, 역대 시조를 모아 가집을 편찬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가객들은 친분 관계를 가지고 함께 공연하고 창작했다. 그 모임을 일컫기 위해 ‘가단(歌壇)’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가객들의 가단 활동은 위항시인들이 시사(詩社)를 결성해서 한시를 짓는 데 열을 올린 것과 함께, 지체 낮은 사람들의 문화운동으로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18세기 초반에 일군의 가객들과 더불어 가단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는 김천택은 주의식(朱義植)의 작품을 구해준 변문성(卞文星), 김성기의 작품을 얻어준 김중려(金重呂) 등과 협력하고 그 밖의 많은 가단 구성원들의 이해와 협조를 얻어 가집 『청구영언』을 편찬하였다.
김천택이 이끄는 가단의 일원이었던 김수장은 18세기 후반에 새로이 배출된 신진가객들과 더불어 가단을 재편성하여 발전시켰으며, 이들의 협조를 얻어 가집 『가곡원류』를 편찬하였다. 이들이 편찬한 『청구영언』·『해동가요』·『가곡원류』는 다른 가집들에 비하여 수록한 작품수가 많고 그 편차체제(編次體制)가 정연하여 3대 가집집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 밖에도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의 『고금가곡 古今歌曲』, 이형상(李衡祥)의 『병와가곡집 甁窩歌曲集』, 편찬자 미상의 『화원악보』, 김교헌(金喬軒)의 『대동풍아 大東風雅』 등의 가집들이 전한다.
그리고 가집의 서문과 발문을 통해 시조야말로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에서 아래로 위항천류(委巷賤流)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짓고 즐기는 우리 노래이기에 한시에 못지않은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일을 거듭 해서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시조가 민족문학으로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인식이 확대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6. 한역 시조의 전개]
조선 후기에 시조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기록하고자 하는 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조윤제가 《조선시가사강》에서 ‘시가의 한역(漢譯)시대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국문시가를 한역한 첫 사례는 고려 말 이제현과 민사평이 고려 속요와 민요로 추정되는 작품을 7언 절구의 한시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것을 ‘소악부(小樂府)’라고 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단형 시조를 중심으로 많은 작품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국문시가를 번역하는 작업은 국문시가는 온전하지 못하거나 격이 낮다고 생각하거나, 국문시가를 역사 기록에 올리려면 국문이 아닌 한문으로 적어야 길이 남긴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생각은 황윤석(黃胤錫, 1729~1781)이 「고가신번」(古歌新翻)의 서문에서 시조가 말로만 전해지다가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한문으로 기록한다고 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시조를 열심히 짓는 사람가운데 자신의 시조를 한역하여 문집에 수록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고, 아주 훌륭한 작품이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된 점을 애석하게 여겨 후대인이 한역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념의 지표가 되는 것에 집중되었는데 이 결과 시조 전체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5백여 수가 한시 7백여 수로 한역되었다.
조선 중기 시조 한역은 일찍이 17세기 이민성(李民宬, 1570~1629)에게서 볼 수 있다. 이민성은 12수의 시조를 한역하였으며, 이어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번방곡(飜方曲)」 11수, 이기휴(李基休, 1650~1710)의 「단가 19 장(短歌十九章)」 등이 있다. 18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은 시조 한역에 대단한 관심을 보여, 「금속행용가곡(今俗行用歌曲)」 55수와 「호파곡(皓皤曲)」 16수를 번역하였다.
18세기에는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청구단곡」(靑邱短曲) 40수, 황윤석의 「고가신번」 29수와 속편 14수 등이 있다.
19세기의 소악부 시대를 여는 신위(申緯, 1769~1845)가 「소악부」라는 명칭으로 40수를 번역하여 소위 번역시조의 명칭을 ‘소악부’라 하게 되고 시조를 한역하는 표준형을 제시하였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소악부」 45수, 이유승(李裕承, 1835~?)의 「속소악부(續小樂府)」 10 수가 바로 「소악부」의 뒤를 이었고, 이외에도 권용정(權用正, 1801~?)의 「동구(東謳)」 30수,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의 『교방가요(敎坊歌謠)』한역시 100 수 등이 있다.
시조를 한역하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어떤 형식을 사용하는가였다. 시조를 시로 옮기려면 한시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는데, 3행의 시조 형식과 4행의 한시 형식이 달라서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시조든 한시든 어느 한 쪽의 형식을 선택하여야 했다.
이에 대해 신위는 시조를 번역한 시 이름을 「소악부」라고 하였는데, 소악부는 고려 때 이제현이 사용한 용어로 ‘소’라는 짧은 형식, ‘악부’는 우리말 노래를 옮겨놓은 한시라는 뜻이다.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신위는 이제현이 민요를 한역할 때 사용한 칠언절구의 짧은 형식을 시조 한역의 고정된 형식을 선택하였다.
시조에 상응하는 한시의 형식은 칠언절구라고 판단하고 선택하였지만, 시조를 한시로 옮기는 방법에는 ‘장단기구(長短其句)’와 ‘산압기운(散押其韻)’이라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장단기구’는 시조를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해서 칠언절구라는 완결된 형식에 맞도록 고쳐야 한다는 뜻이고, ‘산압기운’은 시조의 가락이나 운치를 한시 형식에 구속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옮겨다놓는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산압기운으로는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번역한 다음의 「청구단곡(靑邱短曲)」의 제3곡「막연송(莫燃松)」과 같이, 한시의 고유 형식이 아닌 1행의 글자 수가 다르게 번역하였다.
莫燃松明月上前峰。솔불 켜지 마라 앞 산봉우리에 밝은 달 돋아온다.
莫設席紅葉滿溪石。자리 깔지 마라 붉은 잎이 시냇가 돌에 가득 찼다.
兒兮急速取酒來。아이야, 급히 술 가져 오너라
山肴野蔌聊以娛今夕。 산, 들 나물 안주로 오늘 저녁 즐겨 보리라
집方席 내지 마라 落葉엔들 못안즈랴
솔불 혀지 마라 어졔 진달 도다 온다
아희야 薄酒山菜
만졍 업다 말고 내여라
「막연송」은 한호(韓濩, 1543~1605)의 작품으로 번역된 시는 한시의 형식도 아니고, 시조의 형식도 아니어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이 외에도 이형상 또한 시조를 한시로 옮기면서 한시 고유의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번역시로 시조에 대한 이해를 돕고 시조의 평가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고, 이형상은 시조의 형식에 따라 1줄이 5자로 구성된 6줄의 한시로 옮기기도 하였다.
장단기구 방식의 경우 시조를 변형시키더라도 7언절구의 형식을 유지하는 것인데, 마침 신위가 똑같이 한호의 시조를 번역하여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다. 다음은 『소악부』 제22번의 「관간빈(慣看賓)」이다.
休煩款待黃第薦 귀찮게 누런 자리 깔기를 기다리지 말고
且座何妨紅葉堆 또 낙엽더미에 앉은 들 무슨 상관 있으랴
豈必松明燃照室 소나무를 태워 밝힐 필요 없으니
前宵落月又浮來 전날 저녁에 진 달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한호의 시조와 비교해 볼 때, 시조의 초장이 7언 한시의 첫 줄과 둘째 줄을 구성하고 중장이 셋째 줄, 넷째 줄을 구성하며 종장을 생략하였다. 이와 같이 어떤 방식이든 시조를 한시의 방식으로 번역하는 데는 문제가 있지만, 조선 후기에는 시조를 중심으로 국문시가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조동일은 이들을 ‘번역악부(飜譯樂府)’라고 하여 조선후기 한문학, 국문문학, 구비문학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국문시가가 한문학을 쇄신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았다.
요약 원래 악곡의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후대에 시형을 가리키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시조는 '시절가조'의 준말로서 이해되며 〈청구영언〉·〈해동가요〉 등에서는
'영언'이나 '가요' 등으로 불리고 있다.
시조의 기원은 한시기원설·별곡기원설·민요기원설·향가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발생시기는 고려말 13세기경에 고려가요의 악곡과
시형을 모태로 하여 발생했으리라고 보고 있다.
시조의 정형시형이 완성되기까지는 고려가요 이외에 여러 가지 시가형태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