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예천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피해>
예천에서는 전쟁 발발 전인 1949년 1월 22일에 공출문제(또는 추곡수매)로 반상회에 참가했던 예천 유천면 고림리 주민 10여 명 중 2명이 경찰에 의해 사살당하는 등 1949년 한 해 동안 50여 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나자 예천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연행당해 이중 150여 명이 백골부대 1개 소대 군인 등에 의해 세 번에 걸쳐 서로 다른 곳에서 희생되었는데, 7월 13일에는 예천읍 고평나들에서, 7월 14일에는 개포면 경진나들에서, 7월 16일에는 용궁면 원당고개에서 희생되었다. 예천경찰서 근무자들은 경진나들과 고평나들에서는 ‘백골부대’ 군인들이, 용궁면 원당고개(산택)에서는 경북경찰국 특별경찰대가 총살한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사건 당시 예천지역에 주둔한 국군은 8사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골부대’라고 불린 국군의 소속이 확인되지 않으나 사건 당시 풍기 인접지역인 예천에 있었던 국군은 8사단이었으며 문경에 있었던 국군은 6사단이었으므로 이 부대는 8사단 또는 6사단 소속의 부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부역혐의 피해>
인민군이 후퇴한 뒤 예천지역에는 안동을 떠난 국군 7사단 3연대가 예천에 주둔했는데, 이와 동시에 예천지역의 부역자 색출과 처단이 시작되었다. 군의 역사에는 국군이 이 지역을 수복한 때를 1950년 9월 29일로 기재하고 있으나 선발대는 이미 그 전부터 도착해 있었다. 수복하던 국군에 의해 각 면에서 희생된 사건은 다음과 같다.
감천면에서는 9월 26일 수복하는 국군을 환영하러 나왔던 감천면 벌방리 주민 2명이 국군에 의해 끌려가 총살당했다.
보문면에서는 9월 24일 보문지서로 잡혀간 오신리 주민들이 미호리 내성천 백사장에서 사살되었다. 당시 희생자는 오신리 대한청년단장 윤여일과 오로골 진갑석이었다.
용궁면에서는 9월 29일 월오리 안승호 등 10여 명이 경찰에 의해 보문면 고평리 고평나들에서 희생되었다. 같은 날 산택리 고영창이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로 마을을 지나던 국군에 의해 불려나가 가야리 진입로에서 희생되었다.
지보면에서는 9월 25일 고평리 김학봉이 수복하던 국군에 의해 고평리 고평다리 부근의 서울나들에서 인민군 패잔병 1명과 함께 희생되었다.
풍양면에서는 북진하던 국군이 9월 26일 풍양면 낙상리에 진주하였고 풍양중학교 아래 방앗간을 숙영지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마을에서 부역자를 색출한다면서 김진묵을 풍양지서로 연행해 고문을 하였다. 군인들이 조사가 끝나자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던 김진묵을 데리고 가라며 형 김영묵에게 연락하였다. 김영묵이 김진묵을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이 때 군인 2명이 뒤 따라왔다. 이들 군인들은 김진묵을 사살하고 김진묵의 처를 성폭행하려 했고 이를 만류하던 김영묵을 사살했다.
<미군폭격 피해>
전쟁 전 토벌작전과 국민보도연맹사건, 국군 수복 후의 부역혐의사건에 이어 예천지역 주민들이 받은 가장 큰 피해는 1951년 1월에 있었던 미군의 폭격 때문이었다.
미 10군단 사령부는 “게릴라 지역으로 추정”된다며 1951년 1월 18일 학가산 정상에서 반경 5마일 내를 지역폭격(area bombing)전략의 대상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 187공수연대전투단의 요청에 의해 미 5공군은 1951년 1월 19일 18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보문면 산성리 일대에 3차례에 걸쳐 네이팜탄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했다. 1차 폭격은 오후 2시 50분, 2차 폭격은 오후 3시 40분, 3차 폭격은 오후 3시 55분에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로 인한 희생자가 최소 51명이이며, 이 중 남성이 18명, 여성이 33명이었다. 희생자 중 16명이 10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이로보아 희생자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상자는 40명이었는데, 이중 22명은 2년 이상을 살지 못했다. 그런데 1951년 사건 직후에 이루어진 미 군사고문단의 조사에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64명, 중상자가 42명에 이른다고 하였으므로, 실제 이 폭격 때문에 사망한 주민의 수는 최소 86명에 이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폭격으로 인한 인민군 측의 피해는 없었다.
폭격 전날 국군 2사단 소속 군인들이 마을에 와서 청년들에게 보초를 서라고 했을 뿐 주민들을 소개시키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폭격이 있고 3~4일 후 베레모를 쓴 미군 6~7명이 와서 사진을 찍고 갔다. 1951년 2월 13일 미8군과 미5공군은 합동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각 군에 전달했다. 보고서에는 사망자 34명, 부상자 44명 등의 민간인이 피해를 당했음에도 폭격은 정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폭격당한 마을은 좌익 마을의 오명을 썼다고 하며, 주민들은 오랜 세월을 침묵으로 보냈다고 한다. 당시 인민군 10사단은 안동 북쪽에 있었다.
같은 날 감천면 진평리에도 정찰기의 정찰 후 전투기의 공격이 있었다. 공격은 네이팜탄-로켓-기총사격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최소 26명의 주민과 피난민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 70%가 13세 이하의 어린이였으며, 인민군의 피해사실은 없었다. 인근 지역인 영주 봉현면 노좌리·유전리에도 같은 날 폭격이 있었다.
이상 예천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