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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협우 사진./자료제공 전갑생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
1945년 광복이 됐다. 이협우는 어린 나이에 잠시 면 서기를 했기 때문에 친일파로 몰리지는 않았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10·1사건이 일어나면서, 일부 좌익세력들이 경주군 일대를 습격했다. 이로 인해 경찰서가 잠시 좌익세력에게 점령되기도 했고, 5채의 가옥이 전소됐으며 쌍방 5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협조조직인 우익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협우는 내남면에서 그 핵심에 서게 된다.
1947년 이협우는 내남면 대동청년단장을 맡았으며, 1948년 대동청년단은 서북청년단을 흡수해 강력한 우익단체로 거듭나게 된다. 대동청년단은 1948년 정부 수립 후 다시금 대한청년단으로 재편되면서 모든 우익청년단체를 통합한 강력한 단체로 거듭났다. 이협우는 내남면 대한청년단장이 됐다.
대동청년단 광양지부 결성식 장면. |
한편 경찰은 부족한 경찰력을 보조하기 위해 민보단이라는 준군사조직을 설립했다. 민보단 정원은 보통 30명으로 단원은 경찰서장이 추천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 또한 민보단에게는 총과 무기가 지급됐다. 1949년 내남면 대한청년단장 이협우는 내남면 민보단장직을 겸했다. 그의 나이 불과 28살이었다.
우익청년조직과 준군사조직을 장악한 이협우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협우는 자신의 친척 동생인 이한우와 함께 내남면 민보단과 대한청년단을 이끌었다. 이협우의 민보단에는 현직 경찰인 이홍렬도 가담하고 있었다.
2. 피로 물든 내남면
현직 경찰을 부하로 둔 내남면 민보단장 겸 대한청년단장 이협우는 1948년 3월 15일 내남면 이조리에서 ‘청년단에 비협조적이다’는 이유로 주민 정우택을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고향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간간이 사람을 죽여오던 이협우 일당은 1949년 3월 8일 망성리에서 유칠우와 유찬조가 남로당원이라며 총으로 쏴 죽인 후, 그날 저녁 잠자던 유 씨 일가족 6명을 불로 태워 몰살시키는 등 살육의 규모가 커졌다. 이렇게 이협우 일당은 1950년 8월까지 169명을 학살했다. 물론 이 169명은 4·19혁명 이후 구성된 유족회에 공식 신고된 숫자로, 연구자들은 실제 내남면민 200명 이상이 피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 이뤄진 검찰 조사에 따르면 이협우의 학살은 좌익을 소탕하기 보다는 사적인 감정으로 자행한 학살이 많다고 한다.
“내가 보증할 테니 더는 죽이지 말라”
박세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박세현은 내남면 명계리에 흘러들어온 외지인이었는데, 같은 마을 손 씨 집안의 쌀 5가마를 훔쳤다가 마을에서 탄핵을 당했다. 이후 박세현의 친동생이 민보단에 가입했고, 자신을 탄핵한 마을 이장 김원도 집안과 손 씨 집안을 빨갱이로 몰았다고 한다.
1949년 7월 31일 김정도와 김하묵이 내남면 용장리 소 시장에서 소를 팔고 오다 민보단원에게 체포돼 돈을 모두 빼앗기고 내남면 경찰지서 뒤 용장산 골짜기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그날 저녁 이 소식을 들은 김 씨 집안 식구 4명이 내남면 경찰지서에 찾아와 항의하였으나 이들도 민보단원에게 붙잡혀 용장산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다음날(1949년 8월 1일) 밤 이협우는 민보단원 10여 명을 2~3개 조로 나눠 명계리를 급습했다. 주민들에게 방에 불을 켜도록 한 뒤, 사람 그림자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이날 마을 이장 김원도 씨를 비롯한 일가 16명이 죽고, 손 씨 일가 8명이 죽었다. 박세현 한 개인의 원한으로 30명이 죽은 셈이다.
며칠 뒤 이협우는 민보단원을 이끌고 남은 김 씨 일족을 멸족시키려 명계리로 향했으나, 명계리에서 민보단을 이끌던 정규준이 “이 집은 내가 보증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으니 더는 죽이지 말라”고 부탁해 이협우를 돌려세웠다.
이협우는 덕천2리 주 씨 집안의 딸을 탐냈으나 거절당했다. 이협우는 1950년 1월 5일 밤 주 씨 일가족을 습격해 8명을 죽이고 시신을 짚단으로 소각한 후 주 씨 집안의 가산을 강탈해 친척 동생인 이한우의 집으로 옮겼다.
1949년 8월 25일 망성리에서 권 씨 일가 6명을 ‘청년단에 비협조적이다’는 이유로 죽인 후 1년 뒤인 1950년 8월 11일에는 다시 망성리로 들어가 권 씨 일가 친척 45명을 학살했다. 보통 학살을 할 때는 ‘이들은 좌익의 동조자, 좌익의 가족이다’라고 억지 명분을 뒤집어 씌운다. 그러나 이협우는 그런 억지 명분조차 없이 ‘청년단에 비협조적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했으며, 1949년 7월 9일 망성리에서 양임순(48)·최귀순(23) 씨, 1949년 8월 4일 용장리에서 정영택 씨 일가족 3명은 아직까지도 왜 죽였는지 알 수 없다.
이협우 학살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온 가족을 몰살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훗날 보복을 우려한 행동으로, 어린아이도 철저히 죽였다. 검찰 조사에 의하면 10세 미만 어린이 35명이 피살당했으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자를 동시에 쏴 죽이기도 했다. 1949년 12월 25일 성탄절 노곡리에서 살해당한 최상화와 최동식은 불과 8살, 4살이었다. 이협우는 그들이 빨갱이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죽였다. 아무리 사람을 죽여도 '빨갱이를 죽였다'고 하면 넘어가던 시대였다.
▲ 1950년 대구형무소 재소자 학살 현장 모습. |
물론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협우는 재산이 많은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재산을 강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풍운아 채현국>(도서출판 피플파워)의 주인공인 경남 양산 효암학원 채현국 이사장에 따르면 양산 개운중학교를 건립하고 초대교장을 지낸 임상수 씨도 이협우에게 빨갱이로 몰려 재산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이창해라는 독립중대 중위가 나타나 임상수 씨를 구해 주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임상수 씨는 전 재산을 털어 학교(개운중학교)를 지었다. 빼앗을 재산이 없으면 빨갱이로 몰리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3. 벙어리 국회의원
이협우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던지 “경주군은 이협우 왕국이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이협우는 어린 시절 이루지 못했던 출세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이협우는 대한청년단 후보로 경주군 갑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 무려 16명의 후보가 난립한 이 선거에서 이협우는 16.60%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그러나 한 달도 지나지 않은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국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이 시기에도 이협우는 민보단을 이끌고 1950년 7월 22일 노곡리에서 최현호 씨를 비롯해 일가친척 22명을 학살했고, 1950년 8월 11일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망성리에서 권 씨 일가 45명을 학살했다. 앞서 1화의 주인공 김종원이 국회의원에게 총질을 했다면, 이협우는 현직 국회의원 신분으로 지역구 주민을 학살한 셈이다.
부산 피난 국회 모습.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이협우는 재선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만만찮은 경쟁자가 있었다. 서영출이란 자도 있었다. 친일경찰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를 고문할 때 손과 발을 모두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는 속칭 ‘비행기 고문’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경주군 대동청년단장과 경주경찰서장을 지냈다. 그는 또한 초대 국회의원 선거인 5·10선거에서 경주지역 독립운동가 출신인 최순 선생의 당선을 막기 위해 청년단원을 동원해 사살한 사람이었다.
이협우는 서영출을 1000여 표 차이로 누르고 재선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자유당에 입당하게 된다.
“전 국민이 기억해야 할 이름”
재선 국회의원이 됐지만, 이협우의 존재감은 전혀 없다시피했다. 국회 단상에 올라 발언을 한 경우가 전혀 없었을 뿐더러 1956년 8월 20일 자 경향신문 기자석(기자칼럼)에 의하면 안쓰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평소에는 어디에 있는 지 존재도 알 수 없는 벙어리 국회의원 이협우라는 사람. 그러나 여야가 무슨 일을 가지고 싸울 때면 반드시 한두 마디씩 기성을 지름으로써 사람들의 혀를 차게 하는...(중략) 자유당에서 장면 부통령의 발언을 트집 잡아 논란을 일으키자 이 사람은 의석에 앉아서 출석출석 몸을 들추더니 별안간 ‘처리해버려! 처리해버려’. 물론 2대 국회 때부터 벙어리인 이협우 의원인지라 단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심정(?)은 짐작할 수 있으나 기껏 배웠다는 소리가 겨우 ‘처리’ 두 자!”
그렇게 국회에서 겨우 한 마디 했건만, 그는 야당 신예인 김영삼 의원에게 바로 역공을 당하고 만다.
“이협우 의원! 당신 아까 장 부통령을 처리해 버리라고 했는데 그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처리한다니, 없애버린다는 뜻입니까? 앞으로 우리는 장 부통령의 신변에 특별히 조심하겠습니다!”며 맹렬한 기세로 이협우 의원을 압박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총을 감당하지 못했던 이협우는 고개를 떨구고 묵묵부답했다. 기사에는 “차라리 벙어리라면 또 몰라도 그의 반 벙어리가 더욱 가긍(불쌍해)하다”고 맺고 있다.
내남면을 누비며 약자에게는 한 없이 강했으나, 국회에서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한 없이 약했던 사람이었다.
1958년 이협우는 국회의원 3선에 도전했다. 이 선거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이협우는 권총을 들고 다니며 선거를 했다. 유지와 유력 후보들을 총으로 협박하고, 후보 등록을 방해했다. 당시 언론엔 이렇게 기록 돼 있다.
입후보등록 마감. 유혈과 소란 속에 숨 가쁘게 지나간 10일간 이었다. 특히 경주 월성 갑구에서는 허다한 등록방해사건이 생기고 여태껏 야당후보의 등록공고는 나지 않았다고 한다. 월성 갑구에서 출마하는 자유당 공천 이협우 의원의 강파른 얼굴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협우, 이협우, 이협우. 전 국민이 기억해야 할 이름인 것 같다."
-1958년 4월 11일 자 경향신문
부정투표도 있었다.
“3장이나 7장 감싸고 이협우에게 투표하는 일도 있었다.”
-1958년 7월 15일 자 경향신문
어쨌든 그는 42.81%의 득표율로 손쉽게 ‘3선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국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4대 국회에서는 한 마디 안 하실 겁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10년 동안 국회에서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기이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드문 3선 국회의원이나 했지만, 상임위원장 한 자리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쓸모는 따로 있었다. 1958년 12월 초,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 입법을 놓고 대치 중이었다. 자유당은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민주당을 용공단체, 역적(이적)단체로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양당 국회의원들이 거친 설전을 이어가고 있던 중 이협우는 민주당 우희창 의원에게 달려들었고 이를 신호로 양당 의원들의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국가보안법 날치기 처리 후 국회 현장 모습. |
이협우는 ‘몸싸움 전문 국회의원’으로써 여야 충돌이 있을 때면 항상 선두에 있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4대 국회가 해산되면서 이협우의 국회의원 생활도 끝이 났다.
4. “사형보다 더한 극형 있다면”
1957년 2월. 국군 해병대에 복무하고 있던 유칠문 씨는 이협우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내남면 출신으로 1949년 3월 8일 유 씨 일가족 8명이 이협우 손에 죽을 당시 친구 집에 있어 목숨을 건졌다. 부산으로 도망친 유칠문은 1954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러나 가족은 몰살당했고, 고향엔 이협우가 있어 한 번도 휴가를 쓰지 않았다고 했다.
휴가를 쓰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해병대 장교들이 유 씨를 불러 조사했고, 유 씨는 자신의 형편을 털어 놓았다. 해병대 장교들은 이협우가 유 씨 부모가 소유하고 있던 2659평의 토지를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유칠문 씨는 해병대 장교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소송에 나섰다. 이협우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국방부 장관에게 ‘군인이 정치에 간여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유칠문 씨를 도와준 해병대 장교들은 강제로 전역을 당했고, 유칠문 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협박을 받은 뒤 고소를 취하했다. 그러나 현직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이 소송은 언론에 적지 않게 보도됐으며, 유족들이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숨죽이고 있던 유족들이 일어났다. 1960년 6월 16일 유족 75명은 이협우와 이한우를 상대로 살인, 방화, 강도 혐의로 대구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대구지검 최찬식 검사는 경주경찰서 내남지서 전·현직 경찰관을 모두 소환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사에 임했다. 최찬식 검사는 학살사건 가운데 입증 가능한 것을 정리해 내남면민 76명을 살해한 혐의로 이협우·이한우를 기소했다.
“무법천지인데 무슨 진정서가 소용 있느냐”
1961년 3월 6일 1심 재판부는 이협우에게 사형을, 이한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2심 재판이 진행되던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북한에게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유족들을 잡아들였다. 유족회를 결성한 김하종은 징역 7년, 유족회 간부였던 김하택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다. 분위기가 바뀌자 증언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유족 중 한 사람은 이협우에게 유리하게 증언을 바꾸다가 허위증언으로 징역 6개월을 받기도 했다.
허위증언까지 드러났지만 재판은 갈수록 유족들에게 불리해졌다. 확실한 증언들이 애매한 증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2심 재판부 강안희 판사가 “9가지 공소사실 중 다시 의심되는 점이 있기는 하나 의심되는 점은 피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이 형사소송법상 대원칙”이라며 이협우 손을 들어주면서 무죄를 선고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1962년 6월 28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재판 당시 이협우 측 변호인들은 유족에게 “그런 억울한 일이 있으면 왜 당시 진정서를 내거나 고소를 하지 않고 지금 와서 이러느냐”고 물었다. 유족들은 “무법천지인데 무슨 진정서와 고소가 소용 있으며,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 것이 당시 실정이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한편 검찰에서는 1962년 이협우 일당이 내남면민 9명을 죽인 사실을 추가로 밝혀내고 별건의 재판을 걸었다. 이 재판 역시 1심에서는 사형이 선고됐으나 2심과 대법원에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최종적으로 1963년 5월 15일, 이협우는 자유의 몸이 됐다.
“증거 상 드러난 피고인들의 죄과에 대하여 형법상 사형보다 더한 극형이 있다면 본 검사는 서슴지 않고 그 극형을 택할 것이나 부득이 현행법상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한다”는 이영호 검사의 분통에 찬 논고도 그렇게 허공의 메아리가 돼 버렸다.
이협우는 1974년 대구매일신문 인터뷰에서 “그때 다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경북 경주군 내남면은 한국전쟁 당시 단 한 명의 북한군도 출몰하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이협우는 자신과 함께 나고 자란 주민들을 학살했고, 그 공포를 이용해 젊은 나이에 무려 3선 국회의원이 됐다. 재판이 열렸지만, 처벌받아야 할 사람은 처벌받지 않았고, 되레 피해자들이 처벌받았다. 한국현대사는 이렇게 최소한의 기본과 상식마저 무너뜨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협우는 경주에 계속 머물다 1987년 사망했다. 그의 나이 66살이었다.
이협우 연표
-1921년 경북 경주군 내남면 출생.
-1940년 대구농림보통학교 졸업.
-1943년~1945년 경주군 내남면 농업기수(면 서기).
-1947년 내남면 대동청년단장.
-1949년~50년 내남면 대한청년단장. 민간인 학살 시작.
-1949년~50년 내남면 민보단장.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1958년 5월. 제4대 국회의원.
-1987년 사망.
이협우
1921년 경북 월성군(현 경주시 외곽지역) 내남면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내남면은 유시민 전 장관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아이 이름은 이.협.우. 아이는 머리가 총명했고, 집안 형편도 극단적으로는 어렵지 않았다.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나온 뒤 대구공립농림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에 고등학교를 마쳤다면 시골에서는 ‘지식인’이라 할 법 하다.
출세를 하고 싶었다. 박정희가 '칼 찬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갔듯이 이협우도 만주로 갔다. 당시 많은 이들이 만주로 갔는데, 만주에서는 조선인이라고 하면 일본인 다음으로 2등 국민으로 쳐줬다. 3등 국민인 여진족이나 몽골족 등 소수민족 보다는 대우가 나았다. 따라서 조선보다는 출세의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출세는 쉽지 않았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래도 학벌이 있기 때문에 내남면 사무소에서 기수(서기)로 일할 수 있었다. 이협우는 20대 전반 젊은 나날을 면사무소에서 식민지 행정을 보면서 지냈다.
1945년 해방이 됐다. 내남면 어딘가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필자는 개인적으로 친일파라는 말이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일본을 좋아할 수는 있다. 문제는 좋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족을 팔아 먹은 ‘반민족’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생각한다)로 몰려 봉변을 당하고 쫓겨났다고 하는 이도 있었으나, 어쨌든 이협우는 무사했다. 아니 그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었다.
일본인이 사라졌다. 조선 땅에서 행정이나 기술력을 가진 이들이 깡그리 사라졌다는 것이다. 비록 말단 면 서기였지만 그만한 경험을 가진 이도 내남면에는 드물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혼돈 속에서 그는 위상을 높였고 1947년에는 우익 단체인 내남면 대동청년단장이 돼 있었다. 1948년 대동청년단은 서북청년단을 흡수했다. 1949년에는 내남면 민보단장이 돼 있었다. 민보단은 사실상 경찰의 협력단체였고, 총기 소지가 허락됐다. 부족한 경찰력을 보완해주는 조직이었다.
민보단원은 경찰서장의 추천이 있어야 가입할 수 있었다. 보통 면 단위 민보단은 30명이었다. 이협우는 자신의 친척 동생인 이한우와 함께 민보단을 이끌었다. 심지어 이협우가 이끄는 민보단에는 내남지서 소속 순경 이홍렬도 가담하고 있었다. 경찰처럼 제복을 입고 총을 차고 다니고, 순경을 부하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협우를 형사로 착각할 만도 했다.
어쨌든 이협우가 이끄는 준 군사집단인 내남면 민보단은 자신의 고향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살육, 약탈, 방화
아래 내용은 유가족들의 증언과 이후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기소된 사항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협우는 1948년 3월 15일 정우택 씨를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1949년 민보단장을 맡은 이후 살육의 규모가 커졌다. 3월 8일 망성리에서 유칠우와 유찬조가 남로당원이라는 혐의로 총살한 이후 그날 저녁 잠자던 유씨 일가족 6명을 죽였다.
1949년 덕천리 손영부라는 사람이 좌익혐의로 잡혀가자 그의 가족 5명을 아랫방에 가두고 모두 죽였다.
이렇게 시작된 이협우와 민보단의 살육은 1949년~1950년 사이 내남면을 떨게 만들었다. 한국전쟁 이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총 98명이 이협우 일당의 손에 죽었다.
유가족들과 검사 조사에서 이협우 일당은 사적인 감정에 의해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 많았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2가지 사건을 들 수 있다.
이협우가 이끄는 민보단원 가운데 박세현이라는 자가 있었다. 박세현은 명계리에 흘러 들어온 외지인으로 같은 마을 손씨 집안의 쌀 5가마를 훔쳤다가 마을에서 탄핵을 당했다. 이에 박세현은 친동생과 함께 민보단에 가입했고, 마을 이장 김원도 집안과 손씨 집안을 빨갱이로 몰았다고 한다.
1949년 7월 31일 김정도, 김하묵이 내남면 용장리 소시장에서 소를 팔고 돌아오다 민보단원에게 체포돼 돈을 모두 빼앗기고 내남지서 뒤 용장산 골짜기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그날 저녁 이 소식을 들은 김씨 집안 식구 4명이 내남지서에 찾아와 항의를 하자 민보단원에게 끌려가 역시 용장산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다음날 밤 민보단원들은 명계리를 급습해 김씨 일가 16명과 손씨 일가 8명을 살해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박세현의 사적 감정으로 30명의 명계리 주민들이 민보단에 의해 희생당한 셈이다. 며칠 후 이협우는 남은 김씨 일족을 멸족시키려 명계리로 갔으나 명계리에서 민보단을 이끌던 정규준이 ‘내가 책임지고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마라’고 부탁해 이협우를 돌려세웠다고 한다.
이협우는 덕천 2리에 거주한 주씨 집안의 딸을 탐냈으나 거절당했다. 1950년 1월 5일 밤 이협우는 밤에 주씨 일가를 습격해 8명을 죽이고 시신을 짚단으로 소각한 후 집과 가산을 강탈해 민보단원이자 친척 동생인 이한우의 집으로 옮겼다.
이협우의 친척 동생이자 민보단의 ‘2인자’이었던 이한우는 1950년 5월 이협우가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이후 민보단을 이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검사의 기소에 따르면 이한우는 1950년 7월 22일 최현호 등 일가친척 19명을 살해했으며 1950년 8월 11일 망성리에서 권경술 등 일가친척 40여 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편할 수는 없었다. 특히 위에 언급한 임상수의 예에서 보듯이 당시 우익단체는 재산이 있는 사람은 덮어놓고 빨갱이로 몰려 체포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협우 학살을 보면 한 가지 특이점이 있는데, 바로 온 가족을 몰살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훗날 보복을 두려워 한 행동으로 추정되는데, 유족들은 어린 아이들도 적지 않게 희생당했다고 한다. 이협우 일당이 죽였다는 98명 가운데 10세 미만 어린아이는 27명에 달하고, 아이를 안고 있는 모녀를 같이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벙어리 국회의원
고향을 피로 물들인 이협우. 당시 내남면은 ‘이협우 왕국’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 왕 노릇 한다고 누가 알아주겠는가? 이협우는 진짜 출세를 하고 싶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30살이었던 이협우는 이승만이 총재인 대한청년단 후보로 등록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던 민족주의-좌파계열 후보가 대거 출마했다. 특히 이협우가 출마한 경주군 '을' 선거구에서는 무려 16명의 후보가 난립한 끝에 이협우가 16.60%의 득표율(내남면은 당시 면 가운데서 인구가 많은 편이었다)로 당선됐다. 그러나 그의 출세의 꿈은 1950년 6월 25일 터진 한국전쟁으로 막혀 버렸다. 물론 부산이 임시수도가 돼고 국회가 꾸려지지만 정상적으로 국회가 열리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이협우 의원의 첫 ‘의정활동’은 허무하게 마감됐다.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이협우는 역시 경주에서 출마했다. 이번에도 11명이 대거 출마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와는 달리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다. 서영출 후보.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이고 경주경찰서장 출신이다. 일설에 따르면 독립운동가 방한상 선생에게 두 손과 두 발을 뒤로 묶고 허공에 매단 채 고문하는 이른 바 ‘비행기 고문’을 창시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반민특위가 결성되자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특위가 해산되면서 풀려난 인물이었다. 이협우는 서영출을 1000여 표 차이로 누르고 ‘재선 국회의원’이 됐다. 재선 국회의원이 된 후 이협우 의원은 자유당에 입당하게 된다.
재선의원이었지만 이협우 의원의 존재감은 미미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었다. 1956년 8월 20일 자 경향신문 기자석(기자칼럼)에 언급된 이협우 의원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평소에는 어디에 있는 지 존재도 알 수 없는 벙어리 국회의원 이협우라는 사람. 그러나 여야가 무슨 일을 가지고 싸울 때면 반드시 한 두 마디씩 기성을 지름으로써 사람들의 혀를 차게 하는...(중략) 자유당에서 장면 부통령의 발언을 트집잡아 논란을 일으키자 이 사람은 의석에 앉아서 출석출석 몸을 들추더니 별안간 ‘처리해버려! 처리해버려’. 물론 2대 국회 때부터 벙어리인 이협우 의원인지라 단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심정(?)은 짐작할 수 있으나 기껏 배웠다는 소리가 겨우 ‘처리’ 두 자!”
그렇게 간만에 국회에서 한 마디 했지만, 그는 김영삼 의원에게 망신을 당하고 만다.
“이협우 의원! 당신 아까 장 부통령을 처리해 버리라고 했는데 그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처리한다니, 없애버린다는 뜻입니까? 앞으로 우리는 장 부통령의 신변에 특별히 조심하겠습니다!”며 맹렬한 기세로 이협우 의원을 압박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총을 감당하지 못했던 이협우는 고개를 떨구고 묵묵부답했다.
기사에는 “차라리 벙어리라면 또 몰라도 그의 반 벙어리가 더욱 가긍(불쌍해 보였다)”하다고 맺고 있다. 내남면을 누비며 약자에는 한없이 강했지만, 국회에서 맞딱뜨린 자기 보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이협우는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그 과정이 가관이었던 모양이다. 1958년 4월 11일 자 경향신문 기자석에서 또 이협우는 언급됐다.
"입후보등록 마감. 유혈과 소란 속에 숨가쁘게 지나간 10일간 이었다. 특히 경주 월성갑구에서는 허다한 등록방해사건이 생기고 여태껏 야당후보의 등록공고는 나지 않았다고 한다. 월성갑구에서 출마하는 자유당 공천 이협우 의원의 강파른 얼굴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협우, 이협우, 이협우. 전 국민이 기억해야 할 이름인 것 같다."
- 1958년 4월 11일 자 경향신문 -
아무튼 8명의 후보가 나선 가운데(3명은 득표가 없는 걸로 봐서 후보직을 사퇴한 듯 하다) 이협우는 42.81%의 득표율로 손쉽게 ‘3선 국회의원’이 됐다. 그런데 아래 기사를 보면 이 과정에서 투표용지 속에 사전 기표한 용지를 숨겨넣는 부정행위까지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3장이나 7장 감싸고 이협우에게 투표하는 일도 있었다."
-1958년 7월 15일 자 경향신문 -
3선 의원이나 됐지만 그는 4대 국회에서도 거의 발언을 하지 않았고, 기자와 동료의원들에게 "10년 동안 국회에서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지조(?)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국회 내에서 충돌이 일어날 때는 여전히 ‘행동대장’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58년 12월 초, 국회는 국가보안법 입법을 놓고 대치 중이었다. 자유당은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민주당을 용공단체, 역적(이적)단체로 몰고 있었다. 50년 동안 레퍼토리는 그대로였다. 이에 양당 국회의원들은 거친 설전을 주고 받고 있었다. 이때 민주당 우희창 국회의원에게 이협우가 달려들며 “이놈 누구에게 욕설을 하느냐!”고 나섰고 우희창 의원은 이협우 의원이 물고 있던 담배를 후려 갈겼다. 이를 신호로 주먹질이 오가는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4·19혁명이 일어나고 4대 국회가 해산되면서 이협우 의원의 국회 생활도 끝이 났다.
'의심되는 점은 피고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1957년 2월 국군 해병대에 복무하고 있던 유칠문 씨는 이협우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내남면 학살 유족이었는데, 가족이 몰살당하는 와중에서 구사일생해 부산으로 도망쳤다. 1954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했지만 가족은 몰살 당했고 고향엔 이협우가 있으니 전혀 휴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해병대에서 조사를 나섰고 유칠문 부모가 소유했던 2659평의 토지를 이협우가 타인에게 분양하거나 자작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해병대 장교들이 유칠문의 토지를 돌려주라고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이협우는 국방부장관에게 군인이 정치에 개입한다고 이유로 항의하자 해병대 장교들은 강제로 전역당했다. 1960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유칠문은 생명의 위협하는 듯한 협박을 받은 뒤 고소를 취하하게 됐다고 한다.
비록 유칠문의 소송은 실패로 끝났지만, 현직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이 소송은 언론에 적지 않게 보도 됐고 유족들이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숨죽이고 있던 유족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6월 16일 유족 75명은 이협우와 이한우를 상대로 98명의 주민을 학살했다고 고소했다. 사건은 대구지검 최찬식 검사에게 할당됐고, 최 검사는 역대 내남지서 전 경찰관을 소환하고 7월부터 현장조사를 시작했다. 1960년 9월 15일, 이협우는 살인과 방화 혐의로 구속된다. 최 검사는 일단 당시까지 확실히 드러난 사건만 기소했다. 이협우와 민보단이 전후 9차례에 걸쳐 37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 25호를 방화했으며, 여죄를 추적해 추가 기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1960년 11월에는 현직 경찰이자 민보단원이었던 이홍렬을 기소했다. 1960년 12월 1950년 8월 11일 내남면 망성리에서 권잠지 외 일가 40명을 학살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추가로 기소했다. 검찰은 이협우와 그 일당에게 총 76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했다.
1961년 3월 6일 1심 선고가 열렸다. 그러나 재판부는 유족들의 증언을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9건의 사건 중 3건이 유죄로 판결됐고 이협우에게 사형, 이한우와 이홍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2심이 진행되는 가운데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상황은 유족들에게 더욱 불리해졌다. 유족회 간부가 체포되고 유족회장 김하종은 유족회 결성을 주도해 북한에 이익을 줬다는 이유로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유족회 간부였던 김하택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증인들의 진술도 점점 이협우에게 유리해졌다. 심지어 유족 중 한 사람은 이협우에게 유리한 허위증언을 한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허위증언까지 드러났지만 이후 재판은 단조로웠다. 검사는 사형, 판사는 무죄를 선고하는 극단적인 판결이 엇갈린 끝에 이협우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특히 2심에서 강안희 판사가 “9가지 공소사실 중 다시 의심되는 점이 있기는 하나 의심되는 점은 피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이 형사소송법상 대원칙”이라고 판시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이미 시간이 10년이 넘게 흘러버렸고 물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증언에 의존해야 하는데. 증인들의 증언들은 애매한 것이 많았다. 애매한 것을 모두 이협우에게 유리하게 해석해 버리자, 이협우의 범행을 입증해 줄 증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이협우는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표 출처. [논문]한국의 민간인 학살사건 재판연구-경주 내남면 학살사건 재판사례를 중심으로(이창현 저)
한편 1962년 검찰에서는 이협우와 민보단이 내남면민 9명을 추가로 살해했다는 것을 근거로 별건의 재판을 걸었다. 이 재판도 마찬가지였다. 1심에서는 사형이 선고됐으나 2심부터는 사형 구형, 무죄 선고가 오간 끝에 1963년 5월 15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음으로써 이협우는 자유의 몸이 됐다.
처벌을 받은 사람은 유족회를 결성한 간부들과 허위 증언을 한 유족만 징역 형을 뒤집어 쓴 채 끝이 났다. 우리 현대사의 극단적인 아이러니를 이토록 잘 드러낸 사건이 또 있을까 싶다.
“증거 상 드러난 피고인들의 죄과에 대하여 형법상 사형보다 더한 극형이 있다면 본 검사는 서슴지 않고 그 극형을 택할 것이나 부득이 현행법상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한다”는 이영호 검사의 분통에 찬 논고도 그렇게 허공의 메아리가 돼 버렸다. 이협우는 이후 계속 경주에서 머물다가 1987년 8월 세상을 떠났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80년 동안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온 채현국 이사장은 우리 역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사람 꼴, 사람 값 할 만한 사람들 다 때려죽여놓고, 멍청해 가지고 사람 값 하기 원래 어려운 사람들은 살인을 시키면서 정의라고 해놨으니. 지금 우리가 그 비싼 값을 치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