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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보조국사 지눌(知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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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知訥: 1158~1210)은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이 정(鄭)이고, 자호가 목우자(牧牛子)이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며, 동주(洞州: 서흥) 출생이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도의(道義: fl. 821)국사를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여기며, 보조국사 지눌을 조계종의 중천조(中闡祖: 분명하게 밝힌 조사)로 여기며, 태고국사 보우(普愚: 1301~1382)를 중흥조(中興祖: 중흥시킨 조사)로 여긴다
생애
1158년 정광우(鄭光遇)와 부인 조(趙)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에 종휘(宗暉)에게서 승려가 되어 구계(具戒)를 받고 일정한 스승 없이 도를 구하였다.
1182년(명종 12년)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승려로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많은 선배를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창평의 청원사에서 《육조단경》을 읽다가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 속세를 피하고 도를 구하기 위하여, 1185년 하가산의 보문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대장경》을 열독하는 등 불도에 전력하며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득재(得才)의 청으로 팔공산 거조사(居組寺)에서 여러 고승을 맞아 몇 해 동안 정혜(定慧)를 익히다가 신종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며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참선하여 선의 참뜻을 깨달았다.
1200년 송광산 길상사에서 11년 동안 제자들에게 설법을 전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금강경》,《육조단경》, 《화엄론》,《대혜록》 등으로 가르치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 경절문(經截門)의 3종으로 수행을 이끌었는데, 믿음에 들어가는 자가 많았다. 억보산의 백운정사 ·적취암과 서석산의 주봉란야 ·조월암 등은 다 지눌이 창건하고 왕래하며 수선(修禪)하였다.
희종이 즉위하여 송광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라 개명하여 제방(題榜)을 친히 써서 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보내왔다.
그는 중생을 떠나 부처가 따로 없음을 강조하여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였다. 승도를 소집하여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사망하니 탑을 세우고 감로라 하였다. 죽은 후 국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진심직설》·《수심결》·《정혜결사문》·《상당록》·《염불요문》·《원돈성불론》 등이 있다.
왕이 문신 김군수(金君綬)에게 비문을 찬수케 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병화에 없어지고 귀부(龜趺)만 남은 것을 1678년(조선 숙종 4년)에 백암(栢菴) ·성총(惺聰) 등이 중건하였다.
사상
지눌은 1182년 선과(禪科)에 합격하고 청원사(淸願寺)에 이르러 혜능(慧能)의 《6조단경(六祖壇經)》에서 홀연히 깨치고, 이통현(李通玄) 거사의 《화엄론(華嚴論)》에서 선 · 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대혜(大慧) 선사의 《대혜어록(大慧語錄)》에서 최후의 의혹을 씻었다 한다.] 이러한 깨침의 과정은 그의 독창적인 선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지눌은 사람을 대할 때 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②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③ 경절문(經截門)의 3문으로 하였는데, 이 3문은 각각 자신의 깨침의 계기가 된 《6조단경》·《화엄론》·《대혜어록》에서 나온 것이다.
지눌은 선·교의 배타성이 교리적으로 있을 수 없음을 논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강조하였는데, 돈오는 중생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여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문득 깨치는 것이고, 점수는 그렇게 깨쳤다 하더라도 번뇌는 쉽게 없어지지 않으므로 "정"과 "혜"를 꾸준히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 지눌이 주장한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경절문의 3문 중에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은 돈오점수의 돈오(頓悟)와 그 내용이 같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은 점수(漸修)와 그 내용이 같다. 그러나 이러한 돈오점수는 학문적인 해석("지해·知解")의 자취를 아직 가시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선의 화두를 공부하라는 것이 경절문(經截門)이다.
지눌의 이러한 선사상의 체계는 조계(曹溪) 혜능의 선 속에 화엄을 흡수한 것이었다. 지눌의 조계선(曹溪禪)이 이와 같이 독창적이었던 반면, 지눌 이전의 한국 선은 단지 중국 선의 연장에 불과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지눌의 정혜결사는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에 터를 잡고(고려 신종 3년), 끝까지 왕실불교에 오염되지 않는 조계선을 선양하는 거점이 되었는데, 왕족 · 귀족으로서 여기에 가입하는 자만도 수백인에 달했다 한다.
의천(義天: 1055~1101)의 천태 사상이 교로써 선을 융합하려는 것이었다면, 지눌의 조계종지(宗旨)는 선으로써 교를 융합하려는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원불인 ‘국보 제42호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고려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선종(禪宗)의 중흥조. 성은 정(鄭)씨. 자호는 목우 자(牧牛子). 황해도 서흥(瑞興)출신.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의 조(趙)씨이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자, 아버지는 불 전에 기도를 올려 병만 낳으면 자식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 뒤 병이 깨끗이 나았으므로 8세 때 부모가 정해준 대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사堀山派)에 속하였던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다.
꾸준한 구도 끝에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전남 청량사(淸凉 寺)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 심성(心性)의 본바탕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하여, 양측은 서로의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을 일삼았다.
이에 그는 선과 교가 모두 부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찌 서로 담을 쌓고만 있는가를 의심한 나머지, 3년동안 노력한 끝에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 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닫고,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祖師)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 할 것인가."하며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원 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한 것이다.
또한, 그는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둘이 없는 원칙에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원리를 발견하고, 또 당나 라 규봉종밀(圭峰宗密)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 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마치 원수처럼 등을 지고있던 종래의 선교양종에 대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결사 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음을 천 명하였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에 있다고 하였다.
이 정과 혜의 두가지는 일심위에 통일되어 늘 균형을 지녀야 된다고 본 것인데, 이것은 한 부처의 가르침이 선교양종·정혜이파(定慧二派)로 분열되 어, 정과 혜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불교공부가 된다는 것을 망각 한 채 시비를 일삼고 적을 삼아왔던 당시 불교계 수행법에 대한 깊은 자각에 서 연유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결사운동은 정법불교에로의 복귀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 하고 재건하기 위한 일대 선언서였다.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을 끝낸 뒤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두세번 치고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긴 다음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권수 정혜결사문> 1권, <직심직설(眞心直說)> 1권,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 文)> 1권, <원돈성불론> 1권, <화엄론절요> 3권,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1권, <염불요문(念佛要門)>1권, <상당록(上堂錄)> 1권 등이 있다. 입적 후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 (甘露)이다
보조국사의 선사상
팔공산을 한국 제일의 '불교성지'라 하는 까닭은 우선 물증으로 불적이 많고 산자락에 흩어진 사암에서 훌륭한 스님들이 수도했다는 사실과, 관봉석조여래(갓바위 약사여래불)에 대한 신도들의 참배가 사시사철 그것도 경향 각지에서 끊이지 않는 이유 등이라고 생각한다.
신라는 물론 고려, 조선조를 통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대덕이 이 산의 맑은 공기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수도했지만, 특히 두드러진 스님을 꼽는다면 필자는 신라의 스님으로 오도암과 불굴사에서 수행한 적이 있는 원효대사와 동화사 중창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파계사, 중암암, 환성사를 창건한 심지스님과 이제 소개하고자 하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을 든다.
보조국사 지눌은 중국불교에서 한국인의 근기(根基)에 맞게 독자적으로 체계를 세운, 한국불교 사상사에서 위로는 대각국사와 아래로는 태고국사와 더불어 가장 빛나는 업적과 영향을 끼친 분이다.
불교는 왕건이 고려의 개국과 함께 국교로 지정하고 적극적인 후원과 기대로 귀족화 되었으며, 스님들은 정치와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불교계 모두가 시대에 편승하여 안위를 택했지만 지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하여 지금의 조계산 송광사에 정혜사(후에 수선사)를 정한 후, 민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철저한 수행과 수도로서 포교에 힘쓰면서 정치, 권력, 안락을 과감히 버렸다.
정혜사에 지눌의 수행과 수도력으로 민중이 대거 몰리자 자신의 수행에 본분을 잊을까를 걱정하며, 홀연히 몸에 지닌 가사 1벌만을 가지고 산 속에서 뼈를 깎는 고행을 하였다. 보조국사는 스승을 정하지 않고 홀로 수행을 하며 도를 찾았으며, 자유롭게 경론(經論)과 선어록에 깊이 빠져 독자적인 선사상의 체계를 세웠으며, 귀족과 민중의 차별을 버리고 평등포교를 강조하여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보조국사는 3번 크게 깨우침을 얻었는데,
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고 한가지 상에 매달리지 말고 항상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②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화엄경(華嚴經) 여래출현품에 선과 교가 다르지 않음에 감격하여 수행법의 체계를 세우고 불교계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었으며,
③ 대혜어록을 보고 자아의 본질도 일체의 경계와 작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항상 걸림없이 자재(自在)한 대해탈의 경계를 체득하였다.
보조국사의 선사상의 핵심은
① 심성론(心性論) 선에서 심(心)과 성(性)을 내세워 불교의 기본 정신을 일깨웠다. 저서 {진심직설(眞心直說)}을 저술하고 선이 추구하는 실제 세계인 진심(眞心)과 망심(妄心), 진심의 묘용(妙用)에 대해 정확히 결론을 내었으며, 진정 선은 교가 바탕이 됨을 당부하고 선(禪)과 교(敎)가 다름없음을 간절히 당부하였다.
② 돈오점수론(頓悟漸修論) 참자아와 참마음을 홀연히 발견하는(돈오) 것을 의미한다는 것과, 처음에는(태어남)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되어서 차츰 발견하는 것(점수)을 분리하고 않고 점수가 바탕이 되어 돈오가 눈을 뜬다면 그것이 바른 수행이라고 하였다.
③ 간화론(看話論) 모든 분별심, 즉 사량(思量)없는 마음으로 한 생각 탁 끊고 살아간다면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참 진리를 얻게 된다고 하였다
보조국사는 이렇게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수행의 결실을 거두고 총 15권이 넘는 저서를 집필하였으며, 많은 제자들에게 수행에 시간 없음을 다그쳤다. 보조국사는 중국에 태어났어야 큰스승 소리를 듣는 시대에 태어나 참다운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원껏 펴다 가신 진정 큰 스승의 족적을 남기고 가신 분이다.
한국인의 근기에 맞는 독자적인 사상과 풍격(風格)을 갖추신 보조국사 지눌은 그만의 독특한 선교융통을 이루어내었고, 진정한 한국의 선사상을 이루었으며, 기울어 가는 고려불교를 바로 세우고 부처님과 역대 조사의 참뜻을 근본으로 돌이켜 수행과 이생(利生)에 전념할 혁신적 이념체계를 창안하여 새로운 기치를 세움으로써 한국 불교를 조계종(曹溪宗)이라는 큰 강으로 합류시켰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義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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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의천의 초상
의천(義天: 1055년 ~ 1101년 10월 5일)은 고려시대의 왕족 출신 승려이다. 자는 의천, 이름은 후(煦)이며, 호는 우세(祐世), 흔히 대각국사(大覺國師)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시호이다. 고려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대한불교천태종을 세운 한국 천태종의 중흥시조로서, 대한불교천태종에서 3대 종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송악 출신이다.
생애
출생과 출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과 그 왕비 인예왕후(仁睿王后)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1세되던 해에 부왕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냐."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였다 한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였다.
1065년(문종 19) 왕사(王師) 난원(爛圓)이 의천의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게 하였고, 그 뒤 영통사(靈通寺)에 있었으며, 13세에 우세(祐世)의 호를 받고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승려가 된 이후에도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승려 활동
1084년(선종 1) 송나라 정원(淨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구법(求法)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말리므로 남루한 옷차림으로 몰래 제자 수개(壽介)만 데리고 1085년 송나라로 떠나자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낙진(樂眞) · 혜선(慧宣) · 도린(道隣) 등으로 수행하게 했다. 송나라 철종(哲宗)이 영접하여 계성사(啓聖寺)에 있게 하고, 화엄(華嚴) 법사 유성(有誠)으로 하여금 상종하게 하여, 현수(賢首) ·천태 양교의 판교동이(判校同異) · 유묘(幽妙)의 뜻을 문답하였다.
또 상국사(相國寺)의 원조선사와 흥국사 서천(西天)의 삼장(三藏) 천길상(天吉詳)을 찾아보고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桀)을 대동하고 송나라 서울을 출발 금산(金山)의 불인(不印) 선사 요원(了元)에게 들리고, 항주(伉州)의 원공(源公) 법사를 찾아 혜인(慧因)에게 《화엄소초(華嚴疏鈔)》의 의심되던 것을 물었다.
그때 선종이 귀국을 청하자 자변(慈辨) 대사에게 천태종의 경론을 듣고, 천태산 지자(智者)대사의 부도(浮圖)에 예배, 발원문을 지어 천태종을 본국에 중흥할 것을 맹세했다. 또 영지(靈芝)의 대지(大智) 대사에게 계법을 받는 등 고승 50여 명을 만나 법요를 문답하였다.
1086년(선종 3)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고 환국하여 석전(釋典)과 경서 1천 권을 바쳤으며, 흥왕사에 있으면서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게 하고, 요나라 · 송나라 ·일본에서 경서를 구입하고, 고서를 수집하여 《속장경》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하였다. 1094년(선종 11) 흥원사(興圓寺)의 주지로 있었고, 그 후 해인사 ·흥왕사에 있다가 국청사(國淸寺)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하고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하였다.
생애 후반
송나라의 승려와 불교학자들과 서신으로 사상교류를 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숙종 때 주전론(鑄錢論)을 주장하여 사회경제 면에도 많이 공헌한 바 있고, 1098년(숙종 3) 왕자 징엄(澄儼)이 승려가 되자 그 스승이 되었다.
1101년(숙종 6) 국사(國師)로서 활동하던 중 총지사(總持寺)에서 사망하였다. 1101년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7세, 법랍 36세였다.
사후
오관산(五冠山) 영통사 동쪽에 장례하였으며, 김부식(金副軾)의 명문(銘文)으로 된 비가 세워지고, 또 남숭산(南嵩山) 선봉사(仙鳳寺)에도 임존(林存)의 명문으로 해동 천태 시조 대각국사비가 세워졌다.
서호(西湖)의 승려 혜소(惠素)는 국사의 고제로서 후에 행록(行錄) 10권을 선집하였으며, 태백산인(太白山人) 융응(戎膺)은 국사의 적사(嫡嗣)로 법해(法海)의 용문(龍門)이라 호하였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 의천의 사후 그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23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3권,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실전, 없어지고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 등이 현전하여오고 있다.
가계
조부: 현종(顯宗, 992~1031 재위:1009~1031)
조모: 원혜왕후(元惠太后, ? ~1022)
부왕: 문종(文宗, 1019~1083년 재위:1046~1083) 낙랑군(樂浪君)
모후: 인예왕후(仁睿王后, ? ~1092) 이자연의 첫째 딸
형: 순종(順宗, 1047~1083 재위:1083~1083) 평양공(平壤公)
형: 선종(宣宗, 1049~1094 재위:1083~1094) 국원후(國原侯)
형: 숙종(肅宗, 1054~1105 재위:1095~1105) 계림공(鷄林公)
본인: 의천(義天, 1055~1101) 왕후(王煦) 대각국사(大覺國師)
동생: 상안공(常安公, ? ~1095) 왕수(王琇)
동생: 도생승통(道生僧統)
동생: 금관후(金官侯, ? ~1092) 왕비(王㶨)
동생: 변한후(卞韓侯, ? ~1086) 왕음(王愔)
동생: 낙랑후(樂浪侯, ? ~1083) 왕침(王忱)
동생: 총혜수좌(聰惠首座)
누이: 적경궁주(積慶宮主, ? ~1113)
누이: 보령궁주(保寧宮主, ? ~ 1113)
저서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23권 행적과 시 문집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 3권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3권
평가
그가 활동하던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종과 교종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의천은 각 교단을 통합하여 고려 불교의 파벌갈등과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흉흉해진 민심을 다잡고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로는 불교전적을 정비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평이 있다.
대각국사 의천 대사
의천(義天) (1055∼1101)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성은 왕(王)씨.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송악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 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 어났다. 11세에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 냐."고 물었을 때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 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 (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 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1085년(선종 2)에 송나라로 유학을 떠나 유성법사(有誠法師)와 함께 화엄의 깊은 사상과 현수 (賢首)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다르고 같은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1086년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 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 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다.
흥왕사 주지로 있으면서 그는 요나라·송나 라·일본 등에서 불교서적 4, 000여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모았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간 행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편집하였다.
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상권에는 경의 장소 561부 2, 586권, 중권에는 율의 장소 142부 467권, 하권에는 논의 장소 307부 1, 687권이 각각 수록되었는데, 모두 합쳐 1, 010부 4, 740권이 된다. 흥왕사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하여 간행하였으며, 이를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이라고 한다.
1097년(숙종 2)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같은 해 5월에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 교학을 강의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으며, 그 뒤 1099년에는 제1회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에는 국가에서 천태 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이로써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한 종파가 된 것이다. 의천은 원래 화엄종계통의 승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태교 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사상인 회삼 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교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 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의천은 불교전적을 정비 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 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1101년(숙종 6)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이 47 세, 법랍 36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 류(新集圓宗文類)>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23권과 <대각국사외집 (大覺國師外集)>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3권, <천태사교 의주(天台四敎儀註)>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 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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