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02. 13
언론 출신 선배 중에도 ‘태극기집회’에 참석하는 분들이 꽤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라, 또는 대통령도 대통령이지만 대한민국이 무너질까 봐 걱정돼서 대통령 탄핵 반대를 외친다고 굳이 설명한다. “언론이 너무 한다”는 한마디도 빼놓지 않는다. 존중한다. 그럼에도 가슴이 꽉 막히는 이유는 선배들 고언을 인정하기 어려운 대목이 자꾸 드러나기 때문이다.
11일 태극기집회엔 ‘기획폭로의 희생자’라는 K스포츠재단 정동춘 이사장이 등장했다. 서울대 체육학 석·박사 출신의 스포츠 전문가가 국정 농단 한쪽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게 너무 억울해 미칠 것 같다고 했다.
대통령의 비선 실세 최순실이 단골 마사지센터장을 K스포츠재단 이사장으로 앉혔다는 작년 9월 한겨레신문 보도가 그 억울함의 원천인 건 맞다. 언론인 출신이 운영하는 인터넷매체도 이 기사가 “세계 언론 사상 최악의 집단 날조”라고 비난했다. 1월 9일 청문회에선 정동춘이 마사지숍 아니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국회의원들이 마사지만 강조했다고 세세하게 소개했다.
그러나 이 기사엔 결정적인 부분이 빠졌다. “마사지 안 했다”는 정동춘의 증언에 이혜훈 의원이 “좋다. 그 숍에 뭐든지 간에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최순실 씨가 왔느냐”고 묻자 2010년 8월부터 2016년까지 한 달에 몇 번씩 찾아왔다고 답한 대목이다. 의원들의 추궁에 정동춘이 결국 단골인 최순실의 추천으로 (물론 청와대의 검증을 거쳐) 이사장이 됐음을 인정했음에도 정작 이 사실 보도는 쏙 빼고는 언론 날조를 탓한 셈이다.
정동춘은 태극기집회에서도 최순실과의 인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국정 농단 사건은 일개 고영태란 사람이 최순실과 함께 사익 추구를 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불거진 것”이라고 강조했을 뿐이다. 고영태처럼 유흥업소 경력이 있으면 내부 고발할 자격도 없고, 서울대 박사의 말은 무조건 신뢰받아야 한다는 발상은 이젠 버려야 할 기득권 세계의 의식구조 아닌가.
신속 탄핵을 외치는 촛불집회의 대통령 처형 퍼포먼스나 ‘정권교체 아닌 체제교체’ ‘사회주의가 답이다’ 문구를 보면 섬뜩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계엄령이 답’이라며 성조기를 흔드는 태극기집회도 섬뜩한 건 마찬가지다. 이 자리에서 친박(친박근혜)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은 “박 대통령이 무너지면 대한민국 안보가 무너진다”고 외쳤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탄핵당하면 ‘안보불안 세력’에 나라가 넘어간다고 믿는 보수층이 적지 않다. 아직도 1970년대에 살고 있는 듯한 박 대통령을 제왕적 군주로 떠받들었던 친박 의원들이 반성은커녕 기세등등해진 이유도 이들 친박 보수층의 안보불안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남북대화와 주변 정세의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추진했지만 실제로는 안보불안 대처, 또는 안보불안을 이용한 장기집권을 위해 유신독재를 자행했던 박정희 정권과 뭐가 다른지 의심스럽다.
친박 보수가 진짜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건 박근혜 없는 자신들의 미래라고 봐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애국심이라는 보수의 가치보다 박근혜와 찍은 사진이나 의리, 박정희-육영수에 대한 향수를 이용해 금배지를 다는 데 급급한 웰빙정당이 새누리당이었다. 그러니 주목받는 대선 주자가 나올 리 없다.
이들이 이제는 우리 머리 위에 버티고 있는 북한을 이용해 반칙과 특권의 보수(保守) 기득권을 천년만년 누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일말의 보수(補修)도 하지 않은 이들이 ‘공안검사 출신의 남자 박근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박근혜 대안으로 미는 것도, 이를 은근히 즐기는 황 권한대행도 친박 보수의 무책임성에 기여하긴 마찬가지다. 잘하면 TK(대구경북) 의원들은 새누리당이 개명할 자유한국당이라는 당명의 극우보수 꼴통당으로 살아남겠지만 박근혜 지키려다 국민에게 버려지고, 심지어 안보도 무너질 수 있다는 건 왜 모르는지 안타깝다.
지금 “불출마한다”고 명확히 밝히지 않는 황 권한대행은 보수가 망하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한 달여 뒤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은 “시중에서 이런 얘기가 돈다”며 출마설을 전하는 한덕수 국무조정실장 말을 “국가를 책임지고 관리할 권한대행이 누구한테 맡기고 입후보를 한단 말이냐”고 단칼에 물리친 전력이 있다. 이런 빈틈없는 위기관리 없이 어떻게 감히 ‘황교안 대망론’을 꿈꾼단 말인가.
김순덕 논설주간 yuri@donga.com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