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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방탕한 황비
단지흥 일행은 영고를 데리고 곧바로 천룡사로 향했다.
천룡사 중들이 중독된 지 이미 여러 날이 흘러 내일이면 벌써 닷새째였다. 급히 손을 쓰지 않으면 영영 때를 놓치고 말 것이었다.
그들은 가는 길에 말을 여섯 마리 구해 밤을 도와 천룡사로 내달렸다. 앞장서 천룡사에 이른 단지흥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영고에게 말했다.
"영고, 어서 들어가 고승들을 구하시오."
그 사이 선비는 득달같이 달려들어가 주지 일속 대사에게 그들이 왔다는 걸 알렸다. 일속 대사는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렸던 터라 반색을 하며 얼른 그들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영고의 뛰어난 미모를 마주 대한 순간, 일속은 그 경황에도 흠칫 놀랐다. 황제가 이 여자를 얻은 것이 행여 대리국에 화가 되지는 않을까 심히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 조금도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사께 인사드립니다."
영고가 먼저 말을 건겠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겠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일속은 환례를 하고 일행을 선방으로 안내했다.
영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놓으면서 일속에게 서둘러 중독된 고승들을 불러오라고 재촉했다.
잠시 후 얼굴뿐 아니라 수염까지 시꺼멓게 타들어 가는 노승 하나가 빈사 상태가 되어 들려 들어왔다.
"부축해 앉히세요."
노승을 부축해 앉히자 영고는 작은 손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노승의 몸 이곳 저곳을 모두 열여섯 곳이나 째고 거기다가 작은 병의 약을 발랐다. 일단 그렇게 한 다음 약초를 가져 오라고 해서는 불을 붙여 노승의 곁에 놓았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눈곱같이 작은 벌레들이 짜개진 노승의 살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작은지 머리와 몸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벌레들은 나오다 말고 방향을 찾느라 그러는지 한동안 몸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여러 사람들은 영고가 미리 당부한 대로 숨을 죽이고 소리 없이 벌레가 나오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노승도 선기(禪機)가 깊은 노승이라 아픔을 참고 견디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노승의 살에서 기어 나온 벌레들은, 곁에서 타는 약초의 짙은 향기에 취하여 꼬물거리더니 하나씩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두 열여섯 마리였는데 영고가 잽싸게 불붙은 약초를 그 위에 가져다 얹자 벌레들은 피직괴직 타 죽어 버렸다.
"이젠 됐어요."
영고는 노승의 상처에 다시 약을 발라 주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금할 게 있는데……."
영고는 웬지 말머리만 떼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금해야 할 거라니, 그게 대체 무엇이오?"
단지흥이 얼른 물었다. 영고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것을 보니 그는 애련한 생각이 들었다.
"그건 대사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 일인걸요."
그러면서 영고는 단지흥을 보고 방긋 웃었다. 그녀의 눈길엔 뭔가 부끄러운 기색이 맴돌고 있었다. 단지홍은 이내 눈치를 채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금하라는 건 바로 남녀간의 그 일을 금하라는 것이었다. 영고도 귀밑이 발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일속은 이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유심히 지켜 보았다. 일순 가슴속에 다시금 불안이 밀려들었다.
'이번 남방 만동에 다녀오시면서 황제께서는 이 아름다운 여인을 얻으시고 몹시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그런데 저 여인은 용모가 지나치게 아름답고 요염하다. 앞으로 저 여인 때문에 뜻밖의 일이 일어나 대리국에 해를 끼치게 될까 크게 저어되는구나.'
하나 지금은 천룡사 중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 그는 우선 이 생각은 접어 두었다.
영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바삐 손을 놀렸다. 그러면서도 매우 신중했다. 열 몇이나 되는 중들을 치료해 주고 나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
"폐하, 다행히 때를 놓치지 않았으니 그렇지, 이 몇 대사님들의 목숨이 그만……."
영고는 숨을 할딱이며 웃는 얼굴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예쁘디예쁜 영고가 천룡사 대사들의 생명까지 구하자 단지흥은 마냥 싱글벙글 입이 벌어져서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고마운 일이오. 천룡사 대사들의 몸에서 독을 빼내고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내 이젠 만 가지 근심이 싹 가셔 버렸소. 정말 고맙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세요. 폐하의 일이자 소첩의 일인데요. 꼭 남의 일을 해 드린 듯이 말씀하시네요."
영고는 짐짓 뾰로통한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오, 아니오! 내 그런 뜻이 아니오! 영고가 너무나 많이 수고를 해서 내 그리 하는 말이니 달리 생각 마시오, 응 영고!"
단지홍은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영고를 달랬다. 그러자 영고는 살짝 눈을 치뜨며 애교스럽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일속은 웬지 민망하여 불쑥 끼여들었다.
"폐하, 황비께서 잠시 쉬시게 우리는 나가십시다."
그러자 단지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흥과 일속 등은 조용히 선방을 나와 대응보전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이곳에서 천룡사 중들이 충피에게 중독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영고가 온 정성을 다해 천룡사 중들을 구해 내니 단지흥은 그렇게 마음이 놓일 수가 없었다. 영고가 아니었다면 도시 어떻게 될 뻔했던가. 만일 그때 숙녀 동에서 자기가 극구 영고를 내쳤다면 오늘의 이 일은 기대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이처럼 아름다운 황비를 언감생심 어디에서 얻는단 말인가. 단지홍은 사뭇 흡족하여
자기도 모르게 연해 입이 벙싯거렸다.
그러는 양을 일속은 내내 근심스러이 지켜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황비는 예사 여인이 아니었다. 혹 저 여인으로 인해 대리국에 먹구름이 드리우지나 않을까. 그는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일말 의 불길함을 도무지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백면라살로 인해 그 역시 얼마나 마음을 앓았던가. 황제도 자기처럼 저 여인에게 빠져 버리면 국사를 뒷전으로만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속은 안 되겠다 싶어 선뜻 말을 꺼냈다.
"저, 황제 폐하, 저 황비님은……."
"정말 뛰어난 여인 아니오? 저 여인은 진정 보배요, 보배! 두고 보십시오, 우리 대리국이 저 여인으로 인해 한층 흥성하게 될 것이오."
단지흥은 일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만만하게 한마디했다. 그러자 일속은 그만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황제가 저토록 저 황비에게 흡족해 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속은 차후에 기회를 보자고 마음을 다지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자, 어서 스님들을 치료해야지요."
단지흥은 관후한 미소를 지으며 일속을 바라보았다. 일속은 말없이 읍을 하고는 앞장서서 선방으로 향했다.
영고가 천룡사 중들을 다 해독시키고 나자 단지흥은 사대 시위와 영고를 데리고 황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영고를 각별히 총애했으며 형고와 정사를 치르면서부터는 다른 귀비들과 달리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영고 이전의 여인들은 대개 부르면 와서 그저 단지흥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는 형편이니 둘이서 하는 정사라도 기실은 한쪽밖에 재미를 못 봤다. 그러나 영고는 달랐다. 서로 농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며 한데 어울려 열을 올리다 보면 원래 남녀간의 정사란 이런 거구나, 할 정도로 새록새록 재미가 났다.
영고는 그녀의 침궁에서 단지흥이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가면 몇 달 만에 만난 것마냥 호들갑을 떨며 반가워하였다.
그런 나날이 몇 날 며칠이고 흘러 어느덧 두어 달 쯤 흐른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그녀는 궁녀들의 이야기를 귓전으로 흘리며 일심으로 단지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반가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 오자 그녀는 반색을 하며 뛰어나았다.
"어머나, 이제야 오세요? 보고 싶어서 혼이 났어요."
그녀는 서둘러 황제를 방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한껏 아양을 떨어댔다.
"폐하, 부탁이 있사와요! 내일 위사들에게 명해서 날 좀 마음대로 궁 밖으로 나가게 해 줘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네?"
"영고, 여긴 숙녀동이 아니라 대리 황궁이오. 나도 마땅치 않을때가 다소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종(祖宗)의 법이 지엄하거늘 난 들 어쩌겠소, 그대로 지켜야지. 영고도 이제 황비이니 황중의 법 을 지켜야 한다니까. 더욱이 그대가 거리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그대를 황비인 줄 알아보면 한켠으로 기한다 길을 내준다 야단법석을 떨어야 하니 그런 번거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소? 그런 대
로 황궁에 정을 붙여 봐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궁귈이 숙녀 동보다 좋으니 내가 온 거지 이렇게 황궁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바에야 숙녀동에 그냥 있지 예까지 무엇 하러 왔겠어요?"
영고는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곁에 있던 궁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싸쥔 채 키득키득 웃었다. 대리 황궁에 영고처럼 황제의 말에 대꾸질하는 여인은 여태까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예의를 모르는 영고를 비웃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을 듣고도 꾸짖지 못하는 황제마저도 비옷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흥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슬그머니 부아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영고, 이러면 못쓰오. 황비의 체모를 지켜야지."
"체모요? 그럼 어떻게 말하란 말이에요? 숙녀 동에서 나한테 장가들 때는 예의고 뭐고 한마디 못하더니, 궁귈에 오니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이건 무슨 예법이 이리도 많은지. 그럼난 벙어리처럼 입다물고 가만히만 있으라, 이 말이에요?"
단지흥은 이대로 나갔다가는 궁녀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하기 십상이라 손을 내저어 궁녀들을 물리쳤다. 그리고는 잔뜩 언성을 낮추어 영고를 달랬다.
"천하의 일은 어디나 다 법도가 있게 마련이오. 숙녀 동에도 숙녀동 법도가 있더구먼. 그대도 그 법을 지켰지 않소? 아무리 숙녀동의 할머님이고 뭐고 해도 그 법도를 지키지 않았나 말이오."
"정말 무슨 말씀이신지……. 난 숙녀 동에서 그 많은 예법을 모르고도 잘만 살았어요. 게다가 숙녀 동에는 이따위 거추장스러운 예법은 없었다구요. 이때껏 잘 참다가 하필이면 황제하고 연분이 돼 서…… 어쨌든 난 예법 따위엔 골치가 아프단 말이에요. 당신을 만나면 먼저 무릎부터 꿇어야 하고. 글쎄 무릎 꿇는 게 뭐 귀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수도 있는데 왜 여자만 무릎을 꿇어야 하고 남자는 무릎을 안 꿇는가 말이에요. 당신은 황제이고
난 황비인데 황비가 무릎을 꿇으면 황제도 같이 무릎을 꿇어야지 왜 가만있어요?"
영고는 막무가내로 생트집을 잡았다. 단지흥은 기가 막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단지흥은 노기를 띠지 않고 사뭇 부드럽게 영고를 달랬다.
"황비 자리에 앉아 있는 그 고충을 내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러나 황상 자리도 마찬가지요. 평민 백성들은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 다 자유자재로 할 수 있지만 황제는 원래 그럴 수가 없는 것이오. 그러니 그대도 좀 자숙하면서 궁성 생활에 적응해 봐요. 아, 내가 있잖소, 내가!"
"아이고, 그런 말은 다 그만두세요. 시끄러워요. 한 가지만 대답하세요. 나를 계속 황비로 곁에 두고 싶으시면 바깥 구경 좀 하게 날 좀 제발 내보내 주세요. 갑갑해서 죽겠어요. 한 번만요, 네?"
단지흥은 방법이 없었다. 이 야생마 같은 영고를 단 몇 달 만에 길들여 조신하게 후궁에만 틀어박혀 있게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 병이 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좀 내놓아 바깥 구경을 시키면서 차차 달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정 그렇다면 궁 밖을 좀 나가 보오만 궁녀들과 위사들은 데리고 나가야 하오."
그 말에 영고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다만 시종들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 몹시 성가셨지만 싫다고 하면 황제가 자기를 아예 내 보내지도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그것만은 양보하기로 하고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아이, 좋아라. 뭐 딱히 위사들이 안 따라가도 좋지만 어쨌든 내보내 주시기만 하세요!"
"안 되오, 위사들이 꼭 따라가야 하오! 아시겠소?"
단지흥은 다소 화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자 영고는 뜨끔하여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단지흥은 영고와 마주앉아 있기가 웬지 떨떠름하여 영고의 처소를 나와 버렸다.
단지흥은 심기가 몹시 울적하였다. 영고가 그저 일심으로 자기만 바라보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못내 서운했던 것이다. 그는 그저 발길 가는 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가다 보니 그는 어느덧 취옥궁(翠玉宮)에 다다라 있었다. 이 침궁은 단지흥이 황위에 오르자마자 처음으로 맞아들인 파이인(擺夷人) 황후의 처소였다. 단지흥이 들어서자 파이인 황후는 흠칫 놀 라더니 반가움에 겨워 땅에 부복을 한 채 머리채가 땅에 끌리도록 큰절을 하였다. 금방 목욕을 하고 나온 듯 함치르르한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 미모는 요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폐하께서는 새 황비를 맞으신 후부터는 소청은 아예 잊으셨나이까?"
파이인 황후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은 황제가 반갑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해 아름다운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이 여인은 단지흥보다 두세 살 위였다. 그래서인지 매우 숙성해 보였다. 단지흥이 황제로 즉위하였을 때 궁중 숙방(淑房)엔 황비가 없었다. 대신들이 하나같이 이는 천의 (天意)에 어긋나는 일이
라고들 간언에 간언을 하여 단지흥은 궁녀들 중에서 가장 아리따운 이 파이인을 택해 황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첫날밤, 파이인은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속삭였었다.
"폐하, 이번이 처음인가요?"
아무리 황제라 해도 그렇게 미녀를 마주하고 있으니 단지홍은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황제도 남자였다. 그것도 여인들과 통정 한 번 못해 본 동정남이었다. 단지흥은 얼굴이 발그레하니 달아올라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우리 둘은 부처간이니 그대는 나의 황후요. 앞으로 나를 진심으로 많이 도와주어야겠소."
그 말에 파이인은 방그레 웃으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서서히 그 미끈한 허리를 폈다. 그날 밤부터는 그녀가 남녀간의 그 일을 그에게 가르쳐 주는 황제의 선생인 것이었다.
"폐하, 오늘 밤 여기엔 다른 시녀들이 없으니 소첩이 폐하의 옷을 벗겨 드리겠나이다."
파이인은 단지흥 앞으로 더욱 바싹 다가들며 정답게 속삭였다.
단지흥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가슴은 널뛰듯 하였다. 언젠가 무예 비본에서 남녀간의 일에 대하여 읽은 적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글일 뿐이었다. 이렇게 막상 신방에 들어 파이인과 마주앉아 있자니 그는 실로 당황스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대 뜻대로 하시오. 오늘 밤 난 그저 그대 하라는 대로만 하겠소."
파이인은 단지흥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 냈다. 그리고는 또 살갑게 속삭였다.
"폐하, 남자와 여자가 동심동체(同心同體) 하나로 어우러지면 일천(一天)이라 하옵니다. 폐하는 여느 사내가 아니라 황상이시라 세상 모든 여인을 다 안으실 수 있사옵니다. 폐하의 마음에만 든다 면 이 대리의 여인은 어느 여인이든 가질 수가 있지요."
"나는 오늘 그대만 마음에 든다니까."
단지흥은 빙그레 웃었다.
성격이 활달한 파이인은 황제의 손을 잡아 슬그머니 자기 몸으로 가져 가며 속살거렸다.
"폐하, 천하의 여인들은 모두 폐하를 시중들게 되어 있지요. 하지만 이 소첩을 겪어 보시지 않고서야 어찌 다른 여인들을 견주어 보겠사옵니까?"
"다른 여인들과 견줄 필요는 없도다!"
단지흥은 여색에 흠뻑 취하여 눈동자마저 몽롱해졌다.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옵니다. 천하 여인들은 각기 제나름의 색깔이 있는 법이옵니다. 오늘은 제가 제일인 것 같겠지만 내일은 또 다른 여인이 더 좋아 보이실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파이인은 벌써부터 자기의 운명을 짐작하고 있었다. 황제의 여인들은 비록 오늘은 총애를 받는다 해도 언제 실총(失寵)을 당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이 두려워 다짐하듯 같은 말만되풀 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수가 있나. 내 비록 다른 희첩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래도 그대가 첫정이니 너무 상념하지 마시오."
단지흥은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파이인은 살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비애부터 느꼈다.
'황제의 저 말을 믿지 마. 저 말을 믿으면 바보야. 내가 어찌 황제를 한평생 내 사람으로 붙들어 놓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서글픈 마음을 털어 버리려고 나긋나긋한 몸을 한껏 단지흥 품에 내맡기면서 애교를 부렸다.
"폐하, 저를…… 저를 꼭 껴안아 줘요. 더 힘껏……."
단지흥은 파이인을 바싹 끌어안았다. 여인의 몸이 이처럼 부드러울 줄, 그는 미처 몰랐었다. 그는 여인이 시키는 대로 여인의 몸을 애무하다가 점점 더 망아(忘我)의 경지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 한 순간 그는 퍼뜩 책에서 본 '만악음위수(萬惡淫爲首)'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만악(萬惡) 중에서 음탕함이 수악(首惡)이라는 그 말을 그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체험하는 성싶었다…….
잊지 못할 밤이었다.
파이인과 단지흥은 서로 그토록 애절했건만 오늘에 이르러 파이인은 마냥 비애에 젖어 구슬프게 단지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새로 온 황비가 무척 총명하고 요염하며, 매우 담대한 여인이라는 소리를 익히 듣고 있었다. 그 여인은 자기는 지니지 못한 많은 것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하여 황제로부터 자기는 누리지 못한 은총을 넘치도록 받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눈에는 그 여인밖에 안보일 것이었다. 파이인은 그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언젠가 냉궁(
冷宮)으로 쫓겨 들어 가지는 않을까…….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단지흥에게 매달렸다.
"소첩만을 총애하겠다고 하셨으면서……. 전 매일 목욕갱의(沐浴更衣)하고 폐하를 기다렸사옵니다. 야경 치는 소리만 들리면 소첩은 퍼뜩퍼뜩 폐하께서 오시는가 소스라쳐 깨어나고, 꿈결에도 폐하를 잊지 못했사와요. 소첩을 품에 안고 소침에게 남녀간의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하시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그런데도 폐하는 오시지 않고……. 새 황비를 데리고 오신 이후로는 한 번도 오시질 않으셨으니……. 폐하, 그 여인이 그렇게 좋사옵니까? 소첩보다 무엇이
그렇게 좋사옵니까?"
파이인의 두 눈에선 눈물 방울이 주르르주르르 굴러 떨어졌다.
단지흥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인지 그녀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얼굴에 주름살이 엿보였지만, 한창엔 진정 견줄 바 없이 빼어난 미색이었다.
그 순간, 단지흥의 눈앞에 얼핏 영고가 스치는 듯하더니 점점 더 또렷이 영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파이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파이인 황비보다야 영고가 훨씬 낫군……. 이 여자가 비록 나의 황후요 첫 여자로. 남녀간의 그 일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었다 하나 아무래도 영고 쪽으로 마음이 끌리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아무래도 영고 쪽이…….'
그런 생각이 들자 단지흥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파이인은 마냥 울고 았다가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야. 그 동안 황제가 여기에 발걸음을 아니한 것은 내가 싫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득 이렇게 오신 것을 보면 그 영고라는 계집과 무슨 불쾌한 일이 있은 게 분명해. 그 울적한 심기를 풀려고 여기에 오신 게야. 그런데 내가 한심하게 울기만 하고 있으니 심기가 더욱 울적해지실 것이고 그러면 나를 더욱 멀리하실 게 아닌가. 그래, 이 무정한 황제 앞에서 울기만 해서는 안 돼. 무슨 수를 써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잃은 총애를 되찾아야해.'
여인의 직감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단지흥은 파이인의 생각대로 화가 한층 더 끓어오르던 참이었다.
'영고의 앙탈이 듣기 싫어 마음이나 좀 달래 보려고 온다는 것이 예까지 온 것인데 잘못 왔군그래, 잘못 왔어! 여기서도 징징 울며 화를 돋우니……. 이럴 줄 알았으면 서재에 가서 책이나 보는 건데! 그래, 가서 책이나 보자.'
단지흥은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홱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파이인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생긋웃었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기실 소첩은 폐하가 오시니 너무 반가워 그만 폐하의 심기를 헤아리지 못하고 이렇듯 눈물만 보였으니……. 폐하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아닌가 심히 저어 되옵니다. 폐하, 어여삐 살펴 주옵소서……."
그리고는 파이인은 단지흥 품에 찰싹 안겼다.
"폐하, 이런 재미는 언제나 제가 가르쳐 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소첩은 폐하와 제일 처음으로…… 안 그렇사옵니까?"
파이인은 아직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단지흥을 올려다보며 방긋 웃더니 그의 귓바퀴를 살짝 물고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더듬기 시작했다. 이러기만 하면 황제는 욕정이 일어나 신음 소리를 내며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파이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가슴팍을 온 정성을 다해 더듬었다…….
영고는 드디어 황궁 밖으로 나왔다.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그녀 뒤에는 궁녀들도 따르고 위사도 몇 따라왔다. 그녀가 만일 뜻하지 않은 일에 봉착하게 되면 이들이 나서서 막아 주리라,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황비의 행차를 알리며 사람들을 물리지 않겠는가. 그러면 사람들은 한껏 부러운 눈길로 자기를 우러러보고…….
영고는 자못 흡족한 마음으로 잔뜩 위엄을 부리며 거만하게 걷고 있었다. 그렇게 위세를 떨치며 그녀는 대리의 궁성을 한 바퀴 쭉 순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도 위사들은 마냥 못 본척하며 사람들에게 황비의 행차를 알리는 법 한 번 없었다. 그들은 기실 되레 영고가 황비라는 사실이 웃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새 황비가 왔어도 공식적으로 대리 사람들 앞에 선 적이 없으니, 대리 사람들은 그녀가 황비인지 대가 댁 규수인지 모르고 있는 터였던 것이다. 영고는 위사들의 태도가 자못 못마땅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트집잡아 길거리에서 위신을 깎
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위사들을 약이나 올려 주자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루(酒據) 위로 선뜻 올라갔다.
숙녀동에 있을 때 밖이라곤 나돌아다녀 보지 않다가 딱 한 번 성안에 들어왔을 때 거리에 술 먹는 주루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었다. 황비인 자기가 남정네들이나 찾을 법한 주루로 들어서면 궁녀들이건 위사들이건 적이 당황해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궁녀들과 위사들은 몹시 당혹스런 기색으로 영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감히 말릴 수는 없었다.
영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가져 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웬 여자가 올라와 술을 가져 오라고 호통을 치자 술상에 앉았던 남정네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들은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가히 심장이 벌렁거릴 만한 천하 절색이 아닌가.
그녀는 거만하게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앉아 있다가 술을 날라 오자 한 모금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양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술 맛이 이래?"
그녀는 고개를 내젓다가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한 사내와 눈길이 마주쳤다. 언뜻 보기에 스무 살 가량 돼 보이는 애송이였다.
'쳇, 그 주제에 나를 탐내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다. 남자들은 여자가 욕심나면 여자 몸에서 한시도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더니 꼭 그 짝이로군. 도적 놈같이 시꺼멓게 생긴 녀석이……. 심사도 그렇지 않은데 심심풀이나 해야겠다!'
영고는 그 사내를 쳐다보다가 살짝 웃어 주었다. 그러자 사내는 눈이 대번에 밝아졌다.
'이거 오늘 운수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닌데. 내가 중원 땅에서 불원천리 예까지 와 일양지 비본도 못 얻어내 영 기분이 판인데, 뜻밖에 예쁜 계집과 한바탕 놀아나게 됐군! 하, 이거 참!'
사내는 가슴이 뿌듯하여 연신 입이 벙싯거렸다. 그는 영고를 똑바로 바라보며 농을 걸었다.
"살결이 아주 고운데, 백설같이 하얗고."
그러자 영고는 또 한 번 방긋 웃어 보이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받았다.
"그쪽도 그리 검은 편은 아닌데……."
사내는 영고의 대답에 이빨을 쩍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말만 들어도 알 수 있잖아, 저 계집은 나를 홀리고 있어. 대단한 계집이야. 혹 몸을 파는 계집일지도 모르지. 그런 계집들은 맛이 독특하거든. 여하튼 저런 예쁜 계집을 그냥 스쳐 지나갈 내가 아니다.'
사내는 허허 웃으며 수작을 걸었다.
"내 인물도 그만하면 괜찮다 이 말인데……. 내 보기엔 그대도 미색이 뛰어나군. 그러니 우리 함께 술잔이나 기울여 보지 않겠소? 미남 미녀 동배주란 말도 있으니."
형세가 이렇게 돌아가자 따라온 궁녀들과 위사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등골에 식은땀이 확 내뱄다.
'아이고 황비님, 황비 신분으로 이런 곳에 와서 그런 말을 하다니……. 생면부지 외간 사내와 저렇듯 함부로……. 큰일났다, 큰일!'
영고는 사내를 흘끗 쳐다보면서 속으로 한껏 빈정거렸다.
'네 놈이 내가 숙녀동의 무당 할미였던 줄을 알면 꼬리가 빳빳해져서 진작에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을 게다. 내 오늘 네 놈을 선선히 놔 주지 않을 터인즉, 그 동안 궁 안에서 갑갑증이 나 죽을
뻔했는데 마침 잘됐다, 한바탕 가지고 놀아 봐야지.'
영고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하나 이 사내 역시 평범한 속인은 아니었다. 무림에서 한다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면 영고 뒤에 기골이 장대한 장정 여럿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신분을 짐작해 벌써 꽁무니를 뺐을 터였다.
대리의 천룡사를 한번 들었다 놓고 황제도 한번 만나 혼쭐을 내 주겠다고 벼르며 이 먼 길을 달려온 겁 모르는 사내였다.
"나는 추가라는 사람이오. 아씨는 성이 뭐요?"
영고는 자기를 아씨라고 부르자 적이 기분이 좋았다.
'아씨? 그 말 참 좋은데. 지금껏 아씨란 소리 한 번 못 듣고 이렇게 컸어. 아주 어려서부터 숙녀동 동주가 되어 말끝마다 할머님, 할머님, 그저 여기에 올 때까지 할머님 소리만 듣다가 여기 와 서는 또 그저 황비, 황비…… 아유, 지겨워. 한데 이 사람은 나를 아씨라고 부르는구나. 아씨…… 참 다정한 말이야.'
"방금 날 뭐라고 불렀죠?"
영고는 사내에게 되물었다. 사내는 의아해서 대뜸 되물었다.
"아씨라고 불렀소만, 뭐 잘못되었소? 그대는 아씨 중에도 굉장히 예쁜 아씨, 첫눈에 쏙 안기는 예쁜 아씨 라니까."
사내는 넉살좋게 영고를 치켜 올렸다.
"내 이름은 영고예요. 하지만 지금껏 아씨라는 소린 한 번도 못 들어 봤어요. 아씨! 호호호……. 아씨!"
영고는 진정으로 기뻤다. 속마음을 감출 줄 모르는 떵고는 한껏 신이 나서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사내는 다시금 홀딱 반했다.
'햐! 저 웃음은 기가 막히는구나. 여인의 한 번 웃음을 얻기 위해 천금을 버리고, 나라를 망쳤다는 얘기도 있더니…….'
사내는 당장 이 요염한 계집을 텀석 품에 안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영고를 따라온 위사들은 이제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주인 마님, 이젠 돌아가시지요."
한 위사가 다가서며 말했다.
"아니, 자네가 주인인가, 내가 주인인가? 내가 주인이라면 내명을 기다려야지 왜 나서는 게야? 돌아가고 싶으면 돌 아가자고 할테니 잠자코 기다리게."
그러더니 영고는 한쪽 다리를 옆 걸상에 척 올려 놓았다. 그러자 치마가 걷혀 올라가며 그 희디횐 다리가 다 드러났다. 뾰얗고 미끈한 영고의 다리를 보자 사내는 두 눈이 뒤집혀 군침을 꿀꺽 삼켰다. 영고는 사내의 하는 양을 보고 내심 코웃음을 쳤다.
'보는 건 네 놈 자유다. 실컷 봐라. 하나 눈요기나 하지 네 놈이 별수 있다더냐. 이 예쁜 다리는 황제에게만 보이는 건데 네 녀석이 오늘 의외로 득을 보는구나. 자 보려면 실컷 보아라. 보는 것쯤이야 뭐라 안 할 테니.'
사내는 영고의 속마음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영고의 다리만 훑었다. 사내의 눈에서 탐욕스런 눈빛이 번쩍였다. 저처럼 분같이 희고 쏙 빠진 다리는 그때껏 본 적이 없었다. 남방의 만동 에서 자란 여인들이 다른 지방 사람들은 모르는 특이한 식물을 먹기에 살결이 유난히 희다는 것을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사내는 한참 만에야 백옥 같은 다리에서 눈길을 떼고 아직도 얼얼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아씨. 우리 함께 술이나 마십시다. 어때요?"
"그럽시다. 거기선 거기서 산 술을 마시고 난 내가 산 술을 마시는데 누가 뭐래요?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거지."
"좋소. 아씨가 나를 그렇게 환대해 주니 정말 고맙소. 그럼 내 먼저 한잔 쭉 들이켜리다."
사내는 음심이 동해 손까지 덜덜 떨면서 술잔을 들었다.
위사들은 그 모습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려 눈을 부릅떴다. 생각대로라면 당장에 놈을 쳐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그러나 사내는 그깟 위사쯤아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따라온 놈들로 봐선 허투루 몸을 파는 계집 같지는 않고, 어느 고관대작의 딸이거나 권문세도가의 소실쯤 될 것 같은데, 아 뭐, 황제의 누이일지도 모르지. 그러면 뭐 대순가? 대리 단씨들이 몽 땅 달려들어도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아!'
사내는 자못 호기롭게 술을 쭉 들이켰다.
사내 여남은 명이 이 주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들은 이 두 남녀가 수작을 거는 모습을 처음부터 줄곧 유심히 지켜 보고 있었다. 한눈에도 이 여인이 여염집 아낙이 아님을 그들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복색으로 보나, 얌전치 못한 행실로 보나 결코 평범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돌아가는 판세를 쭉 지켜 보다가 웬지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는 하나들 차례차례로 주루를 빠져 나갔다. 마침내 다른 주객들은 다 사라지고 영고와 그 사내 그리고
궁중 위사들과 궁녀들만 남았다.
사내는 연신 영고에게 술을 권했다. 영고 역시 한 번 사양하는 법도 없이 들어가는 족족 술을 들이켰다. 영고는 퍽이나 취기가 올라 있었다. 일순, 사내는 눈빛을 반짝 빛내며 은근 슬쩍 물었다.
"아씨는 집에 날마다 웃는 낯으로 대해야 할 남정네가 따로 있는 모양이오, 뒤에 저렇게 사내들이 늘어서 있는 걸 보니?"
그 말에 위사들은 더욱 발끈했으나 취중진담이라고 그녀는 갑자기 속에 맺혔던 생각 하나가 불끈 치솟아 눈꼬리를 치뜨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사내에게 되물었다.
"거기도 사내이니, 어디 말 좀 해 봐요. 여자들은 꼭 사내한테 무릎을 꿇어야 하나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영고가 난데없이 엉뚱한 질문을 들이대자 사내는 영문을 몰라 한동안 어정정해 있었다.
'여하튼 이 계집이 속에 뭔가 단단히 꼬인 게 있는 모양이다. 어디 슬슬 장단을 맞춰 가며 한번 들어나 보자. 제 사내에게 억울한게 있어 하는 말이라면 내겐 오히려 잘된 셈이지.'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아씨가 싫어하는 사내한테야 무릎을 꿇을 필요가 뭐 있겠소?"
"그럼…… 그럼 좋아하는 남자한테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영고가 계속 뚱딴지 같은 소리만 해대자 사내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이 계집이 고관대작의 딸이긴 딸인가 보다. 그러니 제 본가의 지체를 믿고 제 사내를 깔보는 게지. 그런데 저 계집이 마음에 두고 있는 남정네란 대체 누군가? 제 남편인가 아니면…….'
사내가 멀뚱멀뚱하니 말이 없자 영고가 새초롬히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언성을 높였다.
"어서 말해 봐요. 왜 말을 못해요? 내가 말하는 남자가 황제일까 봐 겁나서 그러는 거예요?"
영고는 취중에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이 흘러 나갔다. 그러나 사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벌컥 자존심이 상해 큰소리 쳤다.
"황제? 흥, 대리 황제 단지흥이라도 난 무섭지 않소. 아씨, 사내들이 아무리 잘나도 미인들 치마폭에서는 별수없는 거라오, 황제라도 다 똑같다구."
지금은 비록 황비 신분으로 황제의 말 한마디에 설설 기며 궁 안에 갇혀 있지만 숙녀 등에서는 일호백웅하는 동주 아니었던가. 영고는 사내의 말에 쌍수를 들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황제면 뭐 단가요? 제가 황제면 황제지……."
영고는 술잔을 쳐들며 깔깔 웃었다.
그러나 한켠에 꼼짝없이 서서, 영고와 사내가 수작하는 양을 쏘아보던 위사들은 노기가 끓어올랐다. 궁녀들도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저런 개망나니 같은 놈이?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제깟 놈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황제를 들먹여?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이 났군, 환장이!'
그들은 주먹을 불끈 부르쥐었다. 하지만 감히 사내를 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단지흥은 시위들이 바깥에 나가서 사단을 만드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한 위사가 영고에게 다가갔다.
"마님, 주인님 말씀이 있잖습니까? 바깥에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마님께서 오늘 과음하신 것 같으니 이젠 그만 돌아가십시다."
"돌아가자구? 어디로? 내 집…… 내 집이 어딘데?"
영고는 불콰하니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위사를 바라보더니 엉뚱한 소리를 했다. 위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님 집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시겠습니까?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술이 너무 과하십니다. 가십시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영고는 손을 내두르며 막무가내로 중얼거렸다.
"집…… 내 집…… 내 집이……."
"저리 못 비켜? 너희 마님과 내가 지금 한창 흥에 겨워 술이 한창이라는 거 안 보여?"
위사는 화가 나서 몸이 다 부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저 녀석을 육장을 내 놓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아니, 왜 호통이오? 내가 우리 마님하고 말하는데 거기서 무슨 상관이라고 이 야단이오?"
"이 놈이 어디다 대꾸질이야!"
사내는 짓씹듯 내뱉으면서 다짜고짜 장풍을 날렸다. 고막을 찢듯. 쌩하고 바람소리가 일었다. 그 소리에 영고는 정신이 번쩍 들며 적이 놀랐다.
'저자의 무예가 보통이 아닌데!'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장풍을 날렸는지라 영고 뒤에 있던 위사는 미처 방비를 못하고 그만 그 장풍에 맞고 말았다. 그는 휙 뒤로 몇 자나 날려 가더니 탕 하고 벽에 부딪혔다. 철퇴를 맞은 듯 벽에는 순식간에 큰 구멍이 뚫렸다.
그것을 보고 나머지 위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야앗 기합을 지르며 일제히 공격을 들이댔다. 하나는 짧은 비수를 사내의 옆구리를 겨누어 내던졌고, 한 위사는 큰 칼을 휘두르며 머리를 내리찍었으며, 또 한 위사는 그 사내 뒤에서 주먹을 내질렀다. 사내에게는 위기 일발의 순간이었다. 옆구리로 날아드는 비수를 피하면 내리찍는 큰 칼을 피할 수 없고, 내리찍는 큰 칼을 피하면 뒤에서 질러 오는 주먹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히 몸을 약간 기울이면서 손바닥을 척 내밀어 장풍을 내쳤다. 그러자 날아오던 비수가 곧바로 그 장풍에 맞아 퉁겨 나가며 비수를 내던지던 시위는 직통으로 장풍에 맞았다. 다음 순간 그의 가슴에서 북 치듯 한 소리가 나더니 그는 욱 하며 피를 왈칵 토해냈다. 피는 맞은편 바람벽으로 튀어 가 벽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실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큰 칼을 내리찍던 위사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 바람에 큰 칼은 사내
를 찍지도 못하고 빗나가 땅에 쿡 박혔다.
그 순간 사내는 급히 방향을 돌려 뒤에서 주먹을 내지르는 위사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주먹을 쓰는 위사는, 셋 중에서 손은 제일 느렸지만 주먹 힘이 비길 데 없이 세서 평소 병장기를 쓰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그는 사내가 내미는 손바닥을 미처 내칠 겨를도 없이 무쇠 같은 손바닥이 문득 가슴에 와 닿은 것을 느끼며 일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얼핏 느끼기엔 아무 힘도 없이 그저 슬쩍 건드리는 것 같았지만 이내 숨이 턱 막히고 오장육부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그는 가슴을 그러쥐며 온몸을 비비꼬았다.
"사…… 사람…… 죽인다……."
그 위사는 말도 채 못 맺고 그 자리에 푹 꼬꾸라져 버렸다.
그러나 영고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여전히 웃는 낯으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허, 저 녀석 좀 보게. 대리에서도 보기 드문 무예를 지니고 있네. 황제나, 천룡사 고승들 아니고는 누구도 감히 대적을 못하겠어.'
"대단한데요. 그게 무슨 장법인가요?"
영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뭐 딱히 무슨 장법도 아니고, 이 정도야 보통이지요."
사내는 그 장법에 대해 말하기를 피하며 씩 웃었다.
위사들이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자 영고는 사납게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한쪽으로 물러서 있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들은 입맛을 다시며 찍소리도 못하고 한켠으로 물러섰다. 놈에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 주려고 나섰다가 봉변을 당했으니 차마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황제가 이 황비마마 덕분에 구구십팔동에서 봉변을 당하고도 살아났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황비가 이 추씨라는 무례한 놈을 요절내기를 학수고대했다.
"장사님은 어디서 왔어요? 여긴 무얼 하러 왔구요?"
영고가 물었다. 그 추씨 성을 가진 사내는 영고를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의 색욕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저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난 중원 사람으로 단지 대리를 구경하러 왔을 뿐이오. 대리는 경치도 좋고 어디나 동백꽃 향기가 그윽해서 남자도 그 향기에 취해 녹고 여자들도 사뭇 달떠 오른다기에 어디 구경이나 한번 해 보자고 온 것이오."
사내는 콧대를 건뜻 들고 앙천대소를 했다. 영고 뒤에 물러서 있는 위사들은 약이 바짝 올랐다.
'우리 대리가 아무리 소국일지언정 이렇게 면전에서 모욕하는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하물며 황비마마를 앞에 두고 능욕이 저토록 방자하다니…….'
사내는 오만불손하게 영고를 바라보았다. 마치 영고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감상하듯 했다. 숙녀 동에서 자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 여인은 당돌하기도 하고 탐스럽기도 했다.
"그래 그런 한가한 구경이나 하자고 이 대리에 왔단 말이에요?"
영고는 실망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것만은 아리오. 나는 온 김에 대리 단씨네 사람들을 만나 그 일양지공이 정말 소문대로 그렇게 대단한가도 알아볼 참이오. 일양지공이 내 이 철장(鐵掌)보다 강한지 한번 겨뤄 볼 셈이오."
사내는 웬일인지 선선히 털어놓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듣고 나자 영고는 슬그머니 부아가 났다.
'뭐라구? 저따위 시들시들한 녀석이 세상에 으뜸가는 단씨 가문의 일양지공을 여지없이 깔보고 시비를 다 걸어? 괘씸한 놈같으니라구. 좋다, 나도 이 참에 어디 네 그 철장인지 뭔지 하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센지 구경이나 좀 해야겠다.'
영고는 마음속으로 독기를 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한껏 교태로운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어디 나하고 한번 겨루어 보겠어요?"
그러자 사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싸늘한 눈길로 영고를 쳐다보았다.
"겨루자니? 내가 거기와 그래, 뭘 겨룬단 말이오?"
"대리 단씨네와 무예를 겨뤄 보러 여기에 왔다면서요? 나도 대리 단씨네 사람이니 나하고 먼저 겨뤄 보잔 말이에요."
영고의 말에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에이, 농담 마시오. 내가 뭐 단씨네 사람이면 아무하고나 겨루려는 줄 아시오? 난 그 누구도 필요없고 단 한 사람, 단지흥하고 겨루러 온 것이오. 내 이 철장이 더 센가, 단지흥의 일양지공이 더 센가 보자고 말이오."
그러면서 사내는 그릇 하나를 한 손으로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 순간 그릇은 팍 하고 깨지더니 한줌 가루가 되어 부슬부슬 떨어져 내렸다.
'실로 대단한 장력(掌力)이군! 저 철장을 이길 수 있는 고수가 대리에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자칫하면 황제도 못 당해 낼지 모른다…….'
영고는 이런 생각이 들자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가 먼저 손을 써서 이 녀석을 죽여 버려야겠다고 다부지게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웃는 낯으로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심 이 사내를 어떻게
죽일까 방책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하고 누가 더 독에 잘 견디나 한 번 내기해 봐요."
영고가 은근 슬쩍 운을 뗐다.
여자가 이따위 내기를 걸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이 사내는 한동안 물끄러미 영고를 바라보았다. 일개 계집이 재간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처음 볼 때는 음심이 통해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으나. 그는 이제 영고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불현듯 한 여인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구양봉의 여인, 모용쟁…… 인상 깊은 여인이었다. 그때것 그 여인처럼 그렇게 자기를 끌어당긴 여인은 없었다. 영고도 아름답긴 하지만 단지 그 미모 때문에 탐냈던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
"정 그렇다면 좋소, 아무것으로나 겨뤄 봅시다. 내 대리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에게 탄복하고 말게 만들어 놓겠소이다."
영고를 따라온 위사들은 자못 긴장이 되었다. 그들은 이 추씨 성을 가진 사내가 무예를 겨뤄 보겠다고 그 먼 중원에서 이렇게 온 것을 보면 무예도 매우 고강할 뿐 아니라 다른 재간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황비가 저 녀석하고 겨뤄서 저 녀석이지면 원수를 갚는 것이 되겠으나 만의 하나 황비가 져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네 사람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추 선생은 대리에 온 손님인데 그러다가 잘못되면 좋지 않으니 잘 생각해 보세요. 잘못하여 타관에서 객사하면 무주고혼이 될지도 모르니……."
영고는 그릇을 가져다가 거기에 물을 가득 부으며 생글생글 말했다. 그러자 사내는 목을 젖히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런 염려일랑 마시오! 내 평생 가장 두렵지 않은게 무엇인지 알기나 아시오? 바로 독이오, 독! 이번 대리에 올때까지만 해도 남과 독을 겨를 기회가 닿을 줄은 예상도 못했는데 당신 같은 아씨가 다 나하고 독을 겨뤄 보겠다니, 이거 재수가 좋은걸. 핫하하하……."
영고는 사내가 이렇듯 기고만장하게 나오자 다소 어정정해져서 금세 대꾸를 못했다. 이 사람이 정말 말 그대로 독을 사용하는데 뛰어난 재간을 가진 대가라면 오히려 자기가 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한번 내뱉은 터, 도로 걷어들일 수도 없어 영고는 단단히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누가 센지는 겨뤄 봐야 알 게 아니에요?"
영고는 여전히 생글거리면서 물이 찰랑찰랑 담긴 사발을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죽음이 두 사람 복판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나 진배 없었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죽을 수도 있고 둘 다 죽을 수도 있다. 추씨 성 가진 사내는 코웃음을 쳤고 영고는 살짝 낯을 붉혔다.
"추 선생님, 이렇게 해요. 다른 사람들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다툴 필요 없이 아주 간단한 내기지요. 우리 둘이 모두 이 물에다 손을 담그는 거예요. 그런 연후에 향 한 대를 다 태을 동안 누가 버터 내는지 보는 거지요. 그때까지 참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말예요. 어때요?"
"나하고 독에 견디는 재간을 겨루느니 지금이라도 다른 방법을 내놓는 게 유리할 거요. 내 이 손은 어떤 독에도 꿈쩍도 안 하는 손이니……."
사내는 호탕하게 웃어 젖히더니 한 눈을 찔끔 감아 보이면서 손을 척 그 물에다 담갔다.
사발의 물은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그저 그런 물이었으나 기실 아주 지독한 독수였다. 사내의 손이 들어가자마자 물은 단박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피지직 연기가 피어 올랐다. 사내는 가슴이 뜨끔하여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참 대단한데!"
이어 사발의 물은 금세 핏빛으로 변하고, 다시 흰색으로, 또 회색으로 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내의 얼굴색도 창백해졌다. 팔뚝 근육마저 눈에 띄게 불뚝거렸다. 그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거 정말 생각 밖인데!"
사내는 연신 소리를 지르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두 팔근육은 더욱 비어져 나왔다. 그릇의 물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끓어오르고 연달아 연기가 피어 올라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추 선생님, 견디지 못하겠으면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세요. 내가 해독제를 드릴 테니……. 그렇지 않으면 구할 수가 없게 돼요.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구요!"
영고는 여유작작하게 이죽거렸다.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흥, 거기선 상관 마시오!"
그릇의 물은 계속 증발하여 점점 줄어들었다.
"추 선생님, 그릇에 물이 다 마르면 더 이상 내기를 못하니 그때 가선 난 안 하고도 이긴 것으로 치겠어요."
사내는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그저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한 순간 그는 그룻에서 손을 뺐다. 어느새 향 한 대가 다 탈 시간이 지났던 것이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긴장해서 내가 시간 가는 것도 몰랐어. 대단해, 정말 대단해.'
사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의 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번은 내가 잘못했어. 저 녀석 손은 보통 손이 아니야. 오산을 했지, 오산을 했어…….'
영고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천천히 손을 담갔다. 그러나 좀전과는 달리 물은 그냥 그대로일 뿐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지도 않았고, 김도 피어 오르 지 않았다.
추씨 성을 가진 사내는 이 여자가 손에 필시 무슨 해독약을 발랐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발의 물이 저렇듯 그대로 일 수 있겠는가? 사내는 연신 코방귀만 뀌었다.
어쨌든 이번은 피차 일반으로 비긴 셈이었다.
"추 선생님, 이번에 대리에 와서 기어코 대리 사람들과 자웅을 가려 보겠다 이거예요?"
영고는 뻔한 일을 또 물었다.
"물론이오. 난 꼭 대리 황제 단지흥을 만나 봐야겠소. 그 사람의 일양지공이 도대체 어떻기에 무림 사람들이 천하 4대 기공(奇功) 중에 하나라고 떠받드는지 내 이 눈으로 직접 봐야겠소."
사내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천하 4대 기공이라니요? 난 금시초문인데…… 그래, 그 4대 기공엔 어떤 무공들이 있어요?"
그러자 사내는 몹시 언짢아져서 투덜거렸다. 그 4대 기공이라는 것을 입에 담기도 싫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4대 기공인지 뭔지 하는 것들을 일일이 꺾어서 내 이 철장공이 천하 제일이란 걸 세상에 보여 주려고 이 대리에 왔단 말이오."
영고는 사내의 말이 같잖아서 입을 삐죽거렸다. 이윽고 영고가 물에서 손을 뺐다. 사내는 언뜻 영고의 손을 건너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처음 볼 때처럼 그렇게 매끈하고 횐, 남자들의 눈 길을 홀리는 예쁜 손이었다.
"추 선생님, 이번엔 서로 어슷비슷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이러고야 말 수 없잖아요? 한 번 더 겨뤄 어떻게든 끝을 봐야지요."
영고가 대뜸 말하자 사내는 또 무슨 꿍꿍인가 싶어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영고가 말을 이었다.
"나는 남방에서 왔어요. 내 있던 고장엔 볼 만한 것들이 아주 많은데 한번 가 보지 않겠어요? 가 보시면 다시는 이전 내기는 안하려 들걸요. 세상 아무리 독에 능한 사람이라도 우리 할머님한테 는 못 이긴다구요."
사내는 도통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영고는 사내가 얼떨떨해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아주 작은 꽃함 하나를 탁상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추 선생님,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 이제라도 그만두자고 하세요."
"후회? 내가 후회할 게 뭐야?"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영고는 그 작은 꽃함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열었다. 사내는 몹시 의아해하며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 보았다.
'도대체 저 안에 무엇이 들었기에 저렇게 애기 다루듯 하는 걸까?'
영고는 꽃함의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며 은방울 굴리는 듯한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와서 지금껏 너를 가둬 두었다고 성내지 마라. 오늘 시원하게 바깥 구경을 시켜 주면 되잖니?"
깜찍하게 생긴 그 꽃함은 금실로 엮어 만든 것인데 안에는 또 은박을 입혀 놓았고, 가장자리에는 옥편(玉片)으로 장식을 하여 대단히 귀중한 것처럼 보였다. 그 함 안에는 아주 작고 가는 독사 한
마리가 죽은 듯이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영고는 마치 귀염둥이 갓난애기를 어르듯 속삭였다.
"성내지 말래도 이런다. 글쎄 여기 와서 한 번도 너를 내놓지 않은 건 내 탓이 아니야. 이젠 내가 황궁 사람이 됐으니 너를 갖고 놀면 안 된다고 단속이 여간이 아니야. 그래서 그런 거지 뭐 네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라니까."
뱀은 마치 영고의 속삭임을 알아듣기나 하는 것처럼 서서히 대가리를 치켜 들더니 함 밖으로 기어 나왔다. 뱀은 함 뚜껑 위에 기어 오르더니 갑자기 흥분된 것마냥 대가리를 꼿꼿이 치켜 들고 새빨간 두 눈으로 사내를 쏘아보며 짧은 바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흥, 활궁 사람이라면서 그따위 뱀이나 갖고 놀다니……."
사내는 내심 겁이 덜컥 나면서도 입으로는 영고를 비웃었다. 아무리 뻔뻔스런 영고라도 그 말에는 얼굴이 붉어져 급히 반박했다.
"궁 안에선 결단코 뱀을 가지고 놀지 않았어요. 하늘에 두고 맹세해요! 궁에서는 뱀을 갖고 놀게 하는 줄이나 알아요?"
"글쎄 송나라 황궁이라면 모를까 이까짓 대리 황궁 같은 데서야 뱀이면 어떻고 송충이면 또 어떻겠소?"
사내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영고는 그저 한숨을 한 번 짓더니 그 말엔 대답을 피하고 딴소릴 했다.
"내기 한 번 더 해서 승부를 꼭 가르자는 데 동의하셨죠?"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요."
"그럼 좋아요, 한 번 더 겨뤄 봐요. 이 독사에게 물리고도 누가 더 견뎌 내는가, 그것이 바로 내기예요. 마지막까지 견뎌 내지 못 하고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면 그 사람이 지는 거예요. 어때요?"
"좋소! 그러면 내가 먼저 시작할까?"
사내는 호기를 부렸다.
"아니오. 아까는 추 선생님이 먼저 했으니 이번엔 내가 먼저 해야죠."
영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선뜻 옷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옥같이 하얀 팔을 탁상 위에 척 올려 놓았다.
"이렇게 놓고 그저 저 뱀이 아무데나 물게 내버려두는 거예요. 그러나 피하면 안 돼요. 누구라도 움직여서 피하기만 한다면 그건 진 거예요. 알겠어요?"
사내는 코를 팽 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글쎄 그건 근심 마시오. 아무렴 내가 거기만 못하겠소. 내가 뱀 앞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구(裏)씨 성…… 아니 내 추씨 성을 갈겠소."
위사들과 궁녀들은 영고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영고가 팔을 탁상 위에 올려 놓자 그 조그마한 독사는 쉭쉭 소리를 내며 천천히 기어왔다. 온몸이 풀잎처럼 파란 조그마한 독사는 영고의 팔까지 와서는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사방을 돌아볼 뿐 더는 앞으로 기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요 귀염둥이야, 네가 날 물지 않으면 내기가 안 돼요. 먼저 나를 물고 가서 저 추 선생을 물어야 한다, 알겠니?"
그러자 뱀은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나 한 듯 느릿느릿 영고의 손 위로 기어올라가 손등을 깨물었다.
"이젠 됐다, 이 귀염등이야."
한 순간, 영고는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팔뚝이 약간 떨렸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 되었다. 영고의 팔뚝에선 금세 검은 줄 하나가 생기더니 이내 쭉 뻗어 나가 눈 깔짝할 사이에 어깨에까지 검은 줄이 짝 그어졌다.
"추 선생님, 이젠 거기 차례예요."
사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영고가 하는 그대로 팔뚝을 걷어 붙이고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계집이 하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내 이 팔이 어떤 팔인데. 무쇠 팔이야, 무쇠 팔! 백 가지 독을 다 써도 꿈쩍도 안 한다. 그런데 뭐, 이까짓 조그만 독사를 무서워할 줄 알고…….'
그는 뱀이 와 물기를 배짱 좋게 기다렸다. 조그마한 독사는 사내의 팔뚝이 탁상 위에 놓여지자 쉭쉭거리며 사내의 손 위로 기어올랐다. 뱀은 순식간에 사내의 손을 물려고 하였다. 그때였다. 영고가 손을 획 내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남자들 팔뚝이란 여자들보다 몇 배나 탄탄하니까 추 선생은 손 말고 어깨를 깨물어라."
그러자 뱀은 알아들은 듯 재빠르게 사내의 어깨 위로 기어올라 덥석 깨물었다. 그리고는 대가리를 들고 영고를 바라보았다.
"이젠 그만 해, 이 귀염둥아. 더 깨물면 추 선생이 노여워할 게야."
그러자 뱀은 대가리를 끄덕거리더니 탁상 위로 내려와 가만히 있었다.
차츰차츰 뱀 독이 퍼져 가자 영고와 사내는 얼굴색이 변해 갔다.
영고의 낮색은 술에 취한 듯 빨갛게 물들었다.
'뱀에 물려 독이 퍼지면 얼굴색이 검어지거나 누레지게 마련인데 저 여자는 왜 빨개지기만 할까? 필시 해독약을 미리 먹었음에 틀림 없어.'
사내는 내심 놀라서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영고도 사내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괴이하다. 얼굴색을 보면 시꺼멓게 죽어 가는 게 분명한데도 저렇듯 태연자약하니 알 수 없는 노릇이로군. 뱀 독이 퍼지지 않을리 없는데. 저 사내가 철장공을 한다더니 손과 팔을 독액 속에다 몇 천 번이나 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뱀 독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지.'
영고는 불안해서 사내를 자세히 눈여겨보았다. 이윽고 사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내력으로 뱀 독을 내리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추 선생, 그만 하고 이젠 항복을 해요. 항복만 하면 목숨은 건 질 수 있으니까……."
그러자사내는 눈을 번쩍 뜨며 껄껄 웃어젖혔다.
"그런 꿈은 꾸지도 마시오. 사내가 죽으면 죽었지 항복이라니, 그런 수치가 세상 천지 어디 또 있겠소? 내가 누군지 아오? 내 이 철장은 천하 무적이오, 천하 무적! 아직 천하 무림의 4대 고수 라고 하는 자들과 겨뤄 보지 못했다뿐이지, 난 그들 모두를 거꾸러 뜨릴 자신이 있소."
그리고는 사내는 득의양양하게 쏘아보았다.
추씨라는 사내가 독사에게 물렸어도 저렇게 제법 껄껄 웃으며 떠들어대는 것을 보자 영고는 다시금 심히 불안해졌다.
'이 추씨는 괴상한 인간이야. 무공도 강호의 다른 문파들과 다르고 뱀 독도 타지 않으니 특별한 초수가 아니고는 이자를 꺾을 수가 없겠다.'
영고는 먼저 독사를 얼렀다.
"요 귀염둥이야, 저분은 비록 중원에서 오신 분이지만 뱀 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어쩌겠니? 넌 좀 가만있고……."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끊더니 또 추씨를 보며 말했다.
"추 선생님, 그럼 이번도 비겼다고 해요. 이런 뱀 독에 견디는 내기는 그만두고 이번엔 이런 걸 겨뤄요. 자, 보세요……."
그녀는 품 안에서 또 깜찍한 함 하나를 꺼내 놓는데 금방 그 뱀 함보다도 더 작았다. 사내는 이게 또 무슨 기괴한 수작인가 하고 함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건 내 혼이에요. 이번만 이기면 난 더는 아무 말 않고 항복하겠어요."
"항복? 항복하면 어떻고 항복하지 않으면 어떻소?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구?"
영고가 계속 수작을 부리자 사내는 성이 나서 내뱉었다. 영고는 방긋 웃었다.
"내가 항복하면 직접 나서서 추 선생과 폐하, 그리고 추 선생과 천룡사 고승들이 무예를 겨루도록 주선해 줄 텐데요? 그런데도 상관이 없나요?"
"그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내 발로 대리 황궁을 찾아가 단지흥과 싸워 보면 되는 건데 주선은 무슨 주선? 그런 주선 따위는 난 필요 없소!"
그러자 영고는 또 방긋 웃었다.
"그건 모르고 하는 말씀이에요. 물론 중원 강호에서 왔으니 우리 대리국의 일을 잘 모르실 수도 있겠죠. 대리국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예의지국(禮儀之國)이어서 황제께서는 어지간해서는 남과 무예를 겨루지 않지요. 뿐만 아니라 천룡사 고승들도 남과 무예 다투기를 모두 꺼려 한답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무예를 겨뤄 보자고 불원천리 예까지 찾아왔다 한들 모두 헛수고가 되지 않겠어요?"
"내가 내 발로 천룡사에 찾아가 직접 도전을 해도 그들이 응하지 않는단 말이오?"
"글쎄, 안 된다니까 저러시네! 천룡사가 생긴 후부터, 천룡사에 호국신공인 일양지공 비본이 있다는 걸 알고 그걸 노려 찾아온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요? 셀 수도 없어요. 만약 천룡사에서 그 런 사람들을 다 일일이 상대하자면 아마 하루 걸러 한번씩은 싸웠을 거예요. 그러면 천룡사가 지금까지 남아 났겠어요? 천룡사 중들은 그저 입이 닳도록 권도하여 원심(怨心)을 풀어 주고 그 보서를 뺏어 가려는 마음을 돌려 세워서 그냥 돌아가도록 했죠. 이렇게 해서 천룡사를
지금까지 지켜 온 것이에요. 그러니 거기서 아무리 천룡사 고승들과 무공을 겨루어 보겠다고 해도 고승들이 응해 주지 않으면 제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지."
"그렇다면 거기선 무슨 방법이 있소? 무슨 방법으로 그들로 하여금 무공을 겨루도록 하겠다는 거요?"
"난 이 대리국의 황비거든요. 알아요?"
사내는 그저 이 여인이 활궁 사람이고 허풍이 좀 있는 편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나 단호하게 자기를 황비라고 밝히자 깜짝 놀라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영고는 아랑곳 않고 계속 자기 말만 늘어놓았다. 영고가 그 말까지 꺼내 놓자 위사들은 사뭇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나서서 이 사람은 대리에 무공을 겨루러 온 것이지 절대 일양지 비본을 탐내서 온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뿐더러 황비의 말인데 의심할 리가 있겠어요? 그러면 안심하고 무공을 겨룰 수 있으니, 그렇게만 되면야 거기의 철장공이 더 센지 대리의 호국신공인 일양지공이 더 센지 직접 알아볼 수가 있잖아요?"
영고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사내는 선선히 응했다.
"그렇다면 좋소. 이번엔 또 무슨 내기요? 무엇을 어떻게 겨뤄 보겠소?"
"내 말했잖아요, 이 작은 함에 내 혼이 들어 있다구. 어쨌든 이 번 내기에만 이기면 난 항복을 하고 거기를 돕겠어요."
"그걸 가지고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좋소! 그럼 어서 그 함을 열어 보시오."
영고는 해쭉 웃으며 함을 열었다. 사내가 목을 늘여 들여다보니, 함 안에는 조그만 갑충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북방의 귀뚜라미 비슷했는데 머리는 크고 꼬리는 뭉툭해 아주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아니, 이런 조그만 벌레가 어떻게 거기의 혼이란 말이오?"
사내는 의아해서 물었다.
"우리 남방의 만동에는 예전부터 행고의식(行蠱儀式)이라는 것이 있는데 처녀가 커서 생리가 시작되면 자신의 월경 피를 받아 두었다가 칠월 칠석 날에 작은 벌레한테 먹이지요. 벌레는 반드시 용맹하면서도 음(陰)에 속하는 것이어야 하구요. 이 벌레는 일단 처녀의 월경 피를 맛보면 그 이후로는 풀을 먹지 않고 계속 처녀의 피만 먹으며 자라는데, 이렇게 3년이 지나면 더 이상 피는 먹지 않아요. 그 대신 처녀는 독충들의 독즙을 이 벌레에게 먹인답니다.
이렇게 하여 자란 벌레는 그 독이 대단해서 세상 아무것도 당해 낼수가 없게 되지요. 추 선생, 내 이 벌레는 6년 전부터 독즙을 먹이기 시작한 벌레인데 여태까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문 적이 없어요. 그러니 독도 아주 셀 겁니다. 모르긴 해도 제아무리 추 선생이라도 견뎌 내기 힘들걸요. 남자들이 이 벌레에겐 물리면 다른 것은 관두고 생식 기능이 마비되어 후사가 없게 될 수도 있지요. 물론 생명도 위험하구요. 자, 어때요? 겨뤄 보겠어요?"
사내는 그 보잘것없이 작은 벌레를 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참, 별일도 다 있군! 아무리 독한 벌레라고 해도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다. 이제 와서 물러선다면 얼마나 비웃음을 사겠는가. 뿐더러 강호에서의 나의 명성도 묵사발이 된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죽더라도 저 여자와 결판을 내자, 운남 처녀들이 기르는 독충이 무섭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그런지 내 눈으로 직접 한번 봐야겠다!'
"내가 마지막까지 해 본다고 했잖소? 더는 다른 말을 말고 어떻게 할 건지 그거나 말하시오."
사내는 역정을 냈다. 영고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 좋아요.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이 벌레를 손바닥에 잠깐만 올려 놓고 있으면 돼요. 그래도 무사하면 이기는 거죠."
사내는 그 말에 크게 앙천대소를 했다.
'이 계집이 정말 미쳤군. 내가 누군지나 알고 이따위 수작인가? 내 별호가 철장 수상표(手上默)다. 이 별호는 내가 생사를 무릅쓰고 철장방 방주 자리를 빼앗을 때 얻은 것이다. 내 철장공과 경공 (輕功)은 천하 무적으로 천하의 영웅 호걸들이 다 몰려들어도 두렵지 않거늘 겨우 대리의 하잘것없는 계집이 날 위협해? 내 오늘 본때를 보여 주리라."
"좋소! 어서 올려 놓으시오!"
그래도 영고는 마냥 생글거리며 거듭 경고했다.
"그러지 마시고 한 번 더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벌레한테 물려 죽으면 타관에서 객사하게 되는 판인데……."
"아이고 잔소리 그만 하고 어서 그 벌레나 이리 내요!"
사내는 성가셔 죽겠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적이 긴장되어 있었다. 긴장을 털어 버리려고 일부러 역정을 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온몸의 기운을 손에 집중시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의 힘줄이 불끈불끈 튀어나왔다. 벌레가 아니라 돌사자라도 그 주먹 한 방이면 단번에 박살이 날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손을 펴서 앞으로 쓱 내밀었다. 손바닥은 숯 검댕처럼 시커맸다.
"그 벌레를 그냥 내 이 손바닥에 놓는다고 만 했었소! 말한 대로 하지 않으면 사단이 날 줄 아시오!"
"염려 마세요. 잠깐이면 돼요. 더는 필요 없어요."
영고는 풀잎으로 벌레를 툭 쳤다. 벌레가 얼마나 독한지 벌레가 닿자 풀잎은 사정없이 부르르 떨렸다. 사내는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튀어 일어날 수도 없는 터, 그는 힘주어 두 눈을 치켜 뜨고는 영고가 벌레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 놓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벌레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잠시 꿈틀거렸다. 그러나 정작 별 느낌이 없는지라 사내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손바닥이 짜릿하더니 그 기운이 손바닥에서부터 염통까지 한 번에 쭉 뻗쳐 올라왔다. 그리고는 대번에 염통이 발기발기 찢기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사내는 그만 악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그대로 꼬꾸라져 버렸다.
그러더니 바닥에서 사지를 내뻗으며 한동안 데굴데굴 구르다가 크게 한 번 몸을 부르르 떨고는 걸상 다리를 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앞을 쏘아보았다. 여인의 자태가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자세히 보니 백타산 산장에 간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앞에 모용쟁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모용쟁, 미안하오. 그때 구해 주지 못해서……. 나를 보게 한 그때는…… 내가 비열해서가 아니라…… 구양봉이 너무해서 그렇게 된 거요. 그래서 당신이 난산으로 죽은 거요……. 내 탓이 아니
오. 내 탓이 아니라는데……."
혼자 웅얼거리던 사내는 또다시 픽 쓰러져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쳤다.
"사부님, 사부님. 사숙님들과 사조(師祖)님들을 내가 죽인 건 사실이에요. 그들이 내가 방주가 되는 걸 한사코 반대하니 전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는 또 영고를 쳐다보며 계속 헛소리를 했다.
"모용쟁! 모용쟁이 맞지? 맞아, 안 맞아? 모용쟁이 맞다면 날 따라가자구. 난 이젠 철장공을 장파했으니 구양봉 같은 건 무섭지도 않아. 구양봉이 오기만 해 봐. 내가 단번에 쳐죽일 테니."
그는 눈까지 뻘게져서 마구 헛소리를 내지르더니 냉큼 뛰어 일어나 아우성을 치면서 잡히는 대로 탁자와 걸상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언뜻 문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이젠 끝났군. 자,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영고는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흐느적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궁녀들과 위사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서로 조심스레 눈길을 주고받으며 굽실굽실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