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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총칙 과제
‘인내’에 관한 속담 및 격언
20130767
법학과
김은표
1. 낙수(落水)가 바위를 뚫는다.
이 격언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들어본 말이다. 이 말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한다면 가까운 산 어디든 가보면 된다. 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바위에 물을 담는 구멍을 만든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보통 우리 인생에 비교된다. 우리도 무언가 이루기 위해서 낙수처럼 한 가지 일을 시간이 얼마가 걸리던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집중한다면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말도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지속해온 낙수라 해서 반드시 바위를 뚫는 것은 아니다. 낙수에도 일정한 낙차와 충분한 힘이 있어야 바위를 뚫을 수 있지 힘도 없고 낙차도 거의 없는 낙수가 바위를 뚫지는 못한다. 반면, 아주 강하고 낙차도 큰 낙수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바위를 뚫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격언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조금 생각을 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나 낙수나 무언가 이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인내의 시간을 거쳐야 하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약한 낙수가 되어 오랫동안 바위 하나만 뚫고 말 것인지 거대하고 강한 낙수가 되어 여러 바위를 뚫어내고 많은 것을 이루어 낼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이 선택이란 문제도 쉽게 받아들일 만한 것은 아니다. 선택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한다는 점이 대학생활에 있어 고등학교 및 그 이전의 학교생활과 가장 다른 점인 것 같기도 하다. 대학생활뿐만이 아니라 이후의 모든 사회생활이 모두 선택의 문제인 것 같다. 아무도 시키지 않고 찾아서 하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는 생활이다. 여기서 인내 덕목은 또 다시 부각된다. 나태해지는 것을, 유흥을 즐기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인내해야 깨어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시 돌아오지 않는 대학교 생활이라고 치부하고 마음껏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무언가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유혹을 참아내야 비로소 목표에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2.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이 말은 아버지가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어쩌면 이 말을 이제는 습관처럼 되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많이 들었던 말인 만큼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도 알고 있다.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열매를 얻기 위해 인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두가 열매를 얻지는 못한다. ‘인내는 쓰다’라는 말이 사실은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으로 인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면 그 무거움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선험적 사고를 해본다면 인내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겨운지 모른다. 인내라는 말에는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는데 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데에는 인내할 필요가 없고 그저 즐길 뿐이기 때문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목표를 위해 인내하는 과정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재수를 했던 경험이 인내라는 말을 표현하기 가장 좋은 예다.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참아야 했고, 싫었던 과목까지도 공부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험 덕분에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는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쓰디쓴 인내를 겪고 나면 열매가 달 수 밖에 없다. 물론, 결과가 원하던 목표에 도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내의 시간을 견뎌낸 것만으로도 이미 결과와는 상관없이 뿌듯하기 때문이다. 즉, 열매는 결과가 아니다. 열매는 자기 자신에게 느낄 수 있는 희열, 뿌듯함이다.
3.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참는다는 것의 무궁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어찌 보면 참는 다는 것은 사람 사는 일에 아주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학에 대해서도 참는다는 일이 얼마나 많이 관여되어 있는지 모른다. 특히 범죄와 관련해서는 사람들이 참을성을 잃었을 때의 모습들이 아주 많이 관여되어 있다. 살인에 국한하지 않고도 폭력이나 음주운전 등등에도 참을성이 좀만 더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어쩌면 형법은 그러한 참을성을 강제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범죄가 다분히 많다는 사실은 참는다는 것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그래서 선조들도 이런 격언에 참을 인자를 셋이나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싶다. 더 나아가 법 이외에 우리 생활에서도 ‘아 좀만 더 참을 걸’ 하고 후회하는 때가 많다. 더 범위를 확장하자면 사람관계나 학업 문제에서도 빈번히 나타난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도 좀만 더 참을 줄 알았더라면 틀어지지 않았을 사이도 있고, 놀고 싶은 마음을 조금 더 참을 줄 알았더라면 무언가 더 큰 것을 이루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은 평소에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새기는 말이 되면 도움이 많이 될 듯하다. 화가 나는 일에, 하기 싫은 일에, 하기 어려운 일에 한 번 두 번 세 번 참고 난다면 아마 완전히 다른 결과를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4. 인내하는 자에게는 복이 온다.
이 또한 매우 유명한 말 중 하나이다. 어른들이 줄줄 외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느긋함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어른들이 보통 하시는 말을 보면 기다림이 필요할 때 이 말을 쓴다. 예를 들자면 이미 내 손에서 떠나가 어쩔 수 없이 결과만을 기다려야 할 때 어른들은 보통 ‘인내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하니 기다리라’하고 말씀하신다. 그러고는 대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신다. 이 말은 아무래도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갖추는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기다림 후에 얻은 결과도 결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긍정적인 기대 이후에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기대를 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얻을 때는 자괴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지기 쉽다. 오히려 긍정적인 기대 이후에 부정적인 결과가 온다면 잘못된 점을 찾아 고치고 다음 기회에는 더 완벽한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5. 탐욕한 자는 언제나 모자란다.
인내란 단어에는 언제나 다른 개념이 혼합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무엇을’ 인내하는지 그 객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격언의 경우에는 그 객체가 ‘탐욕’이다. 즉 탐욕에 대해 인내할 필요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인류의 역사를 볼 때 탐욕은 항상 존재해왔다. 때로는 그것이 도를 지나쳐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기도 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예로 전쟁이 그것이다. 다른 나라의 무언가를 탐할 때 군인들의 희생을 감수해가면서 그것을 얻고자 한다. 전쟁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탐욕으로부터 나오는 인위적인 것이다.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듯 탐욕이 지나치면 비극을 부른다. 욕심에도 임계점이 있다. 적정한 수준 이하에서의 욕심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의욕을 충만하게 만든다. 또한,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 욕심은 의욕에서 탐욕으로 변한다. 탐욕은 확실히 사람들의 시각을 협소하게 만든다. 탐욕이 시작된 순간 그 대상에 대해서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시각이 협소해 진다면 분명히 중요한 것인데도 못보고 지나쳐 가는 것들이 생기게 된다. 그로부터 비극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탐욕은 경계하고 인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