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버스의 파라독스
은하수의 밝은 빛줄기에서 조금만 옆으로 빗겨나도 그 곳의 밤하늘은 칠흑같이 어둡다. 마치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숨을 자유로이 쉬듯이, 우리는 밤의 어두움에 너무 익숙해 밤하늘이 어둡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서 산다. 독자에게 밤하늘이 왜 어두운가라고 누가 묻는다면, 의아한 눈초리로 묻는 이를 되돌아 볼 것이다. 그러나 밤하늘의 어두움에는 깊은 신비가 도사리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으로 문제의 핵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커다란 고무공 한복판에 지구가 자리잡고 있고, 그 공의 껍질에는 별들이 박혀 있다고 상상하자. 이 별들은 공의 중심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으므로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는 모두 같은 겉보기 밝기로 보일 것이다. 물론 별 하나하나의 절대 밝기는 동일하다고 생각하자.
이제 껍질의 두께는 같지만 반지름이 먼저 공의 2배인 고무공을 하나 더 머리 속에 그려보자. 절대 밝기는 같아도 2배로 멀리 있으므로 둘째 공 껍질에 박혀있는 별들 하나하나는 첫째 것의 1/4로 흐리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둘째번 공 껍질에 있는 별들의 총수는 첫째 것의 4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겉넓이가 4배로 늘었기 때문이다. 별 하나의 겉보기 밝기는 1/4로 줄었으나 별들의 총수는 4배로 늘었으므로, 둘째 껍질의 별 모두가 지구에 쏟아 붓는 빛의 전체 양은 첫째 껍질의 별들이 쏟아 붓는 것과 같다. 따라서 지구에서 느끼게 되는 밤하늘의 밝기는 첫째번 공만 생각했을 때보다 2배로 늘어나는 셈이다.
공의 반지름을 계속 늘리면서 같은 생각을 수없이 반복하면, 지구에서 보는 밤하늘의 밝기가 무한대로 되어야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이해를 돕느라고 2배씩 늘려 간 것이지, 꼭 2배씩이어야 할 까닭은 전혀 없다. 겉보기 밝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감소하지만 겉넓이는 제곱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러므로 공 껍질 하나하나의 전체 밝기는 반지름, 즉 거리에 무관하게 늘 일정하다. 우주가 무한하다면 무한히 많은 수의 공 껍질을 상상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밤하늘의 밝기는 무한대로 되어야 한다.
여지껏 우리는 별을 하나의 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별도 크기를 갖고 있으므로, 우리가 눈길을 어느 방향으로 돌리더라도, 우리의 눈길은 별의 표면과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 숲 속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울창한 숲에서는 어디를 둘러 보아도 시선이 나무 줄기와 만나게 된다. 어느 나무가 되든 반드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무한대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밤하늘의 밝기가 적어도 별의 표면만큼은 밝아야 할 것이다. 태양은 대표적인 하나의 별이므로, 전 하늘이 태양의 표면같이 이글거려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밤하늘이 어둡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이 모순을 학자들은 올버스의 파라독스라고 부른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됐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밤하늘이 왜 어두운가라는 질문이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음을 수긍하게 된다. 이 엄청난 모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천문학자들이 별의 별 제안을 다 해 왔었다.
빛을 흡수하는 물질이 별과 별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가정하여 올버스의 파라독스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그 중에 가장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로는 밤하늘의 모순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어떤 물체이든 빛에너지를 흡수하면 뜨거워지게 마련이다. 용광로에 쏟아지는 쇳물이 장렬하게 빛을 발하듯, 일단 뜨거워진 물체는 빛을 내놓는다. 흡수된 빛 에너지가 어디론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방출된다는 얘기이다. 그러므로 무한의 우주를 고집하는 한 밤하늘의 밝기는 적어도 태양의 표면만큼 밝게 빛나야 한다.
흡수 물질의 제안 이외에도 올버스의 역리를 깨려는 노력이 여럿 있었다. 어떤 이는 별들이 공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지 않고, 자전거의 바퀴살같이 방사선을 따라서 질서 정연하게 일렬로 늘어서 있다고 주장했다. 맨 앞에 있는 별 하나만이 우리에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런 억지를 부렸던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 하나가 자기 뒤에 주욱 늘어서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에서 오는 빛을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무한대에 이르는 양의 빛을 뒤로부터 받으면, 그 별 역시 무한대로 밝게 빛을 내는 도리밖에 없다. 그러므로 에너지의 흡수와 재방출이라는 관점에서 '자전거 바퀴살' 모형도 억지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모순의 씨앗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우주가 무한히 크다고 생각한 데에서 문제가 생긴 듯하다. 혹시 공간적으로 유한한 우주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주가 유한하다고 가정하면 밤하늘의 밝기가 어떻게 될까 살펴보도록 하자. 공간적으로 유한한 우주라면, 무한 우주에서와 같이 그 안에 '공 껍질'을 한없이 많이 채울 수는 없다. 유한한 갯수의 공 껍질들이 내는 별빛의 총합도 유한할 것이므로, 밤하늘의 밝기 역시 유한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한 우주를 포기한다면, 밤하늘의 어두움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겠다. 그러나 유한 우주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우주이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에게 위대한 존재로 군림해 왔다. 이 때문에 현대인이라도 우주의 유한성을 수긍하기에는 주저가 앞선다.
여지껏 우리는, 시작도 끝도 없이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무한 정상 우주(無限定常宇宙)를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무한 정상 우주의 나이는 무한대라고 간주 될 수 있다. 비록 빛의 전파 속도가 유한하더라도, 나이가 무한인 우주에서는 빛이 한없이 넓은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어느 한 순간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다면, 우주의 나이는 얼마일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다면, 별에서 나온 빛이 움직여 온 공간 역시 유한하게 된다. 빛의 속도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간이 유한한 우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시간이 유한한 우주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공간의 유한성뿐 아니라 시간의 유한성으로도 올버스의 파라독스는 해결할 수 있음직 하기 때문이다.
우주 도처에서 별(은하)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 순간, 즉 t=0부터 시간을 재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T라는 시간의 세월이 흘렀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별들은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빛을 내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는 시간 즉 별의 수명을 L이라 표시하겠다.
현재 우주의 나이가 T < L의 관계가 성립할 정도로 아주 젊다면, 우주에는 아직까지 죽은 별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경우 빛의 속도 c에 나이 T를 곱한 cT는 우주 탄생 이후 별빛이 움직인 거리가 된다<그림 1-2>. 따라서 어떤 관측자에서부터 cT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별들에서 나온 빛은 모두 그 관측자에게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cT보다 먼 데서 출발한 빛은 이 관측자에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주가 아주 젊다면 반지름이 cT인 구 내부에 있는 별들만이 밤하늘에 보일 것이다.
우주의 나이가 별의 수명보다 긴 경우라면, t > L의 관계가 성립하므로, 관측자로부터 cL이내에 있는 별들은 빛을 낼 수 없는 암체(暗體)로 이미 변해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cL에서 cT 사이에 있는 별에서 오는 제한된 양의 빛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cL에서 cT사이에서 출발한 빛이 우리에게 도착한 이 순간에는 이 지역에 죽은 별들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제 마악 도착한 빛이 그 지역을 출발할 당시에는 죽은 별이 거기에 하나도 없었다.
우주의 나이가 별의 수명보다 길든 짧든 일단 유한하기만 하다면, 유한한 부피에 있는 별들만이 우리의 하늘을 밝힐 수 있다. 그러므로 밤하늘의 밝기가 유한하게 될 것이므로, 올버스의 파라독스는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