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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인저러스 메소드(A Dangerous Method)는 2011년 개봉한 드라마 영화이다.
감독 :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개봉일 : 2011년 9월 2일
줄거리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그녀가 품었던 비밀이 공개된다!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은 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 정신 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
성적 접근만으로 모든 문제의 해결은 불가하다며 무의식세계를 주장한 정신 분석학자 융!
어릴적 아버지의 학대로 인해, 성 도착증을 앓았으나 프로이트와 융과 만남을 통해 아동 정신 분석의사가 된 사비나 슈필라인(Sabina Spielrein)!
그 동안 한번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세 사람의 팽팽한 심리 게임과 그들이 주장했던 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도발적이고, 위험했던 사랑이 시작된다
출연
비고 모텐슨 - 지그문트 프로이트
마이클 패스벤더 - 카를 융
키이라 나이틀리 - 사비나 슈필라인
뱅상 카셀 - 오토 그로스
세라 개던 - 에마 융
안드레 헤니케 - 오이겐 블로일러
안트 슈워링 손리 - 페렌치 샨도르
사비나 니콜라예브나 시필레인(러시아어: Сабина Николаевна Шпильрейн, 1885년 10월 25일 ~ 1942년 8월 11일)은 러시아의 의사이자 최초의 여성 정신분석학자 중 한 명이다.
로스토프나도누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왔다. 아버지 니콜라이는 상인, 어머니 에바는 당시 러시아에서는 드문 대학교 졸업자의 여성이었다.
10대 후반 카를 융의 환자였다가, 그의 제자로, 다시 그의 동료로 성장했으며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도 학문적 동료로 지냈다. 그녀의 유명한 정신분석 대상자 중 한 명은 스위스의 발달 심리학자 장 피아제였다.
칼 구스타프 융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로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지 않고 바젤 대학교와 취리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융의 숨겨진 연인’ 사비나 슈필라인을 아십니까?
2012.06.26
‘데인저러스 메소드? 뭐야 이 제목은…’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영화 제목을 봤다. 굳이 번역하자면 ‘위험한 방법’ 정도가 될 텐데 궁금한 마음에 클릭을 했다. 제목과는 달리, ‘와우’ 꼭 봐야할 영화였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카를 융과 그의 연인이었던 사비나 슈필라인의 스토리를 담은 영화로 그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까지 등장한다. 십수 년 전 융 전기를 읽고 융에 대해서 공부해보겠다고 결심했지만 아직까지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기자에게 이 영화는 나중에 융을 읽을 때 큰 도움이 될 것만 같았다. 관련 자료를 본다는 차원에서 관람한 영화는 재미도 상당했다. 특히 슈필라인 역의 키이라 니이틀리의 연기가 대단했다. 융을 맡은 마이클 패스벤더도 호연이었다(그는 이 작품으로 런던 비평가 협회상 영국남우주연상, LA 비평가 협회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직 상영중인데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볼만하다.
●의사와 환자에서, 다시 연인사이로
1904년 8월 어느 날 스위스 취리히 부르크횔츨리 정신병원에 마차 한 대가 도착한다. 문이 열리자 건장한 남자 몇 명이 한 여성을 붙잡아 내린다. 격렬하게 몸을 비틀며 괴성을 질러대는 19살짜리 아가씨가 바로 사비나 슈필라인이다. 극심한 히스테리로 정신병원에 온 것이다.
그녀의 담당의사가 바로 29세의 카를 융. 침묵하며 강박적으로 온몸을 비트는 환자를 마주한 그는 다소 냉정하게 ‘대화치료’를 시작한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오스트리아의 의사 프로이트(1856년 생으로 융보다 19살 연상)의 영향을 받은 융은 그가 고안한 이 방법을 이 아가씨에서 처음 적용하기로 한다.
영화제목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바로 대화치료법을 말한다.
대화치료가 왜 위험한 방법일까?
프로이트도 이야기했지만 정신분석학을 적용한 치료는 효과가 좋기는 하지만, 환자가 과거에 중요한 사건을 떠올리면서 분석가인 의사를 관계를 맺었던 예전의 그 사람으로 여기고 그에게 향했던 감정과 반응을 옮기는 전이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의사가 환자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치료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지만 환자는 해당 감정에 대해 정확히 인식을 못하는 것이다(감정전이 단계를 넘어서면 치료자는 강한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의사가 환자에게 감정을 투영하는 역전이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융과 슈필라인의 관계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당시 융은 부유한 집안의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1903년)한 상태였는데(상당한 미모인 사라 가돈이 엠마 역을 맡았다) 열정적이면서도 매우 영민한 슈필라인의 매력에 점점 빠져든다. 이듬해 6월 퇴원한 슈필라인은 취리히대 의대에 등록하고 틈틈이 융의 연구를 돕는다. 영화에서는 슈필라인이 자신의 자취방을 알려주며 융을 유혹하는데, 융은 망설임 끝에 그녀의 자취방 문을 두드린다. 이제 연인관계로 발달한 두 사람은 그러나 관계를 끝내라는 정숙한 아내 엠마의 말에 융이 헤어지기로 결심하면서 금이 간다. 융에 강하게 집착하는 슈필라인은 이별의 통보에 격분하면서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칼을 휘둘러 융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고 급기야는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 문하로 갈 수 있게 해달라며 그렇지 않으면 둘의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환자와 치료자간 감정 전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극도로 꺼렸다).
결국 융의 추천으로 슈필라인은 1911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고, 이보다 앞선 1909년 병원을 그만둔 융은(그가 병원을 떠난 건 슈필라인과의 스캔들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아내가 마련해 준 저택에 병원을 개업한다. 이때의 상황을 짐작케 하는 융이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이 남아있다. “슈필라인은 제가 예전에 당신께 쓴 편지에서 언급했던 그 여자입니다. 그녀는 물론 계획적으로 절 유혹했지만 전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죠. 이제 그녀는 복수를 꿈꾸고 있습니다.”(1909년 6월 4일)
한편 슈필라인은 1912년 같은 유태계 러시아인 의사 파웰 쉐프텔과 충동적으로 결혼했고,
영화는 1913년 임신한 슈필라인이 무력감에 빠져 있는 융을 방문해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임신한 아이가 융의 자식임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물론 1913년 12월 태어난 딸 레나타의 아버지가 진짜 융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융의 자식일 수 없다
●1912년 기념비적인 논문 펴 내
영화를 보고 집에 온 기자는 책장에서 융 전기를 찾았다.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베어가 1969년 펴낸 책으로 한글판은 1999년 뒤늦게 나왔다. 13년 전 이 책을 읽고 융을 공부해야겠다는 강한 동기를 부여받았음에도 책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좀 서글펐다. 그런데 융이 부르크횔츨리 병원에서 일하던 시기를 읽어봐도 슈필라인이 나오지 않는다. 책 뒤의 인명색인에도 그녀의 이름은 없다.
‘뭐야, 영화가 완전 픽션인가?’ 다소 어이가 없어진 기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 Sabina Spielrein을 검색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거짓이 아니었다.
슈필라인은 최초의 여성 정신분석학자이자 러시아에 정신분석학을 소개한(그녀는 1923년 러시아로 돌아갔다) 인물로 소개돼 있다.
그런데 왜 융 전기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가. 읽어보니 그 이유가 나온다. 슈필라인은 오랫동안 잊힌 사람이었던 것이다.
1977년 예전에 심리학연구소 본부가 있었던 스위스 제네바의 한 건물 지하창고에서 그녀의 일기(1909~1912년)와 프로이트와 융과 주고받은 편지(1906~1923년)가 발견되면서 슈필라인의 삶이 재조명된 것이다.
1980년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이탈리아어로 출간됐고, 1982년 영어판이 나왔다. 영어판 제목을 직역하면 ‘은밀한 대칭: 융과 프로이트 사이의 사비나 슈필라인’이다.
2002년 헝가리 태생의 스웨덴 감독 엘리자베스 마톤은 슈필라인의 다큐멘터리 ‘내 이름은 사비나 슈필라인’ 만들었고 전기영화도 제작됐다.
또 영국에서는 연극 ‘사비나’(1998년)와 ‘대화치료’(2003)가 무대에 올랐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연극 ‘대화치료’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슈필라인의 삶이 재조명되면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즉 우리가 프로이트나 융의 업적이라고 알고 있었던 죽음의 충동(타나토스)와 집단무의식의 기본 개념이 사실은 슈필라인에게서 비롯됐다는 것.
결국 영화는 융이나 프로이트에게 미친 그녀의 영향을 과대평가한 게 아니라 애증 관계에만 초점을 맞춰 과소평가한 셈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슈필라인이 이런 중요한 개념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슈필라인은 1911년 박사학위 논문 ‘정신분열증 사례의 심리학적 내용에 관하여’를 출간했고 이듬해인 1912년 논문 ‘탄생의 원인으로서의 파괴’를 발표했다.
이 두 논문 속에 이들 혁신적인 개념이 소개돼 있다는 것이다. 슈필라인이 재조명되면서 분석심리학자들이 그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994년 ‘분석심리학저널’에 ‘탄생의 원인으로서의 파괴’가 영어로 번역돼(원서는 독일어) 실렸다.
2006년 같은 저널에는 미국의 융 연구가인 브리언 스키어 박사의 논문 ‘사비나 슈필라인: 융과 프로이트의 그늘을 벗어나며’가 실리기도 했다.
슈필라인의 삶에 강한 흥미를 느낀 기자로서는 두 논문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넷으로 내려받은 논문은 각각 32쪽, 26쪽에 이르는 꽤 긴 글들이지만 무척 흥미로웠다.
슈필라인의 논문은 100년 전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기독교와 서구 신화, 니체와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해 꽤 어려웠기 때문에 기자로서는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슈필라인이 대단히 지적인 여성임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래는 1912년 논문의 한 구절이다.
“자기보존은 정적인 욕구다. 존재하는 개인을 외부 영향으로부터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의 보존은 동적인 욕구로 새로운 형태 안에서 개인의 부활인 변화를 추구한다. 이전 상태의 파괴 없이는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
20대 중반인 슈필라인이 이런 놀라운 논문을 쓰게 된 건 그녀의 환자 M부인(Frau M)의 덕이 컸다. 거기에 그녀 자신이 정신병자였던 경험도 큰 몫을 했다.
중증의 정신분열증 환자였던 M부인은 슈필라인이 퇴원하고 수 개월 뒤인 1905년 11월 18일 부르크횔츨리에 들어왔는데 증세가 슈필라인과 비슷했다고 한다.
슈필라인은 융과의 관계가 끝난 1909년부터 M부인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녀의 정신분석을 통해 집단무의식과 죽음의 본능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 낸 것이다.
결혼 13년차로 아이가 둘인 M부인은 발병하기 전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세 번째 아이를 임신했으나 7개월만에 자연유산했다.
이때 3주 동안 입원하면서 마취 상태에서 악몽에 시달렸고 몇 달 뒤 정신이 붕괴됐다. 환자의 망상을 면밀히 관찰하던 슈필라인은 그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재발견했고(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마조히즘적인 고통스런 애정을 융에게 투사했던) 성욕 속에서 생성의 본능 뿐 아니라 파괴의 본능도 존재함을 발견한다.
스키어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슈필라인의 학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성욕은 내부에 두 리비도적 흐름을 갖고 있는데 외향적인 한 방향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쾌락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가 느끼는 자기 내부를 향한 두려움, 역겨움, 심지어 죽음 같은 부정성이다. 이것은 두 사람이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이미지를 지닌 성애적인 끌림이 자아의 경계를 초월한다는 행복감과 함께 정체성과 독립성에 위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집단무의식의 심층(영적 행복감과 과대망상 또는 그 반대인 우울과 소멸 또는 해체의 느낌이 명멸하는)으로 끌려들어갈 위험에 직면한다.”
다음은 1920년 프로이트가 자신의 책 ‘쾌락 원리의 저편’에 쓴 각주다. “이 성찰의 상당 부분은 사비나 슈필라인의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한 논문(1912)에서 예상된 것이다(아쉽게도 나는 이 논문을 명쾌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녀는 논문에서 성욕의 가학적인 요소를 ‘파괴적’이라고 기술했다.”
빈에서 활동하던 슈필라인은 1923년 가족 모두와 함께 당시 소련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동정신병원을 운영했고 대학에서 정신분석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이 시작되면서 남자 형제 3명이 사라졌고 1938년 남편도 숙청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소련을 침략한 독일 나치는 당시 로스토피에 머물던 슈필라인과 그녀의 두 딸을 체포해 유태인 수용소에 보냈고 이들은 1942년 8월 처형됐다.
그 여자, 역사가 망각한 정신분석가 슈필라인
2012-06-05
정신분석학자가 본 ‘데인저러스 메소드’
현재 상영중인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분석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 그리고 여성 정신분석가 사비나 슈필라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신분석학 박사 김서영 광운대 교수가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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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환자·정부로 묘사된 영화
프로이트에 영향 준 ‘죽음충동’
아동발달 선구적 업적 가려져
30여편 논문 이제는 기억할 때
프로이트 학파와 융 학파는 서로의 학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카를 구스타프 융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도 끝내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융의 이론을 비과학적 신비주의로 간주했고, 융은 정신분석이 창조성을 결여한 범성욕주의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그들의 고집은 두 학파에 고스란히 대물림되어오고 있다. 그래서 정신분석 전공자인 내가 비판론으로 무장하지 않고 분석심리학 학회에 참석하거나 융의 논문을 호의적으로 인용할 때면 늘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한때 프로이트와 융은 정신분석의 역사에서 가장 친밀한 밀월 관계를 즐겼던 한 쌍이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1906년에서 1913년까지 지속된 프로이트와 융의 인연 또는 공모 관계를 사비나 슈필라인이라는 러시아 여성을 매개 삼아 그려내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융은 프로이트의 공식적 후계자로 간주되었으며 1910년에는 정신분석협회의 초대 회장 직을 맡게 된다. 유부남인 융이 슈필라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도 프로이트는 따뜻하게 융을 감쌌다. 영화 속에서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 속에서 슈필라인은 환자, 정부 또는 학생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를 벗어나 슈필라인이라는 사람을 만나보자.
1911년 프로이트 앞에 러시아어·폴란드어·프랑스어·독일어·영어·이탈리아어·라틴어·그리스어가 가능한 26살의 슈필라인이 나타난다. 슈필라인은 즉시 정신분석 수요 모임에 합류하게 되며 여기서 슈필라인이 소개한 죽음충동(파괴충동)이라는 개념은 프로이트 후기 사상의 중심 이론으로 발전한다. 1912년 슈필라인이 이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였을 때 프로이트는 융이 추천한 ‘슈레버 사례’를 분석중이었으며, 아직 자기애(나르시시즘) 이론조차 체계화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프로이트는 1920년이 되어서야 파괴충동을 삶 충동과 대비시켜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이원론을 구성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자아와 이드>에서 ‘이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 의사 게오르크 그로데크가 <이드에 관한 책>에서 이드 개념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는데도, 그로데크의 개념을 차용한 뒤 마치 그것이 자신의 개념인 듯 그로데크와 무관하게 발전시켰다.
죽음충동을 언급할 때에도 유사한 작전이 펼쳐지는데, 프로이트는 슈필라인의 죽음충동이 모호한 개념이며 이제는 명확한 개념 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는 말로써 슈필라인의 독창성을 가려 덮었다.
슈필라인은 1920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자기 딸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구축한 아동발달 이론을 발표했고, 1923년 러시아로 돌아간 뒤 정신분석 원칙을 기반으로 삼아 운용되는 유치원을 설립했다.
아동 정신분석에 관련된 아나 프로이트와 멜라니 클라인의 논쟁이 1930~40년에 부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슈필라인의 시도들은 아동 정신분석에 대한 실로 선구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슈필라인은 자신의 논문 <존재 생성의 원인으로서의 파괴>의 첫 줄에 “내가 겪은 성적 문제들을 통해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다”고 밝힌 뒤 섹슈얼리티의 파괴적인 측면에 대해 논의한다.
슈필라인은 어떤 남성분석가들보다 용감한 정신분석가였다.
하지만 그가 남긴 30여편의 논문을 인용하는 이는 거의 없으며, 아동정신분석의 역사, 유대인 정신분석가 인명록, 프로이트 전기에서 모조리 그 이름이 제외되어 있다.
융의 전기에서 그는 거짓말에 익숙한 히스테리 환자로 그려진다.
크로넨버그의 <데인저러스 메소드>에서도 그는 융의 정부로 묘사될 뿐이다. 그는 두 딸과 함께 1941년 또는 1942년에 나치에 총살당했다. 그를 구해낼 수는 없었을까. 왜 우리는 그를 기억하지 않는 걸까?
김서영 광운대 교수, 정신분석학 박사